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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2절)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입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펄럭입니다.
<강소천 작사. 박태현 작곡 동요곡>
이 노래 다들 아실테지요.
바람이 불면 펄럭이는 태극기.
바람이 잠잠하면? 태극기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탐관오리의 횡포가 심할수록...
일제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흔들릴지언정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저항해왔습니다.
2019년 3월 1일,
독립종주의 날머리인 독립기념관 오늘 이 자리,
나부끼는 태극기는 그저 동요 속에서처럼 아름다울 뿐입니다.
연인, 가족끼리, 친구, 이웃끼리 시끌벅적.
오늘은 이런 시끄러움이 참 감사하네요.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기까지
이 땅 위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말씀을 들여다 보며
이번 종주 덕분에 근현대사 공부도 좀 하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구나...
우리 민족은 진짜 한이 많은 한민족이었구나...
걸음하며 생각하고, 걸음하며 느끼며
다른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묵직한 산행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로
J3-Club 주관(중부지부)의 3월 1일 천안 독립종주(50km) 공지가 올라오고
글을 보자마자 참석 댓글을 달았습니다.
누구랑 같이 가자 그런 이야기도 없이,
걷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저 3월 1일에 그 길 위에 서보고 싶었고, 걷고 싶었습니다.
2019년 올해 제 첫 주말 산행지가 또한 바로 여기였습니다.
뭔가 의미 있는 걸음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고,
마침 3.1운동 100주년에,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니...
‘小독립종주’ 천안독립기념관-흑성산-태조산-성거산으로 빙~ 돌아 원점(약25km)
지인 몇 명과 1월 5일(토) 다녀왔었지요.
이른 아침 독립기념관 외관을 여유롭게 거닐며 살피고,
추모의 자리 앞에 고개 숙여 묵념의 시간을 가지며
흑성산으로부터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산길을 걸었습니다.
천안을 품에 안고 빙 둘러져 있는 저 멀리 바깥의 산군을 바라보며
‘기회 되면 저 산길로 해서 50km도 한번 걸어보고 싶다~’
그런 바람도 슬며시 가져 보았고요.
기도하고 있는 양손, 새의 날개를 형상화한
독립기념관의 상징탑인 ‘겨레의 탑’
‘태극기마당’의 힘차게 바람에 춤을 추는 태극기며
자유와 독립을 위해 나아가는 ‘불굴의 한국인상’
지금의 우리처럼 그저 제 땅 위에서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며
그렇게 살고 싶었을 사람들.
이 평범한 모습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그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00년 전 그날.
무기도 하나 없이 손에는 오직 작은 태극기 하나 들고
오로지 독립을 염원하며 ‘만세’를 외치던...
잠시 태극기에 대한 자료도 좀 찾아보게 되고...
국기는 고종 19년(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가 처음 사용하였고,
고종 20년(1883년)에 정식으로 국기로 채택, 공포(公布).
1949년에 문교부 고시로 현재의 형태로 확정.
난(亂)이다, 운동(運動)이다, 혁명(革命)이다.
‘3.1운동’을 부르는 이름도 많았습니다.
그저 단 하나,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몸부림이었는데...
이 땅 위에 사는 우리는 모두 그들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셨고
모두의 조상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앞으로 살아갈 후손인 우리들을 위해
기꺼이 제 한 목숨 내던진 분들.
그분들을 생각하며 아프고 감사한 마음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안중근 의사 차남 ‘안준생’이 했던 말
호부견자(虎父犬子)라...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인 게지요.
비단 ‘안준생‘만이 그랬겠습니까?
그 시대에 수많았던 제2, 제3의 안준생들... ㅠㅠ
사실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라고 뭐 대단히 달랐을 거라는 착각.
저도 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비겁하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내 한 몸이야 어찌되어도 상관없지만
우리 가족이 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간다면
어찌 옳은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ㅠㅠ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검색]
그 호랑이 아비, 3.1만세 운동의 눈빛을 좇아가다 보니,
또 다른 이름 석 자와 마주합니다.
동학의 접주이며 동학농민군의 대장인
전봉준(全琫準) (1855.철종6~1895.고종32).
전봉준의 본관도 천안(天安)이었네요.
(천안은 고려 태조가 ‘하늘 아래 으뜸가는 곳’이라고 명명한 데서 기원)
전봉준을 만나보기 전에 잠시...
그 전 상황을 둘러볼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12살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며 정치를 주도하게 됩니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 관리 척결,
민생이 안정(후에 경복궁 중건 등으로 백성의 삶은 피폐)되었지만,
왕권강화에 집착하며 천주교도들을 박해,
쇄국정치를 펴 국제 관계를 악화 시켰고.
이 시기에 산업 혁명 등을 통해
거침없이 동양으로 진출해오고 있었던 서양 국가들,
대원군은 서양 열강과의 통상을 받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는데...
(전국 각지의 ‘척화비’는 이런 단호한 의지를 표명)
1873년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게 되자,
실권은 고종에게 넘어가고,
곧 문호 개방에 적극적이었던 민씨 정권이 장악하게 됩니다.
