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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LA에서 한국미술사 강의하는 버글린드 융만 교수
어느날 갑자기 TV에 나온 옆집 순이를 보고서야 새삼스레 그녀의 미모를 알아보는 것처럼 우리문화가 세계무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현상은 한국문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살짝 시정하게 만든다. 뾰족탑 고딕성당과 대리석 신상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 하지만 정작 그 문화의 주인공들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찬미하며 우리들 손에 그 보물을 다시 쥐어주고 있는 것이다.
UCLA에서 11년째 한국미술사(Korean Art History)를 가르치고 있는 버글린드 융만(Burglind Jungmann, 독일어 발음으로는 부르글린트) 교수가 그렇다. 이 금발 여인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한국미술사. 대체 역사 속 한국 미술의 어떤 매력이 그녀로 하여금 삶 전체를 헌신하게 만들었던 걸까. 융만 교수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대학에서 한국미술사를 강의하는 유일한 교수다.
융만은 독일 북부 하노버 근교의 작은 마을, 일지드(Ilsede)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독일이나 한국이나 시골마을이란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는 곳. 사춘기에 접어든 호기심 많은 소녀를 사로잡을 만한 화끈한 자극이란 게 그 조용한 땅에 있을 리 없다. 시간이 마냥 진양조로 느리게 흐르던 고향 땅, 일지드는 그렇게 심심하고 재미없는 곳이었지만 그곳에서조차 운명은 그녀와 한국과의 만남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다.
“제 피아노 선생님은 동양의 문화에 심취한 분이셨습니다. 그 선생님을 통해 전 독일 촌구석에서 처음으로 불교과 요가를 알게 됐지요. 그리고 지리 시간에는 지구본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코리아를 찾아 봤던 기억도 있어요.”
그녀와 한국의 운명과도 같은 인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8세 때 시작됐다.
“제가 가보지 않은 땅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너무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열 여덟 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는 나이였죠. 어서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아무도 모르는, 유럽의 전통과 멀리 떨어진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한국이었어요.”
1973년도,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찾은 융만은 그로부터 1년 여 세월을 서울에서 살았다. 에이전시에서 주선해준 홈스테이 가족들은 그녀를 친딸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또래였던 최지영, 최지인 두 딸과 친자매처럼 지내는 그녀에게 그집 부모들은 최지혜라는 한국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였으니까.
홈스테이 가정이 있던 동네는 반포 아파트. 지금이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화하고 모든 생활의 편이가 집중돼 있는 곳이지만 당시 홈스테이 에이전시에서 그 가정을 외국인 교환학생에게 알선한 가장 큰 이유는 욕실과 화장실 등이 서양식 스탠더드로 지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융만 교수는 당시 반포 아파트 인근이 성냥갑 같은 건물만 덩그마니 들어서 있었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던 시절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서울 역사의 산증인이다.
교환학생 시절, 그녀는 연세대학교의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문법과 발음체계가 판이하게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24시간이 모라잘 판이었지만 그녀의 한국문화에 대한 목마름은 언어 말고도 다른 우물을 여럿 파게 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동양화를 배우기 위해 시간을 쪼개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을 오갔으며, 유명한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배우고자 인사동을 뻔질나게 드나들기도 했었다.
“김충현 선생은 서예시간에 한자쓰기를 가르치셨어요. 그때 전 한자를 전혀 몰랐으니 쓴다기 보다는 베껴 그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단계였죠. 그래도 서예시간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천천히 벼루에 먹을 갈고 은은한 먹 향기를 폐부에 들여놓는 준비과정이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어디 그뿐일까. 태권도까지 배워 그해 말에는 초단에 등극, 검은 띠를 도복에 둘렀다고 하니, 한국 사랑도 이쯤 되면 훈장이라도 내려야 할 판이다. 한국문화에 대한 사랑은 그녀로 하여금 한국을 더 잘 알게 했고 또 한국문화에 대한 그녀의 이해는 한국문화를 더 잘 볼 수 있는 심미안까지 부여했다.
“당시에 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방면 18세의 처녀였어요. 그러니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했겠어요? 그 나이 때만의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에 그처럼 한국의 문화를 다각적으로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고 흡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나날들이었지만 학교 친구들과 틈틈히 한반도의 구석구석으로 여행도 많이 다녔다. 아직 국제적인 관광지로 부상하기 전, 고요한 자연 그대로이던 시절의 제주도를 돌아볼 수 있었던 건 기쁨이었다.
