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6일
제목 지금 축복하라
본문 요12:1-8
지난주일 옆 사람에게 축복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평소 익숙한 말이 아니어서 좋은 말을 하고도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듣는 입장에서는 축복하는 말을 듣고 기분 나쁜 분은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말은 서툴게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늘 서툴고 어색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축복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축복이란 죽음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았을 때 하는 것임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살아 있을 때 향유를 부어드림
유대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향유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뿌려줍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향유를 부어드린 곳은 베다니 마을입니다. 마26장에 나병환자 시몬이 마련한 잔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에 초점을 두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마련한 잔치라는 것입니다. 2절엔 마르다가 음식을 만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고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 드리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살아계실 때 잔치를 연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보다 더 잘한 일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부은 일입니다. 살아 계실 때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향해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 받아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었을 것이라며 비난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 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나의 장례를 위하여 지금까지 간직해 둔 것이란 뜻입니다. 장례식에서 부어주는 것보다 살아 있을 지금 부어준 것이 잘한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매우 너그럽습니다. 허물이 있어도 장례식에서 고인을 흉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자에 대하여 얼마나 좋은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죽은 다음에 좋은 말 아무리 많이 해주어도 죽은 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장례식의 추도사란 영어 ‘eulogy’인데 희랍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좋은 말이란 뜻인데, 라틴어로는 ‘benedicare’ 축복이란 말도 됩니다. 이처럼 추도사를 할 때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합니다. 그 좋은 말들 가운데 몇 마디라도 그 사람이 죽어 관에 들어가기 전에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사람이 듣고 무척 고마워하며 행복해하였을 것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리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살았을 때 좋은 말을 해주라
이제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좋은 말은 살았을 때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축복의 말은 살았을 때 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장례식 때 하기 위해 칭찬과 좋은 말을 아껴두지 말고 지금 우리 곁에서 함께 살고 있는 때 해야 합니다.
좋은 말, 축복하는 말은 오늘 지금 해야 합니다. 좋은 말, 칭찬하는 말, 축복의 말은 남겨둘 것 없이 모조리 쏟아내야 합니다. 마리아가 비싼 나드 향유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부은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것들은 과유불급이지만, 축복의 말, 좋은 말, 칭찬의 말은 아무리 쏟아내도 탈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남은 날은 더욱 짧습니다. 축복의 말, 좋은 말만 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세월입니다. 불필요한 말, 상처 주는 말, 추한 말 하며 살기엔 아까운 시간입니다. 얄미운 남편을 더 축복해 주고, 말썽꾸러기 자식들을 더 많이 축복해 주면 어떨까요? 형제들과 이웃들을 향해 축복을 아끼지 말고 베풀어주면 어떨까요?
축복의 말 한 번도 해보지도 못하고 내 혀가 굳을 수도 있고, 내가 해준 축복의 말 듣기도 전에 이웃과 형제들이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죽기 전에 좋은 말을 많이 해줍시다. 교회에 오면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해드립시다. 가정에선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들에게 친절한 말,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해줍시다.
오늘 기억할 것은 축복의 말, 좋은 말, 칭찬은 살아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축복은 이웃과 형제가 숨을 쉬고 있을 때 하는 것임을 기억해 두십시오. 이웃에게 축복해주어야 할 때는 지금입니다. 죽은 다음 큰 화환을 드리기보다는 살았을 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함이 더 낫습니다. 죽을 때 비싼 수의 입히려 하지 말고 살았을 때 좋은 옷을 선물함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요19:39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마리아의 것보다 백배나 더 많은 분량의 향유를 드렸습니다. 니고데모의 헌신도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헌신은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으나 니고데모의 헌신은 잘 기억되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한 사람은 예수님이 살았을 때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드렸습니다. 살았을 때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의 헌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마26:13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축복의 말을 나중에 하기 위해 미루지도 맙시다. 떠난 다음엔 늦습니다. 죽은 후에는 축복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늘이 축복을 나눌 시간입니다.
축복도 연습이 필요하다
축복의 말, 좋은 말을 하고 싶으나 어쩐지 어색하고 남의 옷을 입은 기분입니다. 갑자기 남편과 자녀에게 축복한다고 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서 그런가? 아니면 치매 끼가 온 게 아니냐고 의아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부터 죄성이 가득하기 때문에 욕은 자동으로 나오고 거친 말은 연습도 해보지 않았지만 잘합니다. 나쁜 말에 이력이 붙은 자들이어서 좋은 말이 잘 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유치원 선생님이 노인대학에서 강의해 주실 때 욕 잘하는 아이들의 배후엔 욕쟁이 할머니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신달자 님의 산문집에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글이 있습니다. 아직 서툴고 어색하지만, 형제에게 좋은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만 골라 하는 연습해 봅시다. 꼭 축복한다는 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장점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이후상 목사님 부부는 칭찬할만한 일이 참 많아서 어려움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꾸지람이 먼저 나옵니다. 시어머니 눈에 며느리 하는 행동은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잘못할 땐 참고 어쩌다 잘할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칭찬해 보세요. 자녀들도 잘못할 때만 나무랄 것이 아니라 잘할 때 놓치지 말고 칭찬을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엄마는 이럴 때 좋아하시는구나’라며 다음엔 칭찬받을 일을 골라서 하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콜센터의 직원들에게도 화내지 말고 따뜻한 말, 감사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 때도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병원에 계신 분들에게도 격려와 위로의 말을 아끼지 말고 해주십시오. 이웃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들입니다. 땅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신분에 맞도록 좋은 말만 골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의 말을 하기 싫어 못한 것이 아니라, 서툴러서 못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축복하며 살면 됩니다. 입은 먹기만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좋은 말, 은혜로운 말, 축복의 말을 하라고 주셨습니다. 호흡이 멈추면 우리의 혀는 축복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축복을 들을 귀가 어두워집니다. 부모님, 노 성도님들은 우리 곁을 언제 떠날지 모릅니다. 장례식장에서는 축복을 말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장례식에서 드린 니고데모의 많은 향유보다 살았을 때 부어드린 마리아의 적은 향유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함께 있을 때, 살았을 때 좋은 말, 축복의 말을 해줍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