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와 연일정씨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다. 본관은 영일(迎日), 또는 연일(延日)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고 호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인종 때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 정운관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모두 산직(散職)인 동정직과 검교직을 지냈다.
그는 1367년 성균박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다. 정몽주는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했다. 그 뒤 호병문(胡炳文)의〈사서통(四書通)〉을 얻어 참조해보니 그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당시 유학자로 추앙받던 이색 은‘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며 포은을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했다.
1375년(우왕 1) 우사의대부로 임명되었다가 성균대사성으로 전임했다. 이무렵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 가 명의 사신을 죽인 일로 정세가 어지러웠다. 이때도 포은이 나서 무난히 사태 수습을 했다. 얼마 후 북원(北元)에서 사신이 오고 이인임, 지윤 등이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에 반대했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정몽주는 뛰어난 외교가였다.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피해가 심했을 때는 직접 일본에 가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포은은 고려를 끊임없이 위협하던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서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유배됐던 고려 사신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그는 공양왕 옹립 때 이성계와 정도전 등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려고 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이석 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한다.
당시 이성계의 자택은 좌견교(坐犬橋) 건너에 있는 목청전이었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래서 포은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는다. 조영규는 선지교에서 기다렸다가 철퇴를 휘둘렀다. 그러나 조영규는 차마 포은을 치지 못하고 말머리를 쳐서 포은이 낙마케 했다. 결국 망나니 고여(高呂)가 포은을 살해한다.
선죽교(善竹橋)는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노계천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다. 이 다리는 1392년(태조 1년) 포은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석란간이 없었으나, 1780년(정조 4년) 포은의 후손들이 이를 설치했다. 원래 이름은 선지교(選地橋)였다. 포은이 순절한 후 선지교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았다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포은이 죽은 뒤 선죽교에서는 매일 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선죽교 옆에‘읍비(泣碑)’를 세웠다. 그 뒤로는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대신 읍비 주위에서 오죽(烏竹)이 자라났다.
포은의 묘역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에 있다. 옛 이름은 쇄포촌으로 일명 능골이다. 고려 공양왕 4년(1392년) 음력 4월4일 황해도 개성 선죽교에서 순절한 후 포은이 처음 안장된 곳은 개성 부근의 해풍군(海豊郡.풍덕(豊德))이다. 같은 해 음력 12월 부인 경순택주(敬順宅主) 경주이씨가 사망하여 해풍군에 안장했다. 이씨는 포은이 순절한지 14년이 되는 1406년 3월 이곳 용인으로 옮기면서 합장했다.
이장을 할 당시 새로운 장지는 포은의 고향인 경상도 땅으로 정했다. 그런데 행렬이 가다가 용인시 경계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 명정이 하늘 높이 날아가 현재 묘지에 떨어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곳이 명당자리라며 포은의 유택을 이곳으로 정했다. 행렬이 멈추었던 곳의 풍덕래(豊德來)란 지명은 포은의 면례행렬이 개성 풍덕으로 부터 왔다하여 생겨났다.
그 뒤 1600년(선조 33년)에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여러 지관을 각처에 보내어 능 자리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이곳 포은의 묘소 자리가 좋다고 결정이 났다. 그러나 선조는 포은의 묘소임을 알고‘충현(忠賢)의 묘를 어찌 200년 후에 발굴할 수 있겠는가’하고 다른 곳에 구하도록 했다. 지금의 능골은 그 당시 능의 적합지로 정해졌다는 연유에서 비롯됐다. 포은은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비롯하여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한다.
한편 연일정씨(延日鄭氏), 영일정씨(迎日鄭氏), 오천정씨(烏川鄭氏)는 모두 같은 본관이다. 영일정씨의 시조 형양공 정습명으로 부터 선대가 모두 경북 영일군에 살아온 탓에 영일을 본관으로 쓰게 됐다. 영일의 옛 이름을 따라 더러 연일정씨(延日鄭氏)로, 또한 영일에서도 본 고장인 오천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정씨(烏川鄭氏)라고 쓰기도 한다.
영일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있는 지명이다. 고려 초에 연일로 고쳤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쳤다. 현재 연일은 포항시 연일읍의 지명이며, 오천은 포항시 오천읍의 지명이다.
지금도 연일, 영일, 오천으로 본관을 각각 쓰고 있다. 2000년 현재 연일정씨 216,510명, 영일정씨 10,263명, 오천정씨 30,650명으로 모두 합치면 347,423명에 이른다.
연일정씨는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는 두 파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려 인종 때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을 시조로 받드는 ▲지주사공파와, 감무를 역임한 정극유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로 갈라진 것이다.
지주사공파에는 포은 정몽주가 있다. 감무공파에는 송강 정철이 유명하다. 송강이 지은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 우리말로 된 수많은 시들은 국문학사의 일품들이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장진주사 및 시조 70여수가 전한다.
연일정씨는 조선시대에 정회(鄭淮) : 문과(文科) 성종7년(147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정철(鄭澈, 1536 丙申生) : 문과(文科) 명종17년(156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종명(鄭宗溟, 1565 乙丑生) : 문과(文科) 선조25년(159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승명(鄭承明, 1604 甲辰生)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시대(鄭始大, 1615 乙卯生) : 문과(文科) 효종2년(165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도성(鄭道成, 1641 辛巳生) : 문과(文科) 현종11년(167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식(1664 甲辰生) : 문과(文科) 숙종25년(1699)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원달(鄭遠達, 1735 乙卯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정시3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해관(鄭海觀, 1807 丁卯生) : 문과(文科) 고종27년(1890) 기로응제시 장원급제, 정광윤(鄭光胤, 1807 丁卯生) : 문과(文科) 중종18년(1523) 알성시 을과(乙科) 등 모두 42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11명, 무과 34명, 사마시 277명, 의과 1명, 음양과 2명, 율과 1명이다.
연일정씨의 세거지는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이다. 마을에서 1Km남짓한 문수산 기슭에 연일정씨의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다. 후손들은 조상의 묘를 지키며 2백여 년 산 아래에서 살아온다. 마을의 40여 가구가 정씨 한 집안으로 출세한 사람은 없지만 인근에서는 양반동네로 알아준다.
영일(迎日)은 해돋이, 해맞이 뜻을 지닌 지명이다. 지난 95년 영일군과 포항시가 통합되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사라진 명칭이 됐다. 하지만 영일은 아직도 지역민들에게 오천읍, 대송면, 동해면 등 포항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친숙한 명칭이다.
영일지역 중 특히 오천(烏川)의 `까마귀 오(烏)`는 태양을 나타내는 글자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해 속에 세 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고 생각해왔으며 해돋이의 이두식 표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