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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134호
태허스님과 인간불교의 창시(2)
(2) 출가 이후에서 40세까지
① 금산사(金山寺) 칼부림사건
태허스님의 생애를 말할 때 누구든지 빼어놓지 않고 크게 언급하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중국불교계를 진동시켰던 이른바 [금산사(金山寺) 칼부림사건]이다.
이 사건은 중국청조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한족들이 일으킨 「신해혁명」의 다음해에 일어난 것이다. 1912년 그 해는 손문(孫文)이 남경에서 「신해혁명」의 산물로 탄생한 중화민국의 임시대통령에 취임해 있을 때였다.
승려로서 「신해혁명」에 가담했었던 태허스님은 남경에서 혁명의 물결에 편승하여 중국불교계를 혁신할 큰 꿈을 가꾸고 있었다. 태허스님은 불교혁신을 추진할 모체로서 「중국불교협진회」를 조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남경 비로사에 추진위원회 본부를 두고 있었던 태허스님은 손문대통령과의 면담을 청원, 비서실장 마군무와 만나 불교협진회의 창설을 이미 허가 받고 있었던 것이다.
태허스님은 인산스님을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진강(鎭江)의 금산사에서 불교협진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는 금산사 총림의 방장 청권스님을 비롯한 간부스님들과 남경, 양주, 상해, 진강 등지의 승려 및 신도들 2, 3백 명이 참여했었다. 또 진강의 군사, 정치, 상업, 학계인사들을 비롯한 내빈 3, 4백 명도 참석했었다.
창립총회의장으로 추대 받은 태허스님은 창립 취지사를 통하여 혁명을 맞이하고 있는 중국에서 억압당해 왔었던 불교계도 혁신하여 중흥을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협진회를 통하여 불교의 혁신과 중흥을 이룩할 것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승가제도의 혁신, 사찰재산관리의 개혁, 불교교육제도의 개혁을 역설했다. 그는 이어 창립선언문과 회칙 등을 제의했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인순스님이 열렬한 찬동발언을 한 후 사건은 터진 것이다. 승가학창시절부터 인순스님과 잘못 지내왔었던 양주의 적산스님이 인순스님의 불교혁신정책지지 발언에 대하여 심한 반대 발언을 하게 되면서 개혁지지파와 반대보수파간의 고성들이 오고가는 난장판이 벌어지게 되었다. 적산스님의 비판발언에 격분한 인산스님이 다시 등단, 방장 청권스님과 적산스님의 전제적인 사찰운영에 대하여 통렬히 비판하고 혁명적인 승려들과 신도들이 금산사를 접수하여 승가제도를 혁신하고, 절 공간을 학당으로 개조하며, 사찰부동산을 팔아 학비로 충당할 것을 전격적으로 제의했다.
이 제의는 찬반의 일대소동이 벌어진 후 혁신파들이 전략우세로 통과되어버린 것이다. 총회는 태허스님과 인산스님을 금산사 접수책임자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태허스님측은 총회 후 수적으로 우세한 동지들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무난히 접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사건이 터진다. 마침 태허스님이 남경 비로사로 돌아가고 인산스님 등이 동지들과 함께 금산사를 지키고 있을 때 절을 빼앗겼던 간부스님들이 수십 명의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절간으로 난입, 난타전 끝에 인산스님 등을 칼질하고 곤봉으로 후려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칼질사건은 법원에 기소되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한 달간이나 끈 재판 끝에 이 사건을 주도한 청권 방장스님과 상정스님 등 5-6명이 수개월 내지 수년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금산사의 사찰운영과 불교협진회의 진행도 동시에 정지되고 말았다.
불교협진회의 창립발의와 금산사의 칼질사건으로 태허스님은 영광과 수난을 동시에 갖게 된다. 즉 태허스님은 중국불교혁신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지만, 그 방법의 과격성으로 인하여 보수파들의 증오와 반격을 오랫동안 받아내야만 했었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태허스님은 나중에 동지 여대임스님과 사간스님 등이 보수파에게 피살당하는 아픔도 겪어야했다.
금산사사건 직후에 상해에서 열린 중화불교총회에서 태허스님에게 불교협진회의 진행을 정지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하여 불교협진회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태허스님은 중국불교 중흥을 위한 혁신사업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태허스님은 상해중화불교총회에서 뿐만 아니라 그 후 여러 회의에서도 중국불교 3대혁명론을 끊임없이 외치고 또 실천했다.
