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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아름다운 묵상]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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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묵상]
최병석 시집 / 문힘총서 019 / 도서출판 문화의힘(2011.11.11)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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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시나무
최병석
비노리, 쑥부쟁이, 종가시나무
태초의 묵상들이
줄기줄기
가지가지
살아내었네라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묵상
사랑하시는 사람들과
종가시나무 숲에서 살고 싶다
가을 이야기
최병석
잠자리 졸음 이는
정오
짧지만 강렬한 햇살이
긴 생각이나
깊은 숨을 뒤로한 채
뚜벅 뚜벅
가을을 나르고 있다
목련을 보았다
최병석
벙그렇더니
한나절 훤하더니
저녁 비에
후두둑 목련꽃 자지러졌다
빙그레 웃던 옆집 누나
시집가던 날
봄비던가 꽃비던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그날 처음
목련을 보았다
입추
최병석
백일홍 꽃대 올려
여름 정원엔 붉은 향내 가득하고
은행나무 가지가지
청록의 도타운 씨알들이 영특한데
그늘에 기댄 견공의 기지개 여운에
툇마루까지 올라온 가을이 멈칫
그래도 오늘은 입추
어머니 1
최병석
한나절 일감 거두고
새벽 구들 온기 올리셨다
열여덟 시집오던 날
새벽을 이고 오신 어머니
새벽일 마치신 후
다시 남의 집일 가시고는
일 마치셨는지
봉분 열고 새벽을 낳는다
장마가 적시는 것
최병석
후덥지근하더니
주저 없이
세상 것 깡그리 적신다
어머니 기일 밤을
여지없이 기억하고
홀해도 부어댄다
껑- 껑-
쉰가슴이
젖고 또 젖는다
병상일기 2
최병석
낙서 없는 화장실에서
지친 육신과 남루한 열정이
소박한 안식을 얻었다
아직도 흡연을 하십니까
당신의 폐는 재떨이가 아닙니다
또박또박 걸린
한 줄 낙서를 만난다
유희
최병석
낙엽이 몇 날 구르고
참나무 숲은 열렸다
숲길을 걸으며
기억의 편린들을 만나고
불혹의 세월에 화들짝 놀란다
계절이 깊을수록
더하는 그리움
일흔 몇 번
꺼내보고 감추고
가슴엔 성능 좋은 유희의 창이 있다
핸들
최병석
누군가에게 사로잡혀
직진하고 싶다
좌로 우로 마구
돌려지고 싶다
요즈음엔 사십대 가장을 태우고
명함이며 휴대전화는 잊어버리고
섬이 바라다 뵈는 언덕에서
비스듬히 사색하고 싶다
그리하여
노을 적신 추억 한 토막
이정표 옆구리에 걸어두고 싶다
동행
최병석
조그마한 키를 넣고 돌리면
어김없이 응답한다
십 년 세월 넘기고 나니
뭐 한 가지 변변하랴만
그리 불편한 것 없으니 신통한 것이다
자족들과 여행길 동행하고
때로
호수와 숲길과 바닷가에서
주고받은 성성한 고백들을 기억한다
그 사납던 아이엠에프 고금리를
맨몸뚱이 버둥대며 할부 찍어 얻은 놈
세월 보냈다고
조석으로 바튼 기침 내뱉지만
또 한 세월 무던한 동행을 꿈꾼다
성녀聖女
최병석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접힌 등허리는 심하게 좌우로 흔들린다
리어카에 기대어
파지에 기대어
세상 한 모퉁이 돌아서 걷는 길
힘 빠진 안구로
세상이 흐릿할수록
가슴에 사르는 성구聖句
길에서 가끔 성녀를 만난다
조선에서 왔다
최병석
시간이 깊을수록
흥 오른 곡조가 들썩이고
눅눅한 노래방
사내의 몸짓은 드세다
목에서 쉰 소리가 난다
사람이 그리우면 가슴은 연분홍 빛깔로 흔들린다
원시 발해 땅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
손주 안은 노모가 흔들리고 있다
툭- 툭 - 꺼져가는 네온사인에 새벽이 깃들면
가슴은 공명한다
조선에서 조선으로 왔다
건너온 황해는 기약 없이 출렁인다
회색
최병석
고가도로 유선을
회색들이 달린다
신호등 건너 빌딩을 지나치자면
가로등 촘촘하고
고 어제보다 충혈된 눈동자들
태양은 본디 하얗다가 붉고
우주는 파란 바탕이라는데
사람들은
