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은 쌍십절이다.
중국에서, 북한에서 대단히 큰 명절이란다.
이 날 나는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구미 순천향병원으로 응급 이송한단다.
나는 다시 전화를 해서 대구가톨릭병원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1시반쯤 응급실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말이 어눌하고 오른쪽 수족이 마비된 상태였다.
아침8시부터 이렇게 되었다고 하니
응급실에서도 시간이 지났다고 방치하고
더 급한 인공호흡환자를 돌보고 있다.
나는 가정 먼저 어떤 검사를 하냐고 물었고
간호사는 혈압, 체온, 채혈을 한다고 했다.
어머니 피부터 빨리 뽑아달라고 하였것만
혈압과 체온을 재고 피를 한대롱 뽑았다.
그 후부터 나는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발만 주물고 또 주물렀다.
내가 1998년에 배워서 예방의학으로 꾸준히 닦아온 솜씨다.
어머니는 목소리도, 우측 수족도 못쓰는 상태였고,
소변을 베드에서 그냥 보도록 돕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다.
1시간이 지난 후에야
X-Ray를 찍고, CT촬영을 다녀왔다.
결과를 보는데도 1시간이 걸렸다.
뇌출혈은 아니고 뇌경색인지 확인위해 MRI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한숨을 돌리고 다시 어머니 발을 주물렀다. 손과 팔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총 3시간 쯤 흘렀나보다.
어머니 오른쪽 손가락이 움직였다.
내 손가락을 잡을 수 있다.
오른 발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오른 발이 움직인다.
말을 해보라고 했다.
말이 점점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확신했다.
어머니는 곧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참 후에
링거액을 달았다.
뇌촬영시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액체한다.
혹시 부작이 생길까봐 아주 천천히 주입한단다.
나시 한참 후에 복부에 혈전용해제를 주사하였다.
그리고 MRI를 촬영하러 갔는데
촬영기기 속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선명하게 찍을 수 있다며
움직임이 포착되면 말해달라고 의료기사가 이야기한다.
움직임이 두번이나 있어서 촬영을 두번 중단했다가 찍었다.
그때 내 머리에선
어머니가 양손을 다 움직일 수 있음을 직감하였다.
촬영을 하고 나와서 베드로 다시 옮겨 눕히는데
그때였다. 어머니가 오른손을 의지하며 옮겨갔다.
다시 응급실로 오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손을 꼭 잡아보라고 했다.
다리도 들어보라고 했다. 말도 해보라고 했다.
이제 모두 하였다.
오른손과 발을 들 수 있고, 말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분좋은일, 기적같은 일이 또 있을까?
어머니는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기억도 하시고, 기억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셨다.
동생도 다녀가고, 지수도 다녀가고, 집사람도 다녀갔다.
기뻐서 서로 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진정으로 기뻐서 우는 것일까?
나는 내몸이 어머니와 같이 있는데
나는 거기에 없음을 느꼈다.
내가 느낀 것은 돈이 얼마나 나올까?
이것의 100배 고생을 끝내고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어머니를 이제 어떻게 모실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 나았으니 시골로 모시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삶의 끝자락에 서면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뿐이다!
나는 이 말을 계속 되뇌이며 어리석은 내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지만, 나는 거기에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잘 모셨지만, 나느 거기에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나는 거기에 없었다.
어머니의 생각도, 마음도, 몸도 모르는 나였으니까.
내가 참 밉다.
가슴이 아프다.
세상이 참 밉다.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세상이 부끄럽다.
뒷모습이 아름다우면 좋으련만
나의 뒷모습은 밉고 또 밉다.
이 좋은 가을에 부산에 잘아는 교수님이
뇌진탕에 와사증까지 왔다기에
13일 병문안을 밤늦게 다녀왔다.
가까운 곳에 잘아는 원장님이
증세를 이야기하길래 빨리 병원가서
X-ray와 MRI를 찍어보라고 했다.
뇌경색 판정을 받고 집중치료 중이다.
늦지 않아 참 다행이다.
아직 문안을 가지 못했다.
나를 잊지 않기위해
넋두리로 적어둡니다.
고마습니다.
고마습니다.
고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