1875년 5월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이유 없이 일본 군함을 공격했다는 억지 구실)
일본은 문호 개방을 요구해왔고.
1876년(고종 13) 민씨 정권은 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일본과
강제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1882년 5월, 조선 정부는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의 통상 조약을 시작으로 청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불평등한 외교 관계를 맺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세계 속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체제로 강제 편입되며
그들의 각축장(角逐場)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1882년 6월 9일 구식군대인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도 받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한 달 치의 급료를 받게 되는데,
그 봉급미 안에 모래가 반이나 섞여 있었기에
당시 선혜청 당상(宣惠廳 堂上)이었던 민씨 세력의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대원군은 그런 군민의 불평과 은밀히 연결되어
민씨 수구파 및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을 하게 되고,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궁으로 난입.
고종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대원군에게 전권을 주며
반란의 수습을 맡깁니다.
민씨 일파의 청 군대 파견 요청으로
대원군의 재집권은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가며
임오군란(壬午軍亂)은 3일 천하로 끝이 납니다.
이렇게 조선에 들어왔던 청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고 하며 적극간섭정책을 자행하는데,
민씨 수구파는 이런 나라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1884년 12월 4일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개화당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과 개화 정책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여
우정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킵니다.
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달성하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야기하지만,
이 역시 민씨 정권과 청군에 의해 3일 천하로 끝나게 됩니다.
1885년에 청과 일본의 텐진조약이 체결되고
(청나라와 일본 중 한 나라가 조선에 들어오면
같이 들어오기로 한 조약인데
정작 조선은 조약 내용도 알지 못하였네요.)
청일전쟁(1894년~1895년) 중...
일본군의 비호 아래 진행된 이 개혁 갑오경장(갑오왜란)을 기점으로
근대화로 서서히 정착이 되어 갔고.
악질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1892년 말 부임).
당시 고부는 호남에서도 으뜸가는 곡창지대로
탐관오리가 선호하는 곳이 됐고,
실제로 가혹한 수탈이 빈번하게 자행,
서로 이곳 군수로 오려고 안달이 났겠죠.
고부 봉기는 이런 환경적 원인으로 발생.
(만석보(萬石洑) 증축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 착복, 있지도 않은 죄목을 씌워 착취,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며 강제 징수 등 온갖 폭정을 자행)
그 해 1893년 6월 감세 탄원에 앞장선 전봉준의 아버지가
조병갑에게 붙잡혀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숨지고,
12월 군민들이 조군수의 불법에 또다시 항의를 했지만,
이또한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전봉준 등 농민들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만석보를 때려 부수며 결국은 고부관아를 습격.
드디어 1894년 2월 10일 동학농민운동 이 일어나게 됩니다.
조병갑은 전봉준의 습격을 받고 간신히 피신하였지만
정부에서도 그의 행위가 밝혀져 파면 -> 전라도 고금도로 귀양살이.
(하지만 1895년 7월 사면령이 내려 유배가 풀리고
후에 고등법원 판사가 되어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매천야록(조선 말기 고종1~47년간 역사를 서술한 비사)을 쓴 황현 선생 은
“죄인들이 모두 처벌을 면했건만 아무도 항의하지 못한다”며
탄식을 하셨고...
ㅠㅠ
...
조선 정부는 정부의 힘으로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기 어려워지자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게 되고
청국이 ‘텐진조약’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하자
그걸 구실로 일본도 조선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조선에 상륙.
이리하여 또다시 조선 땅에 청·일 양국의 전운(戰雲)이 짙어지게 됩니다.
많은 전투가 이어지고...
1894년 11월 우금치에서 운명을 건 공방전은
근대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며,
간신히 살아남은 동학군은 후일을 도모하며 해산하게 됩니다.
순창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전봉준은 1894년 12월 30일 밤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습격을 받아 관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
이듬해 4월 23일 교수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역적으로 낙인 찍혀 족보도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농민군의 가족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친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것이 끝이라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그 뒤 종두법 실시, 단발령 공포 등으로 이어지며...
반일 감정이 더욱 커지고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고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됩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함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11월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아관파천)
1896년 서재필을 비롯 독립협회가 조직.
독립신문을 발간 및 독립문을 세우고, 만민공동회를 개최
독립협회의 정치 계몽운동은 활발해지게 됩니다.
1897년 8월 고종황제는 드디어 환궁을 하고
대한제국이 자주국가임을 선포.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 교통과 통신망을 장악...
제1차 한일협약 체결 이른바 고문정치를 실시.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체결하며
또다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 통감정치를 하게 됩니다.
이 배후에 있었던 을사오적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어느 하루라고 편할 날이 없었고 ‘독립’ 기약도 없었지만...
우리 민족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았고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이런 땅에서 어디 숨이나 편히 쉬고 살 수 있었으려나.
에효~~
1907년 헤이그특사를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1910년 8월 29일 강제 한일합병으로
민중 항거와 의병전쟁은 더 치열해지며
비밀결사대를 조직, 독립운동은 전개.
