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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저울(단5:17-28)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저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나를 달아보는 저울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나를 달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현재 내 모습
은 어떠한지(내 영적 상태는 어떠한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나를 달아보는 저울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것
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4장4절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를 저울질해 볼 때 내게 아무 문제가 없어도 그것을 가지고 내가 의
롭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를 완전하게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시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주님
이 나를 완전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종
말 때까지 미루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또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달아보는 저울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나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저울질을 당하면 살아
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무례한 사
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달아보는 저울도 필요하지만 이것도 절
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습니다.
또 나중에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의식은 하되 거기에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메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 4장 3절에서는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것으
로 내가 나를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달아보시는 하나님의 저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벨론의 마지막왕인 벨사살 왕이 나옵니다.
그는 부왕인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왕권을 주신 줄을 모르고
마음이 교만했다가 짐승처럼 되어 일곱 때를 지난 후에 다시 왕위에 오른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벨사살 왕은 알고도 마음이 교만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메대 왕이... 다리오 왕을 그의 왕궁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도 교만하
여 궁중에 1000명의 귀족들을 데리고 와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잔치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가지고 온 성전의 금 기명
들을 가지고, 그것에 술을 부어 마시고, 또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했습니다.
그때 벽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십니다.
그 글의 내용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이 글의 내용을 바벨론의 박사들이 풀지 못했습니다.
그때 느브갓네살 왕의 부인인 태후가 나타나서 다니엘이 그 글을 해석해 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다니엘이 그 뜻을 해석합니다.
메네란 뜻은 “세다. 계산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나라의 연수를
계산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또 메네란 말이 두 번 쓰인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바벨론 나라의 연수
를 계산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계산하고 보니까 바벨론 나라의 연수가 이제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날이 바로 그 날 밤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메대왕 다리오가 바벨론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또 데겔이란 말은 “무게를 달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을 하나님 “우 바르신”에서 “우”란 “그리고” 란 뜻이고 “바르신”은 “나누어지다” 란 뜻
입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하나님께서 나라의 연수를 세어보고 세어보고,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여, 두 나라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언대로 바벨론은 메대와 파사 두 나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벨사살 왕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나를 달아보는 저울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달아보는
저울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들을 달아보는 저울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달아보는 저울도 잘못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나를 달아보는 저울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달아보시는 저울은 정확합니다.
벨사살 왕은 그의 모든 행동들을 하나님께서 달아보고 계시는 것을 알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내일 멸망할 것도 모르고 술을 마시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날개가 부러진 천사가 구두수선공으로 나옵니다.
어느 날 몸집이 큰 부자가 와서 구두를 자신의 발에 맞게 맞추어 달라고 합
니다. ...
그리고 만일 그대로 하지 않으면 혼을 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내 맘에 꼭 맞으면 두 말할 것 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부족한 부 분은 내가 맞추 어주 면 100프로 가됩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상하게 구두를 만들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신는 샌들을 만
듭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자는 집에 가는 길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이 오늘 죽을지도 모르고 자신의 발에 맞는 구두를 맞추러
온 것입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벨사살 왕과 같고, 그 부자와 같습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고 인간들은 오늘 쾌락을 즐기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내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저울로 우리를
달아보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렸을 때 부족함이 보이면 하나님께서 오늘
이라도 언제라도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저울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특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지금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지금도 달아보고 계시는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이 교만한가, 겸손한가를 달아보고 계십니다.
삼상 2:3에 보면 한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하
나님은) 행동을 달아 보셨느니라”.
레위 족속으로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던 엘가나에게는 첫째 아내 한나와
둘째 아내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연고로 한나를 조롱하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브닌나 때문에 고통스러
운 날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한나의 고통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허락해주
셨습니다. 그 아들을 낳고 한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삼상 2장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
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
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
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자녀가 있다고 해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용사라 해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 유족하다 해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언가 있다고 해서 교만하게 행하면 그것을 달아보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만하다고 판단되시면 용사의 활이라고 꺽으시고, 일곱자
녀를 낳아도 쇠약하게 만드시며, 부자라도 가난하게 하시고, 귀족이라도 비
천한데 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겸손하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자녀가 없어서 애통하면 자녀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가난해서 영적으로 주리면 우리를 언제든지 배불려 주십니다.
