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 피아 ■
이 트윗을 작성한 이후로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욕을 받고 있다. 개인 디엠으로까지 찾아와 죽으라는 둥 병x이냐는 둥의 쌍욕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젠 페이스북 유머페이지에까지 올라와(아이디를 가리지도 않은 채) 또 온갖 욕과 함께 공유되고 있어 말을 해봐야할 것 같다.
다 알고있지만 수능은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이뤄지고 있다.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 구조에 맞춰서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한 방식이다. 서열화 된 대학 구조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계급적 문제를 유발하고, 이에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교육 과정 내 인권 침해 정당화, 입시 압박, 비인간적인 학습시간 강요 등)를 입고 있는가는 둘째치더라도, 상대평가라는, 누군가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패자가 되는 무한 경쟁 속 합격하는 이들은 결국 한정되어있다. 그리고 입시 경쟁에서 실패한 이들은 많은 부담과 절망을 안는다. 대학에 가지않은 삶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대학 진학 유무에 따라 사회적 자원이나 기회가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 사회다. 어느 대학 이상이 아니면 취업이 안된다거나, 어떤 기업에서는 등급제를 실시했다는 정황이 적발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능 이후 자살했다는 학생들의 뉴스를 매년 접하고, 수능 이후 학생 자살 예방 지원을 확대한다는 뉴스 또한 심심찮게 본다. 나는 수능과 교육, 대학을 둘러싼 사회의 이러한 불의한 구조를 알고 있으면서도, ‘수능 대박’이나 ‘모두 힘내라’ 라는 말을 지나가는 인삿말로, 그게 덕담인 것 마냥 여기며 구조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아름다운 통과의례인 양 포장하는 문화가 절대 편하게 느껴지지않았다.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에 대해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건 자연의 섭리’라거나 ‘세상의 이치’같은 얘기를 한다. 모든 것은 경쟁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왜 이치어야하는지를 묻고 싶다. 왜 교육이 인생을 판가름하는 과정이 되어야하나? 왜 교육이 경쟁으로 이뤄져야하며, 성적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아야하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모두의 권리어야할 교육이 되려 사람을 등급매기는 근거가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양 여겨지는 것이 더 이상하지않나.
나는 나의 불편함이 조롱받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않는다. 이 불편함에 답해야하는 것은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불행해지는 지금의 불의하고 기만적인 구조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가지고 질문했으면 좋겠다.
■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 공현 ■
당신들의 수능 응원은 문제다
응원보다 사과가 먼저
2019년 11월,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힘들었지? 수고했어”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그 글은 “내일은 여러분의 날입니다. 최선을 다한 만큼 반드시 꿈은 이뤄질 것입니다. 편안하게 잘 치러내길 바랍니다.”라고 마무리되었다.(왜 제목만 반말이었는지 모르겠다.) 2020년 수능 시험 때도 역시나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꿈을 활짝 피우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 여러분을 응원하고 있습니다.”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게시했다.
특이한 일은 아니다. 다른 정치인들이나 교육감 등의 고위 공무원들도 수능 시험을 앞두고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쏟아낸다. 교육감들은 수능 시험장 앞에 가서 응원을 하기도 한다. 2019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수능은 한번은 통과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의 터널이다. 자신감과 실력으로 잘 통과하기를 바란다.’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수능으로 대표되는 한국 대학입시의 실상을 생각해 보면, 고위 정치인들의 이런 응원의 메시지들은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반드시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학생들의 꿈을 ‘더 좋은 대학’으로 좁혀 버리는 교육 체제, 시험 성적에 따라 교육의 기회와 처우를 차별하여 꿈도 차별받게 하는 입시 제도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말은 공허하다. 수능 시험 결과가 자기 ‘자신감과 실력’의 산물이라고 순응하게 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수능 시험은 응시자들을 서열화하고 차등하는 방식이며, 각자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에 대한 심의에서 여러 차례 지나치게 경쟁적인 교육 환경이 아동의 교육권, 발달권, 여가권 등을 저해한다고 지적하며, 경쟁을 완화시키기 위해 교육 제도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2001년 일반논평 1호 ‘교육의 목적’에서는, “지식의 축적, 경쟁의 촉진 및 아동에 대한 과도한 학업 부담에 초점을 맞춘 교육의 형태는 아동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의 최대한의 발현을 하는 데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기도 하다.) 한국 정부에게는 경쟁적 입시와 교육 제도를 바꿔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교육 제도, 입시 제도가 반인권적이고 문제가 많다는 점은 이미 여러 정치인들이 동감해 온 것이다. 이른바 ‘진보 교육감’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물론이요, 더군다나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수능 시험 절대평가화를 공약했던 바 있다.
지금의 입시 제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책임 있는 고위 정치인으로서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사과와 변화의 약속이 아닐까? 대통령이나 교육감이라면 서열화와 차별을 초래하고 학생들에게 고통을 주는 입시 제도를 아직 바꾸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조금이라도 빨리 이런 제도와 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고개 숙이며 약속해야 마땅하다. 시험 성적 때문에 차별당하게 되고 좌절하더라도 그건 이 사회와 제도의 탓이 더 크지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는 말라는 말도 보태 주면 더욱 좋겠다. 이런 이야기는 없이 모두를 응원한다느니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느니 하는 말을 남기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행태이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수능 시험 절대평가화 공약이라도 지켰다면 그나마 응시자들 모두를 응원할 명분이라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노릇이다.
