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린 것을.....
증언자 : 박기현(남)/ 박동연(아버지), 이정애(어머니)
생년월일 : (당시 나이 15세)
직 업 : 중학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9
개 요
동신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기현은 1980년 5월 20일 오후 7시경 계림파출소 앞에서 공수부대원의 곤봉에 맞아 사망했다.
공부 잘하고 순박하던 기현이
당시 동신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기현은 아버지 박동연 씨, 어머니 이정애 씨와 함께 광주시 산수동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그만 복덕방을 하고 있었으나 수입이 신통치 않아 3백만 원 정도의 전셋집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순박한 그의 아들 기현이와 더불어 화목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5월 18일 기현이의 어머니는 대전의 친정 동생이 수술을 한다고 해서 대전에 가고 없었고, 기현이는 수학여행에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날 계엄령은 전에 확대되었고, 광주는 시위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군인들이 학생, 시민들을 쫓아가고 닥치는대로 붙잡아가는 것을 본 기현이 아버지는 '저것이 웬 난리냐'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희생이 적고 빨리 사태가 가라앉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한편 5월 15일 수학여행을 가서 오늘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던 기현이가 은근히 걱정되기도 하였다. 기현이는 계엄으로 인해 9시부터 발표된 통행금지가 지나서야 광주에 느지막히 도착했다. 그렇지만 기현이는 군인들로부터 통행허가증을 받고서야 비로소 집에 올 수 있었다. 기현이가 부모님의 선물을 사들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 동연 씨의 마음은 뭉클했다. 아버지로서는 뒤늦게 태어난 막내 기현이를 특히 애지중지하기도 했지만 기현이 역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성장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더하게 했다. 이런 기현이가 난리통에 집에까지 온 것 만도 기특한데 여행갔다 왔다고 선물까지 사오니 아버지로서는 "이놈이 벌써 이 만큼 컸나" 하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5월 20일 오후까지 기현이는 학교도 임시휴교 상태였고 아버지의 당부도 있어서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 오후 TV를 보던 기현이는 방송국이 불타고 TV가 꺼지자 잠시 뭔가를 하는 듯하더니 7시경 아버지에게 공부할 책을 사오겠다고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나가지 말고 책은 나중에 사라고 했으나 집에만 있어서 좀 지루해진 듯한 기현이가 재차 책 사오기를 요청하자 허락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제 중학생이고 평소에 싸움구경도 별로 하지 않는 기현이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온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다. 기현이는 자전거를 타고 계림동 오거리 쪽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간 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9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아버지는 기현이를 찾으러 나섰다. 그날 밤과 21일 종일토록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소문도 들어보고 도청, 학동, 공수부대가 시체를 매장했다는 조선대 뒷산 등을 찾아 헤매기도 했지만 기현이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우리 기현이가
대전에 있었던 기현의 어머니가 광주의 소식을 들은 것은 21일 새벽이 되어서였다. 곳곳을 찾아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현이 아버지는 대전의 기현이 어머니에게 전화할 염두도 못 내고 있었지만 건넌방의 아주머니가 그때 처음으로 연락을 취한 것이다. 기현이 어머니는 건넌방 아주머니가 "광주가 시끄러워요. 데모가 나서요"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 데모란 것이 계엄 이전의 데모 정도로 밖에는 상상되지 않았다. 광주는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설혹 데모가 있었고 아들이 없어졌다 해도 이제 중학교 3학년의 철없는 아들과 데모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어쩔라디야' 하는 생각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길로 대전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마침 광주행 첫 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버스는 광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아마 버스가 장성이나 정읍쯤 왔을 때일 것이다. 맞은편에서 버스 한 대가 기사와 안내양만 탄 채 다가왔다.
그 버스의 기사는 '지금 광주에 난리가 나서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며 돌아가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불안감과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고 버스는 갔다. 도중에 혼자 내린 기현이 어머니는 마음이 '쿵' 내려앉은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도 없었고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안내양이 가르쳐준 대로 근처의 기차역을 향했다. 신발도 벗어든 채로 부랴부랴 기차역을 향해 달려갔으나 마음은 더욱 바빴다. 거기가 무슨 역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가까스로 역에 도착했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버스가 불통인지라 기차역은 광주로 가려는 사람들로 더욱 붐비는 듯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옆에 있던 한 군인에게 "우리 집이 광준디, 데모가 났당께. 내 새끼들이 어쩐가 모르것소. 빨리 좀 가야것는디 표 좀 끊어주시오" 하고 사정하자 그 군인이 황급히 인파를 헤치고 표를 구해다 주었다.
간신히 기차에 올라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광주에서의 일을 화제로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죽고..."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들은 어린께 괜찮을 거요"라고 앞좌석의 한 사람이 위로조로 말을 건네왔으나, 아침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기현이 어머니는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윽고 기차는 송정리 역에 도착했다. 급히 택시를 잡아탄 이정애 씨는 상무대 근처에서 또 한 번 제지를 받았다. 거기는 군인들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어서 교통이 두절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택시에서 내려 우선 전화부터 하려 했으나 가게가 모두 닫혀 있어서 겨우 한 가정집에 들어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아직도 기현이 아버지는 기현이를 찾으러 다니느라 들어오지 않았고 이웃 사람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빌려준 집주인에게 감사의 표시로 대전의 기현이 이모가 기현이 주라고 싸준 딸기를 조금 내놓고 밖으로 나온 기현이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인도로 샛길을 통해서 겨우 집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발바닥은 유리조각이 박히고 피가 흐른 채로 한나절이 걸려서 간신히 집에 도착한 것이다. 아직도 집에는 이웃 사람들뿐이었고 아들 기현이의 책만 여전히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기현이 아버지는 온몸이 긁히고 시커멓게 그을려서 돌아왔다. 아직도 아들 기현이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22일 아침 이웃 사람들로부터 병원에 가면 시체가 많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현이 아버지는 곧바로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찾아갔다. 먼저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는 머리가 깨진 사람, 총에 맞은 사람 등 많은 부상자들이 있었으나 기현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30여구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첫눈에 기현이의 교복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현이의 몸은 머리 부분만 천으로 가려진 채 아랫부분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얼른 천을 떠들어보니 지금까지 찾아헤매던 기현이가 분명했다. 가슴이 미어져왔으나, 우선 집으로 전화를 했다.
