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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비밀』쿠르트 딤베르거 지음. 김영도 옮김. 2019년. 하루재 클럽.
글. 이용대. 코오롱 등산학교 명예교장
8000m 최초의 알파인 스타일 이룩한 딤베르거의 기록
이 책의 저자 쿠르트 딤베르거(Krut Diemberger. 이하 딤베르거)는 브로드피크와 다울라기리 두 개의 8000m고봉을 초등한 현존하는 오스트리아의 등반가다.
그는 자유기고가. 고산 영화 촬영가. 강연자. 등반가로 활동을 해 왔으며 1950년대 초기에 이미 슈퍼 알피니즘을 실천한 현대와 근대를 있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가 히말라야 고봉에서 이룩한 두 등반은 한 시대를 앞서가는 예사롭지 않은 등반이었기에 그의 업적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 받고 있다. 1957년 딤베르거는 포터나 산소를 쓰지 않고 4명의 대원이 알파인 스타일로 브로드 피크(Broad Peak 8047m)를 초등한다.
이들은 히말라야 고봉을 유럽 알프스의 정통적인 등반방식으로 올랐다. 셰르파와 산소 용구 도움 없이 자급자족하며 등반을 완성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알파인 스타일’이란 말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이런 방식의 등반은 알프스등반 방식을 히말라야의 거봉에 적용한 것으로 한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알피니즘의 출발을 예견하는 등반이었다. 이런 스타일의 기술을 적용하려는 계획은 헤르만 불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었으며, 알파인 스타일이 히말라야에 적용된 최초의 등반이었다.
당시 이들 모두는 6950m 높이의 고소캠프까지 직접장비를 운반했고 전 대원이 정상을 밟는다. 당시 대원 중의 한 사람인 헤르만 불은 낭가파르바트에 이어 두 개의 8000m고봉 등정 기록을 세운다. 딤베르거는 브로드피크 성공에 뒤이어 행해진 초골리사(Chogolisa. 7654m) 등반에서 자신의 우상이었던 전설적인 등반가 헤르만 불의 최후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된다.
두 사람이 정상을 향해가던 중 “쩍”하고 눈 처마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사면 전체가 지진의 파장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딤베르거는 반사적으로 사면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눈 처마 부스러기가 3000m아래 허공으로 설연을 일으키며 흩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바로 뒤에서 이런 일이 버러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헤르만 불을 찾았으나 그 어디에서도 불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초고리사 등반 중 딤베르거 바로 뒤에서 눈 처마 붕괴로 헤르만 불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그는 몸서리치는 공포 속에서 헬만 불과 로프로 안자일렌(Anseilen)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그의 추락은 절대로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안전한 길로 그를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가 큰 부담으로 남았다.
그는 선배 불의 죽음뿐만 아니라 파트너이상의 관계로 맺어진 여성등반가 쥴리 툴리스(Julie Tullis)의 사망으로 또 한 번의 충격에 휩싸인다. 소위 블랙서머(Black Summer)라 불리는 1986년 여름 K2의 재앙에선 모두 13명의 등반가가 사망했다. 당시 딤베르거와 그의 파트너 쥴리도 재앙이 닥쳤다. 그녀는 K2에서 하산도중 고소장애로 실명한 후 그의 품에 안겨서 최후를 맞았으며 딤베르거 또한 간신히 살아서 돌아 왔고 동상으로 손가락 2개를 절단한다.
그와 쥴리는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 할 수 있는 등반파트너 이상의 사이로 K2. 낭가파르바트. 에베레스트 등 여러 산에서 큰 등반을 함께 해오며 희망과 기쁨을 함께 나눈 동료였다. 그녀가 죽기 전에 주변 사람에게 남긴 말은 “딤베르거의 하산을 잘 부탁해요”였다.
