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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k라 불리는 폴란드산 원시 말 두 마리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장면 |
이 키 작은 서부초원지대의 말은 훈족이 4세기와 5세기에 정착한 이래 이 지역의 말떼로서 주종을 이루었다. 베제티우스, 그의 역작 Mulomedicina에서 훈족의 말들을 단단한 추위와 서리에 익숙하며, 수명이 긴 동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거대한 굽어진 머리, 툭 튀어나온 눈, 좁은 콧등, 넓은 턱, 강하고 뻣뻣한 목, 무릎 아래로 늘어진 갈기, 지나치게 큰 갈비, 굽은 등, 텁수룩한 꼬리, 아주 강한 정강이뼈, 작은 발목, 넓게 펴진 발굽, 좁은 허리부분을 가졌다. 그들의 몸은 각이 져 있고, 엉치에 지방이 없거나, 등의 근육을 가진, 키 쪽으로 라기보다는 길이 쪽으로 늘어져 있는 그들의 몸매, 배의 쳐짐, 거대한 뼈를 가졌다. 베제티우스에 따르면, 그들은 못생긴 면에서는 얇고 아름다웠다. 그는 또한 그 말들은 조용하고 민감하며 강인하다고 기술하였다.
몽골인 같은 초기 초원 종족이 거느린 말떼에는 덜 다양한 유전적 풀이 있었다. 프르제발스키( Przewalski) 라고 알려진 야생 몽골말들은 초기 몽고말떼의 주요 원천이었다. 프르제발스키 말들은 야생마종인 Equus Ferus의 학명에 속하지만 하위 종이었다. 20세기 초의 동물학자와 자연학자의 노력은 1881년 러시아 탐험대장 니콜라이에 의하여 재발견된 이후 Przewalski말을 멸종으로부터 구하였다. Przewalski의 발견 전에 쇠퇴 하던 타르판 종을 구하지 못한 실패는 오히려 고대 야생말의 지속을 구하는 욕망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Przewalski말은 비록 보다 작고 보다 강인한 목과 똑 바로선 갈기와 낮게 위치한 꼬리를 가졌지만 길들여진 말과 닮았다. 대부분 보통색상은 검은 모래색, 회갈색, 붉으스레한 월계수색 이다. 말들은 등줄, 어깨 줄, 다리에 가로줄을 가졌고, 그들의 주둥이와 배에 가벼운 색상을 가졌다. Przewalski말은 평균적으로 12내지 14뼘정도로 작다.
이들 말들은 일단 몽골족에게 포획되고 길들여지면 사실상 몽골족에 의해 소유된 다른 길들여진 만들과 혼합되었다. 야생말(66개 염색체)은 다 큰 길들여진 말들과 성공적으로 교배되었지만 1세대 후에 야생종의 특별한 염색체 특성은 길들여진 말(64개 염색체)의 특성에 의하여 후손에게서는 사라졌다. 여전히 도출된 길들여진 말, 몽골말은 스태미나와 인내를 포함한 Przewalski말의 많은 육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몽골말의 최고 우수성은 그들의 탑재된 교배를 향상시키는 것에 있다. 1215년에 베이징 점령 후에 몽골족은 몽골기병의 저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왕실 말떼를 사용하였다. 중국 황실 말의 최고는 Fergana(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주의 주도로 Ferghana라고도 씀. 즉페르가나 계곡 남부 알라이 산맥 기슭을 의미한다.)말이었다. 그것은 중국이 오늘날 키르키즈스탄 지역에 살고 있는 터어키 초원종족에게서 포획한 것이었다. Fergana 말은 키가 16뼘이고 몽골말보다 현저히 컸다.
이들 황실 말은 중앙아시아 말 타입에 연결되었다. 페르시아의 성공적 정복과 중앙아시아로의 깊숙한 관통으로 오고데이 칸은 서쪽교배종인 긴 목을 가진 키 큰말이 섬눌로 몽골에 보내지도록 요구하였다. Khwarazm(호라즘) 제국(제국은 아무다리야 강(江) 하류 유역, 지금의 히바에 있었던 국가(1077년~1231년)이다.)에 대항한 몽골의 원정 동안, 그들은 대량으로 이 타입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유지되는 군대말떼에 병합되었다. 고대사적인 발굴에 기초하여 13세기의 원정에 사용된 말들은 평균 오늘날 통상의 15뼘 키나 16를 가진 몽골말보다 오히려 키가 한 뼘 컸다.
