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보다듣다말하다포토에세이 원문보기 글쓴이: 우화등선
전남 영암군 소와 관련된 지명을 보니‘소’가 기운찼소
누워있는 소
물 마시는 소
되새김한 소
소머리가, 구시(구유)가
소 닮은 바위가, 소 발자국이
신축년(辛丑年)의 소, 전국의 소와 관련된 지명 731개나 된다고 한다. 전라남도만 해도 28%인 총204개의 지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전국 최다이다. 그 다음으로 경상남도가 96개, 경상북도가 94개 등으로 집계됐다.
전라남도 도내 시.군별로는 신안군이‘우이도(牛耳島)’를 비롯한 25개로 가장 많다. 이어 영암군에 18개 정도와 장성군에 17개로 파악됐다고 신축년 새해를 맞아 각 언론에서 보도됐다.
소의 관련한 지명으로‘우산(牛山)’이라는 지명이 가장 많으며 고흥군 포두면의 우산마을 등 8곳에서 소의 관련한 지명을 쓰고 있다.
소의 지명에 대한 종류별로 보면 마을이 161개인 74%로 가장 많고 섬이 32개로 16%를 차지하며 고개는 9개로 4%이다.
소가 누운 형상의‘와우산(臥牛山)’은 서울.부산 외에 전국 곳곳에 있다. 제주의‘우도(牛島)’는 소 이름이 들어간 섬의 대표다. 서울의‘우면산(牛眠山)’,‘우이동(牛耳洞)’도 친숙하다. 또한‘쇠소깍.소똥령.소티재.쇠물뿌리’같은 우리말 지명도 정겹다.
소는 예로부터 농사일을 도우면서 부(富)와 재산(財産)을 상징하는 재산목록 1호로 여겼다.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우직하면서도 근 성실한 친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육십 간지의 38번째인 신축년 소의 해, 신축년은 흰색을 나타내‘흰 소’에 해당된다. 힘과 재산을 의미한 소는 영어로 소를 뜻하는‘cattle’은 자본을 뜻하는‘capital’과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소를 가축화된 것은 1만1000~8000년 전이다.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것 없다고 했다. 살아있을 때 소는 달구지와 쟁기를 끌거나 연자방아를 돌리는 동력원으로 쓰인다. 소는 우유도 제공할 정도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동물이다. 소는 또 죽어서는 고기를 내놓는다. 물론 내장까지 먹을거리로 아낌없이 준다. 또 소가 남긴 뿔과 가죽도 공예품(화각.지갑.가방.모자.신발.혁띠)이나 북.장구 등의 악기와 옷을 만드는데 활용하고 있다.
소는 농경을 본업으로 삼아 온 한민족에게 오랜 옛적부터 전해오는 소의 심성은 우직하고 희생과 성실의 표본이었다. 일생을 농경에 힘쓰다가 끝내 고기마저 바치는 희생정신과 본성은 유순하나 때로는 경발하는 기개가 있으며 느릿느릿 걷는 황소걸음이 만리를 간다하여‘우보만리(牛步萬里)’라고 표현했다. 또한 소는 어떤 동물보다 현실적인 이용도가 높고 동시에 넉넉하고 군자다운 성품을 지냈다. 그로인해 소는 특별한 상징성과 신성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선비들은 소를 통해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을 음미하고자 소에게 인간적인 해석을 시도하가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소의 중요성은 고대로부터 있었으며 현재에 와서도 변화하면서 더 소중히 여겼다. 특히 고대에는 재물과 희생용으로 중시되었으며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에는 농경의 조력자로서의 중요성이 옮겨지고 있다. 한국 문화에 나타난 소의 모습은 고집 세고 어리석은 측면도 있지만 농사신, 부, 풍요, 힘, 근면, 성실, 우직, 충직, 순박, 희생, 제물, 축귀, 길상, 수호신, 벽사, 의로움, 자애, 유유자적의 여유, 한가함과 평화로움 등으로 축약된다.
농경사회 동반자였던 소는 시골의 정겨운 이미지메이커였다. 시인 정지용의 향수에‘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등장동물로 황소가 글을 아름답게 장식해주고 있다.
또한 이중섭 화가가 그린 '황소' 가 군더더기 없이 굵고 역동적으로 선으로 이룬 황소 그림이 어떤 역경에도 헤쳐 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집집마다 가축으로 길렀던 소는 마을의 풍요로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산이나 섬 등 지형을 소의 형국으로 표현하며 지명을 붙였다.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뒷산이나 섬을‘우산(牛山), 우도(牛島)’등으로 부르는 지명이 많았다. 또한 소를 닮은 바위 등을 소바위, 소와 관련한 구이통 등을 소와 연관시켜 지형을 구시래 등으로 불렀다.
우리 민족은 소를 아끼고 보살피면 집안과 마을이 번창한다고 믿고 소의 상징성을 중요시 여기며 이 같은 믿음이 지명에 반영됐다. 전남 나주 노안면에 있는‘구축(九丑)’마을은 옛날 선비가 아홉 마리의 소를 기르면서 마을을 발전시켰다는 전설에 따라 이름을 아홉 구(九) 소 축(丑)자를 따‘구축’이라고 했다고 한다.
소의 지명으로 산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불러진 전남 무안군 몽탄면의‘우명산(牛鳴山)’이 있으며 전남 영암군 독천면에는 어린 송아지를 매매하던 시장 주변에 하천이 있어 송아지 독(犢), 내 천(川)자를 써‘독천(犢川)’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고려청자의 고장 전남 강진에는‘가우도(駕牛島)’라는 섬이 있는데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섬 모양이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하여 지명이 유래됐다. 가우는 가마나 상여 또는 짐수레를 끄는 소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소가 누워 있다고 해서‘와우동’, 소가 내려가는 모양이라 해서‘하우리’, 소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우미리’등 이런 소의 관련된 지명이 전국적으로 퍼져있을 정도로 소가 그만큼 의미를 두며 상징성을 갖고 있다.
