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첫 레포과업을 무사히 마치고
그 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이 무명베 주의를 입고 발목이 드러나도록 바지 밑을 걷어붙이고 머리에는 베수건을 동이고 고무신을 신고 농사일을 하는 매무새를 갖추고서 윗집의 상머슴 덕실 아재에게 갔다. 덕실 아재는 나에게 오늘 일을 말했다. “오늘은 바깥마당 앞밭에 갈아놓은 데를, 골을 짓고 남새 씨앗 넣을 준비를 해야지. 샌님이 하라는 일은 엄(없)제?” “예, 지금은 없소. 어디 가더라도 저녁때가 되어야 갈 겁니다. 아마 나중에 청도샌님 심부름이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아재가 일을 시키소.” “그럼 바깥마당 밭에 오늘은, 봄배추 하고 상추하고 쑥갓 씨앗 넣어야겠다. 네 시간 되는 대로 갈아놓은 밭에 흙덩이를 잘게 부수어 골을 타고 씨앗뿌릴 준비를 해놓아라.” “예, 알았소.” 하고 나가자, 뒤에서 말이 따라 나온다. “일은 해보기는 했나?” “걱정 마이소. 큰 농사일은 몰라도 그런 남새밭 가꾸는 일이야 못할라꼬?” “오냐. 오늘은 그 일을 네가 해라. 나는 마을 앞 논보리 밭이나 매야지. 점심때까지 네가 하는 대로 해놓아라. 점심 먹고 둘이 함께 씨앗 넣기로 하자.” 그래서 나는 아재를 따라 대문채 옆 광에 들어가 호미와 작은 쇠갈퀴를 가지고 나와 바깥마당 앞밭으로 갔다. 소 쟁기로 땅을 뒤집어 갈아놓은 밭은 신선한 흙냄새를 풍기고 있다. 나는 밭고랑에 들어갔다. 이미 밭고랑을 지어 갈아놓아서 고랑에 있는 흙덩이를 호미로 툭툭 깨뜨리고 밭이랑에 갈퀴로 흙을 끌어다 북을 돋우고 흙을 잘게 부수어 씨앗의 잔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이랑에 잘게 골을 내어 씨앗 뿌릴 자리를 지으면 되는 일이다. 일이 점점 손에 익어가자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나놨다. 노래라 해야 농민들이 구성지게 잘 부르는 노랫가락이야 할 줄도 모르고, 혁명가 밖에 아는 게 없다. 곁에서 들어도 무슨 노래인지 모르게 작은 소리로 내 신명만 낼 뿐이다. 이런 나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종달새가 따뜻한 봄 공기를 따라 높이 오르면서, “삐지고 째지고 쭉쭉쭉.” 하면서 혼자 밭 매고 있는 나를 보고 “이 좋은 날에 노랫가락 하나 못하나!” 하고 나를 놀리는 듯 했다. 해가 충천에 오르자 이제는 봄볕이 나의 뺨이 좀 따갑도록 따뜻하게 대운다. 한 고랑 한 고랑 씩 일을 해나가자 나는 어느 새 밭 한가운데까지 들어섰다. 나의 서툰 농사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덕실 아재는 좀 이른 듯 내가 일하는 밭으로 왔다. 그리고 밭으로 들어서자 내가 일한 결과를 보고, “아이구, 우리 덕출이 세경 받을 값은 하네. 작은 머슴 노릇은 똑똑히 하구만.” 하고 칭찬을 한다. “아재, 나 우리 엄마하고 밭농사는 좀 했다고요. 고구마도 가꾸었고, 황토 배추밭에 오줌도 주어봤고 잘 한다고요! 놀고먹는 건 아주 싫어한다고요.” 라고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아차, 내가 또 흥분했군. 경각성도 없이.” 점심때까지 두어 이랑만 남기고 모두 마쳤다. “어이 덕출이! 인제 나오지. 점심 먹고 좀 쉬었다가 마자 이랑을 만들고 씨앗을 넣자고.” “예, 그렇게 합시다.” 우리들은 아재 방에 들어가 차려놓은 점심을 먹었다. 일하고 난 후 밥맛은 언제나 좋다. 뒤안에 묻어둔 김칫독에서 꺼낸 겨울을 넘긴 묵은 지, 그중에서 폭 삭은 폭이 사이사이 박아놓은 도한 푹 삭은 무는 천하에 별미이다. 그리고 언제 잡은 물고긴지 억샌 등뼈까지 물렁하도록 무김치와 함께 푹 조린 물고기조림도 또한 일품이었다. 이건 남천강변에 사는 전형적인 우리 고향의 먹거리이다. 점심 후 아재는 퇴침을 베고 한숨 쉬고 있다. 나는 바깥마당 건너 초당의 내 방으로 갔다. 아재가 쉬는 동안 나는 책을 꺼내고 책장을 접어놓은 곳을 폈다. 대구에서 이종형으로부터 얻은 『삼각법』의 책이다. 아주 손쉽게 읽고, 익힐 수 있는 수학이다. 뉘가 집 뒤안으로 들어오는지 발자국 소리가 나기에 나는 책을 키슬링에 도로 넣었다. 