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브라함 시대의 다신교 사회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다. 바로 구약성서이다. 창세기는 인류의 3대 조상에 대해 쓰고 있다. 첫째 조상은 아담이요, 둘째 조상은 노아요, 셋째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유목민 출신이 아니라 도시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당시 수메르 문명은 놀랍도록 발달한 고등문명이었지만, 물질이 발달하자 타락하고 우상 숭배가 만연했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라는 사실은 수메르 점토판 문자가 판독된 20세기 전후에 밝혀졌다. 인류 최초의 문자, 학교, 천문학, 야금술, 도시,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 문명사에서 중요한 것들이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메르 문명과 문화, 신화와 종교는 주변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가나안을 거쳐 히브리 문화와 유대교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영원한 계약
유대민족의 저력은 그들의 종교에 기인한다. 유대교의 특징은 계약의 종교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계약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당위다. 그들이 비단 신과의 계약뿐 아니라 상업상의 계약도 중시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상업 및 금융상의 계약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사를 주도할 수 있었다. 또한 유대교는 배움을 중시한다.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려면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는 배움을 기도와 똑같은 신앙생활로 간주한다. 율법은 유대인 간에 형제애로 단합하고 협동할 것을 명령한다. 유대인은 과거의 역사를 중시한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반추하며, 이를 현재의 스승이자 미래의 거울로 삼는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그들의 기억과 예배 속에 살아 숨쉬는 이유이다.
3. 고난의 역사, 엑소더스
유대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괴로움에 지치자 그들의 조상을 보살폈던 하느님을 기억하고 도움을 간구한다. 유대인들이 노예의 멍에에서 해방된 이집트 탈출 사건은 유대교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수많은 곤경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불평과 후회를 거듭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끝까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 광야의 여정을 통해 유대민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다. 그들은 이 계약을 통해 하느님이 진정 그들의 주인이고 거룩한 민족으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은 유대교 신앙의 중심이자 출발점이었다.
4. 페니키아, 히브리, 그리스의 상권 각축
B.C 1300년경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민족들이 지중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함께 살고 있었다. 페니키아인과 히브리인이다. 뒤에 그리스인들이 합류한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도시국가나 지파 공동체의 자치제도 아래서 살았기 때문에 사고 방식이 군주전제하의 절대 봉건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었으며, 세계를 발전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로운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취적인 기상으로 해외 개척에 대한 도전의식을 갖고 있었다.
5. 유대를 정복한 그리스의 융성
고대에는 정복전쟁이 곧 경제 행위였다. 현대 국가가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과 무역을 지원하듯 고대에는 국가가 전쟁을 통해 국부를 늘려나갔다. 정복을 통한 부의 수탈과 포로로 유지되는 노예경제가 국가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전쟁포로 이외에도 흑해 북안과 러시아 지역에서 지중해 지역에 노예가 수입되었다. 당시 노예는 가장 중요한 생산기반이었다. 그리스와 로마는 노예경제를 기반으로 성립된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했다. 이러한 노예경제를 기초로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민주정 사회가, 동방에서는 봉건주의를 기초로 한 전제국가가 출현했다. 지중해 연안은 대규모 경작이나 목축이 불가능하여 타 지역을 정복하여 토지와 식량을 얻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경제사는 전쟁사를 뜻한다. 이러한 정복전쟁 와중에 페니키아인과 유대인은 해상무역에 종사하며 다른 공동체가 생산한 식료품과 교환하는 상업 행위를 했다. 약탈경제에서 거래경제로 진화한 것이다.
6. 로마의 득세
인류 문명 탄생 이래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요소는 식량과 불, 물, 땔감, 소금 등 다섯 가지이다. 인류는 땔감과 소금을 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강가에 모여 살게 되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로 알려진 예리코는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해 근처에서 탄생했다. 페니키아가 해상무역을 석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소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명의 탄생과 도시 및 국가의 탄생이 소금과 관계가 깊다.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카이사르는 정치개혁과 사법개혁을 단행한 후 파격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지중해를 정복하였고, A.D 96년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즉위시켰는데, 이때부터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맞아 제위를 계승하게 하는 관례가 이어져 2세기 무렵까지 오현제라 불리는 5명의 현명한 황제들이 제국을 다스렸다. 당시 수도인 로마의 인구는 50만명을 헤아렸다.
