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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장 주석
불의한 재판관(누가복음 18:1-8)
이 비유는 문에 달려 있는 열쇠가 있는데, 그 추진력과 고안이 앞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1절). 이 비유를 읽을 때에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백성이며,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일정하게 또한 때에 따라 하나님과 통신을 갖게 되며, 정기적 또한 비상한 사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통신을 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광명이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등한하게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항상 해야 될 일이므로, 언제나 기도해야 되며, 날마다 실행해야 될 의무이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하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영원한 상급을 삼켜버리고 말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려고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영적인 은사를 간구할 때에 꾸준히 계속하여 할 것을 교훈 하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 우리의 육욕과 부패 곧 우리의 가장 악한 원수를 물리칠 힘을 주시라고 기도할 때에 꾸준히 계속하여 기도해야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헛되이 찾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자와 압제자들에게서 구함을 받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한 비유로써 끈덕짐을 힘을 알려 주신다. 이 끈덕짐은 다른 아무 방법으로도 당해낼 수 없는 완악한 마음이라도 흔들리게 하여 의롭고 옳은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정직한 사건이란 불의의 재판관 앞에서도 성공된 예를 보여 주셨다. 정당성과 동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끈덕짐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다.
1. 어떤 성에 악한 성격을 가진 법관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고, 인간을 존중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양심이나 세평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자기에게 관한 사람들의 비난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나 인간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경건함과 명예와는 아주 떠난 사람으로서 관심조차 갖지 않았었다. 창조주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은 피조물을 전혀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곳에서 선이 있기를 기대할 수 없다. 어느 점에서나 이처럼 비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성격이 우세하면서도 권력을 가진 악한 재판관이었다. 그는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종교와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 하지 않았으며 그의 권력을 선을 위하여 쓰기보다는 상처를 입을 위험한 일을 했다. 솔로몬은 해 아래서 재판하는 곳에 가장 독점적인 악의 하나가 있음을 보았다(전 3:16).
2. 불쌍한 과부의 기막힌 사정은 재판관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권세와 공포의 장애물을 참아야 하는 모욕감을 무릎쓰고 그녀는 호소했다. 그녀는 분명히 정의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당성을 달성하기 위하여 졸라댐에 있어서 범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날마다 재판관의 집으로 가서 직접 호소하며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다시 말하면 나의 원한을 판단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재판관 자신이 그녀에게 행한 어떤 일을 원한 풀어달라는 것이 아니고, 재판관의 권력 안에서 그녀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었으니 그녀를 더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불쌍한 과부들은 가끔 원한되는 일이 많이 있다. 과부들에게 원한을 끼치는 자들은 잔인스럽게도 과부들의 약하고 무의탁한 상태를 악용하여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것마저 갈취한다. 그래서 행정관들은 특히 과부들을 압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렘 22:3)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할 책임이 있고(사 1:17), 그들의 후원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이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심같이 행정관도 그러해야 된다(시 68:5).
3. 과부가 당한 어려움과 실망은 그 과부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않았다(4절). 그 재판관이 전 같으면 과부에게 끼친 자의 잘못을 묵인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과부는 재판관에게 줄 뇌물도 없으며 과부를 위하여 대변해 줄 겁날 만한 사람도 없으므로 과부의 불만을 시정하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기의 꾸물거리는 이유를 의식하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사람을 중하게 여기지도 않는 자신을 자인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고치는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4. 이 불공평한 재판관을 계속적으로 성가시게 함으로써(5절) 과부가 얻은 것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곧 계속적인 괴로움을 끼치니 내가 그녀의 호소를 들어주고 올바른 재판을 해 주리라. 그것은 그녀가 내게 소란을 피워서 나에게 불명예스럽다기 보다도 그녀가 나에게 소란을 피워서 나를 괴롭히니 그녀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나를 계속하여 졸라서 편안치 못하게 할 터이니 내가 그녀를 호소를 들어주는 것이니 곧 나 자신이 더 이상 괴롭힘을 받지 않기 위하여 하려는 것이며,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과부는 계속하여 졸라댐으로써 억울함을 풀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 재판관 집의 문 앞에서 졸랐으며, 거리로 따라다니며 졸랐고, 공개된 법정에서 간청하였으며, 그리고도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고 부르짖으니 재판관은 과부가 물러가도록 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재판관이 비록 악하기는 하지만 그의 양심상, 과부가 법정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으로 보내기에는 너무도 마음이 괴로웠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믿음과 열성을 가지고 기도하며,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도록 권장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끝내는 믿음과 열성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다짐하셨다(6절).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과부의 끈덕진 간청으로 인하여 재판관은 드디어 마지못해서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제자들이 원하고 기대하던 것.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 무엇일까.