어쩌자고 색깔의 끝에서 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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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봄날 부지런한 거름기, 물기 길어 올려
쨍쨍 내려쬐는 정열 살라
가을 꽃 울렁울렁 피웠다
곁에 잇다는 사실로
소슬한 만추
눈과 가슴을 한 줄 한 줄 옮기면서
긴 호흡이 필요했다
용기를 앞세워
세상으로 손을 내민다
주변이 사랑 천지다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 곁에서 사치를 저지르고 싶다
2011년 11월
최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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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석 詩集 [아름다운 묵상]
[ 서평 ] -
생명, 그 형형한 눈빛
― 최병석 시집 『아름다운 묵상』을 중심으로
신익선_ 시인, 문학평론가
1. 빈 터의 시
이성의 등불을 밝혀 이상세계의 본질 문제를 비추려 했던 이는 말라르메다.
그는 그의 시론에 따라 추구한 그 이상세계의 본질을 결과적으로 무無 또는 무한無限이라 보면서, “시인이 할 일은 현실과의 모든 접촉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 속에 일종의 빈 터를 만들어서 그 속으로 ‘무’ 속에 들어 있는 무한의 세계의 이상적인 형태들이 흘러들어가 굳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말라르메에 있어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권의 책으로 되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빈터’에 유입되어 새로운 공간을 채워 빈 터가 새로운 공간의 의미와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작詩作에 있어 시인은 무인칭이 되어야 하는데 영적인 세계가 가시적인 세계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체導體로 이용해야 한다면서 이는 오로지 언어, 보도적인 기능을 갖는 언어가 아닌 주문呪文과도 같이 본질적인 것을 나타내는 언어로 시를 창작할 것을 주문했다.
이는 훗날 낭만주의의 폐단이 되고 있는 격정이나 비심미적 요인을 시에서 차단하려는 순수시 개념의 선구가 되기도 하지만 무릇 시가, 시작詩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찰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원용이 될 만하다.
여기서 빈 터는 일종의 솔리튜드Solitude이다.
사회와의 관계성이 단절되어 안절부절 못하고 애타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찾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소극적 고독인 론니네스loneliness에 대별되는 솔리튜드는 적극적인 고독을 의미한다. 깊은 외로움은 외로움, 즉 고독으로만 종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삶에 빛과 자신감을 부여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통로, 혹은 매개체를 말한다. 이는 말라르메가 언급한 바 있는 도체와 일맥상통한다.
최병석의 시집『아름다운 묵상』은 이에 근접한다.
현재의 세계가 영적인 세계와 상통하면서 가시적인 체계가 될 수 있도록 일정부분 자신이 도체가 되어 사물을 형상화시킨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전체 시편의 다수를 차지하는 죽음에의 회상. 그 아득한 저승의 경계에서 보내오는 파장의 묵음들이야말로 일견 신탁의 그 영워눔궁한 ‘빈터’에서만 감지할 수 있고, 언어로 재생이 가능한 견자見者로서의 순수서정을 풀어 보이고 있다.
2. 순수서정과 사회성
반세기란 말은 햇수로 오십 년을 이름한다.