일제의 횡포 그 끝이 어디가 될는지...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 무단통치를 자행하며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방대한 토지를 약탈하며 농민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던
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그 이듬해 1919년 1월 파리 평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원칙을 발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이 발표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 세계 약소민족들은
큰 희망과 용기가 생겼고
우리나라도 독립 쟁취를 위한 정당성을 주장하며
독립운동을 더 활발히 전개하게 됩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
갑작스런 그 죽음은 일제의 독살.
(의심할 만한 많은 증거들이 나왔고)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각지에서 망국의 울분이 터져 나오며
일본에 있는 조선청년독립단(한국 유학생들)
동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2.8독립선언)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 사건은
고종의 서거와 맞물리며
이후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 선언으로
국내의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
33인의 민족 대표는 '독립선언서'를 작성,
드디어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을 기해
(전국 각지에서 국장일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점을 틈타)
이틀 전인 1919년 3월 1일(양력)에 만세 운동을 추진합니다.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잡혀가고
학생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 시위를 진행...
5월 말까지 3개월간 전국적으로 평화적 만세시위운동이 이어졌고,
일제는 그런 군중에게 총탄을 쏘며 살육.
민가, 학교, 교회 등에 불을 지르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때 유관순 열사(1902~1920)는
이화학당에 다니는 학생으로 18살이었고
파고다공원 3.1운동에도 직접 참여하게 됩니다.
유 열사는 3.1운동으로 전국적 휴교령이 내려지며
고향으로 내려가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서울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며
병천 시장에서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가족 마을 어른들에게 상의, 태극기를 만드는 등
그 일대를 밤낮없이 돌며 만세운동을 독려.
4월 1일(음 3.1) 아우내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합니다.
(장날 장터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
이날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
19명이 순국하였고
주도자로 찍힌 유관순 가택은 불에 타버리며
유관순 열사도 주도자로 체포, 공주교도소에 수감.
친오빠 역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
후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 오후2시 3.1운동 1주년 기념식으로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합니다.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졌고
이 사건으로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결국 순국.
10월 12일 유관순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장례를 지냈고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게 됩니다.)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지고
이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며, 6.10만세 운동, 광주학생운동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수류탄, 폭탄 거룩한 행보로...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국내외 활동은 이어지며 결국,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며,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을 맞게 됩니다.
우리의 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순간순간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이어진
민족 항쟁의 결과로 얻어진 것임을
부디 잊지 마시기를 바라며...
100년 전 그날의 만세 함성, 모두의 간절한 바람 소리 찾아
시간 터널을 지나며 역사 속으로...
잠시 다녀왔습니다.
2019년 3월 1일, 감사한 마음 담아
국화꽃 한다발 준비해 천안을 찾고
그 숭고함을 기려보고자 독립종주길에 오릅니다.
2월 28일(목) 밤 11시가 넘어
병천 순대거리(원조병천전통순대 식당)에서 순대국밥으로 식사 후,
(60여명의 사람들이 한 식당을 가득 메우니
주위에 앉은 분들을 빼면 인사 나누기도 어렵습니다.)
아우내 식당가 옆의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에서 단체 사진을 시작으로
기다려왔던...
하지만 마음 편하게만 걸을 수 없는
50km 독립종주가 시작됩니다.
(이 기념공원은 운동 당시 시위 군중이
일본헌병의 총에 맞아 순국한 장소를 보존하고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한밤 중 차 없는 도로를 따라
탑원교차로에서 유관순열사 거리로 진입
“어서오십시오. 이곳은 유관순 열사 사우입니다.”
간판이 J3-Club 60여명의 일행에게
반갑다 ‘어서오시라~’ 인사합니다.
다부지게 만세하며 서 있는 유관순 열사 동상 앞에서
단체 인증 한 번 더 하며
야생화/ 추사/ 알라딘/ 오서산/ 만사성
대장님들 소개의 시간
작년 클럽에 가입 후, 실크길 처음 섰을 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
이제는 저도 클럽 식구가 다 되었나 봅니다.
제법 대장님들 얼굴과 이름을 비롯
회원님들 얼굴과 닉네임 아는 분들이 쫌 있네요^^
앞에 서 계신 대장님들 포스보니 흐뭇합니다. 든든합니다.
초혼묘에 올라 준비해간 국화꽃다발 헌화하며
잠시 경건하게 묵념의 시간을 갖습니다.
잔다르크를 좋아했던 18살의 유관순 열사는
(잔다르크는 어린 여인의 몸으로
나라를 위해 전장터를 누볐던 성녀),
참으로 어여뻤을 여학생...
나라를 위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았던
유관순 열사와 그의 가족.
그 당시 조선에 유관순 열사는 비단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모를 제1, 제2의... 제3의 유관순 열사분들....
그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이런저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 유관순이 뭐 한 게 있다고 1등급 훈장을 서훈하나요?
‘독립운동을 유관순만 한 것도 아니고
수 십 만 명이 했는데‘라며...
일제의 중요한 인물을 죽인 것도 아니라며
어이없다고...한 그 질문.