[1]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택하신 자,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자, 선택한 백성, 선택받은 백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늘 주목해 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하실 모든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이며, 그들을 선택하신 목적에 따라서 이행하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반대를 당한다. 이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많은 대항자들이 있다. 사탄은 이들의 큰 적이다.
[3] 택함을 입은 자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자기들과 함께 하심이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확고한 관심을 가져 주시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는 일이다.
(2) 하나님의 보존하심과 보호하심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마땅히 낮과 밤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은 항의나 충고를 원하시지도 않고, 변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도 없다. 오직 자기들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러면 자비를 베푸시겠노라고 언약하셨다. 우리는 특히 우리의 영적 원수에 대항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던" 것과 같이, 끈덕진 과부처럼 끈질기게 간구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정욕을 극복하여 주신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유혹을 방비하여 주신다. 우리는 핍박받으며 압제받는 교회를 위하여 걱정해야 되며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바로잡아 주시고 안전을 보장하여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이렇게 간구함에 있어서 아주 열성적이어야 하며 열심으로 부르짖을 것이며, 기도를 하면 결국은 응답 받을 것을 믿는 자들처럼 밤과 낮으로 부르짖어야 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값진 것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 그리하면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사 62:6, 7)."
(3)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며 기대하는 중에는 아마 낙담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고, 당장은 기도하는 자들 앞에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응답을 주시지 않을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적에 대하여 인내성을 시험해보시며, 원수를 갚지 않으시고, 또 당신의 백성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시느라고 그들을 변호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애굽인들의 죄악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으며, 압박 받는 이스라엘의 슬픔이 부르짖음에 대하여 오래 견디셨다.
(4) 비록 더디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며 불의한 재판관이 한 말에 의하여 이것이 어떻게 보장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이 과부가 끈질김으로써 소원을 성취하였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성취는 더욱 확실하다. 왜냐하면
[1] 이 과부는 재판관과는 모르는 사이이고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사랑하시며 기꺼이 여기시며 언제나 그들을 위하여 친히 걱정하시는 자들이다.
[2] 과부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많으며, 그들은 모두 같은 목적으로 하나님께로 온 자들이며 그들의 요구하는 바도 일치한다(마 18:19). 연합된 찬송을 부르며 영광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성도들처럼 지상의 성도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3] 과부는 재판관에게 와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야만 서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히 가까이 오라고 명하시는 아버지께로 와서 있으며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라고 가르쳐 주신다.
[4] 과부는 불공평한 재판장에게로 왔다. 우리는 의로우신 아버지께로 왔다(요 17:25). 이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불쌍한 피조물들의 행복을 원하시되 특히 과부와 고아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시기 원하신다.
[5] 과부는 순전히 자기자신의 생각으로 재판관에게로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가 간구하고 있는 사건에 관여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여 일어나셔서 주의 원통을 푸시고,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할 수 있다.
[6] 과부는 그녀를 위하여 말하며 그녀의 간원하는 바를 보충하며 그녀 자신보다 그녀를 위하여 진력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니 그는 하늘에서 유력하고 주요한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다.
[7] 과부는 성공하리라는 언약도 없고 간구 하는데 격려하는 무엇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금홀이 내어 밀어져 있어서 간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에게 간구 하는 바를 주시겠다는 언약을 받고 있다.
[8] 과부는 어느 정한 시간에만 재판관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낮과 밤으로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으며 끈덕짐으로 소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희망이 더 많다.
[9] 과부의 끈덕짐은 재판관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어서 재판관이 과부에 대하여 반항심이나 일으키지 않을까 겁이 났었다. 그러나 우리의 끈덕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곧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므로 우리는 능력 있는 기도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응답 받을 가망성이 많고 또한 많이 응답을 받게 된다.
2.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넌즈시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싫증을 내기 시작할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들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언약하셨지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인자는 당신의 택한 자들의 원수를 갚아 주시고,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변호해 주시려고 오신다. 주님께서는 각 세대에 있어서 당신의 상처받은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하시려는 섭리에 따라서 오실 것이며 큰 날에는 드디어 시온의 쟁론을 판결하시려고 오실 것이다. 자 그러면 주님께서 오실 때에 지상에서 믿음을 가진 자를 볼 수 있을까? 이 물음은 강력한 부정을 암시한다. 아니다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앞을 내다보고 계신다.