우리가 비천하여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면 언제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
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울추는 우리의 행동이 교만하면 낮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면 하나님의 저울추는 높아집니다.
그래서 여러분 절대 내가 지금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한 행동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내가 지금 실패하고 좌절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공해서 교만한 것보다 실패해서 겸손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벨사살 왕도 교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메대 왕이 포위해도 그 왕궁에 몇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었
습니다. 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22,23을 보면 교만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 바벨론 제국을 하루 만에 멸망시키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서 세계를 통치하는 왕이라도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왕
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라도 교만하면 하루 만에 멸망을
시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지, 겸손한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또 하나님께서는 우리 경건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을 달아서 부족함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그의
행동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바벨론 왕궁에 술을 마실만한 금 그릇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가 하나님의 성전의 그릇을 술그릇으로 사용합니까?
그것은 벨사살 왕이 하나님께 태도가 불경건했다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술잔정도로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경건한지, 불경
건한 지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아주 경홀히,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병든 것, 눈먼 것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느
냐, 그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것을 알겠느냐 라고 하지 않았느냐,
또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아주 귀찮고 번거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느냐,
또 집에 수컷이 있는데도 그것이 아까 와서 없다고 하면서 나를 속였지 않
느냐, 그러면서 내게 복을 내려 달라고 하니 내가 복을 주겠느냐고 말라기 1
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를, 특히 예배 때 하
나님께 대한 태도를 달아보고 계십니다.
또 말라기 2장에서는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내 말을 너희 마
음에 두지 아니하고, 나를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네 복을 저주하리라고 하
십니다(말2:2).
그래서 그 벌로서 네 자녀 견책(즉 심판)하리라고 합니다(말2:3).
여러분 우리가 모두 우리가 자녀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
까? 그런데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우습게 여기게
되면 그 자녀를 하나님께서 견책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더라도 하나님께서 절대 보응해주지 아니하신다고 말합니
다. 오히려 악하게 살아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잘 되게 해 주신다고 말합니
다. 이런 말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왜 너희가 이런 불경건한 말로서 나를 괴롭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또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했느냐고 끝까지 하나님께 따
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바르고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녀가 복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란 평상시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들의 압축된 표현입니다.
억지로 외식적으로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다 달아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시의 모습을 통해서 평상시 하나님께 대한 나의태도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에는 예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웃기는 설교를 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예배는 사람을 웃기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짖게 하는 시간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계십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어느 정도의 무게로 여기고, 느끼고
계십니까?
3. 또 하나님은 우리 말의 무게를 달아보십니다.
삼상 2장 3절에 심히 교만한 말을 하지 말지어도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느니라-우리의 입술의 말들을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거기서 하나님이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했는데, 그 행동 중에서 말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입술의 말을 지금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졌을 때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시 우리의 말들이 하나님의 저울에서 함량미달이 되지 않은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시편 12편을 통해서 경건한 자를 괴롭히는 악한 말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말들이 거짓말, 즉 공허한 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허한 말들이란 불신앙적인 말들입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이 아닌 낙심케 하는 말들입니다.
또 아첨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첨의 말이란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합니다. 그런데 돌아서서 그 사람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또 공적으로 하는 말과 사적으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말은 우리 인격과 신앙의 무게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찬양의 입술로 형제, 자매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까?
먼저 우리의 말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말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단순히 습관적인 말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또 우리의 말들이 사람들 앞에서도 진실한 말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들이 되어야합니다.
저는 지난 주 어떤 분을 통해서 저를 위로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목사님 힘드시죠, 제가 말이라도 위로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 말이 진실한 말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제 심령에 무게 있게 다가왔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말들이 하나님의 저울에 저울질 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잠언 16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그러나 여호와는 영들의 무게를 달아보시느니라(잠 16:2)"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경건을 달아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말들을 달아보십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속의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저울로 여러분들의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실 때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겉으로 깨끗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상태를 보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십니다.
지금 우리 영혼의 무게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도를 가지고 우리 영혼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또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인 삶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영혼 무디어져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내 영혼의 무게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영혼의 민감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저울질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