전남에서 소에 관련된 지명이 신안군 다음으로 많은 영암군은 개천가의 우시장에서 송아지를 팔았던 독천을 비롯해 관내에는 재미나는 전설이 얽히고설켜져있다.
*삼호 서창리 우산정-소 경기
영암군 관내에 소의 관련된 지명을 보면 삼호읍 서창리‘우산정(牛山停)’마을이 있다. 우산정은 서창리 서쪽의 마을로서 우산정(牛山停), 우장리(牛場里), 독우촌(犢禹村), 쇠바탕 등은 소와 관련돼있는데 마을 서쪽 언덕이 길게 뻗어져있으며 소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옛날 단오나 추석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소 끌기 등의 소와 관련한 경기를 즐겼고 소를 키울 주변 환경과 여건이 좋아 소를 많이 키워서 소와 관련한 소 우(牛)자를 따‘우산정(牛山亭)’또는‘독우촌(犢牛村)’등으로 마을 이름이 불리어졌다.
*삼호 망산리 망우정-와우형국
삼호읍 망산리 '원망산 마을' 은 망산리의 중심에 위치한 망우정은 마을 앞의 장산을 접하고 있으며 산 밑의 저수지(구터리 방죽)는 많은 아낙네들이 빨래터로 사용 되고 있고 저수지 옆 전망 좋은 곳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힘센 장수가 이곳에 앉아 장산을 바라보면서 망중유한(忙中有閒)을 즐겼다고 한다. 정산의 앞산이 소처럼 생겼다하여 마을 이름을‘원망산’이라고 일컬었다. 원망산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 김흥수라는 분이 마을에 처음 입향(入鄕)했으며 그는 군서면 동호리에서 살다 어느 날 영암의 서쪽 지형을 따라오다가 소의 형국처럼 생겨 상서로운 기운이 솟을 만큼 산세가 좋고 농토의 자리 잡기가 좋아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망우정(望牛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호 서호리 목우촌-소를 기름
삼호읍 서호리 '목우촌(牧牛村) 마을' 은 서호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송죽정의 뒷산인 쇠등산과 뱃머리(송죽정 포구)를 끼고 있으며 사람들은 어업에 종사하면서 쇠등산에 소를 많이 기르고 있다하여 기를 목(牧), 소 우(牛), 마을 촌(村) 자를 써‘목우촌(牧우촌)’이라 불렀다.
*삼호 서호리 쇠동-소 등에 마을조성
삼호읍 서호리 쇠동마을(송죽정)은 마을이 소의 등에다 마을을 조성하였다고‘쇠등’이라고 하였는데 한문 지명으로 바뀌면서 송과 대가 많다는‘송죽정(松竹亭)’으로 바꿔 불리어져지고 있다.
*삼호 용앙리 소등도-소등처럼 생김
삼호읍 용앙리 '앙감 마을' 소등도는 마을 북쪽에 위치한 섬(島)의 지형이 소의 등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소등’이라 했으나 중간에‘소등도(小嶝島)’로 마을 이름이 변하였다.
*군서 동구림리 소전머리-소의 머리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학암 마을' 쌍취정 동남쪽에 위치해있으며 학 바위가 있어 학암(鶴岩) 마을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지만 마을의 쌍취정 동남쪽의 지형이 마치 소의 머리를 한 형국이라고 해서‘소전머리’로 불리어지고 있다.
소는 하늘의 뜻을 알리는 영물이라고 한다. 소의 머리 형국은 분명 길복이다. 소가 누워있던 서 있던 먹이를 먹고 있던 소는 짐을 등이나 달구지에 짐을 실고 가려고, 논밭을 갈기 위해 가려고, 풀을 뜯고서 집으로, 풀을 먹기 위해서 들로 모습을 한 채 지낸다.
꿈에서 ▶소가 집으로 들어온다면 예기치 않는 이득이나 행운의 기회가 생기거나 큰 황재를 할 것이라고 한다. ▶소가 새끼를 낳는 꿈은 오랫동안 공들이고 애써온 어떤 일거리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가 똥이나 오줌을 싸는 꿈은 재물 운이 상승한 길몽이며 많은 재산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가 수레를 끄는 꿈은 여러 사람과 협력을 하여 계획한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황금색 뿔을 가진 소를 보는 꿈은 엄청난 길몽으로 부와 명예, 권력까지 모두 가지게 되는 등 어떤 단체의 우두머리나 사업체의 경영자가 되어 세력을 과시하게 된다고 한다. ▶소에 올라타서 길을 가는 꿈은 귀인의 도움으로 사업이 성공하여 명예를 얻게 된다고 한다. ▶얼룩소의 꿈은 언론 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에게 먹이를 주는 꿈은 성실하게 미래를 위해 준비해나가면 나중에 큰 성공을 맞보게 된다고 한다. ▶목장에서 놀고 있는 많은 소를 보게 되는 꿈은 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일거리가 생기게 된다고 한다. ▶소에게 먹이를 준 꿈은 훌륭한 아들을 얻는다고 한다. ▶황소가 여러 마리 매어져있는 꿈은 자수성가할 인물이 태어난다고 한다. ▶소가 산이나 언덕을 오르는 꿈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를 타고 거리로 나가는 꿈은 공공단체나 협조자에 의해 일이 진행된다고 한다. ▶자신이 소를 이끌고 산에 오르는 꿈은 자신을 내세울 만한 일이 생기거나 재물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꿈은 재물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가 송아지를 낳은 꿈은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에다 쟁기를 매고 농사일을 하는 꿈은 어떤 사람 또는 협조자와 일을 추진하게 된다고 한다. ▶소가 밭을 일구는 꿈은 그동안 침체기였던 사업이 풀려 잘 진행된다고 한다. ▶큰 암소를 끌어내려 말뚝에 매는 꿈은 새로운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한다. ▶시골에서 소가 나오는 것을 보는 꿈은 사업이 크게 번창하게 된다고 한다. ▶흰 소가 나오는 꿈은 진실과 성실함을 뜻하며 본인에게는 행운이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누워있는 소, 되새김하는 소, 소전머리 등의 소와 관련된 지형은 좋은 징조로 기대를 하며 소처럼 근면 성실하게 살면 좋은 일들이 집안에 가득할 것 같다.
