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화엄종
우리나라 화엄종에는 처음 두분 어른이 있는데 먼저 화엄사상을 무사자오(無師自悟)하신분이 행동화엄종조(宗祖) [원효대사]라 하고 그 다음에 화엄사상의 정통교맥(正統敎脈)을 이어받은 분을 해동화엄초조(初祖) [의상조사]라 한다.
해동화엄종에서는 일명 의지종(義持宗)이라고도 칭하는데 의지종에서는 의상조사를 화엄초조로 모시고 종단을 창설하였다.
[화엄종]이란 명칭외에도 의상조사의 호를 따서 의상종(義相宗) 또는 부석종 그리고 지엄선사의 문하에 있을 때 '의지'라는 칭찬을 받았으므로 [의지종]이라고도 불렀다.
화엄종에서는 화엄경판과 해인도(海印圖) (또는 [법계도] 라고도 또는 [법성도]라고도 함)를 종단의 보물로 삼는다.
[해인도]라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각사암에서 모든 제식을 붕행하는 중에 외우고 특히 큰 법회때의 순당(巡當)정진을 돌면서 주로 많이 외우고 행하는 [법성계]가 그것이다.
지금도 해인사에서는 년차로 정해 놓고 팔만대장경 정대경찬법회를 여는데 그 행사때는 미리 마당에 [해인법계도]를 그려 놓고 동참한 불자들이 대장경판을 공손히 머리에 이고 법성게를 외우면서 그 선을 따라 보행정진하는 광경은 매우 이채를 띄운다.
이것은 의상조사가 중궁의 지상사에 있을 때에 그 스승 지엄선사로 부터 화엄경의 중요한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해인(海印)] 72개를 그림으로 그려서 제자들에게 보였다.
그 제자중에 오직 의상조사가 그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72개의 해인을 통일하는 의미에서 종합하여 한 개의 그림을 그려서 지엄선사에게 바치었다.
곧 지엄선사는 이것을 보시고는 지극히 찬탄하며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해인은 총체적인 곧 통일을 이룬 것이 되고 나의 72개의 해인은 별체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해인 속에는 게송이 들어 있는데 글이 체제가 7언송구(七言訟句)로서 삼십구의 노래식체로 조직되었는데 글자수는 전부 210자가 된다. 글의 질서로는 비록 30구절 210자밖에 되지않는 글이지만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량으로는 화엄경 내용전부의 깊고 묘한 교리를 남김없이 다 들어내 보이고 있다.
그 후로 의상조사는 해인 곧 법성게도를 그 제자인 상원대덕에게 전함에 상원대덕도 받아 다시 신림대덕에게 전하고 신림대덕은 다시 순응대덕에게 전한다.
순응대덕은 이 해인을 받아 가지고 현재 합천군소재 가야산으로 들어가서 절을 세우고 [해인]을 따서 기념으로 절이름을 [해인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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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華嚴宗)
중국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 동진(東晉) 말 북인도 출생의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화엄경》을 한역한 이래 《화엄경》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특히 511년 인도의 논사(論師) 세친(世親)의 저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모두 완역한 것을 계기로 지론종(地論宗)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화엄종 성립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한편 《화엄경》을 사경(寫經)·독송(讀誦)하는 화엄 신앙과, 이 신앙에 근거하는 신앙 단체인 화엄재회(華嚴齋會)도 발생하여 화엄종 성립의 기반이 성숙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두순(杜順)은 종래의 화엄에 대한 교학적 연구보다 실천적·신앙적 입장을 선양하여 화엄종의 제1조가 되었다.
새로이 중국에 전해진 현장(玄)의 유식설(唯識說)을 채용하면서 종래의 지론종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이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이며, 이 지엄의 학문을 계승하여 화엄종 철학을 대성시킨 사람이 현수(賢首)이다. 그 후 징관(澄觀)·종밀(宗密)이 나와 화엄종을 계승하였으나, 선종의 발흥과 함께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자선(子璿)·정원(淨源) 등이 화엄의 맥을 이었으며, 그 후 많은 선사(禪師)들의 사상에도 화엄사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에서는 화엄사상을 신라의 원효(元曉)·의상(義湘) 등이 크게 선양하였는데, 원효의 《화엄경소》는 현수의 《탐현기(探玄記)》에 인용될 만큼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의상은 두순에게서 화엄 교학을 배운 적이 있고, 부석사(浮石寺)를 창건(676)하여 화엄의 종지(宗旨)를 널리 편 이래 해동화엄종을 개창(開創)한 사람으로 숭앙되고 있다. 그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요약한 것으로 화엄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의 심상(審祥:?∼740)은 당나라 도선(道璿)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화엄학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十刹)’이라 하여 화엄학 연구의 중요한 사찰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 화엄학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희랑(希朗)과,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관혜(觀惠)의 북악(北岳)·남악의 두 파로 갈라져 논쟁이 치열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균여(均如)는 이를 조화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고려 불교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화엄·선(禪)·천태(天台)를 융합하였다.
그 후 어느 종파에 속하더라도 화엄학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화엄종 교리의 중심은 전세계가 일즉일체(一卽一切)·일체즉일(一切則一)의 무한의 관계를 갖는 원융무애(圓融無)를 설하는 법계연기관(法界緣起觀)이다. 그 원융무애한 모습은 십현(十玄) 연기를 설하며, 그 이유로써 육상(六相:總·別⌒·異·成·壤) 원융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요컨대, 화엄종은 일체의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