(1) 이 말씀은 믿음이 필요한 것은 지상에서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지옥에 있는 죄인들은 자기들이 믿을 것이 없다고 느낄 것이며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자기들이 믿었던 것을 즐기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2)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위대한 것임을 암시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녀를 내려다보시며 순결함이 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믿음이 있느냐?고 물으신다.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주님께 간청하는 자들의 믿음에 관하여 물으셨다.
(3) 이 말씀은 비록 아주 적은 믿음이라도 있기만 하면 주님께서 이를 발견하시고, 이를 찾아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의 눈은 가장 약하고 가장 희미하게 믿는 자도 보고 계신다.
(4)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의 사건을 변호하러 오실 때에는 사람이 기대하는데 비해서는 믿음을 조금밖에는 못 보게 될 것을 예언하셨다. 다시 말하면
[1] 대체로 실제적으로 또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형식적으로 선한 체하는 사람은 많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 곧 진실 되고 정직한 사람은 몇이 안 될 것이다. 충성된 사람은 몇이 안 된다.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다(시 12:1, 2).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역시 불평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보다 나아지지 못하고 끝날이 다가올 때에도 나아지지 못한다. 세상은 악하다. 앞으로도 악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르러서는 보다 더 악하게 되고, 최후의 날에 이르러서는 가장 위험하게 될 것이다.
[2] 주님께서는 특히 주님께서 재림하심을 믿는 자를 몇 사람 보시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 주시려고 오실 때에는 당신을 도와드리며 지지해 드릴 믿는 자가 있는지 찾아보실 때에 하나도 없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실 것이다(사 59:16; 63:5).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오실 때나 끝날이 되어 당연히 오실 때나 같을 것을 암시한다. 주님께서 당연히 오실 날이 혹시 오랫동안 지연되면,
첫째로 악한 백성들이 이에 반항하여 "주님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게(벧후 3:4) 될 것이다. 이들은 주님의 강림에 도전하며 (사 5:10; 암 5:19), 주님이 더디 오시면 더디 오실수록 그들은 더욱 악해질 것이다(마 24:48).
둘째로는 주님의 백성들까지도 실망하기 시작하고, 자기들의 예상한 시기가 지났다 하여 주님은 재림하시지 않는다고 결론짓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는 모든 사물이 최후적인 극단에 이르고 시온이 "주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사 49:14; 40:27).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위로가 됨은 정한 때가 이르면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언약에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리새인과 세리(누가복음 18:9-14)
이 비유의 범위도 역시 미리 기록되어 있다. 9절을 보면 이들이 누구이며 이 비유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씀이며 또는 누구를 예상해서 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자기들은 의롭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경멸히 여기는 자들이 자각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었다.
1. 아주 자만하는 자들이었으며 스스로 선한 체하는 자들이었고, 자기들은 더할 나위없는 거룩한 자들로 생각하였으며 모든 이웃사람들보다 더 거룩하여 그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2.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자신이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자기의 의로움이 높은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그 공로로 인하여 언제나 하나님께 제언(提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치 자기들의 빚쟁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여 무엇이나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 비교하면 아무 값어치도 없는 것처럼 모욕적으로 대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용납하실 수 있는 문을 닫아버리고 있음을 가르쳐 주신다. 이것은 한 비유로써 꼭 이와 같은 일은 없지만 거만스럽게도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자들과 겸손하게 스스로 죄인됨을 자복하는 사람들의 기질과 자세 또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 직결되는 일이다.
Ⅰ.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기도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성전이 언덕 위에 서 있으므로) 때는 공적인 기도 시간이 아니었지만 당시의 신앙인들이 흔히 하던 대로 개인적으로 기도를 드리러 성전으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성전이 기도의 처소일 뿐 아니라 예배의 기간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 성전의 안이나 밖에서 옳은 자세로 드리는 기도이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언약해 주신 곳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우리의 성전인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다 기도하러 성전으로 갔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두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 중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섞여 있다. 그 중의 더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더러는 받지 못한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 이후로 예배하는 자들은 제단 앞에 예물을 가져왔다. 거만한 바리새인은 기도 이상의 자신을 생각지 못했다. 겸비한 세리 역시 그랬었다. 기도를 위하여 자신을 몰아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성전으로 간 것을 알 수 있다.
1.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간 것은 거리의 구석진 곳들보다는 보다 공공연한 공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그를 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며 동시에 자기의 기도함을 칭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것이 그의 가장 바라는 바이었을 것이다. 이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의심을 잘 풀어 준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위선자들은 명예를 보존하거나 얻기 위해서만 종교의 외형적인 행위를 한다는 사실이다. 성전에서 날마다 보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큰 날에 그리스도의 우편에서는 보이지 않을까봐 두려운 바이다.
