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송 처사와 산신령
백화 문상희: 고전 콩트 (여름 특집)
낭독: 이의선 (EBS 성우)
유투브 채널 (선메아리)
*아래는 본문 낭독을 위해
시나리오로 각색 하였습니다*
https://youtu.be/cdlAxLbKMeI?si=xSxV1jHTXs4He7At
깊은 산자락 아래,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유난히 걸음걸이가 느긋하고, 옷차림이 범상치 않은 사내를 가리켜 ‘연송 처사’라 불렀다.
그날도 연송 처사는 지팡이를 짚고 윗동네 방앗간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외나무다리를 건너려는 순간이었다.
저편에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나타났다.
백발은 구름처럼 희었고, 눈썹은 마치 겨울 서릿발처럼 길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오래전부터 ‘산신령’이라 불렀다.
“아이고, 산신령님 아니십니까?”
연송 처사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산신령도 눈을 가늘게 뜨며 반겼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했더니 연송 처사 아니시오?”
“예, 신령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처사는 어디를 그리 바삐 가시오?”
“윗동네에 볼일이 좀 있어서요.”
산신령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빙긋 웃었다.
“허허, 내가 방금 윗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왔는데 별일이 없던데…… 어느 집에 볼일이 있단 말이오?”
연송 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게…… 방앗간에 좀 들르려고 합니다.”
그러자 산신령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허허허…… 그 방앗간이라면 ‘친절한 방앗간’ 말이오?”
“예.”
“혹시 그 집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시오?”
연송 처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구…… 신령님 눈은 못 속이겠습니다.”
산신령은 껄껄 웃었다.
“역시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구먼.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한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산신령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말이오…… 나도 예전에 그 방앗간에 볼일이 있어 들른 적이 있소.”
“신령님께서 방앗간에는 무슨 볼일이 있으셨습니까?”
“누군가 암자에 나락 한 가마니를 가져다 놓았더구먼. 굶어 죽지 말라고 말이오. 참 고마운 일이 아니겠소?”
“참 복 받을 사람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말이오…… 그 방앗간에 들어서니 이상하게 기운이 남다르더구먼.”
연송 처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어떤 기운 말씀이십니까?”
산신령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사람 사는 집에는 집마다 기운이 있는 법이지. 그런데 그 집은 유난히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기운이 있더구먼.”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처사 얼굴을 보아하니, 그 기운을 이미 제대로 느낀 모양이오.”
연송 처사가 헛기침을 했다.
“허허……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산신령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다면 나도 부탁 하나 합시다.”
“무슨 부탁이십니까?”
“나도 혼자 사는 몸이오. 혹시 마을에 마음씨 좋은 여인이 있다면 한번 알아봐 주시구려.”
연송 처사가 산신령의 백발을 힐끗 바라보았다.
“신령님, 춘추가 춘추이신데 감당하시겠습니까?”
“허허허! 사람의 마음에 나이가 어디 있소?”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말이오, 우렁각시 같은 사람이 좋소. 저녁이면 조용히 찾아와 밥 한 끼 같이 먹고, 술잔도 나누면서 세상 이야기나 도란도란 나누면 더 바랄 것이 없겠소.”
연송 처사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이라면 한번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부디 부탁하오.”
산신령은 갑자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이것도 알고 계시오?”
“그게 무엇입니까?”
“요즘 강 건너 신약방에서 나온다는 묘한 약이오. 산에서 나는 머루를 재료로 만든 것이라는데, 기운을 돋우는 데 좋다고 소문이 났더구먼.”
연송 처사가 피식 웃었다.
“신령님도 별 소문을 다 들으십니다.”
“내 별명이 왜 산신령이겠소?”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하하하!”
외나무다리 위에서 한참을 웃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비켜 주며 길을 나누었다.
“처사!”
산신령이 뒤에서 불렀다.
“예?”
“방앗간에 가거든……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마시오.”
“왜 그러십니까?”
“사람 마음이란 한 번 빠지면 산길보다 헤어나기 어려운 법이니까.”
연송 처사는 빙긋 웃었다.
“신령님이나 좋은 짝부터 찾아보십시오.”
“허허허…… 그 말 잊지 마시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연송 처사는 방앗간으로 향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방앗간에는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연송 처사는 문 앞에 서서 잠시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친절님, 안에 계시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아이고, 연송 처사님! 어서 오세요.”
방앗간 주인 친절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방 안에는 구수한 고기 냄새와 막걸리 향이 은근히 퍼져 있었다.
“오늘 무슨 좋은 날이라도 있소?”
“좋은 날은 무슨요. 처사님 오신다기에 간단히 상을 차렸지요.”
상 위에는 따끈한 음식과 막걸리 한 사발이 놓여 있었다.
연송 처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러니 내가 이 방앗간을 어찌 마다하겠소.”
“앉으세요. 먼 길 오셨으니 시장하시지요?”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막걸리 잔이 부딪히고, 웃음소리가 방앗간 안을 채웠다.
한 잔, 두 잔…… 이야기는 깊어지고 밤은 점점 깊어졌다.
연송 처사가 문득 낮에 만난 산신령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외나무다리에서 산신령님을 만났소.”
친절이 웃으며 물었다.
“산신령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자네 방앗간 이야기를 하더구먼.”
“호호호…… 산신령님도 참 별일이시네.”
“그러면서 좋은 짝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하더이다.”
친절은 한참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산신령님께서 참 외로우신가 봐요.”
“사람이란 누구나 그런 법이지.”
연송 처사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까지 늙는 것은 아니니까.”
친절은 잠시 말없이 연송 처사를 바라보았다.
방앗간 밖에서는 바람이 대숲을 흔들고 있었다.
달빛이 창호지에 희미하게 번졌다.
그리고 그날 밤.
산 아래 조용하던 마을에는 방앗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늦도록 이어졌다.
먼 산 중턱 암자에 있던 산신령은 그 소리를 듣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
“허허…… 아무래도 내가 처사를 너무 믿었구먼.”
산신령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좋은 일이로다.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 웃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인연이지.”
그날 이후 연송 처사는 윗동네 방앗간에 더욱 자주 나타났고,
산신령은 마을에 우렁각시 같은 여인이 있는지 더욱 열심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세상에 산신령도 별수 없구먼.”
그러자 누군가 대답했다.
“사람 마음에 산신령이 따로 있나?
외로우면 누구나 사람을 찾는 법이지.”
바람은 산을 넘고,
달은 강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외나무다리에는 오늘도 두 사람이 나눈 웃음소리만 오래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