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와이퍼 노동자들 단결의 값진 성과 '뚜벅이재단'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2024년 6월 28일 안산시에 자리잡고 있는 생활협동조합 ‘좋은이웃’ 사무실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일본계 자본인 덴소코리아의 일방적인 회사 청산과 해고에 맞서 금속노조 한국와이퍼 분회는 2022~2023년 투쟁을 벌였는데 그 결과로 획득한 사회적 고용기금을 모태로 하는 ‘뚜벅이재단’이 본격 출범했기 때문이다. 21대 국회에서 한국와이퍼 분회 투쟁을 지원했던 우원식 국회의장까지 참석하면서 출범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본 원정, 단식, 규탄, 현장 점거…지난한 투쟁의 과정
한국와이퍼는 일본계 자동차 부품사인 덴소가 100% 지분을 소유한 한국 자회사로 현대차에 차량용 와이퍼를 생산, 납품하는 사업체였다. 2022년 7월 7일, 덴소코리아는 “와이퍼시스템을 매각하기로 결정했으나, 부품사인 한국와이퍼는 청산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한국와이퍼의 고용 불안은 2012년 일본 덴소와이퍼시스템이 한국와이퍼에 일본 수출품 라인을 깔았다가 실패하면서 시작됐다.
고용불안이 본격화한 것은 2018년부터였다. 덴소 자본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한국 내 3개 법인을 덴소코리아로 통폐합하고 적자사업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불안감을 느낀 한국와이퍼 노동자는 2018년, 노사협의회를 넘어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회사가 영업활동을 중지하자 2020년, 2021년 고용협약을 통해 ‘노조와 합의 없이 회사를 청산하지 않겠다’는 단체협약을 한국와이퍼, 덴소코리아, 덴소와이퍼시스템과 체결했다. 하지만 2021년 11월에 체결한 단체협약은 불과 8개월 만에 휴지조각이 됐다.
이후 한국와이퍼 분회의 지난한 투쟁이 이어졌다. 세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 투쟁, 40일이 넘는 단식 투쟁과 2022년 국정감사 투쟁, 200일이 넘는 현장 점거 농성 투쟁 끝에 2023년 8월 16일 고용노동부 안산지청에서 한국와이퍼 단체협약 조인식이 진행됐다. 한국와이퍼 투쟁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위로금 거부하고 외투자본 사회적 책임 물은 노동자들
거액의 위로금을 지급할 테니 희망퇴직 신청하라는 덴소 자본의 회유책을 거부한 조합원은 209명이었다. 228명의 조합원 중 소수의 조합원만이 개인적인 위로금을 받고 퇴직했고, 209명 조합원은 끝까지 투쟁한 결과로 사회적 고용기금을 단체협약을 통해 얻어냈다. 한국와이퍼 분회는 조합원 209명에 대해 덴소 자본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며 고용기금 마련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리고 이 기금을 이용한 노동공익재단인 ‘뚜벅이재단’이 지난 6월 28일에 출범한 것이다.
전체 직원 수 400여 명에 불과한 중규모 사업장에서 벌어진 고용조정 반대 투쟁은 한국 노동사회에 적지 않은 함의를 남겼다. 무엇보다 노동자에 대한 개별 위로금을 넘어서 사회적 고용기금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한국와이퍼의 사회적 고용기금은 무엇보다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외투자본에게 사회적 책임을 물은 결과이기에 의미가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확보한 ‘덴소코리아 등 외국인투자기업 지원 혜택 내역’에 따르면, 덴소코리아는 지난 2005년부터 2022년까지 중앙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약 200억 원이 넘는 지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지원의 대부분은 임대료 감면과 각종 세금 면제였다. 이미 안산지역은 2014년에도 독일계 글로벌 전자 자본인 오스람의 일방적 정리해고 투쟁을 경험한 바 있다. 당시에는 결국 100여 명의 조합원이 회사가 제시한 약간의 위로금을 받은 채 투쟁이 정리되었다. 이번 한국와이퍼 투쟁 결과인 사회적 고용기금은 외투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여 이루어 낸 성과이기에 의의가 크다.
‘오늘 채용, 내일 해고’ 풍토에 무력한 노동자들 교육·훈련 기회 마련
두 번째는 기업별 고용안정 체계의 한계를 보완하는 맹아적 형태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한국와이퍼의 사회적 고용기금은 크게 두 가지 용도로 활용될 예정이다. 첫째는 일자리를 잃은 한국와이퍼 분회 조합원을 포함한 지역 내 취약 노동자의 교육·훈련과 취업 지원, 둘째는 지역 내 고용 불안 노동자 지원 사업이다.
