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도해 호령하는 바위산 - 섬뜩한 암릉산행 절묘"
1. 대 상 산 : 천등산(550m) - 전남 고흥군
2. 산행시간 : 4시간 (우천시에도 산행 합니다)
3. 출발시간 : 2009년 2월 1일 일요일 08시(07시 50분 집결)
4. 출발장소 : 순천 기적의도서관앞(금당 동명초등학교정문)
광양읍 승차 07시 40분(광양로타리 국민은행 앞)
5. 산행코스 : 월송마을 - 가시나무재 - 석문 - 딸각산 -
앙천잇재 천등산 - 암릉 - 임도 - 천등마을
6. 준비물 : 회비 20,000원
중식,간식,식수, 아이젠, 스패츠등
7. 개념도
산은 들어가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다고들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 산은 오르는 산이 아니라 들어가는 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등산은 '올라가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아래-밖이 아니다-에서 보면 하나의 커다란 바위산으로 뭉뚱그려 보이지만, 올라가 보면 암릉들이 세밀하게 흩어지고 갈라져 새로운 흥분을 야기한다.
천등산(국립지리원 지형도에는 ‘天登山’이라 표기)은 바다로 열린 산이다. 고흥반도 최남단에 솟은 이 바위산은 한 때 수군만호가 지킨 조운(漕運)의 경유항이었지만 지금은 한적한 어항으로 남은 풍남항을 굽어보며 다도해 여러 섬을 호령하듯 솟아 있다.
봉우리가 하늘에 닿는다 해서 ‘天登’이라고도 하고, 금탑사(金塔寺)를 비롯해 많은 사찰들이 있었을 옛날 스님들이 정상에 올라 천 개의 등불을 바쳤다는 설과 금탑사 스님들이 도를 닦으려고 많이 올라 밤이면 수많은 등불이 커져 있었다 해서 ‘天登’이라 했다고도 한다. 서릉에 솟은 봉우리 이름이 벼락산(343.8m․국립지리원 지형도에는 ‘別鶴山’으로 표기)인 것을 보면 천둥과 번개, 벼락이 연상돼 ‘천둥산’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벼락산은 두 남매가 장대 들고 별을 따러 올라갔다가 벼락을 맞았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고흥읍에서 율치리를 지나 고개를 넘어 송정리로 들어서면 천등산과 벼락산이 한눈에 든다. 천등산 정상부와 함께 겹쳐 보이는 바위산이 그 앞에 보이는데, 이 산 이름은 딸각산이다. 바위를 밟고 오르노라면 ‘딸각딸각’ 소리가 난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주민들의 설명과는 달리 옛 기록에는 월각산(月角山)이라 기록하고 있다. 딸각이 달각으로, 달각이 월각으로 변한 것이다.
천등산은 남해 바닷가 산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바다 조망이 좋아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고 동쪽으로 마복산 봉수, 서쪽으로 장기산 봉수와 서로 응했다. 지금은 작은 제단이 마련돼 있는데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정상 바로 밑 금탑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바둑판 모양의 너럭바위가 있다. 이름하여 신선대다.
8. 코스가이드
산 중턱을 가로넘는 임도가 세 가닥이나 나 있어 어떤 면에서는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지만 임도 때문에 오히려 산행의 맛이 덜할 수도 있다. 이 산의 맛을 진하게 맛보려면 임도를 생략한 코스를 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도 당일산행에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암릉에서 조심만 하면 된다.
가장 권할 만한 코스는 월송마을 - 딸각산 - 정상 - 임도 - 천등마을로 돌아내려서는 것이다. 천등산 산행에 딸각산을 빼놓으면 이 산을 반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만큼 산행의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가 많다.
산행 들목은 851번 지방도로변의 송정리 월송마을.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마을회관이 있는 송정마을에 닿는다. 여기서 민가 돌담을 끼고 북쪽으로 지능선을 넘어서면 동쪽으로 패인 계곡으로 들어선다. 송정마을에서 약 20분정도 오르면 염소목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지계곡으로 10여 분 올라서면 바로 딸각산 남서릉 상의 가시나뭇재에 닿는다. 예전에는 가시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렸다지만 지금은 금잔디가 탐스럽게 깔려 있다.