한 사람의 생애의 오십의 햇수는 반세기에 해당된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고, 결코 간단치 않은 생의 실타래가 얽어 있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지난한 여정이 분명하였을 그 반세기의 삶을 한테 묶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 간단없는 화염의 과정을 살아와 어느새 지천명에 이른 최병석 시인이 한 권의 시집으로 새롭게 선보인 『아름다운 묵상』의 시편들은 주로 과거에의 회상과 삶의 성찰이 주를 이룬다. 언뜻 보아도 형태적인 면에서 변격의 운율미가 함축되어 있고, 내용적인 면에서는 순수서정을 지향하고 있다.
서정이란 말 그대로 감정의 토로이다. 용아 박용철 시인의 말을 원용하면 남달리 고귀하고 예민한 심정이 더욱이 어떠한 순간에 감득한 희귀한 심경을 표현한 것으로 요약된다. 일테면 내면의 자아가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일상성을 넘어서는 완결된 시적 언어의 표출, 또는 구축에 직결된다.
살펴보면 『아름다운 묵상』의 시편들이 시어 대부분은 과거와 현재의 일과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시적 현실로 재구성한다. 이때 드러나는 시적 언어들은 거개가 운율을 지닌 함축성을 갖고 있다. 또 읽기에 편하다. 본래 서정시는 시적 주체와 타자와의 동일성을 서정의 원형질로 삼는다. 당연히 해체나 분리가 아닌 조화의 통일성을 지닌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 들어 있는 「종가시나무」에서 최병석 시인은 비교적 그를 잘 표현하고 있다.
비노리, 쑥부쟁이, 종가시나무
태초의 묵상들이
줄기줄기
가지가지
살아내었네라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묵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종가시나무 숲에서 살고 싶다
-「종가시나무」전문
종가시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수이다.
제주도 방언으로 석소리라고도 부르며 흔히 가시나무라고 회자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지방에 자생 군락지가 있는 이 종가시나무는 겨울의 상온이 -2℃이하에서는 생육이 어려운 특성이 있다. 눈여겨 살펴보면 최병석 시인이 살고 있는 고장인 예산 시내의 한 복판에서도 이 종가시나무를 만난다.
잎이 부드럽고 상록수이어서 조경수나 목재로 유용한데, 이 시편 역시 시적 주체인 종가시나무의 묵상과 시적 풍경과의 거리감이 없다. 이 동일화된 서정적 통일성에는 보편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아닌 화해와 조화로움이 실존한다. ‘비노리, 쑥부쟁이, 종가시나무// 태초의 묵상들이/ 줄기줄기/ 가지가지/ 살아내었네라’는 종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숲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의 표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삶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삶을 사는 거나 ‘종가시나무 숲’ 이 삶을 사는 것은 다 등가성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을에서 사람들이 말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서로 소통하고 때로 묵상에 잠기듯이 숲의 마을에서도 비, 바람, 북풍한설 등에 ‘살아낸’ 숲의 삶이 있는데 이를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묵상’이라 정의한다. 여기서 ‘살아내었네라’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삶이 어찌 아름답기만 하겠는가. 실로 모질고도 험난한 게 삶이며 인생이라는 벌판 위의 풍경 아니겠는가. 그러나 되돌아 지나가고 보면 어두운 면은 사라지고, 그 어두움까지 포함하여 삶은 어느새 아름다운 자수로 그려져 감을 알게 된다.
쓰라렸던 일들조차 아름다운 아침 동녘의 운무로 나폴거린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종가시나무 숲에서 살고 싶다’라는 시적 화자의 내면풍경을 제시한다. 억지나 요설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간결한 율조의 시어들은 전통적인 자연이미지와 함께 미래에의 새로운 소망으로서의 새로운 묵상의 세계, 새로운 희구의 세계, 새로운 낙원의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는 단지 자연현상의 일단을 제고하는 것으로 종결짓는 것이 아닌 서정에 깃댄 사회에의 응시도 포함된다. 단순한 음풍명월의 풍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사회의 제반 병리현상들에 대한 뼈아픈 응시가 숨 쉬고 있는 시편들을 만나는 반짝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폐지 줍는 할머니를 그린 시편인「성녀聖女」와, 보편적 사랑의 성격을 말하고 있는 시편인「중독」은 그러한 최병석 시인의 응시가 담겨진 작품이다.
