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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카르푸스 순교록
폴리카르푸스는 주님처럼 넘겨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이웃에 관련된 일도 돌보면서 폴리카르푸스를 본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참되고 변함없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1,2]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는 것은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의 중심 주제인 동시에, 원시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시기에 가장 많이 사용한 교훈적 주제였다.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본받음’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신자들이 순교자를 본받는 것으로 구별되지만 항상 순교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본받는 사람’은 이냐시우스 편지의 핵심 낱말이며 폴리카르푸스는 이냐시우스의 ‘본받음’ 사상을 확산시켰다. 사도 시대 이후 ‘사랑’은 여기에서와 같이 일반적으로 ‘형제애’를 뜻한다.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사랑은 모든 이기적·광신적 순교 개념을 거부하는 핵심 낱말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 모든 순교는 복되고 고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경건해야 하고 모든 것에 대한 권능을 하느님께 돌려야 합니다. [2,1]
▣ '하느님의 뜻에 따라‘라는 표현은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마태 6.10; 26,39,42)라는 예수의 의도와 부합한다.
누가 순교자들의 고결함과 인내* 주님께 대한 사랑에 경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육체의 조직이 채찍질로 갈기갈기 찢겨 몸 속의 정맥과 동맥까지 드러나 보이는 고통을 견디어 냈고, 구경꾼들마저 그들을 불쌍히 여겨 탄식하였습니다. 또 다른 몇 명은 매우 고결한 태도를 취하여 아무도 큰소리로 울거나 신음하지 않았습니다. [2,2]
▣ 인내는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자주 언급되는 낱말이다. 순교자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인내를 필요로 한다(히브 10,36).
☑ 인내의 끝은 순교다.
그리스도의 가장 고결한 순교자들은 고문을 당하는 그 시간에 육체를 떠나 있다는 것과, 더구나 주님께서 그들 옆에 서서 그들과 이야기하신다는 것을*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지하였으며 이 세상의 고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한 시간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2,2-3]
▣ 주님께서 고문받는 사람을 돕는다는 표현은 다른 순교록에도 나타난다(이사. 순교 5,7.14: “이사야의 몸이 여러 부분으로 잘리었을 때 그는 비명을 지르지도 울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령과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시간의 고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표현은 순교자의 죽음이 죄를 용서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그러나 이 사상은 3세기에 주교의 권위로 부인된다). 이 표현은 부활을 보증하는 순교를 제물로 보는 이냐시우스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부활에 관한 종말론적 관점은 순교록에 나타나지만 그리 강조되지 않는다. 순교록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동참하기보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데, 마카베오서에서는 부활 신앙이 순교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한편 부활의 희망은 복음에 따른 순교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자들의 불을 차갑게 느꼈습니다. 그들이 영원하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피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고, 참고 견디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된 좋은 것들과, 들은 적도 없고 눈으로 본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들을 마음의 눈으로 알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이미 천사가 된 그들에게 이 좋은 것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2,3]
야수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혹독한 고문들을 견디어 냈습니다. 고문자들은 지속적인 고문으로 가능한 한 순교자들이 믿음을 부인하도록 그들을 날카로운 조개 껍데기 위에 뒹굴게 하였으며, 다른 형태의 갖가지 고문으로 괴롭혔습니다. [2,4]
악마는* 그들을 상대로 많은 것을 획책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악마는 순교자들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였습니다. [3,1]
▣ 순교는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뿐만 아니라 다른 글에서도 악마와 맞서는 투쟁으로 이해한다. 폴리.순교 17.1에서는 부정한 전집정관을 "의인들을 거슬러 싸우는 적대자이며 중상가인 악인”으로 표현한다. 복음서도 악마를 예수 수난의 원흉으로 본다(루가 22,3; 요한 13,2 참조). 악마와 맞서는 투쟁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일반적 표상이다. 이 경우 악마와 투쟁하는 순교자의 상에 관한 이원론은 ‘두 가지 길의 가르침’에 관한 이원론과 부합한다(생명〔삶]-죽음: 그리스도-악마; 앞으로의 영광-현재의 고난 둥)
☑ 순교는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매우 고결한 게르마니쿠스가* 고통을 참아냄으로써 순교자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격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맹수들과 매우 잘 싸웠습니다. 전집정관이 그를 설득하고자 젊은 나이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부당하고 불법적인 생활에서 더 빨리 벗어나기를 원하였으므로 맹수를 자신에게 억지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때문에 모든 무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고결한 태도에 놀라 아우성쳤습니다.* "무신론자들을 없애라! 폴리카르푸스를 찾아라.” [3,1-2]
▣ 게르마니쿠스는 ‘두 가지 길의 윤리’에 상응하여 4장에 나오는 퀸투스와 모든 면에서 상반된 사람으로 소개된다. 3,1은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의 모든 본질적인 내용, 곧 순교에 대한 격려, 위로와 권고, 비겁함과 유혹의 극복, 복음에 따른 순교 태도. 자발적인 순교의 거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막에 해당한다. 게르마니쿠스는 ‘탁월한’,‘인내’,‘맹수와 싸우다’와 같은 표현과 함께 소개되며 이는 폴리카르푸스에게도 연결된다. 순교자의 당당한 태도에 대한 군중의 부정적 반응은 순교록의 전형적 요소이며, 순교자들에 대한 경탄도 순교록의 전통적 주제이다.