2. 세리는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사 56:7)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전으로 갔다. 바리새인은 의례적으로 성전으로 갔고, 세리는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있어서 성전으로 갔다. 바리새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갔으며, 세리는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의향과 경륜을 가지시고 이들을 보실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에 따라서 판단하실 것이며 우리도 또한 이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Ⅱ.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연설(기도라고 말할 수 없다)을 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한다(11, 12절).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자기 혼자서 서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번역했다. 바리새인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 자기 외에는, 자기 찬양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눈에 뜨이는 곳에 섰다. 자기의 신분과 격식을 크게 나타내려고 애쓰면서 기도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뜻을 생각해 보자.
1.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믿었다. 그는 스스로 여러 가지 자기의 선행을 말했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 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는 크고 수치스러운 죄는 없었다. 그는 강탈자가 아니었고, 고리대금업자도 아니고, 채무자나 소작인을 못살게 구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의지하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관계하는 무슨 일이나 불공평하지 않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었으며, 사무엘이 말한 대로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간통죄를 범한 사람이 아니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취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여 극기와 경건한 생활의 본을 보이었다. 바리새인과 그 제자들은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다. 이와 같은 그는 육체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 그것만도 아니었다. 율법에 따라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었다. 그러니 세속적인 재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 이러한 모든 일은 매우 좋은 일로써 권장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인이 의가 부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용납하지 않았을까?
(1) 그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단지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사도 바울처럼 말하지 않고, 이 말을 약간 바꾸어서 "하나님이여" 하고 시작했다. 이 말은 거만스러운 허식적인 자부심을 풍기는 그럴듯한 서두에 지나지 않는다.
(2) 그는 자신을 자랑하고, 그 자만심으로 즐겁게 여겨서 마치 그가 성전에서 하는 모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기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를 고하는 일처럼 생각했고, 그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사 58:3) 하는 태도로 위선적인 말을 한다.
(3)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옳은 일이라고 믿고 그렇게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무슨 공로나 세운 것처럼 변론하여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빚쟁이나 된 것처럼 여기었다.
(4) 그가 한 모든 말에는 기도는 한 마디도 없었다. 그는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의 용건은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선행에 대한 생각이 꽉 차서 아무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까지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간구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2. 그는 다른 사람을 경멸히 여겼다.
(1)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모든 인류를 천하게 생각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는 막연하게 자기가 다른 무엇보다도 나은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소문날 만큼 악하고 야비한 사람들과 같지 않은 점이다. 그러나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만 선하고 우리 외의 모든 사람은 무뢰한인 것처럼 모두거리로 판단하는 것이 된다.
(2) 그는 기도하는 세리의 특별한 모습을 보고 경멸히 생각했다. 세리는 언제나 자기의 뒷전에(흔히 이방인의 법정에서) 있는 사람이었으며 성전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패들과 휩쓸려 얘기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세리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주 무자비하게도 그는 착취자이며 불의한 자이라고 단정하고, 그의 모든 짓을 좋지 않게 여겼다. 그것이 사실이고, 또 바리새인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이에 대하여 주의했어야 할 일이 무엇이었을까? 자기의 이웃들은 비난하지 않고 자기의 기도자들(이것은 모든 바리새인들이 한 것이었음)에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하나님이여"라고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또한 자기 자신의 선행만큼 세리의 악행에 대하여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그는 겸비심과 자비심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교만과 악의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Ⅲ. 세기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은 바리새인의 말과는 반대였다. 바리새인은 오만과 허례의 것이었음에 반하여 세리는 겸비와 굴욕적인 자세로 드리었다. 바리새인은 자신만만하고 자기의 의로움과 원만함에 만족해 있음에 반하여 세리는 죄를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1. 세리는 자기가 한 일에서 회개와 겸비심을 나타내었으며, 그가 기도를 드릴 때에 자신에게 말하는 자세는 진설성과 겸비심이 그대로 나타났으며 그의 심령은 찢어지고 통회하며 순종하는 옷으로 입혀 있었다.
(1) 세리는 "멀리 섰다." 바리새인도 섰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올라가 성전뜰의 위쪽에 가서 섰다. 세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만한 자격을 갖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멀리 서 있었는데 아마 바리새인의 방해를 두려워해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경멸하며 그의 기도를 방해하려는 태도로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세리는 하나님께서 멀리서 있는 자기를 공정하게 보시고, 자기를 영원한 거리까지 이끌어 주셔서 자기를 가까이 용납하심을 기꺼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큰 은총을 깨닫게 되었다.
