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 문 복(한학자) 단순한 먹의 한 빛깔과 선과 점의 영감적 조화에서 창출된 글자의 묘미이기 때문에 그 자취가 은미(隱微)하여 이를 쉽게 살피기란 그리 쉽지 않다. 소암 현 중 화 선생의 예술세계
서언(緖言)
소암 선생의 예술세계는 단순한 먹의 한 빛깔과 선과 점의 영감적 조화에서 창출된 글자의 묘미이기 때문에 그 자취가 은미(隱微)하여 이를 쉽게 살피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설령 일부분 만을 엿본다 하더라도 보는 이의 눈높이나 방향 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다. 상당한 체단(體段)을 갖추지 않고서 는 작은 것 한부분 만을 보고 은미한 아주 큰 것은 보지 못하여 마치 우물 안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하늘이 작다(坐井觀天) 말하는 어리석음을 면키 어렵다. 소암선생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서예를 연마하였다. 그런데 그 곳 자료를 충분히 얻어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중국자료는 최근 많이 얻어 볼 수 있으나 그것만 가지고 선생의 예술세계를 더듬기에는 무리이다. 그렇지만 우리 제주도는 물론 전국 어디에서나 선생이 추구했 던 북비(北碑-六朝時代16國에서 세운 비석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 북비를 공부는 서학도들도 많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선생 의 잣대로 보면 자형(字形)은 북비이지만 필의(筆意)는 엉뚱하 게 빗나감을 한탄하였다. 이런 시점에서 북비를 연원으로 하는 선생의 예술세계를 일면 만이라도 더듬어 본다면 비록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하늘이 작다고(坐井觀天) 말하는 촌스러운 꼴이 되더라도 해로 움은 없지 않을까 해서 원고 청탁의 요청을 끝내 고사하지 못하 였다.
선생이 처음 글씨를 쓰게 된 동기와 시기에 대해서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평소에 하시던 말씀 중에 "농업학교에 입학할 무렵 선친께서 상해에서 출판한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을 사다 주시면서 임서(臨書)하라고 하여 임서하였는데 훗날 알고 보니 별로 신통치 못한 인쇄물이었다”라는 대목이 서예를 시작 하게 된 동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당시는 국권을 잃고 나서 10년 남짓한 때이다. 지식을 쌓는 것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관점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방법은 둘로 나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배척 하여 신식교육을 거부하고 교래리(橋來里: 리) 등지의 산 속에 숨어 학문을 닦고자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 을 인정하여 그들의 교육을 받아 신지식을 익혀 일본을 이겨내 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어느 쪽이던 간에 사람들이 지식을 쌓기 위하여 서적구입 에 힘을 기울여 마을마다 책접(冊接)이 생겼다. 당시 책값이 아 주 비싸서 사서오경 한 질의 책값이 땅 1,000평 대금과 맞먹었 다. 그래서 개인의 역량으로는 아무리 넉넉한 가정이라 하더라 도 책을 구입할 수 없어 책접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때에 상해에서 출판된 책을 사들인다는 것은 평범하게 보 아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선생의 부공께서 선생 의 필재(筆才)를 범상치 않게 보아 장래를 계획한 처사가 아닌 가 한다. 당시 글씨는 선비가 갖추어야 될 여섯가지 재능(六藝) 중의 하나였지만 평범한 글씨를 바랐다면지금까지도 널리 통 용되고 있는 한석봉 천자문 1권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훗날 1934년 선생의 나이 28세 쯤 되서 영화회사에 취직하여 자막 쓰는 일을 전담했던 내력을 미루어 보아도 이를 뒷 받침하는 자 료가 된다. 본격적인 글씨공부는 1937년에 송본방취(松本芳翠) 문하에 들어가서 3년간 연마하고 그 뒤 1940년 십본사읍( 本史邑) 문 하로 옮겨 8년간 연마를 하고 부터이다.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송본은 자기의 글씨를 가르쳤고, 십본은 북비를 힘써 임서하게 하였다. 북비에의 입문은 이때부터라 하 여도 망발은 아닐 것이다. 이 두 선생 모두 근등설죽(近藤雪竹) 의 문인이다. 근등은 일하부명학(日下部鳴鶴)의 문인이며, 명학은 중국인 양수경(楊守敬)에게서 북비를 처음 접하였다. 양수경은 하소기 (何紹基-字:子貞, 號:東洲)의 고족(高足)이다. 하소기는 조지겸 (趙之謙), 오창석(吳昌碩) 등과 함께 비학으로서 후대에 많이 영 향을 끼친 대가로 인정받는다(中國書藝史裵奎河저). 소암선생의 연원은 중국의 비파(碑派) 서예가인 하소기 내지 는 그 주위의 대가들에게 두는게 마땅하다.