그때 가장 감동적으로 봤던 한국의 유적지는 석굴암. 아직 입구에 주차장도 호텔도 없던 시절, 새벽 4시에 토함산에 오르기 시작해 석굴암에서 맞이한 일출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융만 교수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석굴암 내부에 앉아계신 부처님께 면전에서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요즘 석굴암을 방문하면 유리벽 너머에서 멀찌감치 바라볼수밖에 없는 부처님을 가까이서 뵌 감동은 가슴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대형불상 주변을 지키고 있는 십이지상과 금강역사의 역동적인 이미지는 18세 감수성 풍부한 처녀의 기억 창고에 차곡차곡 담겨졌다. 그때 석굴암을 아주 가까이서 돌아봤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융만 교수는 말한다.
당시 그녀가 폭 빠졌던 한국의 또 다른 매력은 다름 아닌 대중목욕탕이었다. 교환학생으로 왔던 유럽의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그녀는 주말마다 대중목욕탕에서 호사스런 목욕을 즐겼다. 빨간색 이태리타월로 서로의 등을 박박 밀어주며 보내던 시간을 그녀는 그리움으로 추억한다.
이렇게 한국문화를 배우고 한국 땅 곳곳을 밟고 한국 음식을 맛보고 한국 사람들을 만나 사귐을 갖는 가운데 그녀는 점차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와 사람들에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나’와 ‘남’이 채 분화되기 전의, ‘우리’라는 주체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정’이 냉철하고 분석적인 ‘이성’을 녹여낸 것일까.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제 삶의 큰 방향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에서 지낸 1년으로 인해 전 한국과 극동지역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고, 훗날, 이를 제 공부의 주제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거죠.”
가슴 속에 한국을 품고 독일로 돌아간 그녀의 눈과 귀에는 온통 한국에 대한 뉴스거리만 보이고 들렸다. 독일에 귀국했던 해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수사결과가 계속해서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고 5년 뒤 박정희 대통령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전해듣게 된다. 광주사태와 민주화 투쟁 소식을 접한 그녀의 가슴은 안타까움으로 가득찼다. 격동기 한국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그녀는 스크랩 하듯 기억하고 있다. 이미 한국은 그녀에게 제 2의 고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2001년, 한국을 방문한 융만교수는 청와대를 방문해 이휘호 여사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된다. 이휘호 여사는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를 통해 김대중 선생 석방 서명운동을 벌였던 융만교수의 지난 날 노고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교환학생 과정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온 그녀는 괴팅겐 대학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중국학을 전공, 1981년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한편 극동 아시아 미술사를 부전공했다.
석사학위를 마친 그녀는 대만으로 건너가 푸렌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한다. 그녀가 다시 2주간의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건 바로 이 무렵. 길지 않은 체류 기간 동안 국립중앙미술관을 여러 차례 돌아본 그녀는 다시 한 번 한국미술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며 자신의 삶을 한국미술사 연구에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1983년부터 2년간 서울대학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동안 그녀는 국립미술관을 내 집 드나들듯 오가며 조선시대 회화에 관해 연구를 계속했다. 그 와중에 동국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독일문화원인 괴테 인스티투트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88년 드디어 그녀는 ‘회화에 있어 한국과 중국의 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극동 아시아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 논문은 1992년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출판사를 통해 활자화됐다.
융만 교수의 남편은 괴테에 정통한 철학박사. 학자들의 국제 교류를 담당하고 있는 단체의 소개로 일본의 한 대학에 일자리를 얻게 된 남편을 따라 그녀는 일본에서 6년 동안을 살게 된다. 일본 미술사에 미친 한국미술의 위치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어 융만 교수는 18세기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미친 일본 회화의 영향’에 관한 연구로 1996년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는다. ‘화가들과 사신들(Painters and Envoys)’이라는 논문은 2004년 프린스턴대학 프레스에 의해 책으로 출판됐다.