*군서 모정리 모정-와우형국
군서면 모정리 '모정 마을' 에는 소의 외양간에 해당하는 골자기인‘외양골’이 있다. 모정 마을은 월출산 천황봉에서 굽어보면 넓은 평야 한 가운데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 바다가 아닌 평야 위에 떠있는 섬인 셈이다. 동쪽으로는 남성적인 월출산이 서쪽으로는 여성적인 은적산이 자리하여 음양의 이치를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월출산과 은적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모정 마을은 풍수적으로‘와우형국(臥牛形局 )’이다. 누운 소 형국의 마을들은 주로 완경사 평야지대에 큰 하천 줄기가 아닌 작은 물줄기 곁에 논농사에 접합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모정 마을의 입지 조건이 소가 누운 모습이어서 마을 환경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주고 있으며 마을에 좋은 기운이 넘쳐난다.
*군서 모정리 초장골-소 먹을 풀 저장소
또한 군서면 모정리 '모정 마을' 서남쪽에 위치한‘초장골(草藏洞)’은‘소가 먹을 풀을 저장’하는 곳이다. 모정리는 평야지대인 모정(茅亭)과 서호강(현재 학파농장)을 낀 검주리(黔蛛里)의 1.2구로 나누어지고 있다. 검주리 마을은‘거미형국’을 한 마을로서 모정리에는 주로 광산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평산신씨, 전주이씨도 함께 마을을 형성하며 지키고 있다. 모정리는 넓은 평야의 농토가 많아‘와우형국 지세’의 영향으로 넉넉함이 넘친 풍요로운 마을로서 크게 번창하고 있다.
*학산 독천리 독천-송아지 사고 파는 천(우시장)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 마을' 은 우(牛)시장으로 번성한 마을이다. 독천 마을 천 주변에 우시장이 형성돼 영암군 관내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었으며 이곳에는 각 농가에서 가축으로 기르던 소를 팔거나 사는 등 거래를 했다. 장날이 서면 소 천국이라고 볼 정도로 소의 음매소리가 요란했다. 배고파서 울기보다는 어디론가 자신이 팔려가는 게 두려웠다. 마치 장터에 따라왔다가 엄마 손을 놓쳐 우는 어린애처럼 음매 소리가 끊이질 안했다. 주인을 잘 만나면 그 소는 통통하게 살이 쪘고 어떤 소는 잘 먹고 자랐다. 어떤 소는 그 집에 일꾼으로서 희생을 해야만 했다. 특히 송아지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와있는지를 모르며 그저 울음소리를 냈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이저리 뛰어 다니듯이 움직였다. 외양간과 마당의 좁은 집에만 가두어있다가 넓은 장소에서 오니 마냥 좋았는지 꼬리를 치며 뒷다리를 찼다. 어미 소와 송아지 등 집안에 있던 소들이 다 나온 듯 하는 우시장, 소와 사람으로 진풍경을 그려내며 시끌벅적했다. 이런 시장 통 이였던 곳은 우시장은 천의 물 흐르듯 사람들의 정도 흘렀다. 장날이 되면 영암의 모든 농가들이 기르던 가축을 여기 천가로 끌고 와서 매매를 했으니 천(川)도 마을(里)도 덩달아 이름을 얻게 됐다. 이름 하여 어린 송아지를 매매하던 시장 주변에 하천이 있어 송아지 독(犢), 내 천(川)자를 써‘독천(犢川)’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독천 마을은 우시장이라는 싱징성이 컸지만 추억만 강하게 남긴 채 이제는 우시장보다는‘독천낙지음식명소거리’로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소 대신 낙지가 대세다. 갈낙탕은 음식의 조합이자 사람과 세상의 조합이면서 솥이 팔팔 끊어 오르듯이 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독천의 정서다.
우시장으로 번성했던 독천은 재산목록 1호인‘소’를 팔고 사는 거래처였다. 가축은 재산으로 부(富)의 척도가 되었다. 소를 팔아서 손에 쥔 돈은 자녀의 입학금 등 가정의 살림에 큰 보탬이 되게 한 생활자금으로서의 목돈마련 수단으로써 소는 가정의 큰 힘이 되어준 아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축이 됐다. 샀던 소는 농사일을 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요긴한 가축이었다. 기쁨을 안겨준 독천우시장은 농가에게 희망을 불어준 행복의 요람(要覽)이었다. 송아지 꿈은 행운이 오게 하고 하는 일에 도움과 이득, 수익, 영예, 유명세, 연인 등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소를 사 오거나 소를 끌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은 며느리나 귀한 손님이 오거나 재물, 사업체, 결혼 등이 생긴다고 한다. 소를 팔고 다른 소를 사는 꿈은 며느리, 가정부가 바뀌거나 집, 재물, 사업 등을 새로 장만하게 된다고 한다.
소를 팔려가면서 우시장 갈비탕집에 들려 뚝배기 한 그릇 뚝딱 비우며 느낀 행복은 다음 장에도 또 찾게 만들었다. 어린 손을 붙잡고 같이 시장에 가서 시장의 먹거리를 사주었던 엄마 아빠의 마음은 사랑 아닌 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아낌’이었다. 그래서 독천은 송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송아지가 되었고 그저 좋을 뿐이었으며‘송아지 파는 독천시장’말만 들어도 정감이 간다.