오리지날 말떼 구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초원종족의 지리적인 범위와 그들의 고품질 말에 대한 애착은 다양한 떼의 창조를 초래하였다. 초원군대의 말 유형은 초원 종족사람들에 의해 실행된 기마전쟁에선 절대적으로 필수적이었다. 말은 쉽게 유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고, 말하자면 아주 다양한 저 품질 음식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초기 몽골 기마는 단지 초지위에 존재하였지만, 나중에 중국 정복후에는 몽골군대는 사료와 곡물을 승마에 제공하였다. 말들은 예외적으로 인내력 있는 발을 가져야 했다. 말의 신발은 결코 초원종족에게는 일반적인 사용이 아니었다. 말굽의 물류는 초원 군대에는 관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원 말들은 매우 순종적이었다. 몽골족도 훈족도 박차를 사용하지 않았다. 양 종족은 대신에 말을 가속하기 위하여 채찍을 사용하였다. 몽골말은 행진 중 대오에서 지정된 기수를 따르도록 훈련되었다. 기수는 말을 부름과 호각에 대답하도록 훈련하였다. 말들은 행군 중 서로 묶지 않았다. 말들은 육체적으로 강인하였다. 겨울이 초원 전사들이 선호한 전쟁기간이었기 때문에 말들은 큰 온도변화 특히 추위에 견딜 수 있어야 했다.
초원말의 중요한 특성중 하나는 겨울에도 풀을 찾아내는 능력이었다. 13세기 몽골왕에게 보낸 교황의 사절단인 지오반니 디 플라노 카르피니는 이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가 거기(키에프)에 도달했을 때, 천부장(몽골 장교)과 거기 있던 다른 귀족들과 행로에 관하여 상의하였다. 그들은 만약 우리가 타르타르 지역으로 우리가 가지고 온 말을 이끌고 간다면, 우리 말들이 타르타르 말들처럼 깊은 눈 속에서 어떻게 풀을 파내는 지 모르고, 타르타르인들에게는 짚이나, 마른 풀, 사료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먹을 것을 찾아내지 못하여 결국은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논하였고, 두 소년에게 우리말을 돌보는 두 소년에게 말들을 멀리 좆아 보내라고 말하였다.”
그만큼 한 겨울에도 풀을 찾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말의 큰 수량과 그들의 중요성 때문에 초원 종족들은 말에 가족, 씨족, 종족을 나타내는 표식을 하였다. 그 표식은 귀를 자를 표식이나 또는 뜨거운 철로 어깨나 뒷다리에 표식을 하였다. 사르마트인(흑해 북부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말들을 표식 하였던 최초의 종족이었다. 흑해 북부평원을 500년간 지배한 사르마트.
로마제국이 발칸과 소아시아까지 세력권에 넣었을 즈음 남러시아 평원과 우크라이나 스텝지대에는 스키타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사르마트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 즈음부터 사르마트는 흑해 북부지역을 500년간 이들이 지배한다. 기원전 500년 경부터 동쪽에서 남러시아로 진입한 이들이 남긴 묘지를 발굴해보니 여러 여제후와 여전사들이 매장되어 있었는데 동시대의 남자들 것보다 더 많은 장신구와 무기들이 부장되어 있었고 그리스 작가들의 수많은 기록에도 여전사 아마존족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들이 아마존 여전사 전설의 실제모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영화로 본 아마조네스. 그들을 말한다.
스키타이와 마찬가지로 북부이란계 아리아인인 사르마트족은 기원전 500년 이전에 인구가 밀집한 아랄해 남부지역을 떠나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한다. 기원전 4세기에 볼가강과 돈강 사이에 있었고 기원전 250년 경에는 자신들의 먼 친척인 스키타이족과 전쟁을 하면서 드니에프르강을 건넌다. 이렇게 하여 이 지역을 약 500년간 지배하게 된다.