능선을 따라 딸각산에 다가갈수록 사면이 넓게 벌어진다. 소나무숲과 잔돌밭을 통과하면 느닷없이 거대한 자연석 돌문이 나타난다. 벌어진 바위 위로 큰 돌이 얹혀 있는데 사면과 나란히 겹쳐 있어서 밑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돌문 안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뚜렷하다. 조심스럽게 돌문 위로 올라서면 시야가 탁 트이면서 다도해가 펼쳐진다. 이어 딸각산 정상까지는 암릉으로 이어진다(가시나뭇재에서 30분 소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딸각산 정사에 오르면 천등산 정상 암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안장바위 능선이 서쪽으로는 벼락산 능선이 그리고 그 능선 밑으로 임도가 뚜렷하게 이어지는 것도 보인다.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임도를 넓혀 놓은 공터에 닿고 이어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임도가 삼거리를 이룬 앙천잇재(천등산과 딸각산 사이 안부)에 닿는다. 임도를 버리고 능선만 좇아 내려서도 된다(딸각산 정상서 약 20분 소요).
앙천잇재에서 정상까지는 방화선을 따라 경사의 변화가 없이 꾸준히 30분 정도 오른다. 정상 전에서 안장바위 능선으로 갈리는 지점을 지나게 되고 정상 직전에서는 신선대 너럭바위를 만나게 된다. 정상을 지나면 바로 암릉이 시작된다. 암릉이 미인치쪽 능선과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며 벼랑을 이루고 있다. 두 암릉 사이로 형성된 바위협곡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다시 가파른 암릉이 이어지는데 자일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내려서야 한다. 약 30분 정도 내려서면 임도에 닿는다. 임도로 내려서는 절개지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암릉 구간은 노약자에게는 조금 무리인 코스이므로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오른 길로 되내려서도록 한다. 이후 임도를 따라 천등마을까지는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사동리에서 사동저수지를 경유해 임도를 따라 앙천잇재까지 자동차나 걸어서 오른 다음 산행을 이을 수 있지만 산행의 맛은 그만큼 덜하다(도보로 약 1시간 소요). 가화리 가화저수지에서 아흔아홉골을 경유해 안장바위 능선을 타고 곧장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도 있다(약 2시간 소요).
9. 주변의 명소
가. 금탑사(金塔寺)
신라 눌지왕(訥祗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이 같은 주장은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신라 문무왕의 태(胎)를 금탑사에 봉(封)했다’는 기록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창건 당시에 금탑(金塔)이 있어 금탑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창건 이후 고려 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혀 전하는 것이 없고, 조선시대의 일은 1861년(철종12) 유명(有明)스님이 지은 <금탑사대법당금고신비기(金塔寺大法堂金鼓新備記)> 현판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1604년(선조37)에 궁현(窮玄)과 왕순(王淳)이 중건하여 수백인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합니다. 1644년(인조22) 무가(無價), 계환(戒環) 스님이 극락전을 중수하였고 1692년(숙종18)에는 극락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1767년(영조43) 경징(鏡澄), 획심(獲心), 독일(篤日) 스님이 대총사의 명복을 위해 극락전을 중창, 1834년(순조34)에는 해월(海月) 스님이 극락전을 중건하였습니다.
1835년 순조(純祖)의 능인 인릉(仁陵)과 관련되어 절이 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1845년(헌종11) 법당3채와 승료5채 등 12채의 전각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2년후 극락전에 후불탱화를 봉안하였습니다. 1857년(철종8) 나한전 16다한, 탁자를 봉안하였고 1861년에는 유명(有明)스님이 절을 중창하였습니다. 1868년(고종5) 유명스님이 범종 불사를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여는 절과 마찬가지로 금탑사도 쇠락되어 그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습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1974년 범종이 봉안되고, 1982년 신중탱화의 개수 불사가 있었습니다. 1991년 이후 지금까지는 서림(瑞林)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계십니다.