천에 가면 소가 노래를 한다
사람도 추임새를 넣는다
음매소리에 피라미가 갈기를 친다
백로도 사뿐거린다
각설이타령에 장은 흥겨워진다
우시장엔 소살 돈이 꺼내진다
주막은 소판 돈에 술판이 된다
천의 소는 끌러간다
진풍경이 따로 없다
장터가 작품이 된다
구경꾼이 그래서 있나보다
기웃거린 사람들 표정이 참 예쁘다
천의 물 흐름, 사람 마음의 흐름이다
독천아! 넌 이름값을 하는 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다
다시 한 번 부르고 싶은 그 이름 독천아!
사랑스럽다
장터는 멋지다 음식은 맛있다
장터를 그려내는 사람들이 좋다
장터가 생각날 때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설레임은 더 컸다
장은 열렸다 사람은 몰렸다
소도 그랬다
천의 새들도 찾아들었다
독천장은 마음부터 찾아들게 한다
다음엔 강아지도 따라 가보겠단다
음매소리 그리울 것 같다
채소 파는 아줌마 손이 또 보고 싶어진다
소도 먹으면 좋다는 낙지 구경만 하고 간다
막걸리 한잔에 취한 아저씨 다음 장날에 장날에는
독천장에서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갈낙탕 파는 식당 아줌마도 반갑게 맞이할 것 같다
이런 서정시 한수를 지어도 될 정이 담겨져 있고 삶의 애환이 서려져있는 독천의 풍경이다.
영암고을의 고을 사람들한테 생기를 불어줬던 곳, 삶의 애환이 녹아져 있는 곳, 아이콘이 된 곳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컸던 곳으로써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으로 번성했던 독천우시장은 소를 파는 사장, 소를 사는 시장으로서 한때는 영화로움은 하늘을 찔렀다. 지금은 일반 가정마다 소 한마리씩을 키우며 농사를 직거나 살림용으로써의 보탬이 되고자 가축을 기르지를 않아 우시장도 형성이 되지 않고 있다. 이제는 소 대신 농기계가 자리했고 이제는 대량으로 기업화하며 소를 사육을 하고 있어 한 두 마리 키우는 농가는 그리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지가 않다. 또 우시장이 영암에는 독천우시장과 신북우시장이 있었으나 이제는 도포면에 가축전자경매시장이 준공(2017.6.22)돼 비육유 및 임신우, 송아지를 경매할 수 있게 해 전통 우시장이 필요없게 됐다. 집에서 기른 던 소나 낳은 송아지를 시장이 집에서 몇 십리길임에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동이트지 않은 이른 세벽부터 끌고 가서 팔았다. 소가 필요하면 소를 사 집까지 끌고 오는 시골의 옛 풍경을 한 정취가 한편의 드라마보다 더 재마가 있고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풍경은 찾아볼 수가 없다. 추억의 흔적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몹내 아쉬움이 있는 독천우시장이다.
독천우시장에서의 소들의 표정은 정감이 있었다. 사골 장의 상징성이었다. 모든 농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장이었다. 삶이 이곳에서 피어나고 또 삶을 느낄 수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어미를 따라온 송아지는 어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도 비벼대며 애정을 서로 과시했다. 어떤 소는 시장에서도 자기 새끼를 위해 젖을 먹이는 등 모성애를 보이는 감동의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독천시장은 사람만 북적이면서 삶의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도 사람 못지 않게 자기들만의 애정을 표현하며 음매소리를 내됐다.
독천장은 우시장이 있어 잡은 소고기를 이용한 요리들이 많았다. 갈비탕, 곰탕, 우거지탕, 내장탕, 선지국이 주 메뉴로 나왔다. 그리고 바다가 접해져 있는 곳이어서 낙지를 활용한 낙지연포탕이 식탁을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갈낙탕이 새로 생겼다. 독천낙지음식명소거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떠오른 갈낙탕은 음식 중에 가장 으뜸으로 치며 이 지역의 가장 자랑할 만한 인기 있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소하고 담백하게 감칠맛 난 맛이 으뜸인 매력적인‘갈낙탕’이 탄생하는 이유는 어느 날 산낙지를 고무 통에 두었는데 낙지가 안 보였다고 한다. 낙지가 통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주인은 영문도 모르고 낙지가 어디로 갔지 하며 보이지가 않아 못 찾고 있는데 솥에 국자를 저어보니 거기에 낙지가 있었다. 주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한번 먹어보니“어! 괜찮은데”맛이 새로웠고 풍미가 더 느껴졌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소갈비탕만 할 게 아니라면서 소갈비에다 낙지를 함께 넣어 끊이게 됐다. 이게 바로‘갈낙탕’이 탄생한 계기가 됐다. 우연한 발견이다. 독천이라는 지명도 재미나지만 우시장에서 생긴 음식 에피소드도 이채롭고 시골장터에서 일어날만한 일이다.
갈낙탕의 재료에는 소갈비와 낙지가 들어간다. 소고기 재료는 우시장이어서 소를 잡은 현장에서 쉽게 구했고 낙지는 인근 면(미암 춘동 앞바다)이 바다와 접해있어 갯벌에서 잡은 것을 구해 썼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낙지는 인근 무안이나 신안에서 공수해온다. 어찌됐던 시내의 식당에서 개발한 음식이 아닌 정감 있는 장터환경에서 태어난 구수함을 풍겨낸 토속적인 특별메뉴이다. 시골정취를 느낄만한 어머님의 손맛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갈비와 낙지의 첫 글자를 딴‘갈낙탕’, 독천과 갈낙탕의 함수관계는 동등하며 찰떡궁합이다. 우시장이 있는 독천은 장문의‘역사책’이며 장편의 소설(小說)이며 감동의 서정시(敍情詩)이며 애환의‘창(唱)’이며 휴먼의‘드라마(Drama)’이다. 식지 않는 영원한‘레퍼토리(Repertory)’다.