태허스님은 첫째로 조직혁명론을 부르짖으면서 불교가 조직적으로 거듭나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불교대동회」,「불교홍서회」,「불교유지동맹회」,「불교정신회」,「금만자회」,「지역불교회」,「법원」등 조직사업을 끊임없이 해 나갔다. 태허스님은 중국불교혁명을 이룩하자면 2천여 년 이상 굳어온 승사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혁명적 승단의 조직으로 이상적 교단과 이상적 불교사회의 건설을 이룩해 보려고 평생을 노력했었다.
태허스님은 둘째로 재산혁명론을 강조했다. 그는 불교의 각 종파가 가진 재산은 중국전체불교의 공동재산으로 되어 전체불교의 공동적인 발전과 이익을 위해 운용되어야 하며 각 사찰재산은 승속공유로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찰재산이 국민교육과 복지 등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주지로 가는 사찰과 인연 맺은 지역마다에 불교대학, 고아원, 양로원 등을 세우게 된다. 남경법상대학, 세계불학원, 세계불화대학 등의 창설, 영파고아원, 장사고아원 설립 등은 그 좋은 예들이다.
셋째로 태허스님은 불교학리혁명론을 부르짖었다. 그는 중국불교의 8대사명론을 제시하면서 ⅰ) 중국불교가 당면해 있는 불교의 썩은 습기를 없애고, ⅱ) 비종교적 요소를 뿌리뽑으며, ⅲ) 불교에 들어와 있는 일체의 귀신들을 추방하고, ⅳ) 일체의 우상 숭배적인 저속성을 타파하며, ⅴ) 물질미망 등을 분쇄하는 등 8가지 사명을 완수하여 학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끊임없는 강의와 강연, 집필과 저술작업을 강행했다. 그의 왕성한 출판활동과 광대한 저술은 이 같은 노력의 실천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중화불교총회의「불교월보」창간과 총편집장 취임을 전후로 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잡지출판활동은「양심월보」창간발행, 출판사「각사」의 창설과「각사총서」의 발간, 잡지「해조음」의 발행 등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태허스님은 이미 40세가 되기 전에「감문불학총보」,「불법도론」,「불법대계」, 「각사총서」등의 대작들의 출판과 「인승정법론」,「불교쇠락원인론」,「정리승가제도론」, 「수능엄경섭론」,「성대성론」,「법계론」,「삼명론」,「유물과학과 유심종학」,「대승기신론략석」,「유마힐경석」등 수많은 저술을 하여 학리혁명에 이바지했다.
② 세계를 일찍 둘러본 행운
태허스님의 일생에 있어서 그가 중국국부로 존경을 받고 있었던 손문과 그의 후계자로 성장하고 있었던 장개석총사령으로부터 모두 인정을 받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태허스님은 그가 중국사회당의 당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 만든 「신사회당」의 거물급 창당멤버의 한사람이었다는 혁명적 승려로서 첫 시기의 청년시대에는 좌우합작노선의 진보적인 손문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아 큰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시인이기도 했었던 태허스님은 28세 때 손문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와의 만남을 기념하여 시를 써바치기도 했었다. 중년시대를 맞아서는 손문의 후계자로서 진보적 인사들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보수적인 장개석총사령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되어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총통과는 여러 번 만났다. 이 같은 두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나중에 모택동의 중국과 장개석의 대만이 모두 태허스님을 두 중국현대불교의 창시자로 높이 받들게 된 단초로 된 것이다.
태허스님은 이들 지도자들의 후원으로 1917년, 29세 때 동지들을 이끌고 대만과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중국승려방문단을 단장으로서 대만각지를 방문하면서 대만출신의 승려들과 대만으로 진출해 있는 일본불교의 지도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곳곳에서 강연과 설법을 했다. 그는 이어 일본을 방문, 쿄오또, 오사카, 코오베 등지를 돌면서 진언종의 권전승정을 비롯한 일본불교지도자들과의 교류를 넓혔다. 그는 방문지마다에서 사찰과 불교연구소 등에서 강연을 했다. 또 대곡, 용곡, 입정, 임제대학 등 불교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대학들을 일일이 방문, 불학대강연을 갖기도 했다.
1928년, 40세 때에는 장개석총사령으로부터 3천원의 거금을 희사 받아 대규모 승려방문단을 이끌고 유럽을 방문했다. 이 방문단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영국, 이태리 등을 방문했었다. 태허스님은 방문지마다에서 그곳 불교계의 지도자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유명대학들에서 불교대강연을 했다. 당시 유럽은 동양사상과 특히 불교에 대한 연구열이 처음으로 치솟고 있는 때여서 태허스님의 강연은 큰 관심과 인기를 몰았었다.