①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접힌 등허리는 심하게 좌우로 흔들린다
리어카에 기대어
파지에 기대어
세상 한 모퉁이 돌아서 걷는 길
힘 빠진 안구로
세상이 흐릿할수록
가슴에 사르는 성구聖句
길에서 가끔 성녀를 만난다
-「성녀」전문
② 푸르고 넉넉한 가을이면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아픔도 많아진다
가을바다 한켠에는
지난해 바다가 걸어놓은 얘기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사랑은 독이라서
중독된 사내들이 앉거나 서 있다
-「중독」전문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한 개의 목숨을 만나는 일이다.
한 개의 목숨은 하나의 몸을 갖는다. 몸은 또 영혼을 갖는다.
일찍이 몸의 의미에 대하여 니체가「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말한 바 있다.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은 몸에 대해 어떤 것을 일컫는 말에 불과하다’라고 한 데서 드러나듯이 몸은 우주에서 유일하다. 몸은 감각적 작용의 최우선 순위에 있으면 정신을 표상화한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는 ‘몸이야말로 지각의 기축이며 사물들의 실재성을 떠받치는 토대’라고 하면서, 몸이야말로 주체와 객체, 남성과 여성, 나와 타자 등의 이원론의 속성들에게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토마스 칼라일이 그의 방대한 저서인 「영웅숭배론」에서 영웅을 정의하길, 영웅이 역사의 흐름을 결정짓는다는 영웅사관을 피력하였다. 칼라일이 영웅으로 꼽은 이들은 그러나 왕이나 장군이 아닌 루터, 단테, 셰익스피어, 루소 등을 손꼽았다. 이들이 누구인가. 몸을 옷 입고 있으면서 정신세계를 확충시킨 진실한 인간군들이다. 이는 탁월한 사상가였던 칼라일이 영웅을 갈파했을 때의 그 정신의 주체 역시 몸이 자리한다.
그러므로 몸은 정신의 시원이며 삶의 주체다.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의 요소인 의식주衣食住는 몸의 기본적 욕구의 일환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몸이라는 근원적인 실체를 덧입고 있는데 육체라 불리는 이 몸의 행진이 곧 삶이다. 위의 시편에서 그러한 몸의 관점에서 본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사회지향성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먼저 ①의 시는 ‘리어카에 기대어/ 파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늙은 여인네로 변한 몸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직 ‘리어카와 파지에 기대어’ 파지 줍는 할머니의 고단한 하루가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는 슬픈 정경인데, 시편을 다 읽었을 때의 감흥은 그와 반대이다. 세상 무수한 이들이 세상과 가정이 내는 따사로움에 기대어 살아가는데 비하여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접힌 등허리는 심하게 좌우로 흔들리며/ …힘 빠진 안구로’ 살아가야만 하는 정경은「종가시나무」시편에 기술된 ‘살아내었네라’에 접목된다. 여기엔 능동태가 아닌 피동태의 행위가 담겨 있다. 주체가 아닌 객체의 원형이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모양새가 바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내었네’의 표정이다.
외롭고 고단하고 힘겨운 삶의 정경이 아닐 수 없는데 ①의 시편을 다 읽고 난 뒤의 느낌 역시 어쩐지 그 반대의 성향을 느끼게 된다. 여느 시들처럼 과격하고 역겨운 어휘들을 동원하여 대상적 사물이나 적체를 공박하고 비판하며 흥분하는 게 아닌데도 생생한 생명력과 여유 있는 인간미가 내재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연민이나 성찰의 어휘도 들어 있지 않으면서 무한한 자기 연민과 자기 성찰을 되짚어보게 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끝 행의 ‘성녀’에 있다.