특히 첫째가 중요하다. 대공장의 정리해고만큼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한국와이퍼의 투쟁과 사회적 고용기금은 ‘오늘 채용, 내일 해고’가 일상화된 중소기업 산업단지에서 개인 차원의 구직활동을 넘어서는 지역 차원의 고용안정, 취업 지원 체계의 발판이 되었다.
지금까지 자본의 고용조정에 대한 한국 사회 노동의 대응은 ‘해고는 살인이다’는 주장 속에서 끝까지 고용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기업별 노동관계가 구조화된 한국 노동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대응이었다. 그리고 그 귀결은 중소사업장의 경우 약간의 위로금과 더불어 노조와 조합원이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와이퍼 또한 시작은 동일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사회적 고용기금 활용은 지역의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와 여성, 고령 노동자 등 취약 노동자 교육·훈련을 통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체계 마련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속의 노동자’라는 인식과 활동이 지역사회 연대 끌어내
세 번째는 지역사회와의 연대에 기반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사실 노동조합은 지역사회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결되어 있다. 공장에서는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이지만 공장 밖 지역사회에서는 소비를 통해 재생산을 담당하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와의 연대에서도 한국와이퍼 분회는 눈에 띄었다. 노조 출범 이전인 노사협의회 시기에 통상임금 소송을 승소해 받은 임금액 중 2~3%를 모아 지역 생활공제회 좋은이웃에 기부했다. 2018년 노조로 전환한 이후에는 단체협약을 통해 노사가 지역사회연대기금을 출연해 기부해 오기도 했다.
지역사회에 대한 한국와이퍼 분회의 기여 결과, 이번 투쟁에서도 안산, 시흥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외투자본 덴소 규탄, 한국와이퍼 노동자 일자리 보장을 위한 안산시민행동’을 결성해 지원했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노동자, 노동조합’이라는 한국와이퍼 분회의 인식과 활동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한국와이퍼 분회의 투쟁이 지역운동과도 적극적으로 결합했기에, 공장 청산 후 각자도생의 길로 가지 않는 사회적 고용기금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와이퍼 분회의 투쟁과 그 결과로 노동공익재단인 ‘뚜벅이재단’이 출범했지만 남은 과제는 많다. 외국계 자본의 일방적 철수 시 발생하는 대량해고 대응과 국민 세금으로 지원된 외국계기업 인센티브 환수방안 마련 필요성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불법대체 생산과 단체협약 미이행에 대한 강력한 처벌 필요, 무엇보다 산업전환기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와 여성, 고령 노동자 등 취약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화 방안 필요성 등은 한국 노동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숙제다.
특히 전기차 전환과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산업구조 전환은 전자 및 기계·금속업종이 주를 이루고 있는 반월·시화공단 노동자에게는 직접적인 고용 문제화할 가능성이 높지만 중소사업체가 대다수이기에 사실상 손놓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는 안산, 시흥지역에서 ‘뚜벅이재단’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은 소규모 기금에 불과하지만 ‘뚜벅이재단’이 공장 담벼락을 넘어 지역사회 차원에서 노동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를 소망한다.
일본의 건강한 지역 시민·노동사회가 큰 도움 주기도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극우화로 치닫는 일본 중앙정치와 달리 일본의 지역 시민·노동사회는 여전히 건강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 번에 걸친 한국와이퍼 분회의 일본 덴소 본사 항의 투쟁 과정에서 일본 지역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의 연대는 큰 도움이 되었다.
평판을 중시하는 일본 기업경영 풍토를 이용, 일본 지역 시민사회와 노조의 덴소 자본의 먹튀 행태 고발을 비롯한 연대 활동은 본국의 덴소 자본이 한국에서 열리는 노사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된 유력한 계기였다. 이미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 먹튀한 일본 수미다 자본을 규탄하기 위한 수미다 노조의 본사 투쟁 과정에서 일본 시민·노동사회가 적극 지원한 전례가 있기도 하다. 한국와이퍼 분회 투쟁은 극우-보수화하는 한-일 양국의 중앙정치와는 다른 한-일 노동·시민의 풀뿌리 연대가 굳건하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한 셈이었다.
*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