태허스님은 이 같은 외유를 통해서 중국불교혁명과 현대화의 꿈을 더욱 가다듬을 수 있었으며, 그의 불교사상을 세계적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펼 수가 있었다. 그는 중국에 돌아와서 「세계불학원」을 세우고 원장으로 취임한 후 이를 「세계불화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또 「중국불학회」를 창립, 중국승려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하면서 중국불교의 세계화를 준비했다. 그는 1923년에 「세계불교연합회」를 발기, 1924년 무한에서 세계불교연합회 제1차 대회라는 명분으로 「동아불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당초 세계적인 것으로 계획되었으나 일본과 대만에서만 정식대표단이 참석했고, 유럽에서는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만 소수가 개인자격으로 참석하여 「동아불교대회」로 그 명칭이 바뀌어졌었다. 태허스님은 이 대회 개최 후 세계적으로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는 불교적인 국제조직의 탄생과 확장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게 된다.
태허스님은 이와 함께 「불법구세주의(佛法救世主義)」를 편술 하여 불교로서 세상을 구원하자는 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는 「각세구인(覺世救人)」과 「홍법이인(弘法利人)」의 불법을 펴면서 불법은 이 세계를 구원하는 구세법이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태허스님은 이어서 「건설인간정토론」을 저술, 세계불교연합의 국제조직을 창설하여 세계를 정토화하면서 우선 세계의 1개 지역에 「불화정토특구」를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우선 중국불교가 이에 앞장을 서자면서 그 추진체인 「불법승원(佛法僧園)」 창설과 「법원(法苑)」설치운동을 벌렸다. 「불법승원」은 혁신승려들의 사찰건립운동을 말하고 「법원」은 승속이 불법으로 함께 사는 정토마을 건설을 말한다.「법원」설립식은 1927년 2월 2일, 음력원단의 날을 기하여 상해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법원」설립식에는 태허스님의 가까운 동지들인 장태염, 왕일정, 사주진, 왕삼포, 진유동스님 등 다수가 참석했었다. 이 「법원」은 태허스님이 이미 저술한 바 있는 「정리승가제도론」에 따른 것으로 새로운 승려 및 불자양성, 정토적 사원창설, 신행일치의 불법 수행, 보살행적 중생구제 등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조직과 이론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③ "인간불교"의 창시
태허스님은 1928년, 40세가 되면서 드디어 [인간불교]를 창시하게 된다. 태허스님은 이 해 4월에 「중국불교혁명승려로서의 교훈」과 「나의 불교개진운동약사」를 저술하면서 불교혁명의 한 방안으로 [인간불교]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처음에 [인간불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인생불교(人生佛敎)]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후 [인간불교]로 바꾸어 불렀다.
태허스님은 위의 저술들에서 중국의 혁명적 승가와 불교사회를 건설하려면 보살적인 [인생불교]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생불교]의 실시는 [열 가지의 선(十善)]이 국민들의 풍속으로 되고 보살적인 인간들의 세상을 탄생케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태허스님은 상해의 한 절약근검저축회의 요청으로 갖게 된 불법강좌를 통해 구체적으로 [인생불교[에 대하여 논하기 시작했다. 그는 불법은 일체의 유정을 위해서 있는 것이므로 현대의 문화에 적응하여 인류를 위한 시기 적절한 불학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오늘의 불학이란 것이 [인생불교]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인생불교]는 ⅰ) 인간의 생사존망을 떠난 것이 아니라 현대의 현실적 인생에 밀착된 것으로 인간의 생존과 발달을 중심으로 삼는 불학이고, ⅱ) 무아적인 개인해탈의 소승학이 아니라 인간조직에 밀착된 중생적인 것으로 중생을 일으켜 세우는 대승적 불학이며, ⅲ) 모든 유정들을 성불시키는 궁극적 원만법인 불법을 경험과 질서와 증거를 중시하는 과학에 밀착시킨 원만점진의 대승법적 불학이라고 설명했다.
태허스님은 이 같은 불법강좌를 한 후 남경으로 내려와서 장개석총사령부를 방문, 장총사령에게 인사를 하고 그 다음날 담화를 발표했다. 태허스님은 그 담화를 통하여 불교는 세계인류를 위한 최고 이상을 표현한 것이며, 세상을 구하는 그 높은 정신은 다른 학술종교에서는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불교가 시대사조에 적응하고 국민생활에 맞추어 승속통일로서 [인간불교]로 유신을 해 나간다면 국민을 인도하고 국가를 부상시키고 정치와 풍속을 아름답게 만들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하여 장개석총사령이 지지 찬동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태허스님의 [인간불교]는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계속>
김운하(법사. 나성한미불교봉사회소장)
첫댓글 태허대사님에 대한 귀한 소개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