1992년에 극락전 및 축대를 보수함과 아울러 절로 들어가는 진입 도로를 확장함으로써 신도들이 보다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건물에 대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보수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 금탑사 괘불탱 - 보물제1344호(2002.7.3. 지정)
이 괘불은 비현(丕賢)과 쾌윤(快允)이 1788년에 함께 그린 것으로, 옆으로 긴 폭에 삼세불(三世佛)을 표현한 독특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사천왕 등의 권속을 배제하고 주요 협시보살만으로 구성된 간략한 구도이다. 삼세불은 화면을 횡으로 3등분하여 큼직하게 그려져 있고 상단과 하단으로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본존의 형태는 18세기 후반기의 특징인 원만한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의 표현, 옆으로 퍼진 육계에 큼직한 정상계주, 각이 진 어깨, 발목의 치견(侈絹)장식 등을 보여준다. 괘불탱을 보관하고 있는 괘불궤는 1697년에 제작된 것으로 괘불보다는 약 100여년 전에 만든 이른 시기의 것이다.
다. 금탑사 극락전 - 지방유형문화재 제102호(1985.2.25. 지정)
금탑사는 고흥에서 15.5km 떨어진 포두면 봉림리 천등산(天燈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寺刹)이다. 천등산의 천등이란 옛날 가엽존자(迦葉尊者)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크게 천등불사(千燈佛事)를 한 것을 이르는 것이며,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印度)의 아육왕(阿育王)이 보탑(寶塔)을 건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금탑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유재란 때 사원 전체가 불탔으나 선조 36년(1603년) 궁현·옥순(弓弦·玉淳)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숙종 18년(1692)에 또 참화를 입고 현재는 극락전만 남아 있으며 최근에 건립한 명부전, 삼성각, 종각, 요사체 등이 있다.
극락전은 축대형식으로 쌓은 3단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막돌 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이 약한 굵은 원형기둥을 세웠다. 창방과 평방은 굵은 부재로 하여 길게 좌우를 빼냈고 그 위에 기둥 사이에 포를 배치하였다. 기둥과 평방이 결구된 부분의 내부에 용모양을 만들어 용머리를 밖으로 내놓았고, 외 3출목에 내 4출목이다, 살미첨차의 앙혀부분은 둥그렇게 굽어올라 가지 않고 직각으로 깍아 각을 이루고 있다. 첨차의 굽면 역시 둥그렇지 않고 경사지게 깍아 강직한 맛을 풍긴다. 약간 넓은 중앙칸에는 2조의 기둥 사이 포가 있고 협칸에는 1조의 기둥 사이 포가 있다.
내부는 삼존불을 모셨으며 2개의 대량에 걸쳐 놓은 기둥을 세우고 닷집을 만들었으며, 연등천장이면서 중앙 부분만 우물천장으로 보개천장을 설치하였다. 이 보개천장과 내부공포와의 사이에는 다시 빗천장을 설치하였으며 용의 몸뚱이를 한 부재로 공포와 대량을 연결하여 설치하였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2분합의 문은 빗살로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처마밑이 모두 공포로 휩싸인 듯한 느낌을 주며 4모서리에 활주를 세웠다.
라. 금탑사 비자나무숲 (천연기념물 제239호)
고흥군 군청 소재지인 고흥읍으로부터 남쪽으로 15.5km 거리에 해발 550m의 천등산이 있으며, 그 동쪽 산허리에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금탑사가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포두면 봉림리 700번지이다. 이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아랫편 입구의 계곡과 윗편 산지의 사면에 걸쳐 표고 190 ~ 410m 범위내 39,937평에 집단적으로 3,313주가 분포하고 있으며 천등산은 북위 34°32′50″, 동경 127°17′30″범위에 위치하고, 북동쪽은 포두면, 동남쪽은 도화면, 서쪽은 풍양면을 이루고 있다. 금탑사의 뒷편에 있는 비자나무숲의 수고(樹高)는 8 ~ 14m에 이르고 가슴높이 둘레는 16cm에서 121cm에 이르고 있다. 계급별로는 50cm이하가 31.4%이고 100cm 이상이 17.2%인데 대하여 51 ~ 100cm 범위의 비자나무는 51.4%로서 절반을 넘고 있고 또 91cm이상 121cm까지가 28.6%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볼 때 수령은 최고 100여년생으로 추정된다.