서풍의 확립
1945년경부터 선생은 일본에서 공모전에 출품하였고 1946년 에는 녹담서원(鹿譚書院)을 창설하여 지도하는 한편 서예단체 에도 동참 활약하여 작품활동을 열심히 하였다고 하지만, 당시 의 작품을 얻어 볼 수 없어 당시 서풍을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본댁으로 써서 보낸 병풍 한질(中庸全文隷書素菴玄中和書藝展작품1-2)이 고댁(古宅)에 소장되어 있고 귀국직 후인 1954년경에 쓴 무이구곡병(武夷九曲屛작품1-3)은 한질은 제주일보사에, 한질은 현수언(玄守彦) 씨가 소장하고 있는데 이들 작품에는 선생의 독특한 서풍은 짙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뒤의 국전 출품작품(작품1-1)에도 마찬가지다. 필자의 외람된 견해로는선생의 나이가 칠순에 가까워진 1970년대부터 서풍이 전과 달라졌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소암 70세에 씀(素菴稀年), 또는 소암 71세에 씀(素菴稀有一)이 라고 낙관할 때부터 모든 작품에 선생 특유의 활달함이 드러 났다. 귀국해서 이때까지(1955∼1976) 긴 세월을 임서(臨書)로 일관 하였다. 이 때까지는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찾는 사 람도 없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작품이 흔치 않다. 연마를 위해서도 임서를 하였지만 지도하기 위해서도 임서는 많이 해야 했다. 사범학교에 재직할 때부터인 1980년경 부산에서 체본(體本)을 인쇄하여 오기까지는 구의( 衣)하는 모든 이에게 각체의 체본 을 모두 써서 가르쳤다. 해서(楷書)는 고정비(高貞碑), 장맹룡비(張猛龍碑), 안락왕(安樂王), 미인동씨(美人董氏), 정희하비(鄭羲下碑), 원군(元君), 역명표(力命表), 병사첩(丙舍帖) 행서는 집자성교서(集字聖敎書), 상과첩(相過帖), 종요천자문(鍾千字文), 초서는 십칠첩 (十七帖), 쟁좌위(爭坐位), 손과정서보(孫過庭書譜) 등, 예서는 장천비(張遷碑), 예기비(隷器碑), 전서는 석고문(石鼓文) 등을 열사람이건 백사람이건 모두 손수 체본을 써주었다. 육필한 체 본의 매수를 계산한다면 아득한 숫자이다.
오체관(五體觀)
선생은 해(楷), 행(行), 초(草), 예(隷), 전(篆)서를 임서도 골고 루 했지만, 작품도 골고루 썼다. 다만 작품을 받을 사람의 인품, 작품내용, 흥취(興趣) 등의 외적 여건에 따라 그 때에 맞는 서체 를 택했을 뿐이다. 표현할 대상을 어떤 서체를 택하여야 더욱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었지 서체 자체에는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 말하자면, 초서로 표현할 것을 해서로 표현 못할 이유가 없고 해서로 표현할 것을 예서나 전서로 표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용필(用筆), 운필(運筆) 의 묘를 살리는데 어느 체가 가장 적당한가 만을 따졌다. 그리 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작품에서는 해서에서 엉뚱하게 초서의 분위기를 느끼고(작품 1-4) 초서에서 느닷 없이 전서의 분위기 가 드러나기도 한다.선생이 타계하신지가 10년을 넘지 않았고, 또 절 도의 포구에 살았기 때문에 논평하거나 서술할 문헌이 많치 않다. 그런데 오체를 혼연히 섞여 쓴 데 대해서는 시우(詩友)인 춘산(春山) 이상학(李相學)이 지은 조범산방기(眺帆山房記)에 잘 나타 나 있다. 해서를 쓰면서 초서의 필법을 담기도 하고 초서 를 쓰면서 해서의 필법을 섞기도 하며, 예서와 전 서의 서법도 함께 아우르니 이것이 옹(翁-素菴) 의 독창성이어서 천하에 쫓을 자가 없을 것이다 (正中有草草中有正隷中有篆篆中有隷比翁之獨創而天下無可及者)라 하였다. 춘산은 시인이지 서예가는 아니다. 그러나 선생의 서풍을 누구보 다 바로 보았다. 어찌 시예(詩藝), 서예(書藝)의 융융(融融)한 상통이 아닌가? 선생을 가리켜 행서와 초서를 잘 쓴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생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어느날 정서(淨書)를 보아주다가 쉬면서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보고 행초를 잘 쓴다고 하지만 실은 잘 써서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기 때문이다. 한예 (漢隷)에는 자신이 있는데 원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한글예서를 창안하여 써보고 싶지만이미 손댄 사람이 있어서 하지 않 는다.”고 하였다. 선생의 의중을 바로 드러낸 말이다. 오체를 크게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글이나 다른 나라의 글자도 마찬가지다. 한글은 획이 단순하여 같은 획의 나열이지만 변화를 놀랍게 하여 한 작품 안에 같은 획은 없다
