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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집(破二執) 현삼공(現三空) >
「파이집(破二執) 현삼공(現三空)」은 <금강경>의 대의로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파이집(破二執)’이란 ‘2가지 집착을 부순다, 깨뜨린다는 뜻이다.
2가지 집착이란 나(我, 주관)와 남(法, 객관, 대상)이라고 하는 두 가지 집착,
즉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말한다.
‘현삼공(現三空)’이란 아공(我空)ㆍ법공(法空)⋅구공(俱空)이라는 삼공을 나타낸다,
― 드러낸다는 말이다.
따라서 ‘파이집 현삼공’이란 아집과 법집을 부수어 아공⋅법공⋅구공을 드러나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공은 각각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히 모든 법이 공함을 알게 되고,
마침내 나와 법이 모두 공한 것임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집(二執)이든 삼공(三空)이든 그 출발점은 아상(我相)인 것이다.
아상 때문에 아집과 법집이 생기고, 아상을 극복하는 것이
아공⋅법공⋅구공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상(我相)이다.
그것을 고집하는 것을 아집(我執)이라 한다.
아집(我執)은 마음 위에 떠오르는 것들이 인연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집착함을 뜻한다.
법집(法執)은 진리다운 법칙성을 망각하고, 마음속의 진실성을 망각한 채 집착함을 뜻한다.
아집이 곧 법집으로서 아집과 법집은 동시에 나타나는데,
아집과 법집이 없는 경지가 무아(無我)이다.
아집(我執),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치(我癡)라는 말들이
모두 일맥으로 통하는 말이다.
아치(我癡)로 인해 자아가 존재한다고 보니까 아상(我相)이 생긴다.
내 의견이 옳다는 주장,
즉 아견(我見)으로 인해, ‘나는 …이다’라고 교만해 하는 심 작용이 일어나는데, 이를 아만(我慢)이라 한다.
이러다가 보니까 아집(我執)이 생기는 것이다.
아집(我執)이란 아상(我相)이 짙어 생각의 범위가 좁아져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중심의 한 가지 입장에서만 사물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즉,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삼는,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는
모든 생각과 마음이 아집이다.
자기중심적 판단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집이다.
문제는 잘못된 견해를 옳다고 우기는 것이다.
이 아집을 경계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불이(不二)사상을 내걸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이 가지는 분별심은 천국과 지옥, 선민과 천민,
상층과 하층, 남과 여, 나와 너, 이와 같이 세상을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나눠 분별하려고 한다.
이러한 잘못된 착각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인식이 바로 불이사상이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너를 구분하고 분별하는 이분법(二分法)이 확장됨으로써
이 세상에 갈등을 부추기는 번뇌의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나누어진 개념들의 허구성에 대해서 말하고,
이러한 허구를 마음이 만들어내서 그 결과 스스로 고통 속에 뛰어드는
인간들의 무지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이의 세계관은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고,
나와 네가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서, 대승불교 정신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와 같이 ‘나(我)’에 집착하는 것은 아집(我執)이고,
나 이외의 다른 것에 집착하는 것은 법집(法執)이다.
나도, 그리고 나 이외의 다른 것인 법도 고정 불변하는 실체는 아니다.
내가 공하다는 것도 알고 법이 공하다는 것도 알면,
즉 일체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깨뜨릴 것도 없다.
그런데 나와 남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집착 때문에 문제가 야기된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을 깨뜨려서 자유롭고 해탈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금강경>의 큰 뜻이다.
우리 인생이 공한 줄 알고, 무상한 줄 알아서 매사에 가뿐한 사람,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금강경>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특히 상(相)을 짓지 말 것을 강조한다.
‘상(相)’은 대승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 개념이다.
불교에 있어서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 모습을 말한다.
대개 생각이나 가치관이 굳어진 것을 ‘상(相)’이라 한다.
<금강경>에서 상(相)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실체로서의 상을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상(相)’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일종의 ‘고정관념’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 고정관념은 갖가지 왜곡 갈등과 번뇌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무의식 속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순간 불성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해서
<금강경>에는 모든 상(相)이 상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고 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리하여 상(相)이 없는 것이
무아(無我)요, 무주상(無住相)이요, 공(空)인 것이다.
그리고 아상(我相)이란 자아(自我)가 있다는 생각, 자의식을 뜻한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아트만(atman)을 주장하고 있었다.
아트만은 만물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
영원불멸하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의미한다.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이르는 브라만 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아트만을 아상(我相)이라 해서 이를 배척하셨다.
즉, ‘나’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을 부정하셨다,
인간에게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아상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육신, 나의 이름, 나의 학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나의 생각, 나의 견해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변화하기 때문이다.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히고 만다.