(2) 세리는 보통 기도할 때처럼 눈을 높이 우러러보기보다도 손보다도 더 아래로 수그렸다. 그러나 그의 심령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높이 올리어 거룩한 심정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수치와 치욕의 심정으로 억눌리어 감히 거룩한 신념과 용기를 가진 눈으로 우러러보지는 못했다. 그의 죄악이 그의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아서 우러러 볼 수가 없었다(시 40:12). 그의 실망의 모습은 죄의 생각에 대한 마음의 우울의 표시였다.
(3) 세리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의분을 느끼고 "가슴을 쳤다." "나는 이 나의 악한 마음을 치고, 모두 죄의 물결이 흘러나오게 하는 독한 샘물을 쳐버려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다"고 가슴을 친 것이다. 죄인의 심령은 우선 참회하는 가책으로 자기를 친다(삼하 24:10). 다윗은 그 마음에 자책하였다. 죄인이여!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죄인은 그 다음에 참회하는 양심의 가책으로 자기의 심령을 친다. 나는 얼마나 비열한 자인가! 에브라임은 그의 볼기를 쳤다고 말했다(렘 31:19). 큰 슬픔은 가슴을 치는 것으로 표현했다(나 2:7).
2. 세리는 자기의 통회함을 그의 말로 표현했다. 그의 기도는 짧았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다. 한숨과 신음이 그의 말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적절하였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이 기도가 응답 받은 기도로써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이 기도를 드린 사람은 분명하게 의롭다하심을 인정받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리가 한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자비스러우실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영원히 망할 것이며 영원히 비참할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자비로우시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잔인하게 살아왔다."
(1) 세리는 자기 자신이 성격적으로,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진 죄인임을 인정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 됨을 거부했다. 그의 이웃 사람 중의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고, 아무 일도 잘못한 것이 없으니 자기 자신으로서도 부끄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으며 그는 깨끗하고 죄가 없는 순결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리는 어느 모로 보아도 자기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라고 자인했다.
(2) 그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할 것이고, 그것만을 신뢰할 뿐이다. 바리새인은 그의 금식과 십일조의 공로를 강조했다. 그러나 불쌍한 세리는 무슨 공로라는 생각은 모두 버리고 그의 피난성인 하나님의 자비로 달려가고 하나님의 단의 뿔을 잡는다. "의는 나를 정죄한다. 하나님의 자비, 자비 이외에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
(3) 세리는 이 자비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나의 죄를 용서 하시옵소서. 나를 용납해 주시옵소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고, 나를 자비로이 받아 주시오며,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세리는 주림으로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자선을 받으려 하는 거지처럼 온다. 아마도 그는 새로워진 애착심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계속했을 것이며, 같은 뜻의 말을 몇 번이나 했을 것이며, 자기의 죄에 대하여 특별한 고백을 하며, 자기가 원하는 특별한 자비를 말씀드렸을 것이며, 하나님을 만나 뵈옵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은 경고의 노래로써,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Ⅳ. 세리는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았다. 여기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두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알아볼 만하다. 바리새인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는 흐뭇한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편 비열한 모습으로 흐느끼는 세리를 비웃는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마음 문을 열어놓고 있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를 아시며, 주님 앞에서는 누구도 비밀을 숨겨둘 수 없는 분이시며, 하늘의 법정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도 알고 계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확언하시기를 이 불쌍한 비열하고 찢어진 심령을 갖고 있는 세리에 대하여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확언하신다. 바리새인은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의롭다하심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세리가 아닌 자기이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며 가장 확실한 말씀으로 가장 관심 깊게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신다. 거만스러운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달아났다. 그의 감사는 증오할 만한 것들로써 응답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세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했다. 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며, 정죄에서 면할 수 없는 것으로써, 하나님에게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도 의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는 겸비하게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죄의 용서하심을 받았다. 바리새인은 이 세리를 개의 무리만도 못하게 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의 자녀로 삼으셨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은 교만을 배척하고, 겸비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1. 스스로 높은 체하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대항자이므로 분명히 낮춰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말씀하시면서"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욥 40:1).
2. 스스로 낮추는 겸비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해 있어서 높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승진을 준비하고 계시고 당연히 받을 대가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승진권을 주지 않으신다.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높임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자신이 만족한 자리로 높임을 받고 결국은 하늘나라에까지 높임을 받게 된다. 교만의 죄의 벌을 생각해 보자.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의무를 다하는 자에게 돌아갈 보상을 생각해 보자. 스스로 겸비한 자는 높임을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악에서도 선이 생기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자. 세리는 큰 죄인이었다. 그의 큰 죄에서 위대한 회개가 생기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왔다(삿 14:14). 그와는 반대로 사탄의 악은 선에서 악이 생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 바리새인이 착취자가 아니고 불의한 자가 아니었음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악마가 그로 하여금 그를 교만하게 만들고 그를 패망하게 만들었다.