답변에 올라온 이화여대의 대대적인 홍보가
결정적이었다는 이야기며...
“...전 재산을 쏟아 부은
석주 이상룡(1858~1932)도 3등급이다.”
이런 글들을 접하며...
또한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
.
아.. 이런 말도 안되는 논쟁들...
지금 나라를 위해 목숨 받친 분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있는 이 현실.
우리가 가진 모든 걸 다 줘도 결코 아깝지 않을 분들입니다.
현재 유관순 열사는
_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_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상.
유관순 열사의 봉화지가 있는 매봉산.
거사 하루 전날인 3월 31일 밤...
바로 이곳, 유관순 열사의 손으로부터 횃불이 밝혀졌지요.
20여개가 넘는 곳으로 이어진 불길
불이 산마다 차례로 피어오르며
유관순 열사가 느꼈을 그 마음...
불이 타오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겠고...
그렇게 거사의 불길은 활활 타올랐습니다.
숲길 등산로를 따라 유관순 열사의 생가로 갑니다.
유관순 열사가 걸었을 이 길.
그 길 위에 제가 서 있습니다.
생가 주위로 클럽 회원들 모여
포토존에서 인증들도 남기고
생가 안에도 들어가 봅니다.
4월 1일(음 3.1) 거사 당일 아침
가족들이 모여 마지막 식사를 하는 모습이
조용히 그려지며...
제대로 된 밥이나 드셨을지...
이 집에 다시는 못 오겠구나.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
어쩜 이런 생각도 했을 껍니다.
어떤 마음으로 식사를 하셨을지...
열사의 온 가족이 이날의 만세운동을 위해
3월 한 달을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준비해 왔었습니다.
그저 옛날 집 복원이 아닌 이곳은 바로
‘유관순 열사의 생가’입니다.
생가 옆으로는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고.
3.1 운동은 이후 국외로
만주 , 연해주, 미주 , 일본 등에서 만세시위가 확산됩니다.
역사적 의의로 남녀노소,
계층과 신분을 초월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1910년대의 강압적인 민족통치에서
1920년 문화통치로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약소민족의 민족 운동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중국의 5,4 운동이라던가,
인도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에 영향을 줍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 가 “한국은 동방의 등불”이라며
한국의 저력에 찬사를 보낸 말 들어보셨죠?
역사를 돌아보다보니...
어쩐지 타고르 시인이 그렇게 말한 의미가 알아지는 듯도 합니다^^
동성산~광덕산~몽각산을 지나 만뢰산까지...
어둠속에서 일렬로 늘어선 불빛
걸음 옮기며 때때로 뒤돌아 그 불빛을 보며
‘이런 게 바로 힘이구나’ 느끼며 걷습니다.
앞, 뒤로 든든한 이 기운들
독립운동을 하셨던 그 분들에게도
힘든 길 같이 걷던 동지가 있었고
독립(獨立)을 생각하며 어느새...
‘홀로 독獨’에서 ‘한가지(무리, 함께) 동同’으로...
종주 이름이
‘독립(獨立)종주’에서,
‘동립(同立)종주’가 됩니다.
만뢰산 이후 사람들 걸음이 심상치 않더니..
그다음부터는 서바이벌이었군요.
몰랐네요. ㅎ
만뢰산 가는 길에 잠시 페가소스님과 만나 걷다가
힘이 넘치는 페가소스님 먼저 보내고
홀로 천천히 진행합니다.
어둠 속, 만뢰산 정상에서 일행들과 만나고...
또 같이 걷다가는 날이 밝아오고
새벽녘 ‘싸리재’에서는 또 홀로 걷습니다.
앞사람 따라 걷다가 문득 고개 들어보니
아~ 좀 더디 가야겠다... 그런 생각이...
제가 속도전에 능한 사람도 아니고...
오늘 그런 걸음하자고 온 것도 아니었고^^
밝아온 새벽 하늘 빛...
새벽걸음은 늘 좋습니다.
하늘의 눈썹모양을 한 그믐달..
이 달 모양이 오늘 우리가 걷는
산군 모양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월봉산을 향해 가다가 만난 일출
사실 먼 산 위로 둥글게 떠올라 있긴 했지만
한동안 바라보며 홀로 서있다 갑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을테고
빼앗긴 산에도 태양은 날마다 떠올랐겠지요.
빼앗긴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걸음을 또 기억해보며...
".... 우리 몸에 있는 피 근량대로 전부를 다 쏟아 바쳐야 합니다.“
김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한 자 한 자 내 뱉으며 피를 토하는 심정이셨겠지요.
피가 전부 쏟아지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죽는 겁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했던 이분들.
월봉산에서 표식지 찍으러 나무를 헤치고 가는데
뒤에서 후미 대장님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야생화 대장님, 만사성 대장님
아~ 딱 붙잡혔습니다.
맙소사. 제가 후미였네요.
뒤에 두 분 더 있다고 하셨는데...
오늘도 이렇게 저는 후미에 붙잡히고 맙니다.
너무 놀았나? ^^ 헤헤...