‘성녀’는 신적인 용어다. 신앙의 대상인 성모 마리아를 제외한 지구상의 여인들 중에서 성녀의 호칭을 단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프랑스 혁명봉기의 선두에 섰다가 화형당한 잔다르크, 인도에서 버려진 이들을 평생 섬겼던 성 테레사 수녀 등 극소수로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파지 줍는 슬픈 할머니, 시편에 구체적으로 할머니라는 구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정황상 할머니가 분명한 시적 주체를 일러 ‘성녀’라 호명한 것은 휴머니즘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따사로운 인간애의 극치다. 이 호칭으로 인하여 가진 것 없이 기껏해야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파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슬픈 정황이 단숨에 인간 가치의 수직 상승을 획득한다.
서정시의 결여의 한 부분인 최병석 시인의 사회적 관점의 응시는 흥미롭다.
사회적 관점을 표출시킨 다양한 미적 감각은 비단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②의 시「중독」은 사랑에 관한 다중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짓는 독특한 울림을 제공해 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독毒’이라는 거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짐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요’라고 구약성서의 아가서(8장 6절)에 기록된 그 사랑을 일러 ‘가을 바다 한 켠에는/ 지난해 바다가 걸어놓은 얘기들이/ 바람에 펄럭인다’면서 시간적 배경인 가을과 공간적 배경인 바다를 결합시켜 놓는다.
사계四季중에서 강렬했던 여름의 결실들을 담아내는 열매로 가득한 가을은 단풍, 낙엽, 추수, 첫얼음, 첫서리, 겨울을 내포하는 계절의 길목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노쇠함을 절감하고 황혼에 이르러 황혼을 응시하는 노인처럼 눈동자 가득 쓸쓸함이 내걸리는 남성적 표상의 계절이다. 반면에 바다는 파도의 부드러움과 포근한 심상에 의거 여성성을 표상한다. 이는 또 바다가 항구를 지닌 만남과 이별, 사랑과 미움, 출항과 칩거라는 중층의 구조와 함께 남성 표상과 여성 표상을 결합하는 의미도 지닌다.
이는 모두 한 생애의 분깃점이 되기 족하다.
여기에서 이 시의 모티브가 비롯되고 있음은 바로 사랑이 모든 삶의 귀결이 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의 발로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인다’는 구절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뱃사람들은 멀고 먼 항해 시에 동료들이 죽으면 수장을 한다고 한다. 풍덩, 망망대해에 몸이 수장됨으로 지상에서의 생은 끝나지만, 그 사람의 사랑만큼은 생애의 단하나 울음이자 환희일 수 있는 사랑만큼은 결코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다 잊고 망각하여도 바닷바람은 그를 간직한다.
펄럭이는 바람은 그러니까 바닷바람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파도의 대지에서 살다 간 이들의 순간포착을 통한 대상의 이미지니화이다.
사람의 일생에서 사랑으로 상처받고 사랑으로 죽음에 이르는 일이 다반사이니 상처받은 사랑은 무형의 바닷바람으로 대유되는 오직 다른 사랑으로써만 치유를 받는 이 기막힌 사랑의 줄다리기야말로 바닷바람이라는 무생물체가 생물체처럼 살아갈 수 있는 바람의 핵심이다. 비린내 가득한 사랑의 저 수많은 이야기들, 기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을 제외한 분주한 것들은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출산과 양육, 야망과 쟁취, 교유관계와 늙어감 역시 사랑에 비할 바 없다. 사랑은 그래서 악마이며 지옥이며 천국이며 불이라 불린다. ‘사랑은 독/ 중독된 사내들이 앉거나 서 있다’라는 결구는 사랑이라는 본질적 자아의 변용이 분명하다.
결국 가을과 가을 바다와 가을바람과 가을 이야기가 담긴 사람의 생에서 사랑의 독에 중독되지 않고서는 사람의 생명은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중독은 결국 고독의 이미지와 함께 강한 순수서정을 일깨우며 ‘앉거나 서 있는’ 상태로 생의 언저리에서 서성이게 하는 인간 본연을 바라보는 내면의 거울이라 볼 수 있다. 더하여 이는 곧 최병석 시의 사회적 응시의 결집이라 보아 무리가 없다.