소의 관련된 지명들은 주로 소가 누워있는 모양으로 연관되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학산면 독천은 소가 누워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와우산, 우면산, 우도와는 달리 소를 파는 시장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지명으로 삼았다. 천가의 시장에서 송아지를 파니까 송아지 독(犢), 내 천(川)자를 써‘독천(犢川)’이라고 부르자고 한 것이다. 와우형국은 평야에서 생산한 풍성한 곡식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줬지만 독천은 그런 형국과는 조금은 다르다. 독천 마을은 군서면 모정 마을과는 달리 천을 위주로 우시장이 들어 번성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하고 풍족한 주방에서 요리된 먹을 음식이 식탁에 놓이게 했다. 지금은 예전 같은 우시장의 정취는 못 느끼지만 천 주변에‘독천낙지음식명소거리’라는 먹거리촌이 조성돼 옛 향수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해 와우형국이라고 한다면 독천은 소가 많이 모여드는 곳인‘소우형국(巢牛形局)’이다.
*독천 우시장 유래
고려초 후기 대문장 익재(益齎)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후손인 영암읍에 살고 있는 경주이씨 이주남이 조상의 묏자리를 잡으려 지관을 모시고 월출산 상봉에 올라가 보니 저 멀리 있는 신성스러운 기운이 뻗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관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비래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다시 정상에서 주위를 둘려보는데 비래산 허리에 여자의 생식기 모양인 여근형 명당이 보였다. 지관은 여근이 있는 혈(穴)로 내려가 명당으로 부족한 점이 없는지 두루 살펴보니 100m 정도 아래 샘까지 있는 것을 보니 천하의 명당으로 판단해 지관은 이주남에게 여근혈 명당 자리를 알려주자 이주남은 길일을 택해 조상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했다.
조상을 묘를 써서 그랬는지 이주남의 동생이 1672년(현종 13)에 무과에 급제해 선진관(宣傳官) 벼슬을 하였고 이후 경주 이씨 자손들도 날로 번창하였다. 두루 조상을 음덕이 미쳤는데 한편에서는 근친상간 사건이 자주 일어나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헤 유명한 지관을 다시 모셨다. 지관은 여근혈(女根穴) 묏자리가 명당이기는 하나 음기(陰氣)가 너무 성하여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하며 산 밑 하천에 우시장을 만들면 남자들이 모여들어 양기가 발산될 것이니 여근혈 주변 천가에 우시장을 조성하면 음기를 중화시킬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지관이 말한 대로 하천에 우시장을 세우자 그 후부터는 이씨 문중에 우환이 생기기 않았다고 한다. 우시장이 생긴 후에 송아지 독(犢)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지명도 '독천(犢川)' 으로 바꾸었다.
*학산 학계리 각시골-소 발자국 바위
또한 학산면 학계리 '각시골' 에 있는 바위에‘소 발자국’이 비슷한 흔적이 있어‘쇠죽대’라고 부르고 있다.
▶발자국은 행적, 이력 따위를 뜻한다. ▶사회적으로 지도자격인 사람의 업적을 기리며 추종하게 된다. ▶자신의 발자국을 보는 꿈은 성공을 나타낸다. 또한 ▶선인의 흔적과 문헌의 기록을 재조명한다. 자신의 행적과 업적 등을 남기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다는 발자국, ▶바위에 파여진 굴곡은 신들의 발자국이라고 여겼다.
힌두교에서는 발은 인간과 땅 사이를 오가는 신성한 접촉지점으로 보고 있다. 발자국은 인간이 지나간 길,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나타낸다. 또한 발자국은 성자의 현존이나 방문을 뜻한다. 그래서 발자국은 신이나 성인의 존재나 통과에 의해서 또는 추종자나 신도들을 인도하는 선구자에 의해서 삼라만상에 찍히게 된 표지이다. 각기 다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두 종류의 발자국은 가는 것과 오는 것 그리고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를 나타낸다.
학산면 학계리 마을 각시골에 있는 바위에 소의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는 것은 오로지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고 하듯이 우직하게 부지런하게 걷겠다는 뜻일 게다. 또한 소는 부와 재물을 상징하기에 필시 이 마을에 영화로운 경사스러운 일이 꽃처럼 피어날 것임을 암시한‘쇠죽대’이다. 인간과 땅 사이를 오가는 신(神)이 우리도 모르게 먼 옛날 이곳을 찾아 신성한 접촉지점으로 보고 내려와 발자국을 남겼지 않나한다.
*미암 선황리 우와대-소가 누워 휴식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 '대초지 마을' 은 마을 동쪽에 위소와대(上牛臥垈), 아랫소와대(下牛臥垈)라 부르고 있으며‘큰 소 두 마리’가 풀을 뜯어먹고 망월천(望月川)에서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 쉬고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우와대(牛臥垈)고도 불리어지고 있으며 이 마을에는 처음 살기 시작한 성씨로는 고려 초기에 수원백씨가 이곳에 남하해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어 평구(平區)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작은 평구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이 마을에 번성해 정착하고 살려는 주민이 불어나고 터가 좁아 점차 넓은 지대로 이동하는 등 확장된 마을이다. 강이 평야가 되고 야산이 밭으로 변하여 늪이 생겨 갈대와 잡초가 무성한 마을이 되어‘대초지(大草地)’마을로 개칭하여 지명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진 금강리 우산정-와우형국
영암군 덕진면 금강리 '소적굴 마을' 은 서북쪽에 위치한 우산정(牛山亭)의 마을로서 금산의 옛 마을 중의 하나이며 1900년대 폐동됐으며 앞산이 소가 엎드려 누워있는 와우(臥牛) 형국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소적굴’로 붙여진 지명이다.
