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구성(耐久性)에 관하여
최근 휴대폰을 신형으로 교체했다. 그간 사용했던 삼성전자의 갤럭시는 7년이 넘도록 고장없이 잘 작동했다. 내가 휴대폰을 바꾼 까닭은 기본기능(통화, 문자, 카톡, 영상기능)만 있는 저가의 튼튼한 휴대폰을 싸게 구입하고 통신사를 바꾸면서 통신요금을 절약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사양의 휴대폰은 존재하지 않아 별 도리 없이 고성능이자 초과성능의 휴대폰을 구입했다. 어떻든 내가 7년 넘게 휴대폰을 바꾸지 않고 사용했다는 사실을 안 주위의 반응은 나를 별종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예전에는 내구소비재를 구매한데 있어 그 선택기준으로서 내구성이 아주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한 세대 전 LG전자의 캐치프레이즈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였다. 그러나 이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게 가전제품들은 대체로 수명이 10년을 훌쩍 넘었고 특히 브라운관을 사용한 명품 전축은 수리만 잘 해주면 수십 년을 작동하며 장수하곤 했다.
내구소비재에서 가전제품 외에 내구성이 중시되었던 중요한 물건이 자동차와 주택이다. 자동차에 있어서는 매년 신형의 자동차가 출시되어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지만, 저개발국에서는 2차 대전 전의 자동차가 수리에 수리를 거듭하면서 아직도 운행되고 있다는데 그런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의 내구성이 놀랄만하다.
내구소비재 중에서 가장 자산가치가 큰 집에 관해 본다면, 서양에는 석조 건물로 15세기에 지어진 주택이 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도 잘 지어진 양반집 한옥들은 일이백 년은 간단히 버티고 있다.
이렇게 과거에는 한 번 장만하면 가전제품과 자동차는 수 십 년, 주택은 평생 쓰는 것으로 알았고 제품도 그런 소비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내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사정은 어떤가?
휴대폰, MP3 또는 컴퓨터와 같은 전자제품은 교체 주기가 이삼 년, 최장 5년 정도로 단축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눈부신 기술진보로 신기한 새로운 기능을 갖춘 신제품에 소비자들이 매혹당하는 탓도 있으려니와, 그와 같은 고가의 신제품을 가지고 주위에 과시하고픈 졸부근성이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구매에서 과시욕이 크게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 제품은 자동차다. 친지간에 자택방문이 거의 멸종된 요즈음에는 집은 좋은 동네의 작은 아파트를 감수해도 자동차는 비싼 놈을 굴리고 다니는 것이 한국인의 취향이다. 예전에는 10만 킬로미터 이상을 뛴 차는 엔진을 보링하여 수명을 연장해 타고 다녔는데 이제는 나이가 10살을 넘은 노후 승용차는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 위와 같은 전자제품이나 자동차의 내구 내지 사용연한이 짧아지는 현상은 성숙된 자본주의경제에서 활발한 소비가 있어야 생산도 유지되며 국민경제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간단한 경제이론으로 나와 같은 꼰대의 과소비 우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주택의 내구연한 단축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한국의 주택은 아파트가 전제 주택수의 3분의 2에 달할 정도로 대표적 주거형태인데, 이 아파트의 재건축기간이 30년이고 이 기간도 최근 정부가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해 단축할 방침이라고 한다.
내 개인의 경우를 보아도 신축 아파트에 입주해서 조금 살다보니 어언 20여년이 흘러서 몇 년 후엔 재건축이 가능하게 된다. 예전에는 수도권 아파트의 경우 재건축을 하면 아파트 층수를 2배 이상으로 올려 추가된 아파트를 매각하면 건설비용이 나왔으므로 추가 분담금을 내지 않고 새 아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호세월도 지났다. 아파트 건축원가가 폭등하여 재건축 시 아파트 소유자들은 막대한 추가 분담금을 내게 되었다.
나의 경우 27층 아파트의 재건축이 추진된다면 층수를 더 높이면 평당 건축원가가 폭등하게 되므로 기존 호수를 늘이기는 어렵고 기존 아파트를 허물고 다시 짓는 수준이 될 터이다. 그러면 그 신축비용을 내가 어떻게 낼 수 있는가? 결국 경제적 약자인 나는 정든 거주지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떠나야 한다. 이걸 유식한 용어로는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이라고 한단다.
