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부활절’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유대인의 날짜계산으로 그날 오후부터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의 여성제자들이 예수님 무덤에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무덤에 달려가 보고 빈무덤을 확인하고서도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첫 번째 부활절 소식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의심과 불신의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오늘날 부활절은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러한 의심과 불신의 어두운 마음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알렐루야’를 부르며 부활을 기쁨으로 찬미할 수 있을까? 사도행전은 제자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제대로 깨닫는 것은 성령강림절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이제까지의 의혹과 불신을 떨쳐버리고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를 외치며 설교했습니다. 유대인드을 향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고 설교 했을 때 오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천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루가복음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이야기에서 베드로가 의혹과 불신을 떨쳐버리고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그날의 사건’을 곱씹으면서 자기의 고향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그네 한 명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와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부활이 아니라 시신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주제는 바로 이 대목입니다. 부활에 대해 ‘시체가 없어졌다’고 말하고 ‘그분이 살아있다는 말도 있다’는 식으로 덧붙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이 두 제자의 이야기 정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 신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를 뵙지 못하고 의혹을 버리지 못하고 낙향하는 두 제자와 같습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 공동체 이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코로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가 깨닫거나 전한 복음에 대해 말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부활절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없는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말했던 무덤에서 만난 천사의 말은 생각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듯 우리에게 죽음과 어둠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에서 부활을 발견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루가복음의 두 제자는 그날 밤 예수께서 저녁식사를 하시던 도중 떡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나누어 먹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50일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를만큼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통한 삶의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 죽음을 통과한 후에야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즉생의 믿음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죽음을 이겨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통과하여 거기서 일어서는(아나스타샤, 부활) 새로운 삶을 알지 못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활이 없는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제자들을 깨웠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죽음의 과정에서 벗어나 갈릴리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전의 ‘물려받은 신앙’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이후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로 모이는 것에만 치중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흩어지는 선교입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는 교회를 떠나거나 등진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새롭게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화를 통해 부활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