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진(銅雀津)
冷紅京樹著霜紋(냉홍경수저상문)-싸늘하게 붉은
서울 나무에 서리 무늬 붙었는데
霍霍空船櫓響勤(곽곽공선로향근)-빠르고 빠른
빈 배 노 젓는 소리 부지런하네
頃刻花惟鳧外浪(경각화유부외랑)-경각화는 오리 밖의 물결이라면
飛來峯是馬頭雲(비래봉시마두운)-비래봉은 바로 말 머리 구름일세
鞋彈錦石何時了(혜탄금석하시료)-신이
아름다운 돌을 튕기니 어느 때나 다하려나
扇拍金沙竟日紛(선박금사경일분)-부채는
금사를 치니 날이 다하도록 시끄럽네
水店更衣催趁郭(수점경의최진곽)-물가의 점방에서
옷 갈아입고 성곽으로 재촉하여 따르니
旋歸久旅得無欣(선귀구려득무흔)-오랜만에 돌아온 나그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덕무(李德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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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안씨 동작릉이 현충원으로 이름 바뀐 것 아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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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 국립서울현충원(顯忠院)으로 부르고 있는
현재의
동작구 현충원(銅雀區 顯忠院)은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宣祖1552~1608)의 할머니인
“창빈안씨(昌嬪安氏)”의 묘인 “동작릉(銅雀陵)”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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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1대와 중종(中宗)의 후궁(後宮)인
창빈안씨(昌嬪安氏)가 1549년에
51세에 죽자 경기도 양주 장흥 땅에 안장하였으나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과천(果川) 동작리(銅雀里)로 이장한다.
현재의 동작구 현충원(顯忠院)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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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묘(墓)의 명칭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부르고
왕의 사친(私親)과 세자(世子)의 무덤을 원(園),
기타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을 묘(墓)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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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창빈안씨(昌嬪安氏)의 무덤도
묘(墓)라 불러야 마땅하지만 손자인
선조(先祖)가 임금이 된 덕분에 높여서
“동작릉(銅雀陵)”이라 부르게 된다.
동작릉(銅雀陵)이 좋은 터였음은
창빈안씨(昌嬪安氏) 후손의 번창함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죽은 지 130년 만에 후손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조선이 망하기까지 역대 임금은 모두
창빈안씨(昌嬪安氏)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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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안씨(昌嬪安氏)의 “동작릉(銅雀陵)”이 조성된 후
이곳은 풍수상으로 길지(吉地)
로 이름 난 곳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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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동작진(銅雀津)”이란 화제(畵題)로
동작 마을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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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는 멀리 관악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그 앞으로 한강이 흐른다.
현재의 현충원 일대는 기와집이 늘비하게 있는 것으로 보아
부자나 명문가(名門家)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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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동작 마을은 풍수상으로 명당이라 하여
1950년 6·25전쟁 전사자를 위한 국군묘지를 시작으로
확장을 거듭하여
현재의 국립현충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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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안씨(昌嬪安氏)의 묘(墓)도 지금도 여전히
“동작릉(銅雀陵)”이란 이름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도 동작릉 왼쪽 100m 지점에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는 동작릉 우측 10m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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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주자(朱子)는 풍수에도 능했다고 하였다.
그가 묘지(墓地)에 대하여 말하기를
“조상의 신령(神靈)이 편안함을 얻으면
그 자손이 번성하며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
(神靈得安則其子孫盛而祭祀不絶)“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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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위해 산화(散華)하여
동작동 이곳에 안장된 영령(英靈)들은 후손을 잘
지켜 줄 것으로 믿으며
국민도 수호신(守護神)의 뜻을 보존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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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명사전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작(銅雀)”이란 말은
“동재기”라는 옛 우리말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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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기”란 말은 흑석동에서
국립묘지로 넘어 오는 강변 연안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 색깔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작진(銅雀津)을 “동재기나루터”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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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반포아파트 일대는 한강변의 모래사장과 늪지대였고
이수 로터리를 지나
사당동 방면에는 “정금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 정(丁)씨 성을 가진 감사(監司)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정감몰” 또는 “정가우”라 부른 것이
지금의 정금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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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는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을 모산(母山)으로
그 줄기에 위치해 있으며,
주봉인 공작봉(孔雀峰)은 양쪽으로 불끈 솟아올랐다가
엎드리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늠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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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체의 형국은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孔雀張翼形)이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 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의 흐름이
용(龍)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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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산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줄지어 서있는
형상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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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국립묘지가 위치한 공작봉은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조화를 이루고 있어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渴象取水形)으로서 명당 중의 명당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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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안씨(昌嬪安氏)의 동작릉(銅雀陵)에 지금도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참고로 비문의 내용과 문화재 안내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지정번호-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
시대-조선 숙종 9년(1683년)
소재지-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44번지 7호(국립현충원 내)
이 비와 묘소는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신도비(神道碑)와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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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숙종9년(1683년)에 건립되었다.
창빈 안씨는 연산군 5년(1499년)에
시흥에서 태어나 중종 2년(1507년) 아홉 살에
궁녀로 들어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하였으며 특히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로 궁내에서의 덕망 도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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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에 중종의 총애를 입게 되어
22세에 상궁(尙宮)이 되고 31세에 숙원(淑媛),
이어 숙용(淑容)까지 올랐다
. 2남 1녀를 낳았으나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이고,
둘째아들은 뒤에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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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에 별안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후손이 없는 명종을 이어
제14대 임금 선조로 등극하자
선조 10년(1577년)에 창빈(昌嬪)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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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의 글은 숙종 때
예조판서와 한성판윤을 지낸 신정(申晸)이 지었고
글씨는 한성판윤을 여섯 번이나
역임하고 지돈영부사에 오른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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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神道碑)는 고려시대부터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후궁을 위한 신도비(神道碑)의 건립은 보기 드문 경우인데
이는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자손이 역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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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는 원래 양주 장흥 땅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 묘를 옮긴 지역의 지명을 따라 동작릉(銅雀陵)이라고 일컬어 왔다.
묘 앞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기록해 놓은
묘갈(墓碣)과 혼령(魂靈)이 나와서
놀도록 만들어 놓은 직사각형 모양의 혼유석(혼유석(魂遊石),
그리고 불을 밝히는 석등(石燈)이 하나씩 있고,
사람의 형상을 돌로 만든 석인(石人) 2구가 갖추어져 있다.
이는 조선 후궁 묘 형태의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다
|
첫댓글 친구님들 덕분에
많이 배우게 됩니다 !
한편의 소설 , 드라마를
보는듯 ~
창빈 안씨의 묘가
상당히 명당이지요.
명당이 후손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