과연 내구연한이 100년이라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30년 만 쓰고 허물어 버리는 것이 타당한가? 큰 아파트 단지 하나를 허물면 폐기물이 자그마한 동산을 이룰 만큼 나오니 환경을 심하게 훼손하게 되며, 아파트 신축에 투입되는 자재와 인력은 상당 부분 낭비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반시설의 상당수가 100년 전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지 않았는가? 국가와 건설사는 그런 노후시설의 신축과 개축에 눈을 돌리고 애먼 아파트를 가지고 장난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파트는 탄탄하게 100년을 갈수 있게 짓고 일단 건축된 아파트는 최소 50년은 재건축을 못하도록 규제하여야 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나는 쓰던 바늘 하나가 부러지자 바늘을 추도한 이조시대 여인의 “조침문”을 학교에서 배웠고, 벗에게서 애용하던 고급 만년필을 선물로 받은 일화를 기록한 수필을 감상하면서 큰 세대다. 이렇게 자기가 일상 쓰는 물건에 정을 붙이고 애착하는 마음을 가짐이 빈곤의 시대를 살아 온 가난뱅이의 생활태도일까?
근자에는 일회용 용품이 넘쳐나고 있는데 이렇게 한 번 쓰고 버리는 풍조가 내구재에게까지 번지고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원샷한 뒤 크리스탈 컵을 깨뜨리고, 다 읽은 소설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한 철 입은 옷을 유행이 지났다고 수거함에 투입한다던지.
나의 걱정은 한 뼘 더 뻗어나간다. 우리가 일상용품에 애착을 가지지 않고 거리낌 없이 물건을 내버리는 마음의 자세가 사람과의 관계로 확장된다면 어찌될까 하고 나는 걱정한다.
남녀 간에 애인으로 사귀다가 한 번의 말다툼으로 헤어지고, 동거를 하다가 열정이 사위면 용이하게 이별한다. 이 습관을 결혼하고서도 버리지 못하고 육체적 욕정과 결합한 사랑의 내구연한 1년(아기가 태어나면 조금 더 연장되기도 한다)이 지나면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비난하며 이혼한다. 어떤 사내는 방이 하나 적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침대와 유모차를 버리고 왔는데 그 속에 각각 여인과 아기가 있었다나. 물론 이건 썰렁한 조크일 뿐이다.
이렇게 자신이 쓰는 물건과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불가에서 가르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남과는 그 함의가 다름은 물론이다.
물건과 사람을 가볍게 여김은 인생을 천박하고 피상적으로 사는 태도이며, 젊어 한 때는 반짝일지라도 늙어서는 빈한하고 고독한 생활에 이르게 될 개연성이 크다.
집착은 어떤 대상을 끈질기게 소유하고 싶어하고 못 얻거나 상실하면 심적 고통과 상처를 입는 심적 상태를 가리키며. 불가의 가르침은 이런 심적 상태에 이르지 말라는 것이지 사람과 물건과의 인연을 가볍게 여기라는 가르침은 아니다.
자신과 관계를 맺은 물건과 사람을 오랜 기간에 걸쳐 소중이 여기면 정(情) 내지 친밀감이 생성하여 증대되며, 그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는 그것과 그들이 내 인생살이를 응원해주고 있다는 심적 평안을 얻는다. 나의 한 외우(畏友)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침에 애용하는 만년필에 잉크를 주입하고 나면 용감한 병사가 탄환을 장전하고 최전선에 임하듯 자신감에 충만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선진국(돈과 연예에 한함)이며 자본주의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졸부의 과시적 소비를 포함하여 모든 소비는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방금 내가 지껄이고 있는 바, 내구성을 운위하여 근검절약을 떠올리게 하는 언사는 50년 전 후진국에서나 통했던 시대착오적 사고의 틀에서 나온 헛소리에 불과하겠다.
확실히 대다수 국민들이 반세기 전보다 풍족하게 살게 되었는데, 더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리 저리 모색하다 위에 쓴 사고의 덧에 걸린 것이니 독자들은 내구연한이 다 된 한 유기체의 오작동으로 여기고 심하게 꾸짖지 말기 바란다. (끝)
첫댓글 그간 모임에 나가지 못해 미안한 마음입니다. 소생은 아직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올린 잡문입니다.
아직 더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버리는 것은 경제적 낭비일 뿐 아니라 자원낭비, 환경훼손 등의 문제도 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