집필한 두 편의 연구저서는 영문으로 기록된 유일한 한국미술 전문 서적이라니 한국 미술사에 있어서 그녀의 존재감이 어떤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녀가 ‘한국미술사’가 아닌 ‘극동 아시아 미술사’로 학위를 받은 이유는 당시만 해도 유럽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한국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던, 그저 아시아 변방에 위치한 쬐끄만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한국미술사만을 가르치는 학교도 없었을 뿐더러 한국미술사 연구만으로는 학위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지금까지도 유럽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 미술을 아시아 미술에 포함시켜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다른 곳과는 달리 독일의 박사학위 시스템은 2개의 학위를 받아야 비로소 박사로 인정하기 때문에 융만교수는 ‘중국미술’로 첫번째 박사학위를, 그리고 일본미술과의 관계로 두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한국미술사 전문가라는 본래의 학문적 의도를 성취한 것이다.
“그냥 가슴이 원하는 대로 따라 살았을 뿐이에요.”
그녀는 아무도 관심 갖는 이 하나 없는 한국과 극동 아시아 미술사에 그토록 천착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미술사나 극동 아시아 미술사란 공부해봤자 쓸 데도 없는, 쉬운 말로 영양가 없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취득 후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설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한국미술사를 가르치는 것으로 교수직을 얻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UCLA는 미국에서 한국학(Korean Studies) 과정을 개설하고 있는 곳 중의 한 대학이다. 동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한 학교라 할지라도 중국 미술사, 일본 미술사 과정은 있지만 한국미술사를 따로 강의하는 곳은 없다.
그저 가슴 떨리는 일을 따라, 하고 싶은 공부를 했을 뿐인데 그녀의 학위 취득과 거의 때를 맞춘 1999년, 우주는 UCLA에 한국미술사 과정 개설과 함께 한국미술사 교수 자리를 마련하고 그녀를 모셔가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11년째 그녀는 UCLA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 땅에서 영어로 한국미술사를 가르치게 되리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어요. 돌아보면 제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한국의 영혼이 끊임없이 저를 끌어당겼던 것 같습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한 학자로서는 미국 내 영어권에서 워낙 독보적인 존재인지라 그녀를 원하는 곳,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계속 늘어가는 추세다. 강단 외에 그녀의 해박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은 뮤지엄. 그녀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LA카운티미술관의 한국미술 큐레이터(Adjunct Associate Curator of Korean Art)로서 당시 최초의 한국실 개관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아직 국제 학계에서는 비교적 미개척분야에 속하는 한국미술사를 연구해 영어로 된 논문과 저서로 발표하는 한편, 미국의 명문대학에서의 강의와 그밖의 채널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한국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는 그녀에게 새삼스레 감사함마저 느껴진다.
2003년 중순으로부터 2004년초에 걸쳐 LACMA에서는 ‘The Circle of Bliss: Buddhist Meditational Art’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불교미술을 살펴보는 4편의 전시회가 개최됐다. 한국미술사에서 불교미술이 무시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미국 내 한국미술사의 일인자인 융만 교수는 당시 여러 세미나를 이끌어 미국의 지성인들에게 지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UCLA의 한국미술사 클래스도 뮤지엄으로 자리를 옮겨와 살아있는 교육으로 지적 자극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불교는 한국 미술의 전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유교 숭배정책으로 비하된 감이 없잖지만요. 조선시대를 포함, 한국의 역대 왕조 모두가 예술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불교의 영향권 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을 받았지만 그녀만의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형성하면서부터 불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은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어갔다.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자주 찾았던 한국 산사의 그 고즈넉한 풍경은 삶 자체에 근원적 의문이 들 때마다 그녀의 마음에 평화를 되찾아주는 요소다. 그녀는 특히 ‘속도’에 떠밀려 살아가는 서구사회에서는 매일 직면하는 스트레스를 불교적 접근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산사에서 맛봤던 절밥은 또 얼마나 기막힌 맛이던가. 통도사에서 맛봤던 절밥의 그 담백함과 산채의 향기로움은 그녀의 미각세포에 새로운 눈뜸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남편과 결혼 전, 독일에서 데이트를 하던 시절에도 집에 초대해 한국음식을 요리해줄 정도였으니, 그녀의 한국음식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짐작이 간다. 좋아하는 한국음식들은 갈비찜, 비빔밥, 잡채, 김치, 된장찌개 등. 식구들도 모두 한국음식 사랑에는 다를 바가 없다. 냉장고에는 늘 김치 병이 떨어지질 않는다. 김치가 바닥날 때쯤이면 한인타운의 마켓에 들러 김치와 식재료들을 구입하고 한국식 사우나에도 들러 휴식을 취한다. 올해 25세, 21세인 두 딸들도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한국음식을 비롯한 한국문화 사랑이 남다르다.