초기의 사르마트족의 젊은 여성들은 말을 타고 남성들과 동등하게 사냥하고 전투를 하였고 젊은 여성은 전투에서 한 명의 적은 자기손으로 죽여야 비로소 결혼이 허용되었고 나이가 들면 여제후와 여사제로서 남자들보다 우월적인 지위에 있었다. 쇳조각을 연결한 갑옷을 입고 밀집편대를 이루어 창을 수평으로 하여 돌진하는 전투방법을 쓰기 시작하면서 남성에 비해 힘이 약하고 작은 여성들의 전투참여가 점차 줄어들고 여성들의 지위도 약해진다.
기원전후의 시기에 이들은 도나우강 하류까지 가축을 몰고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보호령이 된 옛 그리스 식민도시에 쳐들어가기도 했고 옛 지배자인 스키타이인들을 정복하고는 노예로 만든다. 도나우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의 영내로 들어간다. 로마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로마인의 용병부대가 되기도 한다. 라인강 동안의 산악지대, 이탈리아 북부, 브리튼섬 등 여러 곳에 배치되면서 토착민과 융합된다.
기원후 4세기에 훈족이 유럽을 흔들면서 사르마트의 이름은 사라져 간다. 그러나 역사는 사르마트족의 한 부족인 알란족에게 운명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기원 원년경에 알란족은 카스피해 북안에 있던 사르마트족의 작은 부족이었다가 그곳의 사르마트 제부족과 스키타이족 그리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여러 부족을 지배하게 된다.
기원후 4세기에 훈족의 서진으로 알란족이 서쪽으로 내쳐지게 된다. 일부는 훈족의 동맹군이 되었고 나머지는 서고트 및 다른 게르만족들과 한 편이 된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북서쪽으로부터 남러시아 스텝지대로 이주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물러서게 된 것이다. 알란족은 이후 375년부터 450년까지 있었던 게르만족 대이동에 참여한다.
알란족은 훈족을 피해 반달족과 함께 405년에 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던 지역을 가로질러 남하한 후, 406년에는 갈리아를 관통하고, 417년에는 스페인을 가로질러서 429년에는 배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다. 반달족과 함께 로마의 카르타고를 정복해 그곳에 정착한다. 수백 년 후인 5세기말에 비잔틴제국의 침입으로 이들은 반달족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북부이란 출신의 한 종족이 겪은 머나먼 노정이었다.
알란인들과 몽골인들도 역시 말 표식을 사용하였다. 그 행위가 다른 초원 종족들에서도 잘 형성되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훈족도 역시 그들 말에 표식을 하였다고 믿는다. 그 증거는 최초의 훈족 전쟁 말은 거세 말이었다. 거세도 군대가 말과 기수에게 훈련으로 상을 내린 것이었기 때문에 역시 몽골군에게서 선호되었다. 암말은 말 젖 때문에 말 떼속에 포함되었다.
몽골군 안에서 훈련은 ‘야사’속에 법제화 되었다. 말떼와 사육이 중심적으로 통제되었다. 최고의 말을 제외한 망아지들은 거세되었다. 말들은 2살에 거세되었지만, 5살 때까지는 전쟁용으로 준비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종마는 통제하기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전쟁에 사용되지 않았다. 말 관리를 강화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징기스칸은 거세 감독관과 말떼감독관을 세웠다. 이 위치는 고참 군사지휘관 중에서 따로 지명되었다.
초원 종족들은 세상에 알려진 아마도 가장 은택을 입은 말소유자들이었다. 시도니우스는 훈족의 마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말이 아이를 등에 태울 때마다, 어머니의 도움 없이 말위에 서는 것을 배워 왔다. 그 사람들은 사람과 말의 갈빗대가 함께 태어났으므로 확실히 기수는 항상 말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민족이 말 등에 짐을 나른 반면에 이 민족은 말위에 산다.” 모든 초원 종족은 이 기술을 공유했다. 그것은 그들의 생존과 그들의 군사적 성공에 결부되어 있었다.
몽골인들은 어린애들은 세 살 때에 말위에 앉혔고, 다섯 살 때 까지 활로 무장시켰다. 그들의 주된 마술교관은 그들의 어머니였다. 안장의 개념은 초원 종족에게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초원은 최초의 안장틀을 생산하였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특별히 아틸라가 로마인들이 그를 451년에 포위하였을 때 불을 놓으려고 했었던 말 안장의 장작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아틸라(Attila)는 5세기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인물로 훈 족의 왕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유럽 역사에서 사악하고 무자비한 악당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는 유럽 인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인들에 대한 맹신적인 우월감과 터무니없는 무지가 작용했다.
