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군[楊口郡]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중앙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인제군, 서쪽은 화천군, 남쪽은 춘천시,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창도군 · 금강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경 128° 10'∼127° 51', 북위 37° 59'∼38° 19'에 위치한다. 면적은 701.53㎢이고, 인구는 2만 408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4개 면, 83개 행정리(6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에 있다.
자연환경
태백산맥의 여러 연봉들이 남북으로 종관한다. 양구군은 화천댐과 소양강댐 건설로 많은 평야지역이 물에 잠겨 전체 면적의 85%가 임야와 호수로 되어 있다. 금강산의 뿌리가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지맥이 양구와 회양을 경계로 하는 마비령으로 내려가 광록산(800m)을 이루어 산세가 험준하다. 군의 동단부는 가칠봉(加七峰, 1,242m) · 대우산(大愚山, 1,179m) · 도솔산(兜率山, 1,148m) · 대암산(大巖山, 1,304m)을 연결하는 높고 험준한 대암산맥이 남하해 소양호에 접한다. 중앙부에는 지혜산(智惠山, 1,024m) · 봉화산(烽火山, 875m)을 연결하는 비봉산맥(飛鳳山脈)이 있다. 서단부에는 어은산(魚隱山, 1,277m) · 백석산(白石山, 1,142m) · 사명산(四明山, 1,198m)을 연결하는 어은산맥이 있다. 이렇게 군 전체가 험준한 내륙산간지역을 이룬다. 이들 연봉 사이를 북한강(北漢江)의 지류인 수입천(水入川)과 서천(西川)이 남류하다가 남서부의 파로호(破虜湖)로 흘러든다. 서부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북한강으로 흘러들며, 남단부를 소양강(昭陽江)이 서류한다. 북동부의 해안분지는 소양강 유역권에 속하는 전형적인 침식분지이고, 양구읍에는 대규모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하였다. 지질은 대부분 시 · 원생대의 변성퇴적암 내지 화강편화암이나, 해안분지는 중생대에 관입된 화강암지역이다. 토양은 대부분 잔적토이고 비옥한 충적토는 하천 주변에 좁게 분포할 뿐이다.
이 군은 태백산맥의 분수령 일부를 차지해 한반도의 서부와 동부 식생계의 경계가 되므로 희귀한 동식물이 많다. 냉수성 어류인 열목어 · 잉어름치 · 황쏘가리, 딱새과에 속하는 쇠올딱새 등이 있다. 그리고 콩과인 개느삼과 다년초인 금강초롱 및 비로용담 · 칼잎용담 · 끈끈이주걱 · 큰비다분취 · 북통발 · 장백제비꽃 · 물이끼 등 식물종들이 자생한다. 호수로는 인공호인 파로호와 소양호가 있어 내수면어업이 활발하고 수상교통과 관광적 가치가 크다. 기후는 산간분지와 1,000m 이상의 고산지가 많아 대륙성기후를 나타내며 같은 위도상의 어느 곳보다도 기온이 낮고 강수량도 적다. 연평균기온 12.3℃, 1월 평균기온 -5.℃, 8월 평균기온 24℃이며, 연강수량은 1,395.5㎜이다.
역사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된 적이 없으나 이 지역에서 가까운 홍천군홍천강 유역의 유적에서 5만∼10만 년 전의 중기구석기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횡성군 둔내에서도 1만∼2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도 발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무너지고 한나라가 4군을 정했을 때 이곳은 낙랑군에 속했다. 고구려의 건국 후 본격적인 남하정책이 전개된 광개토왕 때까지 약 100년간 동안 고구려의 세력권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양구군(楊口郡) 또는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 불렸다. 757년(경덕왕 16) 이 군을 양록군(楊麓郡)으로 개칭해, 태수(太守)를 두고 삭주도독부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희제현(稀蹄縣) · 치도현(馳道縣) · 삼령현(三嶺縣)을 영현으로 두었다. 940년(태조 23)에 양구현(陽溝縣 또는 楊溝縣)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 춘주(春州 : 지금의 春川)의 속현이 되었다. 1106년(예종 1) 감무를 임명해 낭천감무(狼川監務)를 겸임시켰고 이 때 양구(楊口)로 고쳤다. 삼령현은 방산현(方山縣)으로 개칭되어 회양부(淮陽府)에 속했다. 1393년(태조 2) 낭천으로부터 분리되어 따로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관례에 따라 현감을 두었다. 1424년(세종 6)에는 방산현과 춘천에 속했던 해안소(亥安所)가 양구현에 통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는 양구가 297호 641인, 방산이 20호 50인이었다고 한다.
1895년 춘천부 양구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강원도 양구군으로 되어 군내(郡內) · 방산(方山) · 수입(水入) · 해안(亥安) · 북(北) · 서(西) · 남(南) · 하동(下東) · 상동(上東) 등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1월 2일양구면 연포와 학포 두 곳에서 양구의병과 왜군이 공방전을 벌였다. 11월 21일에는 방산면 선안리에서 김덕흥(金德興)과 김경화(金敬和)가 이끄는 300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접전해 총기와 탄약 및 군마 · 인장 · 군도 등을 노획하였다. 그 해 12월 중순 이래 최천유(崔千有)가 의병 600여 명을 인솔하고 양구 · 화천 · 인제 사이를 내왕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였다. 동면 덕곡리 출신의 의병대장 최도환(崔道煥)이 이끄는 양구의병은 1908년 1월 2일 일본군과 동면 임당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1908년 일시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복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면과 군내면을 합해 군내면으로, 춘천군 북산외면 수산리를 이관받아 남면으로, 상동면을 동면으로 개칭하였다. 1917년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다. 1940년 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되자 1941년북면을 폐지하고 양구면과 방산면으로 각각 분할, 편입시켰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남면의 일부인 하수내리를 제외한 전지역이 공산 치하로 들어갔다가, 1953년 국군의 진격으로 탈환, 수복되었다. 이후 휴전협정으로 수입면을 제외한 수복지구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이 시행되고, 해안면이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남면 상수내리와 하수내리가 인제군으로 편입되고, 인제군 남면 두무리와 서화면 현리 · 오류리 · 만대리 · 월산리 · 후리 · 이현리가 양구군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양구와 춘천을 잇는 소양강댐이 준공되었다. 1979년 5월 1일양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양구읍 상5리를 상5리와 상6리로, 중리를 중1리와 중2리로, 하1리를 하1리와 하3리로 분할하였다. 1981년에는 동면 오류리를 오류1리와 오류2리로, 현1리를 현1리와 현3리로 분할하였다. 1983년 2월 15일동면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2021년 1월 남면은 국토정중앙면으로 개칭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5-03-16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