어린이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사랑(누가복음 18:15-17)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다. 세리의 이야기 뒤에, 이 비유로 예시된 진리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이 어린이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 위의 비유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용납을 받아 귀엽게 여기심을 받을 사람은 스스로 겸비한 사람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특선한 가장 좋은 복을 마련하고 계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일이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자녀들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기를 원하며, 따라서 그들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진 진정한 존귀심을 증명하되 그리스도를 존경함으로써 하고, 자기들의 자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진정한 사랑을 자녀들의 영혼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써 증명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몇몇 학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걷지도 못하고 젖을 먹는 아주 어린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려왔다. 아무리 작고 어리더라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지 못할 아이는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봉사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사랑을 베풀 줄 알고 계신다.
2. 그리스도께서 한 번만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시더라도 어린아이들은 기뻐한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왔다. 주님의 만져 주심은 어린아이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성령을 주시는 표시였다. 이를 위하여 언제나 주님의 축복을 위하여 나아가며 이를 기다린다(사 44:3 참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라."
3.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이나 자기들의 자녀들, 또한 이들을 돌봐 주고 권면하는 사람들까지라도 낙심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서 호소하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만일 이런 일이 용납된다면 주님께 한이 없는 괴로움을 끼쳐드리게 되겠어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꾸짖으며 그들에 대하여 눈쌀을 찌프렸다. 이것은 마치 신부가 자기를 지켜 주는 사람들을 불평하는 격이었다(아 3:3; 7 절).
4. 제자들이 꾸짖는 그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제자들의 제지를 받아 물러가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셨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가게 해주기를 제자들에게 간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경멸하는 이유를 알고 계셨다.
5.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당신에게고 데려오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당신의 영예에 대한 산 제물로 여기셨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 이 아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환영받을 만한 이들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에게 하신 것이니라"(행 2:39). 그러므로 약속된 복을 분배하시는 분은 우리와 함께 당신께로 가는 자들을 환영하라고 명하신다.
6.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자녀는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서 자유인의 자녀는 역시 자유인인 것이다. 부모가 보이는 교회의 교인이면 그 자녀들도 또한 교인이다.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한 것이다.
7.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환영받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성품을 많이 가진 어른일수록 주님께 가장 환영을 받는다(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은 겸손과 감사함으로 받아야지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려고 하지 않고, 세리처럼 아무 공로도 없이 값없이 은혜를 받으려는 자임을 기꺼이 자인하는 자이라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녀의 입장으로 물려받아야 한다. 즉 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유산으로 물려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유산은 그들의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라고 불러야 한다.
영적 장애로써의 재산(누가복음 18:18-30)
위에 있는 구절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게 된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 가려면 어떤 길로 가야 될지를 주님께 지도 받으려는 좋은 마음을 가진 관원과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바는 다음과 같다.
1.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영혼과 내세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구별하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누가는 한 관원이 이러한 사람임을 알았다. 관원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 관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교회의 치리자인지 정부의 관원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권력층의 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2. 우리는 누구나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어 보려고 하는 관심은 중대한 것이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무신론자와 이교도는 갖지 않은 영생의 신앙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이런 관심은 조심성이 없고 사려가 없는 사람들은 갖고 있지 않고 또한 어떠한 생각에서든지 이 영생의 신앙에 동의하는 것은 이 세상과 육신에 온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람들은 갖고 있지 않다.
3.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기들의 주님, 교훈 하시는 주님이시며 다스리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되 그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천국에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의 학교밖에는 없다. 그곳의 교훈에 의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또한 계속하여 그 안에는 거할 수 있다.
4.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주님으로 시인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으신 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소유하신 분으로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관원이 당신이 선하다고 부름을 옳게 이해하고 있다면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어야 할 것이며, 또한 주님은 과연 하나님이시었다(19절).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네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런즉 너는 나를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만 네가 옳으니라."
5. 우리 주님 그리스도는 천국에 가는 길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 그대로 두고 변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 길을 보다 편하고, 쉽고 또한 유쾌하게 만드시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갈 경우를 대비하여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네가 계명을 아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시지 않고 더 굳건히 하러 오셨다. 네가 영생을 유업으로 받기를 원하느냐? 네 자신을 그 계명에 의하여 다스려라.