기현이 어머니와 친척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때까지도 기현이가 살아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기현이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영안실에 들어와서 죽어 있는 기현이를 보게 되었다. 기현이의 가냘픈 몸은 영안실 바닥에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머리에는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으나 여기저기가 퍼렇게 멍든 것으로 보아 곤봉에 맞아 뇌진탕을 일으킨 듯 했다.
기현이 어머니는 "기현아!" 하고 부르며 기현이 얼굴을 비비면서 목놓아 울 수 밖에 없었다. 어찌나 경황이 없었던지 누군가가 가르쳐줘서야 자신이 다른 시체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들만 보니라고 정신이 없었어" 기현이 어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며 한숨짓기도 했다.
"흐유, 그런 일도 있어, 못 따라 죽은께 살제......"
묘지번호 1번
훗날 이웃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날, 20일 7시경 기현이가 계림파출소 쪽으로 향할 때, 그곳은 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가 계엄군이 막 밀고 들어왔을 때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본 계엄군이 기현이를 향해 돌진해 왔다. 놀란 기현이가 "나 동신중 3학년 학생이오. 데모 안 해요" 하는 외침을 듣고 주위 사람들이 그쪽을 보았을 때 계엄군의 곤봉은 사정 없이 기현이를 향해 내리쳤다. 기현이는 그자리에서 죽었고 시체는 누군가에 의 해 대인동 고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전남대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
"딱 한 번 나간 것이 그런 일을 당했어. 또 걸어만 갔어도 안 죽었을 것인디, 자전거 타고 강께 어디 연락하러 간다고 생각했는가도 몰라, 아무리 그래도 어린 것인디..." 하며 아버지 박동연 씨가 눈시울을 적신다.
기현이의 가족, 친척들은 다른 옷을 구할 수가 없어서 미리 맞추어 두었던 교복(하복)을 입혔다.
"옷을 갈아입힐라고 입고 있던 옷을 칼로 찢어봉께 피는 안 나도 머리랑 목 근처가 시푸래. 곤봉으로 얼마나 때렸는갑서. 또 아랫도리도 질질 끌고 다녔는가 시푸렇드랑께."라고 어머니 이정애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기현이 아버지의 계원들이 관을 사왔고 거기 있는 시체 가운데서 제일 먼저 입관을 마쳤다. 기현이 어머니가 반쯤 혼절해서 동네 아주머니들에 이끌려 집으로 갔을 때, 한 청년이 기현이 아버지에게 다가와서 "입관된 사람은 도청으로 모셨다가 함께 장례를 치르자"고 말했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기현이 아버지와 몇 안 되는 관은 다시 상무관으로 옮겨졌다(관번호 1번).
그날 이후로 기현이 아버지는 아예 상무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현이 어머니도 날마다 상무관을 오가며 그저 기현의 관을 붙들고 울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묵념을 하고 갔다. 동신중학교 선생님과 학생들도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어린 넋을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현이는 이미 죽었다.
"당해 봐야 알제. 그때는 교복 입은 사람만 봐도 쫓아가 보고 그랬당께. 우리만 그랬으까만, 다 똑같은 일을 당했어도 내 자식 생각만 나서..." 하며 기현이 어머니는 울먹이기도 했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주해 들어왔고, 오후에 군인, 의사 등의 입회하에 상무관에 있는 시체의 검시작업이 시작됐다. 이 검시작업은 몇 구에 그쳤으나, 기현이의 관번호가 1번이어서 기현이의 부모들은 검시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관을 열었을 때 기현이는 눈알이 두 개 모두 빠져 있고, 혀가 한 뼘이나 나왔고 그때부터 이상하게 피가 흘러내렸다.
"널은 안 끄르고 그냥 그대로 묻었으면 안 보고 몰랐을 것인디 끌러갖고 그 처참한 것을 봤어. 으매 세상에 내 새끼가... 지금도 그 문둥이들을 갈아마셔도 분이 안풀리것어."
어머니 이정애 씨가 몸서리를 쳤다.
28일은 상무관 출입이 유가족들에게도 불허됐고 기현이의 부모는 상무관 밖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29일 시에서 유해를 운구한다는 말을 듣고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서 친척들과 함께 망월동으로 향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유해가 도착하자 간단한 절차를 밟고 기현이를 안치했다.
삼오제 때인가는 기현이 물건들을 망월동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옷가지 몇 벌과 다른 물건들을 불태울 때, 기현이가 그동안 받은 우등상, 개근상 등의 상장들도 함께 태워졌다. 지금은 유족회장인 전계량 씨가 곁에 있다가 "나도 자식이 죽었지만 저 상장들을 보니 아이가 너무 아깝다"며 애도해서 기현이 부모의 착잡한 심회를 더하게 하기도 했다.
그해 6월 6일 첫 유족회가 결성되어 박찬봉 씨가 회장으로 선출되고 전계량 씨가 총무가 되었을 때 박동연 씨는 재무를 담당하기도 했고 그 후로도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가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언뜻 내던지는 말 한 마디 속에 박동연 씨가 고생스런 유족회 활동을 계속해 오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조사.정리 김도용)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