그러자 문 앞에서 지도원 동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 덕출이 있나?” 나는 얼른 걸어놓은 문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고 “예, 있습니다. 청도샌님인교?” 라고 인사를 했다. 지도원 동지는 나에게 오늘 레포과업을 지시했다. 첫 과업이다. 좀 긴장이 된다. 노랗게 기름이 찌른 기름종이에 싸인 문건을 내주면서 “이것을 「부북면당」의 ‘트’에 전달하는 일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부북면당」이 「밀양읍당」의 연락업무를 함께 받아 안을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오. 이 문제를 토의해서 그쪽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가지고 오시오. 이상” “예, 과업 하나, 부북면당 ‘트’에 문건을 전달하는 일, 과업 둘, 「부북면당」이 「밀양읍당」의 연락업무를 함께 받아 안을 문제를 토의해서 그쪽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받아 오라는 과업을 분명히 받았습니다.” 라고 나는 복창을 했다. 나의 복창을 받은 지도원 동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동무의 복창을 받고 정말 믿음이 가오. 잘 부탁하오. 집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야간에 행동하시오. 읍내는 들어가지 말고, 검문이 심하다오.” 그래서 나는 행장을 한참 생각하고 말했다. “교동 뒷산을 돌아서 지동으로 해서 감내와 오례 앞들 사이를 빠져 감내를 건너 삽개로 가면 됩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지도원 동지는 웃으면서, “길도 환하네. 돌아오는 길은 그대로 돌아오면 되는데, 특히 긴늪다리(주1)를 건널 때는 조심해야 하오. 긴늪다리에 있는 「향보단」 초소에는 조직선이 있어서 말을 해두겠소. 거기 확인 암호는 ‘교동에서 쇠실로 부고를 전하러 갑니다.’라고 했소. 그러나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임기응변하고 잘 돌아오기를 비겠소.” “알겠습니다.” 기름종이에 산 문건들은 벽장바닥에 널판을 한 장 들고 만들어놓은 상자에 넣어두었다. 거기에는 권총도 넣어놓고 있다. 권총은 밤에는 꺼내어 요 밑에 두고서 바로 손에 잡히도록 하고 잠을 잔다. 지도원 동지는 이야기를 끝내고 곧 나가셨다. 나는 좀 있다가 밭으로 나가 남새밭 만드는 작업을 계속했다. 좀 시간이 걸려 덕실 아재가 남새 씨앗 봉지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남은 두 이랑은 내가 계속해서 작업하고 곧 끝냈다. 덕실 아재는 집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물 드므를 들고 왔다.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아재에게 말했다. “물을 줄락 하면 물지게도 있어야지. 아재 내가 들어가 물지게에다 물을 지고 올께요.” “아니야, 밤에 일도 있을 텐데. 물은 내가 질 께.” “아니요. 내가 할게. 물지게는 어디 있소.”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재는 뒤에서 큰 소리로 “샘가에 갖다 두었네.”, “예, 알았구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했다. 남새밭 파종작업을 끝내고나서 울타리를 고쳤다. 울타리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다. 닭들이 남새밭 안에 있는 먹이를 찾아 울타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생긴 구멍이다. 이 구멍을 막아두지 않으면 닭들이 들어가서 갓 뿌려놓은 씨앗을 모조리 쪼아 먹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자잘한 일까지 마치자, 저녁때가 다 되어갔다. 