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여행11 - 황산의 소나무 단결송을 지나 북해의 청량대에 올라 일몰을 구경하다!
10월 21일 케이블카를 타고는 新白鹅峰(신백아령) 에 내려 황산 始信峰(시신봉) 에 오른후
몽필생화(夢筆生花) 를 보고 산을 넘어 西海宾馆 (서해빈관) 을 지나 排云樓
(배운루) 를 거쳐 排云亭(배운정) 에 도착해 서해대협곡 을 조망하고는 되돌아 옵니다.
유난히 가지가 많은 나무가 보이는데 내려갈때는 마음이 급해 무심코 지나쳤던 團結松(단결송)
이네요? 뿌리 하나에 두개의 줄기가 위로 뻗으니 연리송 의 일종인데 가지가 50~60개쯤
되는 나무 인지라 주민들은 많은 자식을 바라는 의미에서 多子松(다자송) 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2001년 장쩌민(강택민) 이 黃山(황산)을 찾아 산행중에 이 나무를 유심히 보고는 가지가
몇이냐고 물으니.... 머리 회전이 빠른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56개 라고 마치
세어본 듯 말하자 중국 56개민족을 상징하는 단결송(團結松) 이라 부르라고 지시합니다.
중국이 동북아공정 으로 발해에 이어 고구려 도 자기나라 라고 우기고 있는데, 중국의 이러한
"역사왜곡"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고 이유 정도는 알아
두어야 할터.... 중국에서는 지금도 신장 위구르족과 티베트 인 들은 중국으로
부터 분리 독립을 외치며 테러(독립운동?) 를 자행해 불특정 민간인들을 살상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최고로 중요한 것은 56개 민족이 단합하여 "하나의 중국" 을 지향하는 것이니 여기 "단결송
같은 상징" 이 필요한 것이라? 우리 한국인은 우리가 “단일민족”이다 보니 중국도 “漢族
(한족)” 한개 민족의나라 라고 생각하며 영토도 한나라나 송나라 혹은 명나라의 국경선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라며 漢族(한족) 외에 만주족,
몽고족, 회족, 장족에 티베트족과 조선족 도 자기나라 국민으로 중국인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국경선도 만주, 내몽고, 신장과 티베트에 걸치며....
漢族(한족) 외에도 "55개 민족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 라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럼 조선족 은 국제법상.... 중국인 인가? 아님 우리 한국인 인가? 우린 발해 를 소수
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다수의 말갈인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에서는 대조영을 말갈인 걸걸중상의 아들 이라
여기는데다가 주민 대부분이 말갈인 이니 "발해를 말갈인의 나라"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는 우리 한민족의 나라가 100% 분명하지만 중국인의 생각은 다른 것이...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당태종이 협약을 맺기를 백제는 신라 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하기로 했으니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네요?
그후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 고구려인 중에 황해도 지방 사람들만 신라에 넘어 왔고
나머지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만주 지방에 살던 고구려인은 "씨를
말린다" 는 의미에서 중국으로 잡아가서는 하서회랑과 양자강 이남에 가두었습니다.
훗날 일부가 남쪽으로 달아나서 태국 북부 접경 지대인 치앙라이 등지에 라후족과 아카족 및 리수족
등 3부족으로 남았다고 보는데, 그 중에도 40만 "라후족" 은 색동옷을 입고 씨름을 하며
호랑이를 숭배하고 결혼후 처가살이, 소도와 제천의식에 언어가 북한 사투리 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신라가 우리 삼국을 통일했다지만 고구려 영토는 10분지 1에 불과한 황해도 를 얻었을
뿐이고 고구려 주민도 황해도 지방민 15% 정도를 거두었는데.....
훗날 발해 멸망후 피난민을 받아들인걸 치더래도 20% 정도이니 그게 아쉬운 것이라?
중국인들은 꺼우리(고구려인) 들이라면 "공포심" 으로 진절머리를 쳤는데..... 고구려는
수나라 시절 문제와 양제에 걸쳐 수차례 수백만의 중국인이 고구려 침략에 나서
대부분이 죽거나 병신 이 되었으니... 강대국 고구려 에 대한 "두려움과 원한" 이 깊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군인에다가 함선이며 투석기등 무기제작 과 식량 공출이이며 만주 벌판으로 운반 에
백성들은 초죽음 이 되었으니 당나라가 들어서고도 사정은 바뀌지 않아 당태종때 그
전란의 고통 이란필설로 표현할수 없으니, 막리지 남생등 배신자 들과 신라의 도움 을
받아 천신만고 끝에 고구려를 점령했으니 지긋지긋한 "고구려족을 멸종"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통치기관을 세우고 다스리면 당분간은 순종하겠지만 세월이 흐르고 당나라가 안녹산의 난 같은 내란으로
혼란에 빠지면 고구려 후손들은 반란 을 일으켜 독립을 꾀할 것이니 모두 잡아가서 씨를 말리는 게
후환을 없앨수 있다 여겼던 것입니다! 로마가 3차례 백여년간에 걸친 포에니 전쟁 에서 카르타고 를
점령한후 이탈리아를 석권하며 로마 귀족 청년 80% 를 죽게한 한니발 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원한으로.....
"카르타고인을 전원 노예" 로 만들어 팔아버리고는 성벽과 시가지를 무느뜨린 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서는 소금을 뿌려 도시를 없애버린 일에 비유 됩니다.