3. 신화가 된 생명들의 노래
신화는 과학의 시초이며 종교와 철학의 본체이며 역사 이전의 역사라고 언급한 이는 비얼레인Bierlain이다. 신화를 가장 신성한 그 무엇이라고 본 것이다. 어느 집단 어느 민족에게나 있어 신화는 역사이자 자부심과 긍지의 표상이다. 그런 점에서 신화란 실로 언어 속에서,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동시에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한다. 즉 아득한 지경의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언제 어디서든 살아 숨 쉬는 실체가 곧 신화인 것이다.
신화란 그리하여 신들만의 이야기이면서 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살았다가, 삶을 영위하였다가, 삶을 거둔 무수한 피붙이들과 이웃들, 그리고 사람들의 일대기 역시 인간세상에서 하나의 신화이다. 사람이 죽어서 사라진 것을 삶의 소멸이라 말하지만, 삶이란 소멸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시각에 기초한 신화가 된 생명들의 이야기가 이번 시집인 『아름다운 묵상』 대부분을 차지한다.
생을 부여받았으나 덧없이 스러진 운명들이 남긴 이야기들의 신화, 신화를 통하여 현실의 인상적인 한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닌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새로이 방출하는 그 경이로운 신화의 시작을 최병석은 그의 시「갈무리」에서 이렇게 풀어나간다.
원탁 둘러앉아
탁주 몇 순배로 넉넉한 만찬인데
모일 모처 모씨 상喪
전화문자로 한 인생이 갈무리 한다
몇 자 쓰면 꽉 차는
네모가 긋는
짧디짧은 생의 궤적
-「갈무리」전문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휴대폰 액정의 네모난 공간에 불이 켜지면서 ‘전화문자’가 왔을 것이다.
‘모일 모처 모씨 상喪/ 전화문자로 한 인생이 갈무리한다// 몇 자 쓰면 꽉 차는/ 네모가 긋는/ 짧디 짧은 생의 궤적’. 한 생애가 네모난 액정 속에 잠깐 떴다가 즉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일생이라는 엄청난 파노라마의 소멸, 도대체 너무도 간단한 한 생애의 ‘갈무리’만큼 허망한 일이 또 있겠는가.
온 우주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과 애틋한 사랑이 숨 쉬었을 것이다. 찬란한 꿈과 이상을 말하며 피땀 흘리길 주저치 않으며 살아왔을 한 생애다. 그 생애가 그저 전화문자로 떴다 사라짐으로 ‘짧디 짧은 생의 궤적’을 갈무리한 그 뒤안길에 혼백이 뜬다.
생명이 사라진 여백에서 다시 생명을 만나는 생명의 눈빛은 그때서야 신화로 전환된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생의 갈무리 이후부터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신화의 이야기가 전개된다.「갈무리」는 바로 그 분기점을 교시하는 시편이다.
여기서부터 신화의 배아가 싹터 오른다. 갈무리한 그 다음 순간, 죽음의 태아에서 발현한 이야기들의 이야기가 고개를 내민다. 주체의 정체성들이 되살아나 이야기만으로 신화의 자리에 앉는다. 이리하여 최병석 시인은 죽음으로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또 다른 생명들을 호출하기 시작한다.
한나절 일감 거두고
새벽 구들 온기 올리셨다
열여덟 시집오던 날
새벽을 이고 오신 어머니
새벽일 마치신 후
다시 남의 집일 가시고는
일 마치셨는지
봉분 열고 새벽을 낳는다
-「어머니1」전문
이 시편 역시 생존해 계신 어머니가 아니다.