저녁끼니를 마치자, 나는 초당의 내 방으로 가서 행장준비를 했다. 어느 집 작은 머슴이 주인의 급한 심부름을 가는 행장이다. 방밖의 비죽 나온 처마서까래에다 대못을 쳐서 걸어놓은, 짚과 삼 줄기로 곱게 짠 망태에 꼽꼽하도록 물을 약간 뿌려 망태 짚이 부수지지 않도록 하고, 거기에다 기름종이에 산 문건을 짚으로 짠 얇은 쪼가리로 둘둘 말아 망태자루 가장 밑에다 담고 그 위에다 당장 꺼낼 수 있도록 권총을 산 좀 넓은 무명베 밥보자기로 도시락처럼 보이도록 사서 망태 위에다 두고 작은 밥보자기에는 시루떡 몇 조각을 사서 그 위에다 올려놓았다. 만일 검문에 걸려 뒤짐을 당했을 때, 가장 위에 있는 시루떡이 보이면 그것을 주기로 했고 그래도 도시락처럼 보이는 권총 보자기까지 뒤지자고 하면 내 스스로 그 보자기를 풀면서 권총을 꺼내어 장탄을 하고 손을 들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엎드리게 해서 나는 도주한다는 순서이다. 만일 이들이 무기를 들고 따라오면 몇 방을 쏘아 위협을 하고, 그래도 따라오면 마지막 총탄 한두 발이 남을 때는 내 머리에 총구를 대고 격발철(방아쇠)을 당겨 끝낸다는 것이다. 발은 무명베 발싸개를 하고 역시 군데군데 삼 줄기를 넣어 보강한 짚신에다 물을 꼽꼽하게 뿌려 질기게 한 미투리를 신고 한 켤레는 예비로 묶어서 망태에 매달고 바짓가랑이는 무명베로 감발을 했다. 보름이 지난 지 대엿새가 되는지라 초저녁은 달이 좀 늦게 떠서 해가 지고부터는 달뜨기까지는 시간에는 어둠이 들어 좀 거리가 지면 분별하가 어려웠다. 이때에 긴늪다리를 건넬 작정이었다. 긴늪다리까지는 약 4킬로미터 이고, 「향보단」 초소는 있기는 하지만 밀양읍과 산외면 사이의 경계이고, 행정력과 행정관계의 모순에 의한 것인지 일종의 검문사각지대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눈으로 보이지 않으면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처음 염려한 것과는 달리 긴늪다리는 쉽게 건넜다. 긴늪다리를 건너자 도로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는 그야말로 개벽 초와 같은 고요함이었다. 범북고개를 넘어 교동 마을로 들기 전에 산길을 타고 교동향교의 북쪽 담을 오른편으로 해서 교동을 빠져나왔다. 그러면 곧 지동 앞들에 이른다. 들에는 밭보리 논보리가 자라서 이제는 무릎높이까지 된다. 지동 들이 끝나자 감내에 놓여있는 지게다리를 건너 남으로 펼쳐진 들판을 내려오면 마흘리 고개 밑 제대리(堤大里) 앞에 이르면 곧 목적지 삽개에 이른다. 삽개(鈒浦)는 지명으로 보아 이 일대에 강바닥에 흔한 검은 점토가 있어 이로써 틀을 만들어 쇠를 녹여 삽(鈒)이라는 농구 겸 무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지명이 삽개라고 했고 한자로 삽포(鈒浦)라고 기록 했던 것이다. 이를 왜놈들이 들어와 그들 언어로는 삽포라고 발음할 수 없는지라 겨우 ‘사포’라고 발음 하고 이 발음에 따라 사포(沙浦)라고 기록했다. 왜놈들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한 세기가 다가오는데 이 땅의 학자들과 사대에 찌든 관료들은 아직도 우리들의 조상이 만들어 부른 지명을 도로 찾을 생각은 없고 오히려 삽포(鈒浦)라고 한 기록을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아직도 모래판하고는 상관없는 땅을 왜놈들이 발음하고 가록한 사포(沙浦)로 애써 혀짧은 소리까지 흉내 내도록 얼빠진 짓을 하고 있다. 삽개 동내로 들어오는 길은 남천강변의 논밭 가운데 길로 동내로 들어가는 굽어드는 길인데 저멀리 모렴당(慕濂堂) 재실의 솟을대문이 보이는 길로 들어선다. 밤에는 가까운 거리라도 멀리 보인다. 이 길을 5,60미터 들어가자 나지막 담으로 둘러싸인 두 채의 초가집이 있고 솔가지로 얽어 만든 지게문이 있다. 거기에는 안전신호로 요롱이 매달아 놓고 있다. 위험신호로는 이 요롱이 없도록 정해 놓고 있다.(주2) 신호는 이 요롱으로 ‘찌릉, 찌릉찌릉’ 하고 소리를 아주 약하게 냈다. 아래채의 대살방문이 열리고 키가 나지막한 어른이 나왔다. “누굽니꺼?” 그래서 접선암호를 댔다. 지금은 그 암호는 기억에 없다. 그러자 답신암호가 나오고 이어 “들어오이소” 라고 했다. 