*덕진 용산리 우도-와우형국
덕진면 용산리 '우도 마을' 은 군서면 원해창과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해창다리 맞은편에 있는 산이‘소가 앉아있는 형상’의 섬이어서‘쇠섬’이라고 부르다가 소 우(牛), 머리 두(頭)자 써 지명을‘우두(牛頭)’라고 불리어졌다가 섬이어서 자연스럽게‘우도(牛島)’라 부르고 있다. 소가 앉아있다는 것은 한가로이 편안하게 여유롭게 쉬고 있다는 것이다. 우도는 영산강 안에 있는 섬이다. 지금은 간척으로 인하여 육지가 됐다. 소의 형국을 한 곳은 풍요롭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도는 현재 예전의 물이 아닌 농토로 싸여져있다. 소가 태평하게 앉아 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일 게다.
*금정 용흥리 우적걸-암소가 일어나서 밥 먹는 형국
영암군 금정면 '세흥 마을' 은 용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마을 뒷산이 마치‘암소가 일어나서 밥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주변에 역등(力嶝), 우족(牛足)걸, 쇠포리 까끔, 구시 굴, 쇠정이 들, 우적바위, 황두들이 있어 소와 무관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소가 일어난다는 뜻의 우리말과 한문이 섞인 쇠(소의 방언)와 한문의 일어날 흥(興)의 쇠흥으로 불렀으나 일제 행정구역 개편 전에 조사한 구한국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의 기록에는 가늘 세(세)자의 세흥(細興)으로 기록되어져있다. 세흥은 평택임씨 의자라는 분이 아버지가 무령사화로 유배를 당하자 형제들이 헤어지면서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흥하라고 세흥(世興)이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금정 용흥리 구시걸-구시(구유)형국
금정면 용흥리 '안기 마을' 은 인근 세흥 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 지형이‘구수(구유)’처럼 생겼다하여 마을 이름을‘우적걸, 구시걸, 구숫골’이라 부르다가 앞들 쇠정이 들어 비옥하여 사람 살기가 편안한 터라는 뜻에서‘안기(安基)’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때는 나주군 금마면 우적리(牛跡里)라는 마을로 한동안 존재하다가 통폐합에 따라 사라지고 고종 32년(1885)에 영암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4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곳을‘안기’마을로 부른다. 소 여물통인 구수 또는 구시가 있다는 것은 먹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안기 마을은 넓은 논 같은 농토는 없어도 작은 밭떼기라도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북 갈곡리 우정-소가 우물을 마시는 형국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 '우정 마을' 은 산세가‘소가 물을 먹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소 우(牛), 우물 정(井)자를 써‘우정(牛井)’으로 기록되어오다가 입향조인 광산김씨들이 이거하고 300년 전에 전주이씨 이만백이 함안박씨와 함께 정착한 뒤에 우정의 정(井)자를 정자 정(亭)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우정 마을은 가구 수가 많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가구 수는 적어도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훌륭하게 사회에 진출한 분들이 많이 나왔다.
우정 마을의 샘은 우물이 철철 넘쳐흐를 정도로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우물이 넘쳐흐른다는 것은 재물 운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우물을 마시는 꿈은 길몽으로써 좋은 소식을 들여올 길한 꿈으로 본인이 준비하던 시험, 승진 및 취업과 같은 시험에 합격하거나 입학,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불교 경전인‘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적힌‘소는 물을 마시고 젖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시고 독을 만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직역하면‘소는 물을 마시고 젖을 만드나 뱀은 물을 마시고 독을 만든다’라는 말이다. 소는 자신의 새끼를 먹어 살릴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도움을 주는 우유(善)를 만들어내지만 뱀은 그 물로 남을 해치는 독(惡)을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정 마을의 우물을 뱀이 아닌 소가 마셨으니 필시 소는 물론 인간에게도 이로운 일이 생길 것이라는, 소가 우물을 마시는 형국을 한 '우정(牛井)' 마을이다.
*신북 명동리 와우동-큰 암소가 누워있는 형국
신북면 명동리 '와우동 마을' 은 소룽골, 서룽골로 불렀던 마을로‘큰 암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엎드릴 와(臥), 소 우(牛), 골 동(洞)자를 써 와우‘(臥牛洞)’이라 부르고 있다. 와우동은 백용산령(白龍山嶺)을 따라 오봉산(五峰山) 줄기에 조선 중엽에 여러 성씨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이 마을이 소처럼 한가롭고 넉넉한 아늑하고 포근하다.
*도포 성산리 우산정-와우형국
영암군 도포면 성산리 '용동 마을' 남쪽에 있는‘우산정(牛山亭)’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동(牛洞)이라는 마을과 함께 존재했으며 이 마을은 영암군 북일종면에 포함되었다가 1919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포면 성산리로 병합하였다. 1920년경에 폐동이 된 우산정은 뒷산이‘소가 누워있는 모습’의‘와우(臥牛)’형으로 되어져있어 지명으로 부르고 있다.
*도포 수산리 목우동-소 구수통형국
도포면 수산리 '목우동 마을' 은 선불 동쪽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쇠구시통’의 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쇠구시들’이라 부르다가 한문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기를 목(牧), 소 우(牛), 골 동(洞)자를 써‘목우동(牧牛洞)’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 마을이 소를 많이 사육하고 있어 지명처럼 변화된 마을이다.
*도포 수산리 쇠낀양골-소코형국
도포면 수산리 '유수동' 서쪽에는 '쇠낀양 굴' 이 있는데 골짜기 지형이 마치‘소코’처럼 생겼다하여‘쇠낀양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시종 금지리 우두-소머리형국
영암군 시종면 금지리 '우두 마을' 은 지금은 인가는 사라지고 없지만 나지막한 산이었던 이곳의 지형이‘소머리’처럼 생겼다하여‘쇠머리산’으로 불렀으며 소 우(牛), 머리 두(頭)자를 써‘우두(牛頭)’로 불리어지고 있다. 우두는 시종면 명산 9두 중 1두였을 정도로 아름다운 산세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인가도 없고 인가 대신 경작지로 변해버렸다.
