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는 유효 기간이 경과해도 버릴 수 없는 음식 같은 것 현실적으로는 이혼을 못해서 별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모 인터넷 사이트 대화방에서 만난 김진수씨(가명·36)가 그런 경우다. 김씨는 6살 난 딸을 데리고 친정에서 더 못 있을 것 같으면 집으로 들어가고, 남편과 못 살 것 같으면 다시 친정으로 가기를 일 년에 두어 차례씩 되풀이하고 있다. 김씨의 남편은 사업 실패와 가정 폭력, 외도 등 ‘종합상자’처럼 모든 문제를 다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과 눈에 보이는 현실적 절망 사이에서 위태롭게 발을 디디고 있는 그녀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언제까지 불안하게 살 수는 없겠지요. 일단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유효 기간이 지난 결혼 생활을 쉽게 못 버리는 이유는 ‘후회할까’ 두려워해서다. 통계에 의하면 이혼을 하고 후회를 하는 경우가 70% 이상이다. 후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와 자식 문제. 여성의 재취업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어렵고, 자식 문제는 당장 아이가 유치원 입학을 하게 되면 겪는다. 학부모 면담과 주민등록등본 등 몇 가지 서류를 통해 가정환경 조사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별거는 유효 기간이 경과해도 냉장고에 두는 음식처럼 최후의 보루가 된다. 김씨는 “(별거는) 생활비가 해결되고 자식과 이별을 안 해도 된다. 또 사회적 품위에도 손상을 안 받는다”면서도, “가끔씩 진한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며 말끝을 흐렸다. |
조강지처 콤플렉스? 별거라는 선택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우리나라는 아주 옛날부터 별거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강지처’라는 게 바로 그 증거다. 후처가 들어와서 살거나, 내침을 당해도 자식들을 위해 호적 정리는 안 한 것이다. 조은주씨(가명·46)는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 이혼을 보류하고 있다. 식당 체인을 운영하는 조씨의 남편은 딴살림을 차린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혼을 해줄 경우 아무리 따져봐도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조씨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위자료로 식당을 하나 준다고 했는데 이혼은 안 된다고 했어요. 식당 하나 주고, 평생 아이들 책임지라는 말처럼 들려서, 그 마음이 미워서요.” 이혼을 하지 않은 탓에 아직도 생활비와 양육비로 매달 일정 금액을 남편에게서 받고 있다. 남편의 사업이 잘되든 잘못되든 돈을 받고 있고, 아파트는 3년 전에 이미 명의 이전을 끝냈다. 아이들과 남편도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남편만 생각하면 옆에 있는 것처럼 화가 치민다. 극심한 편두통을 겪고 있는데 그것이 아마 화병일 것이라고 말한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겉으로는 엄마도 남자친구를 사귀라고 쿨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엄마가 아빠와 달리 헌신과 순결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조씨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가정 책임의 모든 걸 혼자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힘겹다”고 토로했다. 별거라는 선택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다. |
관리 별거, 좀 더 나은 부부 관계를 위한 쿨한 선택 외국의 경우, 좀 더 나은 부부 생활을 위해 일정 기간 별거를 하면서 관리를 하는 ‘관리 별거’ 시스템이란 게 있다고 한다. ‘관리 별거’는 일정 기간 양방의 행동에 대한 세부 사항이 명기된 계약에 따라 부부가 별거 생활을 하며 결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이렇게 쿨한 별거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물지만, 비슷한 케이스를 발견할 수 있다. 남편이 한의사인 남미주씨(가명·38)는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이혼을 막은 케이스다. 교사로 맞벌이 10년차인 남씨는 3년 전 아이들과 캐나다로 갔다. 남편과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10년간을 이혼을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각자만 바라보느라 갈등이 생겼던 것 같아요. 요즘은 캐나다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둘 다 아이들을 위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서로 다르게 살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살고 있더군요.” 캐나다 생활은 만족스럽다. 랭귀지 스쿨을 다니며 아이들 픽업하느라 하루를 다 보낸다. 물론 외롭지만 결혼 생활의 고민이나 권태가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예전과는 다른 평안을 느끼고 있다.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는 남편과도 새로운 느낌의 대화가 가능하다. “부부는 딱 몇 년 살고 헤어지는 관계가 아니잖아요. 사는 동안 서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서로를 발견해가는 게 필요한 거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부부가 맞냐고 하겠지만,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때는 결혼 생활 자체도 후회가 없다. 반대로 삶에 대해 회의하고 후회할 때는 결혼 생활 자체도 후회된다는 평범한 진리. 남미주씨는 그것을 말하고 싶어했다. |
어느 날 훌쩍… 트렁크를 들고 턴할 수 있을까? 별거에도 결혼 생활과 마찬가지로 유효 기간이 있다. 따라서 장기전일 경우는 곤란하다. 부부 문제 전문가들은 부부가 싸움을 하더라도 열전보다 냉전이 더 위험하고, 이왕이면 별거보다는 한 지붕 아래서 싸움을 하라고 충고한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빨리 내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별거를 선택한 많은 여자들이 가정으로 다시 턴할까? 배우 손숙씨의 경우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어느 날 훌쩍 트렁크를 들고 나왔던 것처럼 어느 날 훌쩍 다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지금처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주변에서 별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이혼을 한 사람 같으면 ‘그래 잘했다’라고 위로라도 하겠지만 별거를 하는 부부들에게는 그런 위로마저도 부담스럽다. 별거를 꿈꾸는, 별거를 감행하는 여자들이 그래서 더 외로울 것이다. 선뜻 그런 여자들에게 뭐라고 도움을 줄 수도 조언을 해줄 수도 없기에…. 그녀들은 들고 나온 트렁크를 버리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들이 과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더 현명한 일일까? 어쩌면 별거는 이혼보다 더 많은 고민을 안고 사는 단계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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