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치 못할 지니라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1:19-20).
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고 말씀한 사도는, 이제 이를 상세(詳細)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먼저 19-25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건치 아니함이 무엇인지 그들의 종교적인 죄를 논하고, 26-32절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의한 도덕적인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된 죄악은 우상숭배요, 이웃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진 죄악은 음란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내려진다 해도 어찌하여 그것이 정당한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가를 말씀합니다.
①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19) 합니다.
㉠ 지금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서 먼저 죄론부터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 순서를 보면 먼저, “이방인들”의 죄를 드러내고,
㉯ 다음에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한 후에,
㉰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하고 총체적으로 죄인임을 말씀한 후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② 먼저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데, 치명적인 죄가 우상숭배입니다.
㉠ 몰라서 그러는가? 사도는 알만한 증거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 첫째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19상) 말씀하고,
㉯ 둘째는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20중) 하고 말씀합니다.
㉡ 그러면 첫째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創造)하실 때에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며 알아 볼 수 있는 본성(本性)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창 1:26)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들인 “사랑, 의로움, 지혜, 지식, 자비” 등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양심”(良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는 것입니다.
㉢ 죄를 범하면 양심(良心)에 가책을 받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만 주신 본성(本性)입니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에게는 제 혈육을 알아보는 직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저들 속에 주시지 않을 리가 있으셨겠습니까?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하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인간 내면(內面)에 주신 것입니다.
③ 둘째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萬物)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20) 하십니다.
㉠ 이 말씀은 자연을 통한 계시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본성 외에 특별계시인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본성적인 내면의 계시와,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 합니다. 이것은 외적(外的)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 사람들은 작품만 보고도 그것을 제작한 작가를 감정해 냅니다. 한 폭의 그림이나 조각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감탄과 찬사를 보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돈을 아낌없이 지불하면서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그렇게 할줄 아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작품인 우주만물의 그 신비와 오묘함과 조화들을 보면서도 모른 채하다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④ “하나님을 알되”(21상) 합니다.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것이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20하) 하십니다.
㉠ 저들에게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하고 말씀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런 짓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봅니다. 무식한 사람들뿐 아니라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도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절하고 있는 우상에 대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 물어 보십시오. 당신들은 지금 누구에게 이 짓을 하고 있소? 그에 대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바가 뭐요?
⑤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그래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까?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실까 나를 신묘막측 하게 지으신 분이 누구신지 알 수만 있다면, 이렇게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의 기쁨과 감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어떤 특징을 말하기도 하며 잃어버렸던 혈육임을 확인하려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만큼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던가요? 하나님이 계심이 99%가 보여 지는데도, 잘 알 수없는 1%가 있다면 그것을 내세워 억지를 쓰지 않던가요?
⑥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습니다.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 합니다. 진노의 날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 인간의 내면적인 본성으로 보나, 외적인 자연 계시로 보나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 하나님은 경배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우상을 섬기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부채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18중)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 위에 진노가 떨어진다 해도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 합니다.
⑦ 만물 가운데 무엇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20)입니다.
㉠ 산에 오르거든 양지바른 곳에 반듯하게 누어 보십시오. 서 있으면 옆을 보게 되지만 누우면 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시 8:3-4) 한 시편 말씀이나,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空間)에 다시며”(욥 26:7) 한 욥기 말씀이라도 묵상해 보십시오.
㉡ 욥기 말씀대로 형제가 누운 지구가 허공에 떠 있습니다. 해와 달과 수많은 별들이 그러합니다. 그 넓이와 거리는 빛의 속도인 광년으로도 나타내기에 부족합니다. 무한대한 우주 공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을 조금이나마 아시게 될 것입니다.
㉢ 이제는 주변에 산유화라도 있거든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살펴보십시오. 한 알의 모래를 보고 우주를 생각하고,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천국을 생각 했노라는 시인 브레이크가 아니더라도, 형제는 그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에서도 하나님의 “신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⑧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먹여주는 어미 닭은 그것을 누구에게 배웠단 말인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며, 자식이 부모를 그리워하게 함은 누가 주신 성품입니까? 어릴 적 동심이 깃들어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입니다.
㉠ 그러함에도 어찌하여 저들은 영원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으며, 영원한 본향(本鄕)을 사모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그토록 사랑하시며 기다리고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이렇게 시작합시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당신 속에 두셨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래도 당신은 핑계될 말이 있소?” 이것이 바울이 루스드라(행 14:15)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행 17:25) 때에 사용한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