‘영자의 전성시대’는 조선작의 소설로 유명하다. 김호선 감독의 영화로도 인기를 끌었다. 길 가다가 ‘영자야’라고 부르면 적어도 몇 명은 뒤를 돌아보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자 정혜선의 본명도 영자다. 무남독녀가 탤런트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작명소에 가서 혜선(惠先)이라는 예명을 받아왔다. 착할 선(善)이 아니라 앞 선(先)자를 쓴 게 특색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딸에게 탤런트 시험 원서를 가져온 분은 아버지였다. 혜선, 아니 영자는 그때 탤런트라는 말이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거기엔 재능이라고 씌어 있었다.
재능이 많던 소녀였다. 수도여고 다닐 때 방송반에서 아나운서, 성우, DJ를 섭렵했다. 웅변, 무용, 합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내성적이지만 그 내성을 뿜어내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소녀였다. 그 내성(內省)이 내성(耐性)을 지니고 빛을 발한 지 벌써 44년째다.
1961년 KBS 남산 라디오방송국 공개홀 앞에 모인 2,700 여명의 지원자 중 최종 26명 속에 그녀는 당당히 들었다. 당시엔 실기와 면접 뿐 아니라 필기시험도 보았다. 무슨 문제가 나왔는지 궁금하다. 간단한 상식과 연기자의 자세를 묻는 질문이었단다. 정작 자신은 연기자가 된다는 ‘성향’보다는 취직한다는 ‘개념’이 더 강했다. 그녀에게 연기는 ‘일’이었던 셈이다. 그 일자리를 그녀는 지금껏 계속 지키고 있다.
혜선은 늘 ‘음전해’(말이나 행동이 곱고 점잖음) 보여서 동기이자 동갑인 박주아는 처음에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때 동기 중에는 탤런트 김혜자도 있었다. 나중에 MBC가 개국하자 그리로 터전을 옮긴 그녀와는 나중에 드라마 ‘아직은 마흔 아홉’에서 재회한다. 실제로 그때 그 둘의 나이가 마흔 아홉이었다.
그녀의 연기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연출자들은 무엇보다 그녀의 정확한 발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녀의 최전성기는 대한민국이 반공이념으로 똘똘 뭉쳤던 때다. 반공방첩이라는 네 글자가 어느 모퉁이에나 써 있던 시절이다. 나이든 시청자들 가운데 정혜선을 첩보원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1960년대 중반부터 KBS에서 시리즈물로 방송한 ‘실화극장’의 단골 여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배역 덕분인지, 아니면 지리적으로 가까워서였는지 당시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자주 녹화장에 나타났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특히 ‘제3지대’의 구월서방 역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구월서방이란 조총련계 아지트로 사용하던 서점 이름인데 첩보원 두목인 그녀의 별명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최무룡, 정혜선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다.
다작을 했지만 당시에 큰 돈을 모으진 못했다. 왜일까. 온갖 의상이 경쟁적으로 협찬되는 지금의 연기자들로선 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여주인공들은 받은 출연료의 대부분을 의상비로 ‘투자’했기 때문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 역시 본인이 직접 디자인하여 이미지에 맞는 가죽의상 등을 주문하여 입었다.
비슷한 시기에 정혜선이 연기한 두 어머니상이 방송가의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죽어가는 딸(김희애)을 둔 헌신적 어머니(‘완전한 사랑’)와 아이 딸린 여자(조민수)와의 결혼을 극력 반대하는 모진 어머니(‘청혼’)역이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이다. 극단의 두 어머니역을 무리 없이 해낸 그녀의 연기야말로 ‘폭이 넓다’라는 상찬이 제대로 어울린다.
‘청혼’의 강신효 PD는 “기술이 아니라 가슴으로 연기하는 배우”라고 그녀를 평한다. 집중력이 대단한 것 같다고 하자 오히려 그 반대의 답을 내놓는다. 힘을 빼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온다는 게 그녀의 경험적 연기관이다. 기계적인 연기를 하는 사람과 호흡을 맞출 때 가장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하기야 기계와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면 고역이 아니겠는가. “진실하게 연기하자.” 이것이 그녀가 다짐하는 심플한 연기관이다.
“더 이상 하고 싶은 역이 없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평생소원이 집에서 된장찌개 끓이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하는 여자였다는 건 다소 뜻밖이다. 딱 30년 전 이혼한 후로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다. 위로 아들과 딸은 결혼했고 피아노를 전공한 막내는 현재 유학중이다.
후배 중에는 드라마 밖에서도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누구누구예요?” “수첩 들고 불러야 돼. 한두 명 이름만 거론하면 나머지가 삐쳐요.” 하기야 그녀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후배들 이름만 빼곡히 250명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다시 난감해 한다. “평생을 계획 없이 살았어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의문은 금세 풀렸다. “오늘에 충실하자, 그게 목표이자 계획이었죠.” 44년 연기 생명력의 비결이 조금씩 풀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