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柳韶)는 사서(史書)에서 그 세계(世系)를 잃어버렸다.
현종(顯宗) 때에 사헌중승 간의대부(司憲中丞 諫議大夫)를 거쳐, 여러 차례 승진하여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현종〉 20년(1029)에 왕은 유소에게 명령하여 흥화진(興化鎭) 서북쪽 40리에 있는 오래된 석성(石城)을 수리하여 위원진(威遠鎭)을 설치하게 하였다. 또한 흥화진 북쪽에 있는 오래된 석보(石堡)를 수리하여 정융진(定戎鎭)을 설치하게 하고, 영평진(永平鎭)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게 하였다.
거란(契丹)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칭 흥요국(興遼國)이라하며 원군을 요청하려 왔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유소는 서북면(西北面) 판병마사(判兵馬使)로 있다가 상을 당하였는데, 왕이 교서를 내려 기복(起復)하라며 이르기를, “옛날에는 3년상에도 졸곡(卒哭)이 지나면 전란[金革之事]을 회피하지 않았다. 한(漢) 승상(丞相) 적방진(翟方進)이 상을 당하였는데, 장사지내고 난 뒤 30일 만에 상복을 벗고 일을 보았다. 지금 흥요국에서 원군을 요청해 왔으니, 변방에 변고가 생길까 걱정이다. 경은 변방으로 속히 가서 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중군병마원수(中軍兵馬元帥)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로 옮겼다.
〈덕종〉 2년(1033), 유소가 처음 북쪽 국경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서쪽 해변의 옛 국내성(國內城) 지역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위원진·흥화진·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진(寧德鎭)·영삭진(寧朔鎭)·운주(雲州)·안수진(安水鎭)·청새진(淸塞鎭)·평로진(平虜鎭)·영원진(寧遠鎭)·정융진(定戎鎭)·맹주(孟州)·삭주(朔州) 등 13개의 성을 넘어, 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화주(和州) 등 3개의 성에 이르렀다.
이 공사 중에 거란이 와서 분쟁을 일으키자, 교위(校尉) 변유(邊柔)가 기세를 떨치며 앞장서 공격해 물리쳤으며, 그 전공으로 중랑장(中郞將)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왕이 신하들을 위해 문덕전(文德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유소 등이 국경의 관성을 개척한 일을 치하하였고, 유소에게는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은청흥록대부 상주국(銀靑興祿大夫 上柱國)으로 품계를 올렸고, 벼슬은 태위 문하시랑평장사(太尉 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를 양의(襄懿)라 하였으며, 덕종 묘정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