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디카시도 인간 존재의 심연을 건너는 한 방식이다
- 지구별로 오기 전 먼 머언 어느 봄날
칼뱅의 예정론
지구별로 오기 전 먼 머언 어느 봄날
밤의 ‘따이 학 꾸롱’을 꿈꾸듯 보며
신짜오 신짜오라고 중얼거렸지 아마
■ 형이상학적 질문
지구상에 수많은 생물종이 있지만 인간만이 영혼을 지녔다. 인간은 영혼을 지녔으므로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가진다. 동물도 배가 고프면 먹고, 위험하면 피하며, 또 종족을 번식하는 것에서는 인간과 다름이 없지만 근원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 동물도 죽음을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왜 죽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인간만이 고통, 상실, 슬픔, 기쁨 같은 경험을 형상으로 만들고, 언어로 표현한다. 인간이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말은 세계 앞에서 한계적 존재로서 불안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불안을 견디기 위해 예술도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디카시도 마찬가지다. 디카시도 감각적 표현이나 정서적 표출을 주요 기능으로 수행하지만 본격문학으로서 가지는 관심은 역시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형이상학은 보다 존재에 대한 깊은 물음에 다름 아니다. 하이데거는 존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를 묻는다. 존재자이면서 존재를 묻는 인간만이 현존재다. 일상에서 만나는 것은 모두 존재자다. 눈앞의 컵, 창밖의 나무, 길을 걷는 사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까지도 존재자다. 존재는 존재자와 다르다. 존재는 또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어디에 놓여 있거나,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란,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방식, 다시 말해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있음의 의미다. 사람들은 나무를 보면서 “나무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있음’ 자체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숨어 있는 자리를 사유하자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서양 철학은 오랫동안 존재를 묻는 대신, 존재자를 더 잘 분류하고 더 정확히 파악하는 데 몰두했다. 그 결과 자연은 자원이 되고, 시간은 관리 대상이 되며, 인간마저도 성과와 효율의 기준으로 평가된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을 “존재를 잊어버린 역사”라고 말한다. 우리는 늘 무엇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 것인가, 어떻게 더 잘 관리할 것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보다 앞서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있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오늘날 형이상학은 인공지능이 사고할 수 있는가, 가상 세계는 현실인가, 예술 작품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같은 깊이 있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디카시 「칼뱅의 예정론」은 존재자인 내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칼뱅의 예정론도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인간은 주체로서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완성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기독교적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칼뱅은 이 지점에서 인간 사유의 중심을 무너뜨린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에 의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선택했다는 신 중심의 기독교 교리이다. 칼뱅의 예정론은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 곧 인간의 행위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는 자리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관점이다. 이로써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신앙의 성과를 증명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은혜 앞에 서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인간은 실제로 선택하고, 욕망하고, 행동한다고 본다. 다만 그 선택의 궁극적 근거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할 뿐이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행위하지만, 그 자발성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디카시 「칼뱅의 예정론」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구별에 던져진 존재자로서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의문이면서 질문이다.
2022년 1월 27일 코로나 기간인데도 베트남 메콩대학교(구룡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2023년 4월까지 체류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밤에는 학교 앞 카페서 커피를 마시며 디지털 노마드로서 사유했다. 밤의 카페서 대학 게스트룸으로 걸어가며 밤의 캠퍼스 본관 건물의 로고 조명을 보면서 칼뱅의 예정론을 떠올렸다. 낮 동안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캠퍼스는 밤이 되자 모든 기능을 내려놓고, 어둠과 불빛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세계는 더 이상 ‘사용되는 장소’가 아니라, 이유 없이 ‘존재하는 장면’으로 다가왔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망각은 대학은 가르치기 위한 곳이고, 캠퍼스는 그것을 수행하는 장소로, 나는 초청된 교수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자로서 기능할 때였다. 그러나 밤의 캠퍼스는 모든 역할이 사라질 때, 세계는 오히려 선명해진다. 그때 비로소 존재는 존재자로부터 분리되어, “왜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나는 왜 이 낯선 나라의 밤 캠퍼스를 바라보며 서 있는가. 이 질문은 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혹은 칼뱅에게, 나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 이 세계에 들어온 존재가 아니라, 이미 던져져 있는 존재다. 그 던져짐의 사실이 불쑥 드러나는 순간, 예정이라는 말은 물음이 된다.
지구별로 오기 전 먼 머언 어느 봄날
밤의 ‘따이 학 꾸롱’을 꿈꾸듯 보며
신짜오 신짜오라고 중얼거렸지 아마
코로나를 뚫고 이국 땅에 서 있는 나는 지구별로 오기 전 먼 머언 창세 전 어느 봄날 신의 품 안에서 밤의 구룡대학교를 꿈꾸듯 보며 안녕, 안녕 하고 중얼거렸다고 고백하는 것이 피투된 존재에 대한 자각이 아닌가. '신의 섭리(예정)'라는 형이상학적 틀로 해석함으로써, 우연처럼 보이는 삶을 필연적인 존재의 의미로 승화시킨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캠퍼스 건물은 그 자체로 '고립된 실존'과 '신성한 예정'의 시각적 발현이다. 여기에 "씬 짜오(Xin chào)"라고 중얼거리는 문자기호가 결합하며, 예정된 운명에 대해 인간이 건네는 최초의 인사이자 응답으로써 존재의 긍정이다. 이 디카시에서 칼뱅의 예정론을 끌어들인 이유는, 나(현존재)라는 존재자가 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존재) 속에서 결코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먼지가 아니라, 이미 예정된 신의 섭리 속에 머무는 의미 있는 주체임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사랑하며, 왜 고통을 겪고, 왜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살아간다. 이 디카시는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의 아포리아를 칼뱅의 예정론이라는 형이상학적 틀로 수용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칼뱅의 예정론이 삶의 유일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를 해석하는 한 틀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철학적 신학적 담론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풀리지 않는 형이상학적 아포리아 앞에서 절망할 때 조그마한 위안을 주기도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세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묻는 가장 농축된 미적 양식이다. 그래서 좋은 디카시는 아름답기 이전에 진지하고, 감동적이기 이전에 깊다. 디카시도 인간 존재의 심연을 건너는 한 방식이다.
AI가 생성한 아포리아 이미지
■ 아포리아
'아포리아'는 어원적으로는 '길이 없음' 또는 '통로가 막힘'을 뜻한다. 생에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당혹스러운 상태, 그것이 무엇이든 아포리아라는 말로 표상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나누며 상대방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해, 이 상태를 '아포리아'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아포리아를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진정한 지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첫 단계로 활용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지를 인정해야만 새로운 탐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포리아는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인간은 아포리아를 견디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만약 세계가 완전히 설명 가능하다면 예술은 불필요하다. 그래서 예술은 문제를 해결하는 형식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형식이다. 예술이 영원한 이유도 아포리아 때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