최근에 프리기아 지방에서 온* 프리기아 출신의* 쥔투스라는 사람이 맹수들을 보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도 자발적으로 순교하도록 부추긴 사람이었습니다.* 전집정관은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고 기원제물을 바치도록 온갖 회유의 말로 그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스스로 순교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이와같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4장]
▣ 퀸투스가 ‘최근에’ 프리기아 지방에서 왔다는 언급은 그가 교회의 분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프리기아 출신’은 ‘새 예언’의 추종자인 몬타누스파를 가리킨다. 순교록 4장은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 가운데 몬타누스주의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리기아 사람 퀸투스가 몬타누스파라는 사실올 추론할 수 있다. 몬타누스파의 신탁에서 순교에 대한 열망은 퀸투스의 순교 열망과 부합한다.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은 폴리카르푸스가 순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은 점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극단적 몬타누스주의와 영지주의 사이에서 순교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 순교하러 나서서도 안 되었다. 박해의 위험에서 도피하는 것이 당시 교회의 일반적 견해였다. 다.「폴리카르푸스 순교록」에서 예수의 수난은 복음에 따라 겪은 순교의 본보기와 규범으로 평가되며, 복음은 올바른 가르침으로 간주된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피신하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농가로 피신하여 몇몇 사람과 함께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습관대로 모든 사람과 전 세계의 교회를 위하여 밤낮 기도만 드렸습니다. 체포되기 사홀 전, 그는 기도하는 동안에 환시에 빠져 자신의 베개가 불타 없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정신이 들자, 그는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해져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5,1-2]
▣ 폴리카르푸스는 반몬타누스주의 논쟁에서 그가 황홀경에 빠지지 않은 ‘판단력’을 지닌 참된 예언자로 입증된다. 12,3에서 이 구절의 예언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지기(16.2 참조)때문에, 폴리카르푸스의 환시는 몬타누스파의 계시와 명백히 구분된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이 경쟁심에 빠져 약속한 계시들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에피.약상 48,2,1).
☑ 폴리카르푸스는 환시대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를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두 명의 노예 소년을 체포하였고, 그 가운데 한 명이 고문을 받고 자백하였습니다. 그를 배반한 사람들이 바로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숨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헤로데라는 치안관이 폴리카르푸스를 경기장으로 끌고가려고 서둘렀습니다. 이로써 폴리카르푸스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자가* 되는 몫을 받은 반면, 그를 배반한 사람들은 유다와 같은 벌을 받았습니다. [6,1-2]
▣ 순교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많은 문헌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 폴리카르푸스는 생명의 길로 갔고, 그를 배반한 자들의 죽음의 길로 갔다.