서풍의 독창성
선생의 특이한 서풍을 어떤 이는 소암체(素菴體)라고 말한다. 풍이든 체이든 이름 자체가 중 요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획마다 점마다 모양이 다르다. 그러나 무작정 다르기 위하여 다른게 아니라, 다른 모양 속에 엄격한 법도가 있다. 그 법도 속에서 다시 변화가 생겨난다. 문하에서는 선생의 글씨 풍은 농담조로 크게 둘로 이름 지어 삐딱체, 빤득체라 부른다. 종횡 무진하여 호방한 기개가 느껴지는 풍은 삐딱체 이다. 점잖은 말로 고쳐 쓰면 방일체(放逸體)이다. 단아 장중하여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씨같은 체는 빤득체이다. 역시 점잖은 말로 바꾸면 정제체(整齊體)이다. 삐딱, 빤득 두 가지 풍을 자세히 보면 삐딱 속에 빤득이 있고 빤득 속에 삐딱이 있어 서로 엉켜 돌기 때문에 둘로 나눌 수가 없다. 다만 획과 점 어느 것에나 흐트러져서 젓거나 허술하게 느껴 지는 부분은 털 끝 만치도 없다. 뜻이 먼저 정해진 뒤에 붓은 뜻에 따라 움직이기(意先筆後) 때문에 점획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각도와 방향이 분명하여 종점이 보인다. 점과 획이 끝맺혀진 곳에서 즉시 시작되기 때문에 만자의 많은 글자나 만폭의 대작을 펼쳐 놓아도 획과 점, 글자와 글자가 맥락이 상통하여 끊김이 없다. 반대로 앞 뒤 위 아래의 글자가 이어졌어도 분명히 떨어져 있어 서로 조화는 하지만 합류되어 버리지는 않는 것이 선생 서풍의 독창성이다.
결언(結言)
선생의 글씨 쓰는 방법이 비파(碑派)의 이론이나 방법을 따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작정 비파 만을 존숭(尊崇)하여 따르지는 않는다. 지금도 제자들 모임인 소묵회에서 쓰고 있는 체본 중에 역명표(力命表), 원군(元君) 등은 북비가 아 니다. 서력이 높은 제자들에게는 북비를 익히고 나서는 당(唐), 송 (宋)의 명품도 살펴보고 참고하는 것이 좋다고 조심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지도할 때에 언제나 강조한 것은 체본을 바로 볼 것, 붓을 세울 것이었다. 임종하는 전날까지도 시측(侍側)한 필자에게 혀가 굳어져 발음이 잘 안 되는데도 첵, 첵이라고 외쳤다. 체본을 첵이라 발음한 것이다. 체본을 바로 보라는 말은 북비의 강건함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며 붓을 세우라는 말은 글씨를 쓸 때에 팔꿈치를 들고 팔목을 둥굴게 하여 붓을 잡은 손이 팔의 둘레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붓이 바로 서고 이렇게 하여 바로 선 붓은 필봉(筆)이 적당히 꺾이어 붓끝이 양쪽으로 펴지게 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한 뒤에 점획이 굵고 가늘고, 길고 짧고, 성기고 빽빽 하고, 크고 작음이 스스로 달라져 귀신도 놀라게 할 변화가 절로 생긴다. 그러므로 일정한 법도에 맞추려 하지 않고 그때 그 때의 흥취에 따라 자유로이 붓을 옮겨도 아름다움이 절로 생긴다. 어린이를 위해서 글씨를 쓸 때는 순진함을, 시골 사람을 위해 서 쓸 때는 촌스럽게, 술자리에서는 흥청망청, 사우(祠宇), 전각 (殿閣)의 현판은 선명강건(鮮明剛健), 묘갈(墓碣), 품제(品題)의 제자는 장중엄연(壯重儼然) 등 글씨를 쓰는 대상이나 당시의 흥겨움에 따라 속된 말로 빤득, 삐딱을 자유로이 하는 것이 선생의 예술세계이다. 문자의 내력을 살피면서 우주의 원리에 근원하여 반대를 돌이켜 마주 보게 하고, 마주 보는 것은 섞여들지 않게 하여 금 그어 주고, 움직이는 것에는 안정을, 고요한 것에는 움직일 힘을 넣어 주는 창작활동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이왕(二王:王羲之父子)의 법첩을 기본으로 한 행서 초서에 잘 드러나지만 지면관계로 줄이면서 훗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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