7. 고대 동양과 서양의 해상교역
바빌론 유수기의 유대인은 활발한 교역으로 중국까지 진출하였다. 고대 실크로드는 알렉산더대왕과 한 무제의 합작품으로, 다양한 수출입품목을 빈번하게 교역하였다. 이 시기에 비단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유대인은 기원전 3세기부터 중국에 정착하였다. 백제가 기원 전후 상하이 앞바다에 있는 저우산군도를 점령하여 바닷길 실크로드를 활용해 비단 수출을 크게 늘렸는데 이는 백제인과 유대인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8. 로마의 멸망
5현제 이후 황제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그치지 않았다. 235년부터 50여 년간 무려 26명의 황제를 바꾸는 ‘군인황제 시대’를 거치며 제국은 쇠퇴기에 들어섰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식품의 최고가격령을 발표했지만 부작용으로 실패하였고, 제국을 4등분하는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였으나 국가재정은 더욱 망가졌다. 노예경제가 붕괴되고 인플레이션의 해악으로 화폐 및 도시 기능이 상실되었다. A.D 33년 최초의 금융위기가 발생하였고, 네로 이후 저질 주화의 대량 유통으로 화폐경제가 무너지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경제가 순환되지 않아 자급자족 원시경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9. 로마 제국 몰락이 주는 교훈
첫째, 부의 원천이 농업과 노동에 있다며 상업을 경시하여 시장경제를 무시한 점이다.
둘째,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이다. 대량 주조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화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실물 선호도를 높임으로써 통화경제가 몰락했다. 경제에 피가 돌지 못한 것이다.
셋째, 어떤 국가나 정부도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정치도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냇째, 동일한 사태가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대규모 양적완화와 환율전쟁으로 달러는 앞으로 그 가치를 얼마나 더 잃어버릴지 모른다.
10. 이베리아 반도와 유대인
이베리아 반도에는 구석기시대의 크로마뇽인 문화를 특징짓는 동굴회화가 많이 남아 있다. 알타미라 동굴회화의 경우 기원전 1만 5천년경의 것이다. 기후가 좋아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았고 지중해 연안은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다. 최남단은 아프리카 해안으로부터 1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해상 길목인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는 나라가 지중해를 지배했다. 유대인은 아라비아 수학과 영(0)의 개념을 전하고, 지중해 교역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원거리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라나다 대학살이 일어나자 황금 시절은 종식되었고, 유대인들이 떠나자 이슬람 왕국의 상업적 기반은 무너진다.
11. 중세 유대인의 동방무역과 금융업
경제사에서 중세는 서로마 제국의 몰락 때부터 콜럼버스의 대항해 직전까지를 의미한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고대가 끝나고 암흑의 중세가 시작되었다. 암흑의 중세라 부르는 이유는 시장 기능이 실종되어 도시는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시골로 옮겨 가 영주 중심의 장원경제를 이루며 화폐경제가 마비되어 물물교환 경제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7세기 이후 이슬람권에 의해 지중해가 장악되어 폐쇄되었다. 유대인들의 동방 무역과 금융업을 통해 경제가 성장하고, 문맹 사회에서 글을 아는 독보적 존재인 유대인이 상업을 석권했지만,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 이후 박해와 추방이 관례화된다. 하지만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경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뒤에 술탄이 불러들인 유대인들의 상업적 활약에 의해 오스만 제국은 부흥되고 르네상스 탄생에 크게 기여한다.
12. 도시국가의 부흥과 메디치 가문의 부상
11세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자 도시가 활력을 되찾았다. 그 무렵 도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유대인들이 상권을 주도하던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이었다. 당시 첨단산업인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여 상공업이 가장 먼저 발전했다. 11세기 100여 개였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14세기 30여 개로 합병되어 큰 규모의 도시 국가들로 발전했다.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등 도시국가들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버금가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지중해 무역과 모직물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모직물산업으로 메디치 가문을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은 유대인 조반니는 업종 전환을 시도하여 대부업에 뛰어들었고 메디치 은행이 1397년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430~50년대 메디치 은행은 최대의 호황기를 맞았다. 궁전 1채를 건축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약 1천 플로린인데, 은행업에서만 연평균 2만 플로린을 벌었던 것이다. 그들이 약재상에서 모직산업으로, 모직산업에서 은행업으로, 또한 교황을 배출하고 피렌체의 통치 엘리트 가문으로 변모를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는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 홍익희 著, 유대인 경제사 1~3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