추적자들과 기병들은 노예 소년을 데리고, 금요일 저녁 시간에 강도를 잡으러 나서듯이 평상시대로 무장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저녁 늦게 그곳에 도착하여 이층의 조그만 방에서 쉬고 있는 폴리카르푸스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장소로 피할 수 있었지만, 이를 원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6,10; 사도 21,14 참조)하고 말했습니다. [7,1]
그는 그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내려가 그들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폴리카르푸스가 매우 늙었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에 놀랐으며, 이런 노인을 체포하려고 그렇게 애쓴 것에 당혹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때에 식사와 음료를 대접하도록 바로 지시했고, 조용히 기도할 수 있게 시간을 내달라고 그들에게 요청하였습니다. [7,2]
폴리카르푸스는 자신이 만난 적이 있는 모든 사람, 곧 낮은 사람들과 높은 사람들, 중요한 사람들과 하찮은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보편 교회 전체를 기억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기도가 끝나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그를 나귀에 태워 도시로 데려갔습니다. [8,1]
▣ 폴리카르푸스의 기도에 대한 이 언급은 다른 사람을 위해 바치는 청원기도의 특징을 나타내며(요한 17 참조). 그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경건한 노인’(7.3)으로 묘사한다. 폴리카르푸스는 자신의 안녕이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편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 이미 폴리.순교 1,2에서 저자는 필립 2.4을 참조하면서 자신의 안녕과 구원만을 위한 행위를 경계한다. 또 4장에서 프리기아 사람 퀸투스에 대한 비난과 개인의 구원과 보상 에 관한 몬타누스주의의 신탁에 대한 비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치안관 헤로데와 그의 아버지 니케테스가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은 그를 마차에 옮겨 태우고 그의 옆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황제는 주님이다" 하고 말하고, "황제의 수호신에게 기원제물을 바치고 이에 뒤따르는 행동을 하고 풀려나는 것이 도대체 왜 나쁘냐?'’ 하고 말하면서 그를 설득하였습니다. 폴리카르푸스는 잠시동안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설득하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8,2]
폴리카르푸스가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폴리카르푸스야, 힘을 내고 용감해져라” 하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나, 거기에 있던 우리 공동체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9,1]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고* 마음을 바꾸시오.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없애라!’ 하고 말하시오.” [9,2]
▣ 그리스도인은 황제의 수호신에 대한 맹세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범죄에 해당하며 맹세의 거부는 황제를 모독하는 행위로 생각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는 조항을 관리들의 취임선서에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 조항의 위반은 황제의 신성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범죄로 여겼다.
이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제신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렀다. 이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제신의 호의와 평화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신들의 분노로 불행을 야기시킨다고 비난하였다. 곧, 이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제신을 숭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들이며, 신들의 분노와 공공의 재난을 책임져야 했다. 로마인들이 볼 때, 황제의 수호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과 맹세에 대한 거부는 로마의 공권력과 종교에 대한 공적인 저항이었다.
전집정관이 그에게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모독하시오”* 하고 다그쳐 경고하자 폴리카르푸스가 대답했습니다. "여든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9,3]
▣ 전집정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황제의 입상 앞에 제물을 바치고 그리스도를 저주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맹세를 요구한 다음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과 무신론(그리스도교)에서 돌아설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물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은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이용한 수단이었다. 특히 이 모독은 유다인을 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특징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하거나 배교한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전집정관이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시오”*하고 계속 맹세를 강요하자 폴리카르푸스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요구대로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할 것이라 잘못 생각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당신이 모른 체하더라도, 나의 솔직한 고백을 들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한다면, 나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10,1]
▣ 전집정관은 폴리카르푸스에게 세 번에 걸쳐 맹세(9,2.3; 10,1)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신약성서에 세 번(사도 11,26; 26,28: 1베드 4,16) 나온다. 이 명칭은 그리스도인의 경칭 또는 대중적인 이름이 아니라, 이교인이 국가에 적대적인 단체의 일원을 나타내는 부정적 용어였다. 이 용어는 나중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순교자들 덕분에 경칭으로 변하였다.
전집정관이 말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맹수들이 있소.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맹수들에게 던져버리겠소.” 그 말에 폴리카르푸스가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맹수들을 부르십시오! 우리는 정녕 더 좋은 것에서 더 나쁜 것으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한 것에서 의로운 것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전집정관이 다시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불로 태워 없애 버리겠소.”* 그러자 폴리카르푸스가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은 잠시 타다 마는 불로 위협하는군요. 당신은 불경건한 이들을 위하여 준비된 다가올 심판과 영원한 벌에 관한 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주저합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맹수들을 데려오십시오." [11,1-2]
▣ 화형은 로마법에서 최고의 형벌이며, 특히 적이나 반역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다. 순교자들의 화형은 그리스도교의 순교 문헌뿐만 아니라 유다교 문헌에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화형은 야수형 다음에 이루어진다. 열한 명의 다른 순교자들이 야수형을 받은 뒤 열두번째 순교자로 폴리카르푸스가 화형되었는지 이 진술만으로는 알 수 없다. 폴리카르푸스가 화형에 처해진 동기가 11,1-2에서는 그가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12,2-3에서는 군중이 요구한 야수형이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용기와 기쁨으로 가득 찼고 얼굴은* 은총으로 충만했습니다. 물론 자신을 위협하는 말에 놀라거나 동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전집정관은 격노하여, "폴리카르푸스는 세 번”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였다” 하고 공포하도록 전령을 경기장 가운데로 내보냈습니다. 전령이 이 말을 공포하였을 때, 스미르나에 사는 이교인들과* 유다인들* 모두가 억누를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큰 소리로 아우성쳤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기원제물을 바치지 말고 황제의 수호신을 숭상하지 말라고 가르친 아시아의 스승이자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며* 우리 신들에 대한 파괴자이다." [12,1-2]
▣ 이로써 순교자의 얼굴이 영적인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순교자들은 죽음에 즈음하여 이미 천사가 되었다. 이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황제의 제의를 거부하여 스미르나에 사는 자신들에게 손해만 끼치는 집단으로 여겼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이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선동자로 드러난다. 실제 역사에서 수많은 유다인이 소아시아 지방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상업도시이며 항구도시인 스미르나에서 그리스도교 박해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적대행위와 그들이 그리스도교 박해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은 고대의 수많은 문헌에서 증명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 칭호는 여기서 처음으로 주교에게 적용되고, 스승 칭호는 이전부터 사용되었다. 더욱이 히에로니무스는 폴리카르푸스를 '아시아의 지도자’로 부른다.