이 비자나무숲의 다른 한편에는 140cm되는 것도 발견되었다. 자연생이 아니라면 1800년대 중엽이나 말엽에 처음으로 심은 듯 하고 그 후 하종갱신 된 것이 있어 50cm이하가 31%나 된다. 비자나무는 상록침엽교목으로 자생지는 산록곡간지이고 분포는 수직적으로 표고 150 ~ 700m, 수평적으로는 전남북, 경북까지이고, 지리적으로는 일본(日本) 사국(四國), 구주(九州)이다. 목재는 치밀하고 심재가 황색을 띄고 있는데다 독특한 향기와 광택이 있어 바둑판, 조각재, 의장재 등에 값있게 쓰여지고 있으며, 종자는 기생충 구제용으로 생식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비자나무를 나자식물강 또는 아강으로 취급하고 있으나, 나자식물은 계통상, 단원적으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식물군의 종자형성 단계만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형태적으로도 나자식물은 분류군이 아니며 유관속식물의 진화과정에서의 한 단계이고 현생종보다 화석식물에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는 비자나무는 중국에 분포해 있는 2개종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서 일본에 분포해 있는 비자나무와 같은 종으로 취급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비자나무가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었다면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초가 될 것인데 이를 증명할만한 자료가 없다. 우리나라에도 자생하고 있었다면 어디인가 그 집단림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어야 할 터인데, 분포북한지로 보는 백양사의 비자림처럼 집단적으로 성림되고 있는 곳은 대부분 사찰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어서 이러한 수림을 자연림으로 보기는 어렵다.
천등산 일대의 토질은 중생대 백아기의 중성화산암과 산성화산암이고, 포두면 옥강리와 남성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세동리와 봉림리는 불국사통의 화강암이 형성되어 있어 천등산 암석로출지는 여기에 속하며, 길두, 남촌, 송산, 상포리 일대는 중성화산암지대이며, 장수리 근처만이 반암등으로 되어 있다. 지형은 고흥반도가 전라남도 동남단에 돌출한 와우반형이고, 산세는 노령산맥의 동축지맥이 벌교에서 뻗어내려 동으로 팔영산(608.6m)과 해창만, 천등산(550m)을 이룬다. 천등산과 미인치에서 발원한 하천은 금지제를 거쳐 포두천(8.4km)을 이루어 해창만간척지에 이른다.
고흥반도는 비교적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으며 큰 강이 없다.연평균기온은 13.7℃, 연평균강수량 1,308mm, 연평습도 73.4%이고, 최고온도와 최저온도는 1977년에 36.4℃와 -12.4℃를 기록하였다. 천기일수는 맑음 123일(33.7%), 구름 127일(34.8%), 비 94일(25.8%), 안개 2일(0.5%)의 연평균을 나타낸다. 천등산과 비자나무숲의 주위 식물상에 대한 식생형을 목본(木本)과 초본(草本)으로 구분하여 목본을 낙엽교목 (落葉喬木), 낙엽관목(落葉灌木), 상록교목(常綠喬木), 상록관목(常綠灌木), 낙엽만경(落葉蔓莖), 상록만경(常綠蔓莖), 기생식물(寄生植物), 대나무과 등으로 초본을 상록초본(常綠草本), 다년생초본(多年生草本), 만경다년생초본(蔓莖多年生草本), 1년생초본(1年生草本), 2년생초본(2年生草本), 만경1년생초본(蔓莖1年生草本), 만경2년생초본(蔓莖2年生草本)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면 목본에서는 낙엽교목이 59종으로 낙엽관목 57종과 유사하고 상록수가 42종이며, 기생식물(寄生植物)로 동백나무겨우살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초본에서는 다년생초본이 246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1년생초본 103종, 만경인 것이 10종이며, 바위손, 바위고사리, 봉의 꼬리, 도깨비고비, 비늘고사리, 콩짜개덩굴, 콩짜개난, 보춘화 등 상록초본이 30종으로 나타났다.
천등산의 특산식물로는 금탑사 후사면 계곡의 비자나무림하의 석산(Lycoris radiata)의 대군락이다. 이곳에서는 독무릇으로 부르고 있는데, 무릇 類는 백합과 식물이고, 석산과는 다르다. 석산과 함게 사찰 주위에 개상사화도 분포하고 있으나 그 상태가 빈약하고, 석산은 절 위쪽 천등산 동사면을 따라 표고 200 ~ 350m까지 대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같은 지역의 암자터 주위에 오갈피나무와 섬오갈피도 자생하고 있다. 정상의 암석 노출지에서는 광양 백운산의 산특식물(産特植物)로 알려진 백운기름나물이 자생하고 있다.