아련한 회상 속에서 존재하는,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가 이 시의 제재이며 그 그리움에의 갈구가 주제이다. 처음으로 생명을 부여해 주신 어머니를 노래할 때 누군들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으랴, 어머니의 시상을 떠올리고, 어머니의 시를 쓰는 일이란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일이다.
어머니는 이름만으로도 가장 진실한 탐구이며 가장 고귀한 아름다움이기 족하다.
현대처럼 거칠고 부박한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단 하나의 영원한 그리움의 자리인 어머니, 설령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하여 어느 자식이 마음속의 그리움을 지울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 어머니는 생전에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일을 해 놓으시곤 구들장에 불을 지펴 방을 따습게 덥히셨다.
열여덟, 꽃 같은 나이에 시집오셨다는 것이다. 시집오실 때 머리에 이고 오신 ‘새벽’이 있다고 한다. 그 ‘새벽’을 평생 이고 살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구절인 ‘한나절 일감 거두고/ 새벽 구들 온기 올리셨다// 열여덟 시집오던 날/ 새벽을 이고 오신 어머니’는 아직도 안심이 안 되시는 모양이다. ‘일 마치셨는지/ 봉분 열고 새벽은 낳는’ 자리에서 지상에 남겨진 자식들을 이고 있는 것이다. 이때 어머니는 더 이상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다. 시적 화자의 호흡을 주관하는 하나의 신화이다. 그리고 생명에의 환원이다. 이는 죽은 자의 이야기가 아닌 산 자의 살아 있는 육성이라 하겠다. 강인하게 시인 자신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심원한 생명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실상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 생명의 눈망울을 가슴에 품고 꿈과 희망과 이상을 향하여 고달픈 항해를 계속해 나가면서 주체할 수 없는 사모의 마음을 「어머니1」「어머니2」「어머니3」「어머니4」의 절창을 뽑아 내놓는다. 시인이 펼쳐내는 시집 『아름다운 묵상』에서 연시는 이「어머니1.2.3.4」한 편뿐이 없다. 이것은 그만큼 절절한 생명에의 향수, 그리움에의 통곡, 영혼에의 갈망, 형형한 눈빛에의 정념이 사무쳐 오른 까닭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 ‘공중전파 한 구절로/ 사치 없는 이별을 고했다// 헤아림 없이 내달려온 생애/ 명멸하는 고단함이여/ 뒷산 중턱/ 황토 잔디 깔고 앉아/ 목구멍 컬컬해지도록/ 밀담 나누었다’의「밀담」은 갑자기 고인故人이 된 친구의 생명을 불러내는 장면이다.
최병석 시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선고장 내외분의 생명을 체감하는 시편인「묘 소묘」와 보편적 삶의 가치를 묻는 내용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전하는 인사/삼천리강산은 강녕하신가// 가슴에 묻고 견디어 온 결/ 나는 조선의 씨알이다// 무덤은 묵을수록 찬란한 생명/ 너희는 또 어떤 무덤을 준비하느냐’의「어느 고고학 발굴에서」와 같은 시편도 있다. 하나같이 신화가 된 생명들의 노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드시 죽은 이들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풍경을 담은「개미」와 주식에 빠진 이들을 그린「개미들」과 중국동포의 비애를 그린「조선에서 왔다」등은 의미심장한 시편들이다. 또 가장 가까이 생활에 근접해 있는 시편인 ‘돋보기 걸친 아내가/ 흰 머리칼을 잡아챈다/ 이마와 목덜미에서 묵은 주름살이 움찔한다’와 같은「흰 머리칼」이라든가, 최병석 시인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고장인 예산을 노래한「예산장」,「예당에 간다」등도 만만치 않은 시적 형상화와 부름의 신화에 근접한 작품들이다. 그 중에서「예산장」을 보자.