그들은 폴리카르푸스를 산 채로 화형에 처하라고 일제히 외쳤습니다. 그에게 계시된 베개에 관한 환시의 내용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곧, 기도하는 동안에 그는 베개가 불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정신이 들자 그는 자신과 함께 있던 신자들에게 ‘나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해져야 합니다” 하고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 [12,3]
▣ 폴리카르푸스는 여기서 이냐시우스(이냐.필라 7.1-2)나 스테파노(사도 6,10;7,55)처럼 예언적 은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군중들은 곧바로 작업장과 목욕탕에서 나무와 잔가지들을 모았습니다. 특히 유다인들은 이러한 일에 익숙한 듯이 이 일을 매우 열심히 도왔습니다.* 장작더미가 준비되었을 때, 폴리카르푸스는 스스로 겉옷을 모두 벗고,* 허리띠를 풀고, 신도 벗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에는 이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교하기 이전에도 고상한 품행 때문에 모든 점에서 존경받았으며,* 신자들은 저마다 언제나 그의 몸을 맨 먼저 만지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13,1-2]
▣ 여기서 초대 그리스도교의 반유다주의를 명백히 엿볼 수 있다. 유다인들의 이같은 태도는 구세주의 수난을 상기시킨다. 폴리카르푸스가 스스로 옷을 벗는 것이 이 서술의 중심이다. 겉옷을 벗는 것은, 14장의 성찬기도를 15장의 성찬 의미와 결합하여 “폴리카르푸스가 순교에서 완전한 자의식 아래 마지막 성찬을 거행히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순교를 감사의 제물로 여긴 것 같다. 이냐시우스(이냐.로마 7,3)도 자신의 임박한 순교를 성찬례로 여겼고. 이냐.로마 2,2에서는 순교를 제물로 묘사한다.
☑ 이냐시우스도 폴리카르포스도 순교로서 자신을 성찬 제물로 바쳤다.
장작더미를 태우려고 준비한 도구들이 곧바로 그의 주위에 놓였습니다. 그들이 그를 못박으려고 하자 그가 말하였습니다.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오. 나에게 불을 참을 힘을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이 못으로 나를 고정시키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디어 내는 힘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3,3]
▣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마카베오서의 순교사화에도 언급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못박지 않고 단단히 묶었습니다. 큰 양떼 가운데 살진 숫양이 희생제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번제물로 준비 되었둣이, 그의 손은 등 뒤로 단단히 묶였습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당신께서 사랑하고 복을 주시는 당신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천사들과 권능들과 모든 피조물과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의인의 하느님이시여, 저를 이 날 이 시간에 합당하다고 여기셨으니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순교자들 가운데에 동참하고 성령의 불멸* 안에서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삶인 부활을 위하여 당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거짓이 없으시고 진실하신 하느님, 당신께서 미리 마련하시고 계시하셨으며 지금 이루신 대로* 오늘 저를 순교자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살진 희생제물*로 당신 앞에 받아 주옵소서. 이때문에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종, 영원한 하늘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을 찬미하고 찬양하며 당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과 성령과 함께 당신께* 이제와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14,1-3]
▣ ‘불멸’이라는 표현은 폴리.순교 19,2에도 나온다. 성령의 불멸은 영원한 삶과 직접 연관된다. 유다의 묵시적 사상과 이 사상의 영향을 받은 바울로는 세상과 인간의 유한성을 미래의 불멸성과 뚜렷이 구분한다(로마 1.23; 1고린 9.25; 15,42-54; 1베드 4,23 참조)
저자는 하느님께서 폴리카르푸스에게 이미 이전에 계시하신 것을 놀라운 방식으로 완성하셨다고 서술한다. 곧, 폴리카르푸스는 환시(5,2)에서 그가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12,3)을 알았다. 하느님께서는 제물을 ‘미리 준비하셨으며’, 미리 보신 것을 마침내 완성하셨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뒤에 계시며,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는 ‘복음에 따른 순교’(1.1) 또는 ‘하느님의 뜻’으로 확인된다. 순교를 제물로 이해하는 개념은 명백히 유다 전통을 거쳐 이냐시우스의 사상에서 물려받은 것이며(이냐.에페 21,1; 이냐.스미 10,2; 이냐.폴리 2.3;6,1) 성찬과 연결된다.