당시 훈 제국은 현재의 독일에서 이란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며 서로마, 동로마, 페르시아라는 3개의 거대한 제국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왕국 안에는 훈 족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여 있었다. 훈 족의 왕들은 단순히 흉포한 야만성만을 앞세워 이 지역을 정복하고 약탈하는 것으로 임무를 끝낸 것이 아니라 이 다양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왕국은 아틸라 시절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사악하고 무지한 악당이 아니라 '현군(賢君)'으로 분류해야 하는 통치자였다. 14-15세기의 유목민묘지에서 나타난 고대학적 증거는 훈족의 안장은 똑바른 수직 안마이며, 등 뒤로 기울어진 약간 더 높은 안마로 묘사한다. 훈족은 그들과 싸웠던 로마인 뿐 만아니라 게르만종족 또한 이러한 혁신을 본뜨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등자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5-6세기 초원에서 나타난 등자는 나무나 쇠로 만들어졌으며 동그랬다.
초원종족인 알란인들이 6-7세기에 유럽인들의 주의를 끌었던 등자를 가져다 주었다. 몽골안장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아마도 궁술에 도움이 되었던 매우 높은 평평한 안장 그리고 비슷하게 높은 안마를 가졌다. 그 안장은 안정된 좌석, 기갑틈새를 준 중요한 협곡을 제공하였다. 등자 가죽은 가운데 놓였고 기수에게 균형 잡힌 위치를 갖게 하였다. 두꺼운 천 조각이 나무와 가죽안장과 말 사이에 놓였다.
초원 궁수는 짧은 등자를 가지고 탔다. 프랑스 여행가인 보플랜은 17세기에 크리미아반도 타르타르 마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 그들은 말을 탈 때 솜씨 있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다리를 접고 매우 낮게 올라탔기 때문에 거의 앉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그레이하운드에 탄 원숭이처럼 말위에 탄다.” 유럽인들은 17세기에 초원사람들이 가졌던 균형된 좌석이 중세시대의 그것 보다 더 좋았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몽골기병은 재갈은 선호하였지만, 그들이 사용한 재갈은 대다수의 재갈 보다 더 엄격하게 된 매우 얇은 것이었다. 몽골굴레의 독특한 모습은 재갈 끈이 뺨 조각에 연결되었고, 턱 줄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 재갈 끈 굴레와 유사했다. 그것은 말의 입을 닫게 하였고, 그래서 재갈을 피하지 못하게 하였다. 몽골 인들은 말의 통제를 가치 있게 하였다. 통제는 말이 말과 궁수의 포메이션이라는 복잡 미묘한 기술을 수행하기 위하여 말을 훈련시키는데 필수적이었다.
초원 말은 태생적으로 기민한 말은 아니었다. 앞다리에 무게중심을 놓고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고 약한 하체를 가졌다. 그러한 체형은 빨리 회전하고 가속하지 못하게 하였다. 몽골인들은 원위에서 훈련시킴으로써 구조적 결함을 보정하였다. 이것은 말에게 그 자신을 더욱 균형 잡힌 매너로 움직이도록 하였으며 하체를 강화시켰다. 이 훈련법은 마르코폴로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들의 말들은 너무 잘 훈련되어서 그들이 개처럼 재빠르게 회전할 수 있다.”
초원 전사들은 글자 그대로 말위에서 살 수 있었다. 동로마 역사가인 조시무스는 6세기 초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말위에서 살고 잔다“ 몽골기병은 그들의 말위에 자신과 배급품을 날랐다. 그들은 암말의 젖을 가죽주머니에 부었는데 거기서 치즈로 응고되었다. 그들은 소금물로 말고기를 절여서 그것을 육포로 안장아래 가지고 다녔다. 한 유럽인 관측자는 정도에 벗어나게 몽골군대의 호전성과 야만성에 대하여 기술했는데 혹독한 상황 하에서 몽골기병대는 말의 피를 마심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목에서 이러한 목적으로 작은 조각과 흐른 피를 만들었다. 초원 전사들, 최초의 위대한 초원종족은 스키타이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원전 700년에 이미 초원을 누볐다. 그 다음은 과연 누구 차지였을까. 초기 종족에서 훈족에 이르는 그들을 우선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