*시종 와우리 와우-소가 누워 되새김형국
시종면 와우리 '와우 마을' 은 마을 앞산의 생김새가‘소가 누워 되새김을 하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누리’라고 부르며 엎드릴 와(臥)자와 소 우(牛)자와 마을 리(理)자를 써‘와우리(臥牛理)’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와우리 마을은 뜻과 같이 소가 되새김을 하듯이 와우리 마을 앞에 간척사업으로 배들이의 넓은 들이 있어 논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풍요로운 마을이다. 소의 되새김은 소가 음식을 뱃속에 가득 채워놓고 오래 씹을 정도로 먹을 풀이 많았다는 뜻일 게다. 농사를 지울 농토가 많으니 이 어찌 풍요롭지 아니하고 먹을 양식이 많은 고장임을 지형은 말해주고 있다.
*시종 와우리 우정-소의 아래 마을
시종면 와우리 우정 마을은 와우 마을에서 안산 잔등을 넘어가면 아담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소의 아래라 하여‘소아래 마을’로 부르고 있으며 한자로 소 우(牛), 우물 정(井)자를 써‘우정(牛井)’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시종 봉소리 구싯골-소 구시형국
시종면 봉소리 '조동 마을' 은 웃조동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구시(구유)처럼 생겼다하여‘구싯골’로 부르고 있다.
*시종 신학리 우암-서바우를 제물로 바침
시종면 신학리 '우암 마을' 은 일명 소바우라고 하는 이 마을은 영산강의 지류에 우암제(牛巖堤) 제방을 막아서 농사를 지었는데 조수가 왕래하고 농사철에 많은 비가 내려 제방이 자주 무너져서 농사를 망쳐 버리므로 마치 지나가던 도사가 이곳 사람들에게 사람을 제물로 하여 제(祭)를 올리면 그러한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서암(徐巖)이라 하는 어린소년을 제물로 하여 제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서바우를 제물로 하였다하여‘서바우’라고 부르던 지명이 소를 상징하는‘소바위’로 바뀌며 마을 지명을 소 우(牛), 바위 암(巖)자를 써‘우암(牛巖)’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영암읍 회의촌 냇가-소바우
지명이 아닌 바위에도 소에 관련된 것을 보면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회의촌' 서남쪽 냇가에 있는 바위가 소를 닮았다하여‘소바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두고 영험한 기운이 상승하여 마을의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으로서 평화롭게 하고 융성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회의촌은 명지(名地)라고 볼 정도로 입신양명을 한 악성으로 불리는 가야금산조 창시자 김창조, 바둑계의 국수 조훈현,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장군 등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소는 영험한 동물이다. 2021년은 신축년의 소의 해여서 소와 관련한 지명이나 명물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2021년은 신축년 소띠 해다. 소띠 해는 을축(乙丑), 정축(丁丑), 기축(己丑), 신축(辛丑), 계축(癸丑)의 순으로 육십갑자에서 순환한다. 십이지의 동물인 소는 발향으로 북북동, 시간적으로는 새벽 1시에서 3시, 달로는 음력 12월을 지키는 방향신(方向神)이자 시간신(時間神)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소에 관한 전설, 소에 관한 에피소드, 소에 관한 그 용도 등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알고 있듯이 쏟아낸다. 우리 조상들은‘소가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德)’이 있다고 했다. 여유와 평화를 부르는 소, 소는 제주고 심성혈 신화,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는 소가 농사신(農事神)으로서 인식되는 등의 부와 풍요와 힘을 상징한다. 농경사회인 우리 민족에게 소는 농사일을 돕는 일하는 짐승으로 부와 재산과 힘을 상징하고 있다.
소에 관한 세시풍속이 많은데 소를 위하는 놀이에서도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동물로 농가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자산(資産)으로 여길 정도로 풍부한 노동력을 의미한다. 새해에는 풍년을 기원하며 가을 한 해 동안 고된 농사일에 대한 위로와 풍년을 가져오게 한데 대한 감사로 각종 풍속과 민속놀이가 마을마다 행해졌다.
소는 실지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부자가 되는 듯이 하는데 꿈에 나타난 소도 어찌나 반가울 수가 없다. 꿈에 황소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소의 형국에 묏자리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을 통해서 볼 때도 분명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부(富)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소는 희생(犧牲)과 제물(祭物)과 축귀(逐鬼) 나타내고 있다. 소의 희생은 희(犧)와 생(牲)은 약간 다르다. 희는 소의 기운, 즉‘의(義)’라는 뜻이다. 제사를 지낼 때 소를 바침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소의 기운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의미를 달리하여 소의 희생을 값지게 봤으며 소를 중요시했다.
한편 생(牲)은 소중에서도 살아있는 소를 뜻하며 그것은 소를 잡아 고기를 바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소를 바쳤다는 뜻이다. 곧 희생은 천지신명이나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제물로 바쳤던 소를 뜻한다. 암컷은 바쳤지 않았으며 우람한 수컷만을 골라 바쳤다.
근면하고 성실하고 우직하면서 충직하고 신성한 소는 성격은 순박하고 근면하고 우직하고 충직하다.‘소같이 일한다’.‘소같이 벌어서’.‘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말은 꾸준히 일하는 소의 근면성을 일깨워주는 속담이다.
소는 비록 느리지만 어느 동물에서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인내력과 성실성이 돋보이는 근면한 동물로 쳐준다.‘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아내에게 한 말은 난다’는 소의 신중함을 들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소를 빗된다.
인도 이슬람문화권 힌두교에서 신성시한 소, 소의 충직함에 대한 이야기에는 조선조 후기에 상주에는 의우총이 있었는데 낙동면에 사는 권씨가 집 근처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덤벼들어 곁에서 풀을 뜯고 있던 소가 달려들어 주인을 구하고 죽었다는 설화로 전해오고 있다.