그가 "아멘” 하고 기도를 끝마쳤을 때, 불을 맡은 사람들이 불을 붙였습니다. 불꽃이 활활 타오를 때, 우리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기적 이야기들을 보존하였습니다. 배의 돛이 바람을 가득 안고 불룩해지듯이 불은 아치형이 되더니 순교자의 몸을 둘러쌌습니다. 그의 몸은 타지 않고 빵이 구워지듯이, 또는 용광로에서 금과 은을 정련하듯이 불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향내나는 유향이나 다른 값진 향료들과 같은 그러한 향기를 맡았습니다. [15,1-2]
▣ 박해 상황에서 기적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범적인 주교를 본받으려는 독자들의 신심을 강하게 한다. 기적은 폴리카르푸스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충실한 도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마침내 무법자들은 그의 몸을 불로 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단도로 찌르라고 사형집행인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사형집행인이 그대로 하자, 비둘기 한 마리*와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와 불을 꺼버렸습니다. 모든 군중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선택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 시대의 사도적 스승이고,* 스미르나에 있는 정통신앙 교회의 예언자다운 주교이며, 매우 존경스러운 폴리카르푸스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은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6,1-2]
▣ 비둘기는 고대 교회에서 의인의 육체에서 떠나가는 영혼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표상 외에 비둘기는 하느님의 ‘영’을 가리킨다. ‘선택받은 사람들’ 개념은 순교자들을 가리킨다.
고대 교회의 증언들은 폴리카르푸스를 교회의 뛰어난 인물이며 이단에 대한 투쟁자로 묘사한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 가현설과 엄격한 금욕을 주장하고 구약성서와 복음을 비판한 영지주의자들과 투쟁하였다.
의인들을 거슬러 싸우는 적대자이며 중상자인 악인은 폴리카르푸스의 고귀한 증언과, 처음부터 흠잡을 데 없는 그의 품행과, 불멸의 월계관을 쓰고 확실한 상을 받은 그를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시신을 가져가 그의 거룩한 몸의 일부에 동참하기를* 바랐지만, 악인은 우리가 폴리카르푸스의 시신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7,1]
▣ 순교자의 유해 공경에 관한 제의적 특성은 ‘그의 거룩한 몸에 동참함' 정식에서뿐만 아니라 성찬과 관련된 문맥에서도 나타난다. 폴리.순교 14,2의 성찬 정식은 ‘동참하다, 참여하다’와 거의 동의어인 ‘몫을 받도록’과 연결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동참자’(폴리.순교 6,2)도 성찬과 결합된다.
☑ 성인의 유해 공경은 초창기부터 있었다.