깽이.. 토끼몰이에 쫓기듯 이제 토깽이 되어
지원장소인 ‘부소문이고개’까지 달려가야겠습니다. 읔...
농담이구요. 후미 야생화 대장님과 만사성 대장님
그냥 천천히 가라고 해주십니다.
그래도 부담은.. 죄송하니까 ~
야생화 대장님 배낭 속의 쿨피스^^ ㅋㅋ
그거 엄청 맛났었던 거 아시려나?
제가 거의 반은 다~ 먹은 듯...
얼마나 맛있었냐 하면은요.
집에 갈 때 꼭 사가지고 가야지..
생각했을 정도로^^
달달한 쿨피스로 충전하며...
“힘이 난다. 힘이 나.”
조금 가다보니 바람구름님,
같이 걷던 일행들 먼저 보내고
저 기다리셨다가 같이 후미로^^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오셨다던 두 분까지...같이 걷습니다.
(제가 닉을 잘 몰라서..^^죄송)
배방장님 후미인 제게 언제 오느냐며 전화 주셨던 곳..
‘부소산 정상’ 도착입니다.
음... 노란 옷이 보이는데.. 딱 봐도
“산이지부장님이시다~”
어찌나 반갑던지..
방장님은 물길 찾아 이미 떠나셨고.
여기 방장님까지 계셨으면 두 배로 더 반가웠을텐데.
좀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
산이지부장님과 다같이 후미 즐겁게 인증합니다.
사실 저는 제가 가장 걱정이라
이때부터 후미 제일 앞에서 열심히 걸음합니다.
저땜에 느려지면 안되니까....
웅성웅성.. 시끌시끌...
소리가 산 속으로 나무들 너머 들려오며
금북정맥생태통로터널 도로를 가로질러
드디어 지원 장소인 ‘부소문이고개’에 도착.
사람들 다~ 빠지고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 많이들 계시니 좋습니다.
한밤중, 출발하며 유관순 열사 만세 동상 앞에서
인사하셨던 소청님과
(밝은 곳에서는 오늘 처음 뵙습니다)
어묵국을 몇 그릇이나 펐을까~
조금은 지쳐 보이시는 황금산지부장님
그리고 우스개 소리로
‘J3 Club 유령회원’이라고 하시는
이곳에서부터 합류하게 된 대전에서 오신 지인 세 분
제가 걱정이 되어
( care하겠다고^^),
사실 이분들도 3월 1일 의미있게 독립종주길
걸음 하고 싶어 오셨지요.
어쨌든 맛난 거 많이 싸들고 이리 오셨네요.
이쯤에서 ‘만세’ 한 번 부르고 싶어집니다.
혼자는 약하지만 같이할 동지가 생겼다는 건
나아감이지요.
못할 게, 못갈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한그릇 가득 퍼 주신 어묵국이며, 사발면
감사히 든든하게 먹고는 출발합니다.
“소청님, 황금산 지부장님 감사합니다.
J3-club 지원 만세^^“
바람구름님 여기까지 저랑 발 맞춰주시느라 고생하셨으니,
후미대장님들과 좀 더 드시며
부담없이 놀며 오시라 남겨드리고...
먼저 갑니다.
위례산~촛봉(갓봉)~우물목고개를 지나
도로길을 걸어 성거산순교성지(제2줄무덤) 표지석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종교를 떠나 옳은 일을 하면 마음이 좋다는 의미겠지요.)
독립운동 이끌었던 종교인 분들...
군부대와 성거산 방향 갈림이 나오며 좌측 숲으로 듭니다.
성거산 정상에서 기다리고 계신 발빠른 엘리사벳님 일행님과 합류.
딸기, 김밥 먹으며 봄소풍 즐기듯
땅에 엉덩이 깔고 앉았다 일어서고
등로길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만큼 폭신폭신합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며 곳곳이 질퍽거리긴 하지만
이또한 봄(春)...
나무계단 정상의 정자가 있는 태조산.
잠시 앉아 간식 먹으며 쉬어가고
아홉사리고개에서 흑성산 방향으로 길 잡아 가고
역시나 종주의 마지막 산답습니다.
500m가 넘게 우뚝 솟아 있네요.
한발 한발 질퍽거리는 검은 흙 밟아가며 비탈 오릅니다.
낙엽 아래 땅이 새 생명 밀어 올리며 바쁜티를 냅니다.
헬기장을 지나 옆으로 활공장에 서서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처럼 ‘만세’를 해 봅니다.
두 팔 날개삼아 날아도 좋을 듯 합니다.
산행도 막바지에 이르고
흑성산 안내 속에 어사 박문수님의 묘소 이야기...
지금 독립기념관자리가 명당은 명당인 듯 싶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보석도 땅 속에 있으면 돌이나 마찬가지고
아무리 좋은 땅도 찾아오는 이 하나 없으면
죽은땅이나 매한가지...
흑성산성 담장 옆길 걸으며 들풀에 눈길을 주며...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들풀이 긴 어둠속 흙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독립운동하셨던 분들의 처지와 어쩐지 닮은 듯 하여
예사로 보아지지 않네요.