6.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게 되려면 주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신 의무를 양심적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경건한 행동이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이 두 번째로 말씀하신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계명을 크게 범하여도 관계치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들 계명을 잘 알아서 지켜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산상보훈에서 그 범위와 영적 성격과 또한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신 대로이다.
7. 사람들은 무식하기 때문에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이 관원이 그랬다.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하고 말했다(21절). 관원은 바리새인이 11절에서 말한 이외의 자신의 잘못을 몰랐다. 관원은 자기가 어려서부터 덕행의 길을 밟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계속하여 내려왔고, 한 번도 율법을 범한 일이 없음을 자랑으로 삼았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법의 영적 성격과 그 범위를 알고, 그 자신의 마음으로 깨닫고 있었다면,─잠시만이라도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주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았더라면, 그는 아주 반대로 말했을 것이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어릴 때부터 생각으로, 말로 또한 행동으로 범했습니다."
8. 우리의 영적 상태를 시험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 형제에게, 이 세상에 대하여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떠한 애정으로 대하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1) 만일 관원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대했다면 그는 "와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훈육을 순종하기를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힘썼을 것이다. 주 예수와 운명을 같이 하며,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그를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2) 관원이 그의 형제에 대하여 진정한 애정을 가졌더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토지의 소산 중에서는 마땅히 받쳐야 할 것을 하나님의 수령인이 되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을 것이다.
(3) 관원이 만일 응당 그랬어야 했을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보다 경멸히 여겼다면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주저하지 않고 가진 것을 팔아서 하나님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을 것이다.
(4) 관원이 만일 응당 그랬어야 했던 대로 다른 세상 곧 하늘나라를 보다 중하게 생각하여 하늘나라에 보다 많은 보물을 쌓아 두기를 원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두고, 잃어버리고 또 투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줄로 믿게 될 것이다.
9. 세상에는 아주 칭찬 받을 만한 많은 것을 가졌지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 이 관원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관원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와 갈라져서 모든 조건을 아주 잘 지키었지만 자기와 자기 재산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만일 이것이 거래 조건이라 하면 그것은 바로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10.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떠나기 싫어하면서도 결국은 그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자기들의 타락성 사이의 오랜 갈등을 치른 뒤에 결국은 그 타락성이 승리를 거두어 하나님과 재물을 다같이 섬길 수 없음을 매우 슬프게 여기기는 하니만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으면 세상의 재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Ⅱ. 이 경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1. 부함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큰 지장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부자가 당신과 관계를 끊게 된 마지못해함과 후회할 만한 일에 제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셨다. 주님은 이 부자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하셨다(24절). 만일 이 부자 관원이 베드로, 야고보 또는 요한과 같이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적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진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 재물을 가졌기 때문에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어서 자기 재산을 자선 사업에 쓸 의무를 감당하기보다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한 자의 구원받는 일이 어려움을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 이것은 매우 어려움을 속담투로 말씀하신 것이다.
2.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모두가 이러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애착심을 가진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얻으려면 이 세상의 것에 무관심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니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실로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을 팔아버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게 된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6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어렵고 불합리한 일에 대하여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세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저들로서는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귀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을 버리려고 해야만 영원한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마음이 너무도 집착되어 자기들의 기대에 대하여 자포자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우리의 구원의 길은 도달하지 못할 만큼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히 무한하신 능력 곧 모든 능력과 지혜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하여 가능하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사람이 노력함으로써 그 정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로써 이는 마치 바다를 갈라지게 하고, 요단강을 물리침같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영혼에 역사하셔서 그 굽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으셔서 처음과는 반대되는 성품을 갖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4.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리고 잃은 것 또한 행하고 고난받은 일에 대하여 말을 너무 많이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이 바로 베드로에게서 나타났다. "보옵소서. 우리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 이렇게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한다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림에 있어서 주님에 대한 자신과 자신의 형제의 애정을 과장함을 억제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자랑할 것이 못된다. 