악인은 헤로데의 아버지이자 알케의 형제인 니케테스를 부추겨 그의 몸을 내주지 말라고* 통치자에게 간청하게 하였습니다. 니케테스는 “그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이를 포기하고 이 사람을 흠숭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부추김과 압박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불에서 폴리카르푸스의 시신을 모으려고 할 때 감시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받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신 흠없는 분인 그리스도를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공경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17,2]
▣ 박해자들이 순교자의 유해와 유물을 없애려는 이유는 부활의 희망을 없애려는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무덤만이 사자(死者)가 쉴 곳이며 사자숭배를 위한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에 매장에 큰 의미를 두었다. 이때문에 적들도 무덤에 안치되었다.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비용으로 매장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니케테스의 입을 빌려 순교록의 수신자들에게 순교자 공경과 그리스도 흠숭이 뒤바뀔 수 있는 위험의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몬타누스파의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은 순교자 공경과 그리스도 흠숭의 명백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17,2.3에서 그 이유와 근거를 분명히 밝힌다. 박해 시대의 이러한 순교자 공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강하게 하고 극단적인 순교 열망(폴리.순교 4)과 순교자 공경(17,3)을 ‘복음에 따라’ 제한하려는 교훈적 의도를 내포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이분을 흠숭합니다.* 또한 우리는 순교자들이 왕과 스승께 비할 데 없는 애정을 쏟으므로, 주님의 제자들이며 본받는 사람들인 순교자들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우리도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고 동료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3]
▣ 여기서 순교자 공경과 그리스도 흠숭이 신학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그리스도에게 사용하는 ‘공경하다’, ‘흠숭하다’는 순교자를 공경하는 ‘사랑하다’와 구분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순교자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그분을 본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는 신이나 반신(半神)으로 공경되는 고대의 영웅과 구분된다. 그밖에 폴리카르푸스에 대한 공경은 그를 하느님과 유사한 존재로 보고 그에게 어떤 것을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른 그의 모범을 다른 이들에게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백부장은 유다인들의 완고함을 알아채고, 폴리카르푸스의 시신을 가운데에 놓고 그들의 관습에 따라 화장하였습니다. 그 뒤 우리는 보석보다 더 귀하고 금보다 더 값진 그의 유골들을 모아 적당한 곳에 묻었습니다. [18,1-2]
우리는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가능한 한 그곳에 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전에 투쟁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앞으로 순교할 사람들이 단련하고 준비하도록, 그가 순교한 날을* 기념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18,3]
▣ 이 진술은 순교자와 유해 공경에 대한 교회의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여기서는 폴리카르푸스의 유골이 적당한 곳에 묻혔다는 것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곳에 모였다는 것 말고는 다른 사실이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폴리카르푸스의 사망일을 순교자의 불멸과 영원한 삶의 생일로 보았다. 이미 이냐시우스는 순교자가 죽은 날을 하늘에 머무르는 삶의 생일로 이해한다(이냐.로마 6,3). 이때문에 공동체는 순교자가 사망한 날을 축일로 거행하였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축일에 「폴리카르푸스 순교록」의 내용이 낭독되거나, 애찬(愛餐)이 행해졌다. 폴리.순교 18장에서도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성찬례가 거행되었음을 추론하게 한다. 폴리카르푸스의 순교에 관한 모든 보고는 그리스도의 순교를 근거로 쓰였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높다. 따라서 주님의 수난 재현은 순교자의 순교를 기억하는 축일과 쉽게 결합할 수 있다.
이것이 복된 폴리카르푸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필라델피아 출신 사람들과 함께 열두번째로 스미르나에서 순교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그만을 특별히 기억하여 이방인들조차 어디에서나 이야기합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순교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일어난 그의 순교를 본받기를 열망합니다. [19,1]
▣ 이러한 진술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폴리카르푸스는 스승일 뿐만 아니라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② 많은 사람이 본받기를 갈망한 그의 순교는 복음에 따른 순교였다. ③ 폴리카르푸스는 이미 살아 생전에 매우 유명하고 존경받는 주교(폴리.순교 13,2: 17,1 참조)였다.
그는 인내로써 불의한 통치자를 내 제압하였으며, 그리고 이와같이 불멸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그는 환희로 가득 차 사도들과 모든 의인과 함께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우리 영혼의 구원자이고 우리 몸의 지도자이며 전 세계 보편 교회의*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였습니다. [19,2]
▣ 여기서 ‘가톨릭’은 ‘전 세계’와 연결됨으로써 16,2의 ‘정통 신앙의’보다는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복된 폴리카르푸스는 크산티쿠스 달의* 둘째 날, 3월 초하루 날의 7일 전, 대안식일 오후 2시경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트랄레스의 필립푸스가 대사제이고, 스타티우스 과드라투스가 전집정관이었을 때 -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 헤로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영예, 위엄, 영원한 왕좌가 영원히 있기를 법니다. 아멘. [21장]
▣ 크산티쿠스 달은 로마 달력 2월 22일에 시작한다. 동방 교회는 폴리카르푸스의 축일을 2월 23일에 거행한다.
첫댓글 그리스도께 영광, 영예, 위엄, 영원한 왕좌가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내의 끝은 순교다.
댓글로 함께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