바로 옆의 흑성산 데크전망대로 가니...
두건님과 일행들께서 계시네요.
두건님 올리시는 산행기 속에서 종종 뵈어서
저 스스로는 그 분들이 좀 익숙한데... 처음 뵙는 분들...
꾀기도 챙겨주시니 맛나게 먹습니다.
그렇게 독립기념관 날머리 ‘추모의 자리’ 앞에 섭니다.
나는 오늘 이렇게 짧은 산길 50km를 걸었지만
언제 끝나게 될지도 모를 그 기나긴 일제 치하를 견디며
살았어도 산목숨이 아니었던 이 땅 위의 모든 분들...
‘독립‘ 그 하나만을 염원하며
밤이나 낮이나, 죽어서도 외쳤을 그 단어 ‘독립’
훌륭한 분들 집안은 대대손손 이어져야 하거늘
근현대사 역사를 돌아보면서 한숨만... 가득...
한 집안의 아비가 독립운동을 하면
일단 가족들은 생계유지가 힘들어지고
있는 돈 그나마도 독립자금으로 들어가게 되며
이 땅 위에 발붙이고 살 수도 없고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심지어 이름까지도 바꿔 살아야 했던...
광복이 오고도 오랜 시간 반란으로 낙인 찍혔던
동학농민운동도
일본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도 있었지만
양반 지주층의 후손들이 과거 나쁜 사람들이라 매도해왔고
100주년이 되었을 때에서야 명예회복사업 시작됐습니다.
"3.1운동" 1946년 3월1일 국가 경축일로 지정.
49년에는 국경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달력의 빨간날이라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
애초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묵념을 올리고
민족정신을 되새기는 3월 한달 되길 바라며...
서산대사의 선시(禪詩)에서 나오는 말로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읊조린 말입니다.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후손들 되게 하소서.
첫댓글 장문의 멋진 산행기 잘보았습니다
완주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무탈한 발걸음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완주 첫번째로 축하해주시고
긴 산행기 잘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대대로님도 늘 무탈한 발걸음 이어가시길요^^
와우!~~~~
박학다식의 표본 지리깽이님...
삼일운동 백주년 기념에 대한 산행논문 잘봤구요.
다시 한번 정독을 해야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박학다식이 아니고 줄여쓰는 재주가 없어서
쓰다보니 길게 늘어진겁니다.
정독은 하지 마시구요.
정독하시다가 오류 발견하면 창피하니께...요.
저도 뵈어서 반가웠구요.
제가 두 분 쫓아가겨다가 중간에 포기했다는...
치고 나가시는 힘이...^^
지리 향기가 느껴져서 그런지 기분이 참 좋아요. 늘...
담에 또 뵙길 고대하며~
산행기 보니 너무 잘 쓰셨는데 내는 왜 눈이 빙빙 돌까요 하하하
그럼 나중에 읽어봐야 되겠어요
너무 길어서요
독립 종주 길 의미가 많은 곳입니다
난이도는 약하지만 여러 산우님들과 같이 걸을 수 있어 즐거웠네요
쟁이님 잠시나마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거 같아요
독립기념관이 너무 복잡 에 가시는 것도 못 봤네요
수고 많았씁니다
다음 삼길에서 베요
리딩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대장님들께는 늘 고맙고 감사하고 그러죠.
눈 돌게해드려서 죄송합니더~
회원님들 눈 건강을 위해서 제가 후기를 쓰지 말아야하는데...ㅎㅎㅎ
좋은 길 위에 같이 있었어서 좋았더랬습니다.
다음 산길에서 또 뵙겠지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와우~ 깽이님 쵝오^^
봉준대장님이 지하고 같은 宗氏임돠^^
담에 전국구님 뵙게되면
전봉준 대장님하고 닮았나 안닮았나 찾아 봐야 겠습니다.
그 눈빛이 닮았는지??ㅎㅎ
긴 글 읽으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죠?
주말 잘 보내시구요.
깽이님 꽃은 왜 들고 오셨데요?
네~ 유관순 열사 헌화하려고요....
아....우린 여적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빙구들~
몇번의 산행기와 방장님의 강행기에서만 보았았던 깽이님
만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런 명품산행기는 자주 볼수 있는게 아니기에 핸폰으로 보다가 급 컴으로 바꿨습니다.
다시금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을 되뇌이게 하며
힘없는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순간입니다.
일제치하 3.1운동 10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서구 열강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네요.
제가 좀 유치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
산행 가기 전에 유관순 위인전 2권이나 읽었드랬지요.
그러다보니 유관순 열사님도 여자인지라..
꽃 좋아하실 듯 하여... 준비해봤습니다.
사실 저도 작은 국화꽃 좋아하거든요.
향기도 모양새도 화려하지 않아서...
좋은 날은 오겠죠. 내일이 더 좋고 그 다음 내일이 더 좋고.. 그래야겠지요.
3.1일 운동에 대한 의미 와 글 잘봤습니다.