재산목록 1호이자 농사의 든든한 동지로서 비록 땅은 없어도 소만 있으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했던 소, 여유와 한가함과 평화로움의 상징한 소는 소를 생구(生口)라고 할 만큼 소중히 여겼던 우리 조상들은 소를 인격시했다. 횡희, 김시습, 맹사성 등은 소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긴 현인들이다. 황희 정승은 젊은 시절에 길을 가다가 어떤 농부가 2마리 소로 밭을 가는 것으로 보고 농부에게 묻기를“어느 소가 더 잘 가는지요”라고 물었더니 농부는“이쪽의 소가 더 잘 합니다요”귀엣말로 대답했고 황희 정승은“비록 짐승일지라도 사람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어 질투하지 않겠오”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소는 신성시할 만큼 영물이다. 유교에서는 소가 의(義)의 상징으로 여겼고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비유하고 있다. 소는 도교에서는 유유자적을 의미하며 소는 비록 느리지만 근면함과 묵묵함은 유유자적의 여유와 한가로운 대인(大人)와 은자(隱者)의 마음이라는 이미지를 수반한다. 소의 모습에 긴장감이나 성급함을 찾아볼 수 없으며 순박한 눈동자는 보는 이에게 평화롭고 자적한 느낌에 젖게 한다. 이러한 천성과 모습으로 인해 선비들의 취향에 각별한 영물(靈物)로 인식돼 시문이나 그림, 고사에 자주 등장한다.
고집과 어리석음과 어둔함의 대명사인 소는 다른 집짐승에 비해 큰 편이다. 그러면서 우직하고 고집이 세기 때문에 때로는 어리석으며 어둔하고 미련한 짐승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특히 속담에 소의 고집 세고 미련한 면을 들어‘소귀에 경읽기’니‘황소고집’이니 말들을 해 된다. 또한 몹시 둔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나‘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는 식의 우연히 공을 새웠을 경우도 소에 빗대어 말한다. 또한‘말 갈데 소 간다’속담에서처럼 분별력 없는 존재로 폄하되기도 한다. 소는 또한‘소 죽은 귀신 같다’.‘소 같고 곰 같다’라는 속담에 이르면 소고집은 고집불통의 대명사로로 사용하고 있고 또 소 힘줄은 고래힘줄과 더불어 부정적인 측면에서 매우 미련하고 끈질기고 고집 센 사람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이런 우직스러운 소의 성격은 곧 충직한 성격으로 이어진다.
소의 중요성은 고대로부터 변화를 두어왔다. 고대에서는 제물과 희생용으로 중시되었으며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에는 농경의 조력자로서의 중요성이 중대되고 있다. 오늘에 와서는 고기와 유제품 등으로 중요성이 옮겨지고 있다. 우리 민족과 꾸준히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해왔던 소는 한국 문화에 나타난 소의 모습은 고집 세고 어리석은 측면도 있지만 풍요, 부, 길조, 의로움, 자애, 여유 등으로 축약된 소의 매력이다.
소는 사람들에게 사람 이외는 가장 친숙했던 동물이다. 신성시되며 여유, 충직의 상징이 되고 있는 소는 꿈에서도 나타나면 좋은 꿈 해몽으로써 길몽이 많을 만큼 소는 우리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영험한 동물이다.
마을에 있는 산을 두고‘소가 누워있다’.‘물을 마시고 있다’.‘되새김질 하고 있다’.‘발자국을 남겨났다’는 등으로 소의 형국이나 흔적으로 삼고 풍수사상적으로 중요시 여기며 마을에 좋은 기운이 상승하여 건강, 평온, 평화, 재물, 번성, 번영, 출세의 필시 영화로운 일들이 넘쳐나기를 바라고 있다.
아침에 우는 소의 음매 소리는 새벽을 알리는‘청신호(靑信號)’이며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내된다. 소의 목에 단 워낭은 소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는‘행운(幸運)’의 소리인양 퍼진다. 또 소의 코에 달린 코뚜레는 소에게는 수갑처럼 여기겠지만 코뚜레는 집안을 지켜주고 보호해 준다는‘수호신(守護神)’의 역할을 띠고 있다.
소의 형국이 많은 영암,“마을 앞산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야”,“소가 부와 풍요를 상징한다고 하지”, “우리 마을이 분명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구려”말이 나오게 할 정도로 영암군 관내에 있는 소와 관련된 지명유래와 바위 등의 흔적을 보면 영암군 고을사람들이 영화로운 풍요롭고 평화로운 땅에 살고 있는 듯하다.
집터로 알맞은 장소로 풍수지리에서는 소가 편안하게 누운 모양을 한 마을에 살아야 복(福)이 들어온다고 믿는다. 소가 누운 모양을‘와우형(臥牛形)’, 소의 배 속 모양을‘우복형(牛腹形)’이라고 해 명당으로 친다. 명당에는 소, 말, 닭, 학, 봉황, 거북이 등 여러 동물이 등장한다.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 은 평화, 태평, 풍요를 의미하며 음택의 소의 형국이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구유를 갖춘 '구시형국' 은 안정과 화평을 불러들인다고 한다. ▶금 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이면 입신양명, 부귀공명과 풍요와 행복을 의미하며 닭 벼슬은 벼슬을 의미한다. ▶봉황이 둥지를 튼 '봉황귀소형(鳳凰歸巢形)' 은 자손대대로 문무에 걸쳐 인물이 난다고 한다. ▶거북이가 물에 올라와 알을 낳고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오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은 재물번성과 자손번창을 의미한다.
우리 선조들은 마을의 산이나 지형이 또는 바위 등이 어떠한 동물 형태를 하고 있으면 그 마을은 번성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영암군에 소의 형국을 한 마을은 명당으로서 참 좋소,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소 필시‘번성할 지어이다’이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