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미 유고특집 | 송유미를 그리다
송유미를 추억하다
윤 경(시인)
9월 5일 송유미 선생님의 부고를 받고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다가 선생님의 번호로 전화를 돌렸다. 신호음만 가고 받지를 않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갑자기 나의 무심함 때문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모두 오히려 나한테 묻는 것이 아닌가? 일단 네이버로 검색을 하다 부산일보 사회면을 보니 사실이었다.
송유미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마동인에서 주최한 해변시인학교에 참석하였다가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언니, 동생으로 일주일에 몇 번 씩 만날 정도로 함께 한 시간, 손때 묻은 시간들이 길다.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이 난다. 짧은 생머리로 부끄러움이 많으신 편이어서 자신을 먼저 드러내지를 않으셨다. 그래서 모임이 있을 때에는 함께 가기를 청하기도 하셨다.(이 이후는 평소대로 송유미 선생님을 언니로 칭하기로 하겠다.)
트레이드마크인 모자를 쓰면서부터 언니의 행보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늘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어서 아마추어 때부터 남달랐다. 각 신문사나 향장 등 백일장에서 거의 장원을 하셨는데 그의 초기의 글은 흥건한 감정이 녹아있는 작품이 많다.
또한 1989년 시 전문지 《심상》으로 등단 하셨는데 그 다음해에 첫 시집 『그대 마을에 사는 불빛은』이라는 시집이 나왔다. 나는 이 첫 시집이 내 명치끝을 건드리는 부분이 많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부산일보와 동아일보에 시조로 신춘문예에 당선 되셨는데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아 모르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02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셨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시와 시조를 넘나들며 수작들을 쏟아내어 시집만도 10여권이 넘는다. 그리고 문학상 수상 이력도 양손을 다 꼽아야 할 정도인데 타고난 재능도 있었지만 촌각도 허투루 쓰지 않을 정도로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다.
내가 언니를 만난지 36년이 넘었는데 결혼 전 10년간이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냈던 시간들이다. 해운대에서, 광안리에서, 중앙동에서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면 함께 다녔던 걸로 기억된다. 한여름 강릉 심상시인학교에서 여러 시인들과의 만남과 부산 해운대에서의 <심상시인회> 모임도 잊을 수 없다. 파라다이스 호텔 옆이었던가. 부산 시인들이 주체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오신 선후배님들을 맞았는데 함께 나눴던 시간들과 웃지 못 할 일화들도 이제는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남편과의 인연 또한 언니 지인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결혼을 한 뒤 생활인이 되어 바쁘게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를 하다 보니 언니와 서로 전화로만 안부를 확인 할 때도 많았다.
큰 나무는 그늘도 깊다고 했던가. 나는 세상에서 힘이 들 때면 언니를 찾아 잠시 쉬어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어깨를 내어주셨다. 그런데 정작 언니가 아플 때 나는 아무 힘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아니 이 정도로 심각하게 아픈 줄은 몰랐다. 전화를 드리면 문자로 하자고 할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런데 남편 직장 문제로 경북 상주로 이사를 하게 돼 언니와 만남을 청했지만 언니는 ‘다음’이란 말로 넘겼다. 그리고 커피잔 세트를 미리 선물로 보내 주셨다.
작년 5월 말에 『점자 편지』 책을 보내주시겠노라고 주소를 달라고 하셨는데 기다려도 책이 오지 않았다. 잘못 배달 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문자를 했어야 했는데 몇 번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만 했다. 혹시 언니를 성가시게 할까봐 참았던 것이다. 언니는 그 힘든 와중에도 나의 안부를 놓치지 않았는데 마지막을 너무 외롭게 해드린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
혼자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 지 송유미 언니의 따님을 통해서 투병일기를 일부 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전 국민이 다 맞는 코로나 백신 접종을 했을 뿐인데 그 후유증으로 혀와 호흡기가 마비되어 숨 쉬는 것과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언니는 그로 인해 1~2개월 사이에 음식물을 씹거나 삼킬 수도 없게 되었고 언어마저 완전히 상실하신 것이다. H병원에서는 생소한 이름의 길랭바레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이는 80%가 자연 회복 된다고 하셨지만, 여의치 않아 재활치료와 한방치료를 병행하셨으나 투병 2년만에 병명이 바뀌었다. 그는 루게릭 이라는 납득하기 힘든 병명을 받아들고, 절망뿐인 오늘일지라도 살아있기 위해 투병기를 써야만 한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셨다.
입으로 물 한 방울도 삼킬 수 없어 콧줄로 경관영양을 해야 하고, 그것도 어려워 위루술까지 하며 병과의 사투를 벌이는 그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 지 가늠 할 수가 없다. 그는 이때 줄 끊어진 가야금처럼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입, 아무것도 씹을 수 없는 입을 잎이다 라고 표현 하셨다. 루게릭은 현실적으로 치료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빛이 보이지 않기에, 통증이 영혼을 잠식해 가는 순간에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이가 뒤틀릴 정도로 이를 깨물기도 하고, 신묘다라니경을 들으며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
돌아보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치열하게 사신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면 섬이 되나보다. 자꾸만 한 곳으로 밀리어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떠나는 이보다 남아있는 사람이 더 초라 할 때가 있다. 작년 추석에 언니의 영전에서 넋두리를 하다가 왔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나는 많은 말을 들었다. 며칠 전에도 부산에 갈 일이 있어 언니에게 발길을 옮겼다. 약속 없이 가도 되는 곳, 이제야 그의 곁을 허락해 주는가 싶어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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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93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목련은 골목을 품는다』, 『높이 올라간 것은 가볍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