완주 축하 드립니다
제가 산에 다니며 역사 공부하게 될 줄 생각도 못했는데...
감사한 일이지요. 배울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겨서요.
살아있는 공부가 되는거 같습니다. 찾아가고 걷고 보고.. 느끼고 찾아보며...
앞으로도 배울 수 있는 걸음 많이 찾아 다니고 싶은 욕심이....
늘 안산하시길 바라며... 긴 글 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광복까지 공부 많이 하셨죠.자세한 글을 읽으며 몰랏던 부분까지 알게 됩니다.
땅과 ,언어와 글,하늘 마져 빼앗긴 세월 ...힘들고 괴로운 날들이 무려 35년간 이어지며 의로운 분들이 태극기를 들고 일어서죠
전봉준과 국가 1년 제정 15% 이상을 탕진한 민씨 일가와 명성황후 그리고 을사조약과 한일합병까지 글 잘봤구요 소중한글 감사 드립니다.
공부하고 오라는 배방장님 글 땜에 더 찾아보게 되었던 듯 싶습니다.
저는 시키는건 좀 잘 하는 깽이라서...ㅎㅎㅎ. 덕분에 감사요.
배방장님께 이래저래 많이 배우게 되는 듯 싶습니다.
늘 감사드리구요. 강길 늘 무탈하시길 응원드릴께요.
참, 지리산으로부터의 강길 또 기대됩니다.
지리산에 강길이 엄청 엄청 많았으면 좋겠는데..
이제 1개 정도 있는 듯 하여 섭섭하기도 하고요.
부끄러운 글 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배방장님.
버스에서 깽이님첨뵐때 꽃을준비한것보고.제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마음도 이쁘고.미소도 아름다운 깽이님..
수준높은 산행기에..공부좀했습니다.
논문수준이십니다.ㅋ
방장님 학위하나 주셔야겠습니다.
담달 반갑게 또 만나요.
독립종주 완주축하드리고.수고많았어요.
페가소스님의 정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그 말이며 얼굴 미소..
또 그립네요. 참 반가웠구요.
또 보면 더 반가울 듯...
페가소스님 그 밝음이 늘 이쁘십니다.
앞으로 독립종주 후기는 끝 ㅎㅎ
아주 정성스런 후기..폰으로 보다가 아니다 싶어서 컴으로 다시 봤네요..
고맙구요.. 다시 한번 3.1절 숭고했던 선열들의 희생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만나서 반가웠구요..수고하셨어요..
저보다 길게 쓰실 분은 아마도 당분간 안나타나겠죠? ㅎㅎ
후기를 길게 써서 죄송한 마음과 함께 올렸습니다.
아휴... 누구 보라고 이렇게 길게 올리나.. 암두 안보겠다~ 싶어요. 저도.
그래도 많이 줄이고 줄여서 올린거라는거...ㅎㅎㅎ
두건님 늘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드리구요.
두건님은 딱 한 번 뵙고도 기억하게 되었다는...^^
눈도 노안인데...... 이러믄 어쩌라구 ^*^
쿨피스 자주 줄게 ..... 이나이에 공부는 좀그렇타 좀 봐주라 환장하것네 다 못읽고 중탈한다 ^*^
ㅋㅋ 저도 눈 아파요. 오래 컴퓨터 보면은...
죄송합니다. 야생화 대장님~
저 어제도 쿨피스 2잔이나 마셨는데...
앞으로 쿨피스 보면 야생화 대장님 먼저 생각날 듯....
후미 대장님 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드립니다.
저 사실 제 글 중탈 하시는 분들 나오는거 은근 즐기니까요.
중탈 해 주셔서 감사.. 꾸뻑~
해토머리에 걷기도 힘들었을 하드웨어 길인데.. 이렇게 소프트웨어를 실속있게 채워주시고...^^
저 남강 이승훈선생 말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서경천도를 주장한 `묘청의난`을 탄식한 단재 신채호선생이 근세에 빛을 보지 못한 이유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주창함도 있겠지만 신라 김유신장군을 외세를 끌어들인 나쁜 예로 들어서 이기도 했답니다.^^
배울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제가 도통 텅~ 비어 있는 사람이라서요.
독립기념관 내부 못 가봤는데.. 올해는 기회 만들어서 꼭 가보고 싶습니다.
저는 글 쓴 저보다도 제 긴 글 읽어주시는 분들이 더 신통해서...
어떻게 이렇게 긴 글을 읽어주실 수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더 감사드리구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가 아는 동생 중에 달이라는 녀석이 있는데...
^^
동해안길 간다고 댓글 단거 보셨구나.
산만 좋아했는데.. 강길의 매력도 조금 맛 보고 있는 중이구요.
해안길도 어쩐지 설레입니다. 재밌을 거 같아요.
산길, 강길과 다른 면들도 만날거 같고요. 응원 감사드리며...
글을 수준있게 정말 잘적으셨네요
한번도 뵙지않았지만 사고력이 멋지십니다..
많은분들과 산행 그리고 수준높은 산행기록을 잘읽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준있게 잘 적었다라기 보다는...