고구려와 오랜 전쟁 에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으니 이참에 멸종시켜야 하는 것 이지요?
고구려인을 모두 중국에 잡아가는 것이 고구려인에 대한 후환을 확실하게 끊는 길입니다!
하지만 거란족의 반란 으로 영주에 잡혀 있던 고구려인과 말갈인 일부가 탈출해
발해 를 세우고 228년 후에 발해가 거란에 망한 후에는 일부 유민이 신라로 투항 합니다.
중국은 다수의 고구려인은 중국에 잡혀갔으니 중국인의 피에 섞였다는 것이고 우린 숫자 가 중요한게
아니라 고구려의 혼과 정신 을 한국인이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성씨 본관 5천개 중에 인구 25만이 넘는 성씨 본관은 30개인데 가야계 는 1위 김해 김씨 412만 입니다.
그리고 신라계 는 2위 밀양박씨 303만, 4위 경주김씨 173만, 5위 경주이씨 142만,
6위 경주최씨 98만, 8위 광산김씨 84만, 9위 파평윤씨 71만, 10위
청주한씨 64만, 11위 안동권씨 58만을 비롯해 12개성씨 473만등 1,408만에 달합니다.
반면에 고구려계 는 7위 진주강씨 97만이고, 백제계라기 보다는 신라계라 여겨지는 통일신라
시대인은 이한을 시조로 하는 3위 전주이씨 261만 외에 평산신씨등 2개 82만이며
제주 는 23위 제주고씨 32만이고 고려시대가 시조는 20위 해주오씨 38만등 3개 94만 입니다.
귀화한 중국인은 19위 남양홍씨 39만등 2개 성씨 69만이며, 이상 30개 본관을 합치면
2,500만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50% 에 달하고, 나머지 4,970개 본관이 2,500만 인데...
보다시피 고구려인을 시조 로 하는 성씨는 한국인의 4% 미만이라? 고구려인의 피는 적네요!
그런데 중국에는 조선족이 200만 으로 56개 민족중에 14번째인데 이들의 국적은 중국인
이니 조선족의 역사 다시말해 고구려의 일부는 중국의 역사 라는게 저들의
인식이며..... 또 하나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수 없는 것은 지방 정권 운운하는 것입니다.
고구려 수도 환도성 이 246년 위나라 관구검 에 이어 342년 전연 모용황 에 의해 두번째로
또다시 함락된후 선왕의 시신과 왕모와 왕비에 5만 백성이 생포 되어 갔는데
고국원왕만 간신히 도망쳤을뿐 수도의 백성 대부분인 5만 이 잡혀간데다가 시신까지...
고국원왕 은 전연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하니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에 책봉됩니다.
이후 광개토대왕 은 396년 후연의 모용보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에 책봉되는데
왜와 가야가 신라를 침범해 서라벌을 포위하자 400년에 5만 구원군을 보내니...
후연이 공격해와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 하자 김해까지 내려갔던 고구려군을 철군시켜
재정비한 후에 신성과 남소성은 찾지 못했지만 대신 402년에 숙군성을 공격해 반격 합니다.
아들인 장수왕 은 북위 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에 책봉 되고...
남조인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 되었으며 이후 영류왕 까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습니다.
590년 영양왕 은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조공을
바쳐 시간을 번 다음 598년 말갈기병 1만기를 인솔해 요하를 습격하자 문제가 30만
대군을 보내니.... "미천한..." 운운 사죄사를 보내 용서 받는등 책봉은 외교 에 불과합니다!
시간을 번 영양왕은 돌궐과 연합하려다가 수양제의 침략을 받는 것이니 신라나 조선 과는 달리
중국과의 일시적인 평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공과 책봉의 형식 을 따랐을 뿐이고
실제로는 이처럼 구속 받지않는 자주적인 외교 를 했으니 지방정권 운운은 중국의 억지지요!
그럼 결론 은 하나인데..... 중국은 “漢族(한족)” 단 한 개 민족의 나라 인가?
아니면 56개 여러 민족 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 인가??? 물론
중국 정부는 중국은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고 56개 다민족 국가 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한국인 들은 중국은 “漢族(한족) 의 나라” 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만주와 내몽고,
신장과 티베트등 여러 지방과 민족이 장차 중국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만주족과 조선족등 발해와 금나라,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과는 관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윽고 북해 에 도착해서는 베이하이 빈관에서 일몰 을 보기 위하여 狮林大酒店
(사림대주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서는 청량대 로 갑니다.
10분만에 청량대 바위산에 오르니 동쪽과 서쪽이 모두 탁 트인게
바로 여기가 "일몰과 일출" 을 보는 명소임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올라갈 때 사람들이 줄지어 내려온 것은 오늘은 구름 이 너무
짙게 끼여 일몰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인가 본데...... 아쉽네요?
해서 다시 내려와 베이하이빈관 앞 마당 에 이르니 여기서도 청량대 만큼은 아니지만
일몰과 일출 을 본다는데..... 마당에 텐트가 보이고 농구하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다시 마당을 가로질러 가파른 벼랑 절벽 위에 반원형으로 지어진 散花塢(산화오)
전망대에서 이백 의 전설이 얽힌 몽필생화 (夢筆生花) 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마당에 있는 매점에서 캔맥주 를 하나 사서는 방으로 돌아와서
마시고는 휴대한 전기남비로 밥을 해서 먹고는 잠자리에 듭니다.
첫댓글 저희들은 북해빈관에서 묵엇던것 같습니다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