‘수능 대박 기원’은 무슨 의미인가
해마다 수능 시험을 앞두면 시험 응시자들, 입시를 치르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들이 넘쳐난다. 개중에 특히 눈에 거슬리는 것이 ‘수능 대박 기원’ 메시지이다. 내가 수능 시험 응시자였을 적에도 온라인 공간이건 방송이건 시험장 앞에서건 “모두 다 수능 대박 나세요!” 따위의 주문이 떠돌았던 기억이 있다.
수능 시험은 상대평가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대학에서 수학(修學)할 능력을 검증한다는 듯한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수학할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응시자들에 비해 얼마나 잘하는지, 서열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를 산출해 내는 방식이다. 아주 단적으로, 내가 수능 시험 점수가 예상보다 좀 더 높게 나왔다 하더라도, 만약 응시자들의 전체적인 점수가 높아졌다면 이는 전혀 ‘대박’이 아니다. 남이 나보다 더 잘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서 잘하더라도 나는 못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가령 내가 찍은 문제가 운 좋게 몇 개 맞아서 원래 등급이 올라갔다면, 그 이면에 있는 현실은 높은 확률로 다른 누군가의 등급이 떨어졌으리라는 것이다. 애초에 누군가를 밀어내고 앞 서열을 차지해야만 하는 방식도 문제인데, 심지어 요행 내지 행운으로 ‘대박’이 나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기를 바라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일까 하는 고민마저 든다.
특정한 누군가, 즉 가족이나 친구 등의 수능 대박을 기원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행운을 얻기를 기원하는 일이나 경쟁에서 승리하라고 응원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정당성을 떠나서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곤 하며,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응시자들에게 ‘수능 대박’이 나라며 응원하는 것은 분명 현실과 모순되는 언행이다. 수능 시험이 절대평가나 자격고사화되어서 정말 일정 기준만 넘기면 되는 식의 시험이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결코 사람들이 수능 시험의 방식이나 입시 경쟁의 현실을 몰라서 ‘모두 수능 대박 나세요!’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수능 대박’이라거나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길’ 같은 응원의 목소리 속에는 문제적 교육 현실을 외면하고 이 과정을 ‘아름다운 노력과 성취의 서사’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아무도 밟지 않고 날아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싶어 외는 주문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문에는 별 신통력이 없나 보다. 수능과 입시를 통해 학생들, 응시자들에게는 등급과 서열이 매겨지고 대학 서열과 학력·학벌 차별 구조 속으로 배치된다. 학교들과 학원들에 걸려 있는 “○○대 ○○○과 12명 합격” 식의 현수막들만 응시자들의 머리 위에 깃발처럼 펄럭인다.
잘못된 제도의 문제를 직시하기
고3 시절, 수능 시험 두 달쯤 전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어느 교사가 갑자기 “수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친구들에게 마지막까지 힘내자고 격려의 말을 해 보자”라고 했다. 그 교사는 나가서 말할 생각이 전혀 없던 나를 지목해서 교단에 올렸다. 나는 입시 경쟁 교육에 대한 분노와 냉소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인간답지 못하게 살 바에는 그냥 대학 가는 걸 때려칩시다.” 말할 것도 없이 교실 분위기는 싸해졌고 교사는,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며 붉으락푸르락했더랬다.
그 교사는 왜 하필 나를 콕 집어서 시켰을까? 무작위 선택의 불행한 결말이었을 가능성은 낮을 것 같다. 짐작건대 평소에 학생인권 이야기를 하며 학교에 저항적이던 내가 다들 끝까지 열심히 공부하자는 등의 말을 하게 만듦으로써 더 큰 분위기 단속 효과를 기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분위기 같은 건 잘 신경 쓰지 않는 마이웨이 캐릭터였다. 나는 앞에 나가서 밤 10시, 11시까지 강제 야간자율학습을 하거나 학원에 있어야만 하고, 시험 문제 틀린 개수를 갖고 체벌을 당하며, 매 수업 시간 수능 대비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야 했던 끔찍한 현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니고 대학을 위해 참아 낼 만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해 버렸던 것이다.
교육 제도와 입시의 구조가 잘못되어 있더라도 물론 그 속에서 분투하는 개개인들을 격려하거나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제도를, 거기 순응하는 일을 아름다운 일이라 포장하지는 말아야 하며, 개개인들에게 이겨내라고 요구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도 개혁의 책무가 있는 정치인들이 그러는 것은 더욱 문제다. 그리고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수능에서 모두 다 대박 나라거나 다들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거나 하는 현실을 은폐하는 이야기로 세상을 채우는 것은 문제다. 입시 당사자들, 수능 응시자들이 힘이 빠질 것이라고?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이 사회적·제도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할 계기를 얻는 것이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혹시 결과가 기대만큼 안 나오더라도 개인 탓, 자책을 할 이유도 더 줄어들 것이고 말이다.
수능 시험을 비롯해 입시 경쟁 제도는, 무슨 자연스러운 의례나 불변의 이치 같은 것이 아니다. 개인의 노력과 꿈을 아름답게 빛내 주는 장도 아니다. 서열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제도이고, 많은 고통을 초래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부정의한 구조이다. 꼭 수능에서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 더 높은 등급을 따내라고 응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입시 결과를 얻으려면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하고 공부 기계로 살아야 하는, 인권을 침해하는 교육 환경임을 고백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제도가 잘못되어 있고 바꿔야 한다는 것을 직시하고 환기시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변화의 시기도 좀 더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