쥴리의 죽음은 그에게 치유 할 수 없는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1986년 K2에서 빈사상태에 빠진 딤베르거를 한국원정대가 구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디엠베르거의 구출경위는 1986년 한국K2원정대 대장 김병준이 펴낸 『K2 하늘의 절대군주. 수문출판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그는 한국 K2 원정대와는 각별한 인연을 맺은바 있다. 동상을 입은 그의 손을 한국원정대의 팀 닥터인 정덕환 박사가 치료를 해주었다.
1960년 딤베르거는 스위스 국제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해 다울라기(Dhaulagiri 8167m)를 무산소로 올라 브로드 피크에 뒤이어 두 번째의 8000m고봉 초 등정을 이룩한다.
그가 산과 첫 만남을 시작한 것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오른 3014m의 람코글(larmkogl)이다. 이 산은 등산을 목적으로 오른 첫 번째 산이었으며 이후 그의 등산편력은 194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반세기동안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등산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포와 불확실성은 등산의 본질이다. 산을 가까이 하고 살면 모든 감각이 고조된다. 그건 한껏 높아진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모든 걸 상실할 수 있는 높은 위험과 공포도 가져다준다. 등산은 극단적인 삶의 한 방편이지만 일단 그것에 빠지면 결코 헤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반세기동안 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딤베르거의 연도별 주요 활동기록을 정리해보면 그가 수많은 고봉과 미지의 세계에서 얼마나 큰 폭의 활동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1952년 마터호른. 브라이트호른. 몬테로사 등을 섭렵했으며, 1953년부터 2년 동안은 친구인
볼프강 슈테반과 함께 알프스의 암벽과 빙벽에서 난이도 높은 등반을 했다. 1956년엔 마터호른 북벽을 등반하고 쾨니그슈비체 디레티시마(konigspitze Direttissima)를 초등한다. 그 당시 알프스의 설빙 대상지에서 가장 어려운 거대 커니스인 자이언트 메링거(Giant Meringue) 등반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헤르만 불이 딤베르거를 브로드피크 원정대원으로 초청한다. 1957년 헤르만 불. 마르쿠스 슈무크 등과 함께 첫 히말라야 원정을 떠나 브로드 피크를 초 등정한다. 당시 이들은 8000m급 고봉을 고소포터나 산소를 사용하지 않는 서부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는 등반을 감행하여 초 등정의 쾌거를 이룩한다. 서부 알파인 스타일이라는 개념과 사상은 헤르만 불로부터 나왔다.
1960년엔 스위스 국제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 해 다울라기리(8167m)를 무산소로 초등한다. 1965년-1969년까지는 아프리카 고원지대와 그린란드를 세 차례나 원정했고, 힌두쿠시를 두 번 원정했다. 힌두쿠시에선 2인조로 팀을 이루어 티리치의 네 번째 서봉(7338m)을 북쪽에서 공략하여 초등했고, 티리치미르(Tirich Mir 7708m)를 비롯하여 다섯 개봉도 초등한다. 1974년엔 네팔의 샤르체(shartse 7502m)를 초등한다. 샤르체는 1984년 한국알파인 가이드협회의 윤대표가 남 서릉으로 등정에 성공하여 세계 2등을 기록한다. 1978년 봄에는 마칼루(Makalu.8485m),가을에는 에베레스트(8848m)를 등정하고 1979년엔 가셔브룸 2봉(Gasherbrum 8035m)을 등정한다.
그는 고산원정뿐만 아니라 고산영상촬영가로 영화제작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1960년 다울라기 원정에서 카메라맨과 등반가 역할을 병행하면서 고소촬영가로서 첫출발을 한다. 1979년 가셔브룸 2봉 원정에서 많은 촬영을 하면서 8000m고봉 촬영기사로서 명성을 굳힌다. 1980년 그는 고산 카메라맨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최초의 동시녹음 촬영에 성공했으며 1982년 프랑스원정대와 함께 낭가파르바트의 디아미르 벽을 시도하며 촬영한 첫 다큐멘터리 영화 “낭가파르바트에 매혹 당한 디아미르”는 1983년 스페인 세바스챤 영화제에서 그 해의 그랜드 상을 획득한다. 1986년 k2의 쓰라린 경험을 촬영한 “k2 꿈과 운명”은 트렌토 영화제에서 1989년 그랜드 상을 수상한다.