저도 이번 기회에 정리하며 공부하며
모르던 것들도 알게 되었네요.
지맥님과도 언제 뵐 날이 있겠지요? ^^
항상 안산 즐산 하시길 바랄께요~
산행 후기글을 통해
근 현대사 역사를 다시 짚어보게 하는 훌륭한 글입니다.
많은 왜곡된 역사들이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고 제대로 조명받고 있지 못하는 근 현대사
3.1운동의 숭고한 정신과 상해 임시정부까지
폄훼 하고 왜곡하는 부류들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한민국
민주화는 많이 진척이 되어있지만 해방 후
일제청산이 전혀 되지 않았던 관계로 친일잔제가 보수라는 탈을 쓰고 사회 곳곳에서
나라의 혼을 갈아먹고 사회 갈등을 유발하고 있기에 100주년 3.1정신은
우리 후손들에게 더욱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쉽게 못보는 후기 글이기에
안 빼먹고 정독 ㅡㅠ
산행과
후기 글까지 수고 많았습니다
희망새님 늘 지켜봐주시고 응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긴글 정독해주시느라 감사드리구요.
올 한 번쯤은 함산해야할텐데.. 기회가 올런지...
저도 희망새님 가시는 걸음 늘 응원 드리겠습니다.
깽이님~~역사공부 제대로 합니다^^~벌써~정독하고 기억할건 기억하도록 할게요^^~멋진산행기 잘읽고갑니다~
보라님 이번 산길 오실 줄 알았는데...
찾아봐도 안 보이셔서 좀 실망했더랬습니다.
다음달 강행에서 두 배로 기쁨 가지고 뵙길 고대하며...
챙겨서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보라님~
산행기 잘보고 갑니다
그냥 제 긴 글 읽어주셨다는 분들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제 스스로도 너무 길게 써버린 걸 알아서...죄송해서...
앞으로도 또 후기 올리면 짧게는 못 올릴거 같은데...
이 노릇을...ㅎㅎㅎ
더 정성들여 쓰기로 하는걸로다가....ㅎㅎㅎ
감사드려요. 읽어주심에... 늘 행복 산행길 되시길요.
부끄럽습니다.
많은걸 알고나니 얼굴이 확끈거리네요.
지금도 극민들은 참 열씨미 살고있는데 여의도 犬님들은 쌈 박질만해대니 에효~~
긴글이지만 감명깊게 한자도 안빼고 잘 읽었습니다.
뜻깊은 100주년 독립종주길 완주 축하드립니다.
한자도 안빼고 읽으셨다는 말에... 땀 삐질...
어법도 좀 안 맞는 부분도 있고 오타도 있을 듯 하고...
100주년 독립종주길 많은 분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다는 것에 그저 감사...
해피맨님 한 번 뵈었다고 아는 분이신 듯... 한 느낌....
산행한 시간 이상을 투자하여 산행기을 써 내시니 명품산행기가 되네요.
가슴에 와 닿는 글과 산행기와 더불어 찾아주셔 감사드립니다.
정답입니다. 산행한 시간 이상 그 이상.. 투자...
책, 관련동영상.. 영화며.. 검색...
제가 생각해도 너무 열심히 한듯...
근데 즐거웠습니다. 알아가는 기쁨....나름 의욕도^^
좋은 길 찾게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리지요.
잘봤습니다.
역사공부 잘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산행기라기보다는 역사공부 같긴해요.
저도 더 줄여서 못 올리는게 여간 부담스럽지...ㅠㅠ
줄이고 줄이다가.. 더이상 못줄이겠다.. 이제 올려야겠다 싶었네요.
산행 50km하듯 후기 쓰며 한번 근현대사 걸어보니
스스로 정리도 되고 그랬네요.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이제 좀 눈좀 붙여야겠네요. 안녕히..하품 중..입니다
100주년 3.1운동 독립산행에 한발 한발 걷는 발걸음에도 독립을 위해 싸우신 선열의
발자취를 느끼셨을 깽이님 산행기에서 숙연한 마음마져 듭니다
저는 그날 일찍 독립기념관에 찾아 행사에도 참여했고 그 날의 외침 대한독립 만세도
힘차게 외쳤고 고귀한 넋을 위해 간절한 기도도 드리고 독립기념관을 다 돌아보았네요
갱이님 덕분에 근 현대사 역사에 많은것을 알게 됩니다 정성가득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당시 처음 상황을 지켜본 외국인기자는 독립이 될것이라 확신했다고 하는 기사와 함께 왜? 독립이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을 ‘ 무기 대신 태극기가 들려있었다’ 는 글을 어디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무력이 없었고 조직적이지 못했다는 분석을 내놓았고 그 결과가 20년대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 활발한 무장 투쟁, 그리고 임시정부의 탄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잔여세력은 후일 활빈당으로 대거 활약하지요. 그후 정미의병부터 의병으로 편입된경우가 많았던것 같습니다. 독립협회와 서재필에대한 평가는 아직 진행 중인듯하고... 여하간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