그러니 아상을 극복해야 아집이 생길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법집(法執)은 사물과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인연화합에 의해
생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하고 색⋅수⋅상⋅행⋅식
하나하나에 모두 실체가 있다는 그릇된 집착을 해서 탐욕을
발생하는 마음을 말한다.
법집(法執)에서 법(法)은 객관적 사물을 뜻하기도 하고,
종교적 진리를 뜻하기도 해서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즉, ‘법집’이라는 단어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있다.
하나는 우주만물의 객관적 사물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고집하는 집착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믿는 종교와
그 종교의 ‘법’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꼭 내가 믿는 종교만 옳다고 하는 고집이 바로 법집이다.
각종 종교의 원리주의야말로 법집의 전형이다.
대승불교의 교의에서 공(空)은
크게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2공(二空)으로 나뉜다.
2공을 아ㆍ법 2공(我法二空)이라고도 하며,
아공(我空)은 인공(人空)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인ㆍ법 2공(人法二空)이라고도 한다.
이공(二空)은 초기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교의였다.
아공(我空)을 인무아(人無我)라고도 하며,
법공(法空)을 법무아(法無我)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둘을 통칭해서 2무아(二無我)라고 하는데,
2무아(二無我)는 2공(二空)과 같은 뜻이다.
2공(二空)의 교의 또는 사상은 후대에 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
구공(俱空)의 3공(三空)의 교의로 발전했다. 이것이 <금강경>의 대의이다.
‘아공(我空)’은 ‘나’를 구성하는 것은 생멸ㆍ변화하는 다섯 요소인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는 오온(五蘊)이 화합해 이루어진 것일 뿐,
참으로 ‘나’라고 할 만한 실체는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법공(法空)’이란 ‘나(我)’ 아닌 일제제법(一切諸法) - 삼라만상이 공하다는 말이다.
‘아공(我空)’은 실체적 자아의 관념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간은 오온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자아(自我)라는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법공(法空)’은 삼라만상의 개체를 구성하는 여러 법(사물) 역시
자성(자체)이 없다고 설한 것으로, 물질적ㆍ정신적인 모든 존재의
실체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만유(萬有)는 모두 인연이 모여 생기는
가짜 존재로서 실체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아공ㆍ법공이라는 이공(二空)은 개인 존재와 그 구성요소,
그리고 일체제법의 궁극적 비실재성을 말하는 것이다.
남방불교에서는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의 삼법인을 강조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삼법인에서 더 나아가 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구공俱空)이라는 삼공(三空)을 말하는데,
특히 아공과 법공을 강조한다.
‘아공’은 생공(生空) 또는 인공(人空)이라고도 하며,
자아(自我)가 실재하고 자아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망상(妄想)이라 해서 물리치는 것이다.
‘법공’은 이 현상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사물(법)이
모두 연기(緣起)의 법칙에 의해 생기고 소멸하기 때문에, 사물이 실재하고
그것들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부정함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설일체유부 등 부파불교는 아공(我空-人空)을 설명했고,
대승불교는 아공과 법공의 2공(二空)을 명확히 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한 것을 보자.
• 아공(我空)
아공(我空)은 인공(人空)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나’가 아니라 공한 것이라는 진리를 체득한 것을 말한다.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自我)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를 말한다.
즉, ‘아(我)’에는 실아(實我)가 없다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색⋅수⋅상⋅행⋅식의 5온(五蘊)이
임시로 화합해 이루어진 존재로, 가아(假我)라는 것이다.
진실로 ‘나’라고 집착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공(我空)’은 자아의 실체를 공이라 한 것이고,
사상(四相-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버릴 때 얻어지는 것이다.
아집(我執)은 번뇌장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장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해
열반(또는 해탈)에 드는 것을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수행에 의해 ‘나’, 그리고 ‘나의 소유물’이라는
주관적 아집(我執)을 벗어난 경지가 아공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공이란 연기에 의해 지ㆍ수ㆍ화ㆍ풍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임시적으로 결합된 가짜 ‘나’를 두고 실재한다고 하는 아집(我執)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공의 이치를 깨친 단계에 이른 분을 아라한(나한), 벽지불, 성문, 독각(연각)이라 지칭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아공을 강조했던 것이다.
• 법공(法空)
법공(法空)은 물질적인 현상, 삼라만상과 객관을 대상으로 한 상대적 정신작용은
다 인연으로 모인 거짓 존재로서 만유의 본체가 본래 공(空)한 것이란 진리를 말한다.
이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가 항상 있는 것이라고 하는 미집(迷執)을 극복하는 것이다.
즉, ‘법공(法空)’은 제법이 다만 인연에 의해 생기고 존재하며
연기에서 인정될 뿐 자성(自性)이란 있을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법공에서 ‘법(法)’은 제법(諸法) 또는 만유(萬有), 삼라만상을 말한다.
