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지하 2층 작업실
산본 중심부에 있는 한 7층짜리 건물의 지하 2층 짐 정리를 했다.
그 안에 쌓여 있던 짐을 꺼내 외부 방에 옮겨야만 온전히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건물 관리인이 며칠 전 인야에게, 필요한 것들은 맘대로 이용해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책상과 의자 그리고 캐비넷 등은 남겨놓은 채 자리 배치해 정리까지 해 놓을 수 있었다.
일요일이라 쉬고 있던 조카가 인야를 따라와서 책상이며 물건들을 찬물에 걸레를 빨아 열심히 닦아준 덕에, 일은 훨씬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아늑하고 정감이 가는 실내 공간이 탄생했다. 그런데도 인야는 여전히,
'지하만 아니었어도, 그것도 2층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하는 설렘도 감출 수 없었다.
독일에서 돌아온 뒤 근 5개월 동안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그림 작업을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동안 신촌 작업실에 신세를 지며 흙 작업이나마 이어오긴 했지만, 이렇게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이 있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산본에서 한의원을 하는 친구 O의 소개로 이 지하 공간을 아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얼추 정리가 되면서 조카를 먼저 돌려보낸 뒤, 인야는 작업실에 남아... 본격적인 그림 그릴 준비 등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으슬으슬 춥기는 했지만, 앞으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마음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옛 직장 동료 김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더니,
"이 선생, 우리 한 이틀 정도... 함께 여행이나 갈까?" 하고 물어왔다.
"글쎄......" 하고 인야는 주저주저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행을 가려면 돈도 필요했지만 막 작업실을 열어놓은 상태라서, "상황이 그렇게 안 돼서, 못 가......"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인야에겐 그림 작업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이제 신촌 작업실로 출근할 일도 없게 되었지만, 뒷마무리를 해야만 해서... 두세 차례 들를 일은 남겨져 있었다.
그런 뒤 신촌으로 가 석고 틀을 뜨느라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일이었는데, 때마침 그곳에 와 있던 조각하는 후배 '지' 모씨가 도와주어...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인야는 머리도 새로 깎았다. 거울 속 모습이 너무 꺼칠해 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의 의미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자잘한 물건들을 챙겨 다시 지하 작업실로 향했다.
아직 작업을 시작하기에는 준비할 게 남아 이것저것 점검하고 정리하고 있는데, 누님이 지하로 찾아왔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역 가까이에 있는 작업실에 들른 것어었는데... 인야가 어떻게 해놓고 지내려는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볕도 들지 않는 지하 2층에서 뭔가를 하겠답시고 벌려놓고 있는 인야의 모습이 못내 딱해 보였던지,
"그래도, 어쨌거나 난로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 하고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하실이라 더 그렇겠지만, 처음 들어왔을 때는 춥지 않은 것 같다가도... 한 시간쯤 지나면, 어디선가 스며 나오는 싸늘한 한기를 도저히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야는 두꺼운 파카를 한 겹 더 껴입고 있었던 것인데, 이래저래 지켜보는 누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업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또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누님이 돌아간 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지하 작업실에 홀로 앉아 있다가... 인야는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잠시 TV를 보는데,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들어, 얼른 방으로 피해 들어왔다.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며 인야는 곧바로 컴퓨터를 켰다.
그 다음 날은 약속했던 대로 제자 녀석이 차를 몰고 와 주었다. 덕분에 인야의 남은 물건들을 신촌 작업실에서 산본 지하 작업실까지 안전하게 실어올 수 있었다. 고마운 제자에게 점심을 먹여 돌려 보낸 뒤, 인야는 가져온 석고 틀에다 새로 사 온 흙을 집어넣는 작업을 시작했다.
드디어 온전한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지하 2층이라는 폐쇄된 공간 특성상 외부와 연결될 전화가 꼭 있어야 했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당장 설치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 돈을 꾸기라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갚을 것인지조차 불확실한 상태라... 돈을 빌린다는 생각마저도 쉽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지하에서 보냈더니, 온 몸에 뼈마디가 시리는 한기가 들어... 평소보다 조금 이른 저녁에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문밖으로 나서니 바깥 날씨는 지하실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그날은 평소 하던 영어 회화 수업을 끝낸 뒤, 근처 '안양'에 들러 컴퓨터 교육에 관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최근 광고를 보고 알게 된 정부 무료 컴퓨터 강좌가 다음 달부터 열린다는 소식에, 미리 문을 두드려본 것이었다.
그렇게 인야는,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시작하고 있었다.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사무치게 그리웠다.
만약 살아계신다면 전화라도 한 통 걸어 목소리라도 들었을 텐데, 이제는 전화로도... 마주 앉아서도 어머니와 대화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그립다 생각하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만 갔다.
'아, 사랑했던 나의 어머니!'
한참 감상에 젖어 있는데, 이 건물에서 옷가게를 한다는 사람이,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어제부터 작업실을 기웃거렸다. 인야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문을 슬쩍 열어보기까지 했다.
별다른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행동은 참 묘했다.
지난번에는 옆 창고를 쓰는 사람이 노크도 없이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한 적도 있었다.
인야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들을 어쩌면 그리 서슴없이 해대는지, 인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그저 기가 찰 따름이었다.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행동이 분명한데도, 인야의 마음 한편에서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면? 혹시 내 생각이 너무 고지식하고 잘못된 걸까?'
끝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인야는 딱히 반박하거나 따지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말았다.
영어회화 학원에서 돌아와 점심을 챙겨 먹고, 오후부터는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흙으로 납작한 부조 작업 하나를 끝마치고, 첫날 채워 넣었던 흙 작업의 석고 틀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그리고는 꼼꼼하게 수정을 이어갔다.
새롭게 작업을 시작한 인야는 나름대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구석으로는 뭔가를 애타게 기다리고도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앞날과 직결된 작품 활동이나 생계를 위한 구직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답을 내려주는 것은 없었다.
'해도 너무하네!'하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고, 쓰린 가슴은 서서히 지쳐만 갔다.
그러던 중 제자 H가 드디어 작품 스캔본을 받아왔다.
인야는 그제야 겨우 글과 그림을 합성하여 하나의 디스켓에 담는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작업을 끝내자마자 가장 먼저 출판사로 디스켓을 발송했다.
현재 아무런 수입이 없다 보니 살아가기가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고, 그렇다고 당장 뾰족한 해결책이 솟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수중에 돈이 없어 필요한 전화조차 놓지 못했고, 다음 달에는 그나마 영어 회화 수업마저도 그만 둬야할 형편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정신없이 전철을 타고 학원으로 향한 뒤, 두어 시간 동안 영어 섞인 말들을 쏟아내고 나면 허기가 몰려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지하 작업실에 돌아와 점심을 대충 때운 뒤, 곧장 흙 작업에 매달렸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그 몸을 이끌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끊임없이 해내야만 했다.
그런 고단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차가운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앞이 캄캄했다.
수중의 돈도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2월은 또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인야는 다시 그림 작업을 시작했다.
1월의 마지막 날이자 일요일이었던 그날, 지하 작업실에서 흙 작업을 점검하고 종이 앞에 앉아 한참을 씨름한 끝에... 막바지에 이르러 겨우 작품 하나를 건져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목은 '겨울 꿈'.
'아, 어쨌거나 작업만 계속할 수 있다면...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다 견뎌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인야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삶을 향한 몸짓이었다.
자신만의 온전한 모습을 지켜낼 수 있을 때야말로, 인야는 스스로가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