나는 집 마당에 들어섰다. 주인의 안내를 받아 그 방안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자 시각은 9시를 조금 넘었다. 여기까지 거리는 11킬로미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50분이다. 방안에 들어가자 주인을 나를 보더니 뜻밖이라는 듯, “이런 밤중에 나이도 어린 분이,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하다니 정말 장하네요.” 라고 하시자, 나는 선뜻 대답을 드렸다. “나이가 어려서 겁 없이 어려운 줄 모르고 하는가봅니다. 이 일이 오늘이 처음입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하고 큰절을 하고 인사드렸다. “저 이름이 최덕출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처음 뵙습니다.” 면당의 어른은 나의 인사를 받으면서 이름을 말하는데 지금은 기억이 없다. 물론 가명이겠지만. 얼굴이 동그랗고 눈에는 언제나 미소가 눈가의 주름처럼 어려 있다. “나는 〇〇〇인데, 부북면에서 일하고 있소. 이 집을 연락선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 당분간 만나게 되겠네요.” 나는 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으로부터 존칭을 받으니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어르신, 저에게는 말씀을 낮춰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송구하기도 하지만 남 보는데서 존대 말씀이 나오면 안전상 문제이기도 하지요.”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동지가 아니요? 동지간의 인사에 존비고하가 어찌 있겠소. 그러나 안전상의 문제라 하니 남 보는 데는 존대하지 않고 ‘하게말’을 쓰겠소.” 그래서 나는 다시 제기했다. “어르신, 평소에는 보통 관습대로 존칭을 안 쓰고 토론이나 과업에서만 존대말을 하시기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허 참, 나이 어린 사람이 경위가 정말 반듯하구나. 그래, 그렇게 하지.” 라고 하셔서 일단락되었다. 다음은 「밀양읍당」의 연락업무를 「부북면당」의 ‘트’에서 전달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직 안전 상 그렇게 하기로 토의 결정을 보았다. 그리고 이 결정을 「밀양읍당」에 제기하여 토의 결정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다음 접선 때까지 이를 확정하기로 하고 매듭지었다. 그 다음은 「부북면당」이 「밀양읍당」의 연락업무를 함께 받아 안는다는 문제도 읍당과 토의해서 다음 연락 접선 때 그 결과를 보고한다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로써 이번 연락과업은 잘 성사되었다. 삽개에서 10시 좀 넘어서 출발했는데 갔던 행정이 안전할 듯해서 그 길로 해서 돌아왔다. 자정 좀 못되어 초당에 있는 내 ‘트’에 도착했다. 집 뒤안으로 해서 방문 앞에 도착하자 방안에서 지도원 동지의 말소리가 나왔다. “덕출이, 벌써 오는가.” “예, 저 덕출입니다.” “어이, 욕 봤네. 어서 들어오게.” 나는 방에 들어가 지도원 동지가 밝게 웃으시는 얼굴로 내어 미시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보고 했다. 나는 적은 소리로, “지도원 동지, 제시하신 과업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상.” 그리고 제기하신 두 가지 문제의 결정을 보고했다. ------------------- <주>
(1) 밀양시 교동리와 산외면 경계에 있는 지금의 남천강 「밀산교」
(2) 지난봄(2012년 4월)에 당시 그 아지트를 찾아갔는데 모렴당 솟을대문을 표적으로 삼아 겨우 찾았다. 그 집은 흔적이 없고 포도밭으로 변했으며 그 집 앞의 밭은 사포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