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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허 스님의 배려로 머무르던 광릉의 봉선사 전경 |
수양대군 세조의 능 덕택에 잘 보존된 광릉 숲길. 요즘이야 수목원까지 단장되어 더 유명해졌지만 초입부터 가지런한 전나무 고목은 근교에서는 드물게 심산유곡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광릉숲 초입 상가촌에서 왼켠으로 불과 몇 백 미터에 봉선사 산사(山寺).
절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늘어선 부도들 틈에 ‘춘원 이광수 문학비’가 어울리지 못하고 낯선 모습으로게 뎅그러니 서있다. 장방형의 검은 대리석에 꾸밈도 없이 그저 밋밋한 모양의 돌비 하나. 대문호의 비석이라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긴 이곳에 춘원의 비가 있는 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고, 광릉과 봉선사를 찾아드는 수많은 발길 중에 여기 잠깐이나마 눈길을 주는 이가 얼마나 있으랴. 짤막한 생애를 그나마 훼절로 오명을 남긴 채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까마득한 전설로 묻혀버린 불운한 선구자여.
곳곳에 허다한 문인들의 기념비야 후학들이나 향리의 주민과 자치단체에서, 때로는 한국 문단에서 다투어 건립하고 생가와 묘까지 가꾸어 문화유산으로 기림을 받는 터인데, 춘원의 비는 1975년 아들 영근, 딸 정란 정화 등, 모두가 미국에 가 있는 1남2녀의 자식과 아내 허영숙이 뜻을 모아 겨우 건립을 보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가하여 당대의 고승으로 추앙을 받던 운허 스님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어려웠을 일이다.
동경 유학시절 뭇 연적(戀敵)들을 물리치고 상해로까지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며 춘원을 차지했던 그 아내 허영숙은 기념비 제막을 며칠 앞두고 임종하여 의정부 샘내 공원묘지에 묻혀 있으니, 유한한 인생에 세월의 덧없음이 해설픈 산사를 마저 적막으로 휘덮는고나. 한 길 반 정도의 크기에 뒷면은 가족들의 추모의 글이, 좌우 측면엔 춘원의 시문 몇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러나 내 자식들이나 가족 또는 친우들이 내 죽어간 뒤에 구태여 묘를 만들어 주고 비를 세워준다면 그야 지하에 가서까지 말릴 수야 없는 일이나, 만일 그렇게 되어 진다면 내 생각으로는 ‘이광수는 조선 사람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이다’ 하는 글귀가 쓰여 졌으면 하나 그도 마음뿐이다.”
(1936)
뒷날 자신에 대한 풍파를 예측이라도 했을까. 실낱같은 희원을 담아 유언과도 같은 이 말을 남길 때 춘원 자신의 심회가 어떠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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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이 거처하던 봉선사 다경향실 터 |
봉선사 입구의 춘원 이광수 기념비 |
춘원은 광복 직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릉과 봉선사를 오가며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있던 팔촌 동갑나기 아우 운허(耘許) 스님 이학수의 배려로 여기서 머무르며 은거의 세월을 보냈다. 6.25로 납북될 때까지 봉선사의 다경향실에 은거하면서 집필도 하고 절에서 운영하는 광동중학교에 나가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다경향실(茶經香室)은 노스님이나 주지스님이 머무는 요사채를 이르는 당호로서, 경전과 더불어 차의 향기가 함께한다는 의미다. 봉선사의 다경향실은 춘원으로 하여 더욱 유명해졌지만, 그가 머물던 건물은 전쟁에 잿더미가 되고 지금은 ‘다경향실터’ 다섯 글자를 새긴 자연석 작은 돌만이 지키고 있을 뿐이다. 춘원은 큰법당 뒤 등성이 너머 옹달샘물을 길어다 차 끓여 마시기를 즐겼다.
화로에 불 불어라 차 그릇도 닦았으라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산중에 외로 있으니 차 맛인가 하노라
내 여기 숨은 줄을 알릴 곳도 없건마는
듣고 찾아오는 벗님네들 황송해라
구태여 숨으럄 아니라 이러거러 왔노라
찬바람 불어오니 서리인들 머다 하리
풀잎에 우는 벌레 긔 더욱 무상코나
저절로 되는 일이니 슬퍼 무삼하리오
춘원은 반민법으로 구속 수감되었다가 고혈압과 폐렴으로 병보석되고,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12일 납북,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소재 군인민병원에서 같은 해 10월 25일 58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에 평양으로 이장하여 지금은 평양 용성구역 용궁1동 ‘재북인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춘원의 허물이야 감출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나, 우리 문학사의 온전한 정립을 위해서도 이제는 그의 공적과 과실을 함께 보여줄 작은 공간이라도 허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찬바람이 을씨년스럽게 스치는 봉선사를 떠나온다.
(200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