마. 독치성 - 지방기념물 제208호(2002.11.27. 지정)
독치성은 서북쪽에 해발 463.1m의 조계산에 있으며, 이 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려온 능선의 끝자락 한 부분에서 작은 봉우리(해발 175~212m, 성뫼산이라 부르고 있음)를 이루고 있는데 이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남쪽에 있는 평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동쪽의 바다도 보이고 있다.
독치성의 전체 길이는 508m로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석성 가운데 광양 마로산성(길이 550m, 전라남도 기념물 제173)과 고흥 남양리 산성(길이 530m, 전라남도 기념물 제207호)에 이어서 세 번째로 큰 산성에 해당한다. 성벽의 방향 구간별로 보면 북쪽이 190m로 가장 길며, 너비도 5.7~5.3m로 넓고, 높이도 3m까지 남아있는 곳이 있다. 동쪽은 길이 113m이며, 너비3.7~4.2m 정도이고 많이 무너져 있다. 남쪽은 길이 85m이고, 너비 4m 정도 되는데 동쪽에서 꺾어진 곳에서 40.5m까지는 성벽이 있으나 약 4m구간은 흔적이 거의 없다. 이처럼 독치성은 남벽의 일부 구간만 없어졌을 뿐 대부분은 체성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백제산성 가운데 가장 많은 형식으로 알려져 있는 테뫼식 산성이며 이 가운데서도 산복식 산성의 유형에 속하고, 평면형태는 삼태기형이다.
독치성의 축성법은 협축식인데 체성은 경사면을 석비레층이나 혹은 암반 위까지 파서 기초를 자연적으로 튼튼하게 한 후에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곧바로 벽석을 쌓아 올렸다. 체성의 벽석은 길이 20~100㎝, 두계 10~30㎝ 정도의 할석을 이용하고 있는데 대체로 길이 30~60㎝, 두께 15~30㎝크기의 석재가 많다.
체성의 외벽을 보호하기 위해 기저부에서 몇 단의 벽석 높이까지 점토와 잡석들로 비스듬히 다짐한 층이 내외벽에서 확인되었다. 경사면 지역을 수평 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리고 있는데 이는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배려해서 나온 것이다. 즉 경사면 지역을 경사면과 평행하게 성벽을 쌓는다면 결국 경사면 아래쪽으로 모든 성돌의 하중이 모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경사면 아래쪽의 성돌은 결국 위에서 내려오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붕괴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성벽의 하중이 아래쪽으로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벽을 수평 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벽의 하중을 골고루 분산시켜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지는 동문과 북문 등 2곳에서 확인되었다. 문지의 형태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백제시대 산성으로 밝혀진 검단산성과 고락산성처럼 외벽이 곡선을 그리고 내벽은 거의 직각을 이루어 평면형태가 동일하다.
특히 독치성에서는 치가 확인되었다. 치가 위치한 곳은 성벽과 능선이 교차하는 가장 높은 지점이다. 북서쪽 모서리부분과 북동쪽 모서리 부분이 바로 능선과 교차하는 곳인데 이곳에 사각형으로 돌출되어 치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의 성벽이 한 눈에 들어와 이곳을 방어하는데 유리하다. 동문지와 연결된 치는 능선의 정상부를 막고 있으며, 체성의 곡성부에 덧대어서 방형으로 축조하였다. 동문을 보호하는 적대와 같은 역할과 북벽을 방어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던 치로 보인다. 이 지역의 백제산성 가운데 처음으로 치가 확인되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치의 규모는 길이 2.5m, 너비 6.4m 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토기편(高杯片, 蓋片, 구연부편, 동체부편). 분청사기편, 평기와편(등문양은 격자문, 선문, 승석문, 무문)등이다. 기와의 분할면은 전면을 반듯이 자르고 내·외면을 다시 다듬은것들이 있다. 기와의 내면은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되는데 수키와는 포목흔이 일괄적으로 확인되고, 암키와는 포목흔과 승문(섶문양)이 함께 보인다. 이처럼 기와의 내면에 포목흔이 아니라 승문(繩文)이 있는 경우는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 산성들에서 예외 없이 출토되고 있는 특징적인 유물이다.