역전 장
건어물집 먹태 한 묶음
읍내 장
잔치국수 한 뭉치 허리춤에 챙기고
오일육 오일팔
그 드세다는 세월 다 잘 넹기고
선술집 육자배기
금오산 돌아 예산을 달군다
-「예산장」전문
분주하나 덧없는, 삶이라는 세월을 살아내는 일이란 실상 ‘선술집 육자배기/금오산 돌아 예산을 달구’는 것 아니겠는가. 예산장의 많은 인파 속에 섞여 무엇인가에 골몰하며 경황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장이 파하면 그 부산하던 장터엔 정적이 감돌고 사람들은 모두 제 갈 길로 사라져 간다. 장場으로 표현되지만 장이란 실상 우리 삶의 전반부 묘사가 아닌가. 장을 보듯이 분주하지만 사라져 가는 것. ‘오일육 오일팔/ 그 드세다는 세월 다 잘 넹기고’ 육자배기를 부르며 끈질기게 살아오던 장터 사람들도 사라져 마침내 소멸되는 것. 소멸됨으로 마침내 신화가 된 생명들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음과 시를 쓰는 일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황홀한 느낌이 아니겠는가.
이번 시집에 실린 시 중에서 가장 문학적 형상화에 가까운 시 한 편을 보자.
지루한 빗소리는 비린내를 동반한다
그 소리
등에 받아 적는다
바람처럼 스쳐간
익숙한 얼굴과
헤진 지폐와 밀어들이 등에 돋는다
지중해 짠 내 섞인 갠지스의
피안하는 영혼과
히말라야 설원의 천장天葬을 받아 적고 나서야
미천한 삶의 고상한 종말을 떠올린다
-「등에 적는 빗소리」전문
이러한 시편들을 통하여 사람들은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바로 최병석 시의 매력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산을 오르내리고는/ 몸에서 풋내가 난다/ …/ 산을 오르내리고는/ 몸에서 솔 향내가 난다.’(「솔향내」)에서처럼 우리의 삶의 신화의 궁극이 결국은 ‘향내’ 나는 삶이어야함을 말하는데 주력한다. 이는 현대서정이 세계와 자아와 언어의 이타성에 내재한 간격을 최소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귀결에 밀접해 있기도 하다.
4. 결어
한국시에 관하여 서정시라 분류되는 것에는 공통적으로 아름다운 서정의 고양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자연친화적이고 복고적이며 안이한 감성성, 순진무구한 자아 설정, 전근대적인 삶에의 향수 등등의 부정적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시는 결코 안일한 언어 형식주의를 위해 존재치 않는다. 서정시 역시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을 바탕으로 각박하고 험난한 현실인식과 세계인식을 심화, 초월한 새로운 미의 발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 상재하는 최병석의 시집 『아름다운 묵상』이 이에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나, 시어에서 요설과 사설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밀하게 갈고 닦은 흔적이 뚜렷한 시어의 선택과 언어의 응축을 통하여 고전적인 시의 양식이 가니는 응축과 균형의 미할에 근접해 있는 시편들을 선보인다. 지천명에 닿을 때까지 이에의 맥박이 마침내 시집 『아름다운 묵상』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치열한 정신적 천착을 통하여 최병석은 ‘시’야말로 영원과 순간, 죽음과 삶, 영혼과 육체를 합일케 하는 촉매라는 사실을 면면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지천명에 이르러서야 최병석은 그 특유의 빈터에서 건져 올린 순수서정의 여러 신화들을 기저로 하여 생명, 그 형형한 눈빛의 연가를 들려주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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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일련의 치열한 정신적 천착을 통하여 최병석은 ‘시’야말로 영원과 순간, 죽음과 삶, 영혼과 육체를 합일케 하는 촉매라는 사실을 면면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지천명에 이르러서야 최병석은 그 특유의 빈터에서 건져 올린 순수서정의 여러 신화들을 기저로 하여 생명, 그 형형한 눈빛의 연가를 들려주고 있다 하겠다. ― 신익선(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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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석 시인∥
∙2004년《서울문학》등단
∙한국문협, 예산문협, 내포문학회 회원
∙충남문협 이사
∙한국농어촌공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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