디엠베르거는 단순한 고산등반가가 아니다. 고산군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정글. 그린란드 빙원. 캐나다와 그랜드캐니언. 아마존에 까지 미치는 모험을 했으며, 힌두쿠시에선 미지의 빙하를 탐험하고 티리치미르를 한 바퀴 돌기도한 등반가이자 탐험가다.
그는 『산의 비밀』 첫머리에서 “나는 산을 떠나서 살 수 없다”고 밝힌바 있지만 그는 산을 떠나선 살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고산에 익숙한 체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으로 고소에 갔을 때를 제외하곤 항상 피로하고 지쳐있었다. 그래서 한 혈액 전문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혈액검사를 마친 의사는 “적어도 당신은 10000피트((3,048미터)고도의 지대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다. 그곳이 당신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다.” 라는 소견을 내놓은 것처럼 그는 산을 떠나선 살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8000m급 6개봉을 올랐는데, 매스너의 그것과 비교하면 유머가 풍부한 여유 있는 스타일로 이룩해낸 것이다.
1974년 여름 토렌토 산악영화제에서 만난 메스너는 딤베르거 에게 8000m 고봉을 함께 오를 것을 제안하지만 이를 거절했다. 메스너와 경쟁을 즐길 수 도 있었지만 여기에 매어달리면 자신의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굴레에 갇혀 자유를 속박 받는다는 것은 받아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3부 ‘메스너와의 대결’을 읽어보면 당시 기자들은 메스너와 딤베르거를 대결구도로 만들어 기사화하고 싶어 했다. “세계최고의 두 산악인이 필연적으로 충돌한다면 흥미진진한 기사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성인잡지 『펜트하우스(PENTHOUSE)』1980년 5월호에 실린, 카트만두의 호텔 나라야니의 바에서 만난 두 산악인의 대화 내용은 매우 흥미롭다.
이 호텔은 대부분의 히말라야 원정대가 출발지점으로 삼았던 곳으로 많은 등반가들이 이용했다. 당대 최고의 두 산악인이 만나 대화를 나눈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딤베르거를 위시하여 히말라야에 원정을 온 몇몇 등반가들이 모여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 뒤늦게 메스너가 들어온다. 바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그가 입고 있는 티셔츠의 ‘rgst’라고 쓰인 비밀스러운 문구에 쏠렸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산악인들이 ‘rgst’의 앞뒤 문구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자 “미국에서 만들었는데 인쇄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메스너는 티셔츠의 단추를 풀고 가슴을 드러냈다. 책에서는 그곳은 세계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열렬히 비박하고 싶어 하는 곳이라며, 그렇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베르크 슈타이거(Bergsteiger, 등산가)는 섹스를 가장 잘 한다”라는 문구로 보였다고 쓰여있다.
딤베르거도 메스너에게 대응하려고 단추를 풀고 가슴팍을 드러냈지만 그곳은 비박의 천국이 아니라 ‘그냥 더러운 티셔츠’였다. 이런 것이 바로 딤베르거의 대응방식이다. 이날의 일은 한 잡지사기자가 쓴 기사로 메스너에겐 야유와 조롱을 섞은 유머였고, 딤베르거는 더러운 티셔츠를 입고 있는 소탈한 품성의 인물로 묘사했다.
2019년도 울주세계산악문화상(償) 수상자 디엠베르거가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의 저서 『산의 비밀』은 방한에 때맞춰 하루재 클럽에서 발간했으니 딤베르거에게는 산악문화상 이상의 값진 선물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첫댓글 고문님. 글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받은 책...다 읽은거나 매한가지입니다...ㅎ
감사합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늘 고맙읍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평의 대가이십니다. 서평이 너무 재미있읍니다.
존경하는선생님의 서평을 보고.
책을 읽고 주말에 저자를 만날수 있다니~~!!정말 뜻깊은 한주를 보낼수있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