독치성은 백제 후기에 처음으로 쌓았던 산성이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아 이 지역이 통일신라에 흡수되면서 국경의 의미가 상실되자 산성의 기능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독치성은 백제시대의 산성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바. 음성(陰城) - 지방기념물 제210호(2002.11.27. 지정)
음성(陰城)에 대한 문헌기록은 거의 없지만, 주변에 고려시대의 도화현 치소(신호리 동백 마을로 추정)가 있어 도화현과 관련된 성(城)으로 추정된다.<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신호리 오치(烏峙) 국유림에 있는 성을 ‘둘레 1200-1200칸, 석축이며 성벽은 골짜기 유역을 둘러싸고 있는데 대부분 붕괴되었고 주민들은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는 기록이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목장성에 대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1,200~1,300間의 규모는 약 2,172~2,353m에 달하는 대규모 성으로 고흥반도에 소재한 성 가운데 가장 크다.
이 성은 고흥 도화면 신호리와 포두면 봉림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555m의 천등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끝자락 해발 389.5m정도의 산마루서 동쪽을 산 중턱[中腹]까지 내려가는 포곡식(包谷式) 山城이다.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방형이다. 체성은 내외협축(內外夾築)과 내탁(內托)을 병형하여 축조되었는데, 계곡을 막고있는 동벽을 제외한 나머지는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총 둘레는 2.642m이며, 단곽(單郭)의 석축성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성의 북서쪽 정상에서 북쪽으로 독치성(전라남도 기념물 208호) 백치성(전라남도 기념물 제209호), 남서쪽으로는 거금도 [절이도]가 관찰된다. 관련 시설로는 서·남·동쪽의 체성에서 문지(門址)3개소가 확인이 되었다. 서문지(西門址)는 해발 389.5m의 북서쪽 정상에서 남쪽으로 260m 거리에 위치하는데, 너비는 6m이다. 남문지는 해발 339m 남동쪽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28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데 바닥면은 평탄면을 이루고 있고, 너비가 10.3m로 중앙에는 폐쇄석으로 막혀 있다. 북벽 너비는 9.8m이고, 잔존높이는 1.5m이다. 동문지는 해발339m의 남동쪽 봉우리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498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너비는 3.8m이다. 그리고 우물지도 확인된다.
체성의 축성기법은 서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체성은 석비례층과 같은 단단한 바닥 위에 土石을 다져서 바닥을 정지한 후 수평쌓기의 방법으로 축조하였는데, 일부는 어떠한 형식을 보이지 않고 막쌓기를 하였다. 내부 채움석은 부정형 할석으로 채웠으며, 내벽은 2~3단으로 석축하여 마무리하였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부정형의 할석과 판석형 석재가 사용되었는데, 체성은 하부가 상부에 비해 비교적 큰 석재가 사용되었다. 석재의 크기를 보면 체성의 하부는 30~60cm×12~35cm 정도이며, 상부는 15~30cm×10~20cm 정도다. 그리고 기간의 보강시설이나 기단부를 설치하지 않고 곧바로 1단부터 쌓았다.
서벽은 성의 북서쪽 해발 389.5m의 산정부에서 해발 335m 고지상을 지나 남서쪽 해발 344.5m의 우마장산(牛馬場山) 산정부까지 연결되는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서벽의 바깥쪽은 북서쪽 산정부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우마장산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고, 두 능선의 사이에는 여러 개의 골이 합해져서 ‘물맞는 골’로 이어진다. 산의 능선과 서문지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경사가 심하다.
동벽구간은 포곡식 산성에서 계곡부를 막고 있는 곳으로서 서쪽 산정부쪽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북벽은 성의 북서쪽 해발 389.5m의 산정부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수습유물은 회청색이나 경질토기와 적갈색의 연질토기 동체부 등의 토기류, 분청사기편, 격자문 암키와와 복합문 암키와 등의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음성은 입지, 축성법, 수습유물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축성한 것을 보이는 2.642m에 달하는 대규모 포곡식 산성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참석 하실분은 꼬리말에 메모나 전화예약 바랍니다.
선비산악회 (011-633-81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