“전생에 한국인이었을 거라는 말, 수도 없이 들어왔죠. 정말 그럴 지도 모르겠어요. 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이제 거의 무조건적이니까요.”
그동안 여름방학이면 고향인 독일은 제쳐두고라도 한국은 다녀왔었다. 특히 2004년부터 2009년까지 6년간은 고려대학교 섬머 캠퍼스에서 강의을 맡아 한국의 대학생들과 가까이서 교감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현재 UCLA 파울러 뮤지엄에서 전시 중인 ‘도자기 속의 삶: 한국현대작가 5인전(Life in Ceramics: Five Contemporary Korean Artists)’ 전시 기획 차 한국을 찾기도 했다.
“한국의 발전상은 놀랍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어요.” ‘라인 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장본인인 그녀에게도 ‘한강의 기적’은 경이로웠다.
“고려대 학생들이나 주변의 젊은 작가들은 제가 1970년대 초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살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야기 해달라고들 졸라요. 정말 한국의 경제적 성장은 눈이 부시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불교 사찰도 많이 변했어요. 당시 절은 아주 외진 곳이었고 찾는 이, 별로 없는 조용한 곳이었잖아요? 요즘 절에는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아요. 무척 바빠졌죠.”
한국미술사 학자로서의 융만교수는 한반도의 미술을 시대적으로는 신석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장르로는 불교미술과 회화로부터 도자기, 묘지문화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 그 다양한 한국미술 가운데 그녀가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대상은 문인화.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하는 담백한 색채감, 침묵하고 있는 여백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어떤 서양 예술에서도 맛보지 못한 독특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사를 해석하는 융만교수의 시각은 역사의 진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그녀는 한국미술을 중국미술의 영향을 받은 아류로 해석하는 일반 학계와는 달리 한국미술이 중국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한국미술을 아시아 미술의 중심이라고까지 말하는 그녀의 이유를 들어보자.
12세기 경, 성나라 사람들은 고려청자의 신비한 매력에 사로잡혀 일부러 수집해 가곤 했었다. 그만큼 한국 도자기의 도예기술과 미적 감각이 앞서 있었다는 얘기. 일본인의 경우는 또 어떤가.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한국 다기를 무척 좋아했던 다도선생을 둔 덕에, 한국 다기의 가치를 일찌기 알고 있었다. 그가 임진왜란 때 한국의 도자기를 일본으로 가져가 발전시킨 것이 다름 아닌 일본의 차와 도예 문화인 것이다.
그녀는 전통적인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자신의 출신에서 찾는다.
“전 독일인이고 유럽 대륙에서 났습니다. 유럽의 미술이나 건축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사조가 다른 사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받은 사조가 다시 원조 격의 사조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서로 연관돼 발전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고 한쪽은 영향을 받는 그런 종속관계가 아닌 것이죠. 그런 유럽문화의 배경과 유럽인의 시각으로 동아시아 각국 미술의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보니 그 속에서 홀로 빛나는 한국미술의 아우라를 보게 된 것이죠.”
그녀의 이런 열린 시각과 역사적 해석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아직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 지금까지 한국미술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과 이해는 우리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세계적 수준이라는 우리의 주장과는 달리, 세계 역사속에서 우리 미술은 중국미술의 변방 또는 아류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 이제는 그녀의 한국미술사 해석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국제적 감각으로 한국미술사를 재조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매 학기마다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은 약 70명 정도. 11년간 강의를 수강한 학생의 숫자는 무려 1,000여 명에 이른다. 그중 1명이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5명이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니 그녀는 제자들에게 지적 영감을 솔솔 불어넣어준 뮤즈에 다름 아니다.
참 많은 것을 성취한 버글린드 융만 교수. 남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한국의 미술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이라고 답한다. 순간 금발 머리 바바리아 여인의 열정이 후끈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참 좋은 인연이다. <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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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버글린드 융만 교수님, 버글린드 융만, 버글린드 융만, 버글린드 융만..... 이런 분이 계셨군요.
한국사람이면서도 우리 문화에 대해서 체계적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부끄러움이 듭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 고마우신 버글린드 융만 교수님, 고맙습니다. 장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이 글을 올려주신 파란연꽃님께도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융만 교수님도 이런 일을 하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미국에서 우리의 좋은 한국문화를 알리는 일을 해야겠지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