따라서 법공은 모든 우주 만유는 인연이 모여서 생겨난 가짜 존재이며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즉,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성이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다는 견해이다.
법집(法執)을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즉 보리(菩提)가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를 의미한다.
그리고 제법에는 번뇌를 비롯한 탐ㆍ진ㆍ치 등 온갖 정신작용까지도 포함되는데,
이들 역시 연기된 일시적인 것들로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물질[색(色)]과 정신[심(心)]의 모든 존재는 모두 원인과 결과,
즉 인연법에 의해 생긴 임시적인 가짜 존재로서 거기에는 고정된 실체로서 집착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공(空)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나 인공(人空), 법공(法空)이 그 근본인데,
특히 대승불교 중관학(中觀學)에서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는 말이다. 즉, 객관세계의 일체법이 공함을 모르고
여기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법공을 깨우친 단계에 이른 분을 보살이라 한다.
• 구공(俱空)은 제법(諸法)의 본성에 계합하는 것을 뜻한다.
아공ㆍ법공을 다 초월해 공(空)하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서, 안과 밖이 모두가 공하고,
청정하다고 해서 비로소 마음자리의 본성에 계합한 것을 말한다.
유(有)라고도 할 수 없고 무(無)라고도 할 수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ㆍ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경지가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상계가 바로 진리(절대계)의 모습이고, 현상계와 절대계는 둘이 아니라서
아공과 법공을 다 이해한, 그래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를 말한다.
곧 진리의 궁극처, 궁극의 진리, 아집(我執)ㆍ법집(法執)ㆍ무집착(無執着)까지 놓아버린
궁극의 공(空)을 말한다. 이러한 구공의 경지에 이른 분이 부처님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파이집 현삼공’의 출발점과 귀결점은, 바로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이다.
이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그 순간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은 생명을 부여받은 순간부터 한시도 ‘나’라는 생각을 놓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의식의 대전환이 돼야 한다.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은 <반야경>이 설해지고 비로소 완성이 되는데,
<반야경>의 사상이 바로 공사상(空思想)이다. 의식의 대전환의 방법이
바로 <반야경>에서 설하고 있는 ‘공’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수행의 근본도리이기도 하다. 나아가, 분별과 집착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즉, 분별과 집착을 떠난 지혜의 완성을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금강경>은 공사상을 강력히 주장하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금강경>이 공사상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공(空)’이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대승보살의 수행방법을 설하면서도 보살의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보리심(菩提心)’이란 용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특이한 점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라고 하셨다.
이것은 어느 누구든, 또 어떠한 존재이든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실상(實相)이자 인생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평등하게 누구에게나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바르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고정된 의식을 가지고 모든 것에 집착하면 불행과 고통이 따른다고 하셨다.
<금강경>에 설해진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존재(인생)의 실상을 올바로 알아서 일상을 행복하고 복되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즉, ‘파이집(破二執) 현삼공(現三空)’을 말하는 이 경은 모든 존재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직설적으로 진공(眞空)을 설하고 묘유(妙有)를 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금강경>의 대의에서 알 수 있듯이 잘못 알고 있는 ‘나’,
잘못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깨트릴 때, 삶의 온갖 장애들도 다 깨지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 영원한 기쁨의 삶이 열리는 것이다.
<금강경>은 우리 인생의 교과서이며, 삶의 지침서이다.
내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자다.
<금강경>을 수지 독송, 해설하는 곳에는 부처님이 거기 임하신다.
부처님의 자비 공덕이 충만하므로 모든 신장들이 환희하며 무수한 중생들이 찬탄의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금강경>은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발달하면서 가장 선호하는 경전이고,
중국 선종이나 우리나라 조계종에서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소의경전이라 함은 생활의 지침서, 수행의 지침서가 되는 경전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믿으라는 말 대신에 이치를 설명해 주셨다.
특히 <금강경>은 우리의 근본적인 집착을 깨트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
개인이든 국가든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상(相)’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금강경>을 통해서 상이 확실히 없다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리고 혜능 대사는 <금강경>의 아래 구절에서 깨쳤다고 한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금강경>에서 공에 관한 대표적인 게송이 있으니, 아래와 같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무릇 존재하는 형상들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가 허망한 것이라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곧 부처님을 친견하리라(진리를 깨칠 것이다).
무릇 상(相)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 깨달음을 얻을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상이 있는바 모든 것이란 뜻으로,
두두물물(頭頭物物) 일체 현상계에 벌어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꼭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일체 모든 현상계가 개시허망(皆是虛妄), 즉 일체 현상계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중생들이 상이 있다고 하는 바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닌 사실을 바로 안다면(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할 것이라고 했다.
즉, 이 참된 이치를 바로 안다면 여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 여래를 본다는 말이다.
‘여래를 본다’는 말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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