우리는 오히려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됨을 알고, 자기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함에 있어서 후회되고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한 나중에도 그 버린 것들을 동경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5.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거나 바친 것이 무엇이든 지간에 우리의 약함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보답이 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29, 30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의 재산이나 친척의 위안을 버린 사람은 이 희생한 것들로 인하여 하늘나라와 그 나라에서 누릴 즐거움을 받기 위한 봉사에 지장을 받기보다도 "금세에 있어서 여러 배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와 위로하심.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서의 즐거움, 선한 양심의 기쁨 등에 있어서 큰 축복을 받을 것이며, 자기들을 평가하며 개선할 줄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모든 잃은 것에 상쇄할 만큼 풍성한 유익을 받을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내세에 있어서 영생을 받을 것인데 이것은 부자 관원이 눈과 마음으로만 본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예언(누가복음 18:31-34)
Ⅰ.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난 당하심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옴과 당신이 친히 완전히 통찰하고 미리 알고 계신 제자들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문제를 알려 주신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미리 제자들에게 알려 줌이 좋겠다 생각하셨다. 그래야만 제자들이 실제로 그 광경을 당했을 때에 덜 놀래고,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두 가지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1.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서의 응함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제자들과 일치시키고 또한 제자들을 일치시키셨다.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특히 주님께서 당하시게 될 고난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영은 구약의 예언서에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다"(벧전 1:11). 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정확히 또한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심을 증거하는데 그것은 메시야에 대하여 미리 말씀된 것은 주안에서 입증된 때문이며, 주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바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무엇이나 달게 받으셔서 성경에 기록된 한 구절이나 제목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을 증거한다. 이 사실은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치게 하며," 십자가에 영광이 있게 하였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있어서 주님이 당하신 치욕과 불명예가 여기서 가장 강조되어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주님이 "능욕을 당하실" 것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침 뱉음을 받겠으며"라는 말이 더 있다. 모욕적인 언동과 창피 등 갖은 치욕거리를 다 받으시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주님의 영광을 더럽힌 손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게 하신 주님의 영적인 고난의 일부였었다. 여기에 주님께 치욕을 드린 한 가지 특별한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침 뱉음을 받으심"이다. 이것은 이사야 1장 6절에 특히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친히 말씀하실 때에는 당신의 고난과 공포와 치욕을 제거해버린 부활을 예언하셨다.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Ⅱ. 이 때에 제자들이 혼란을 일으켰다. 주님의 예언하시는 바는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와 주님의 나라와는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주님께 대한 기대에 대하여 너무도 좌절감을 주었고, 자기들의 모든 계획이 깨지는 것이어서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34절). 그들의 선입관은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주님의 하시는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달리도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전혀 무슨 말씀인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로서는 불가사의한 일이었고 수수께끼와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메시야의 영광과 존귀함에 일치될 수 없는 일이었고 또 주의 왕국의 건설 계획에도 부당한 일이었다. 주님의 말씀은 "감취었으며," 그들에 대해서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말씀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자들로서는 구약 성경을 여러 번이나 읽었지만 메시야의 치욕과 죽음이 일어나리라는 기록은 도무지 본 일이 없었다. 이들은 메시야의 영광에 대한 예언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주님의 고난에 관한 예언은 그냥 지나쳐 버렸었다. 이 고난에 관한 예언도 율법의 서기관들과 박사들이 주의해 읽도록 지시를 받았어야 할 것이고,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구의와 교리 문답을 배우며 장성했으련만 그들의 교육계획에 적당히 배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등한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경을 반만 읽고, 율법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언서도 일부분만 읽었기 때문에 실책을 범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부드러운 말만" 하였다(사 30:10).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도 앞으로 이루어질 예언 곧 우리들의 기대하는 바가 후일의 교회에서 영광스러운 상태로 이루어질 예언을 읽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황량한 비탄에 잠긴 상태의 예언을 우리는 빠뜨리고 보고 또 그런 상태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려고 하며, 고난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고 평화스러운 날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시련과 핍박이 닥쳐 올 때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을 있는 대로 쉬운 말로 들어왔건마는 장차 될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소경의 눈뜸(누가복음 18:35-43)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가져오시고, 목표로 삼을 목적물을 제시하기 위하여 오실 뿐 아니라 눈먼 영혼에게 시력을 주시고, 그 기관을 고치셔서 우리가 목표로 삼을 목적물을 볼 수 있게도 하시려고 오셨다. 그 증거로써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먼 눈을 고쳐 주셨다. 여기에는 주님께서 여리고 근방에서 소경을 고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에도 한 소경의 기사가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도 밝혀 있다. 예수께서는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이 사람의 눈을 고쳐 주셨다(막 10:46). 마태복음에도 두 사람의 소경에 대한 기사가 있는데 여리고에서 떠나가시면서 이들을 고쳐 주셨다(마 20:30). 누가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여리고로 들어오실 때도 될 수 있고, 여리고에서 떠나가시면서 고치셨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이 불쌍한 소경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35절). 그는 소경일 뿐 아니라 생활해 나갈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그를 도와 줄 친척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치시고 구제하기 위하여 인간 세상에 오시게 한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눈멀었기 때문에 곤고하고 가련하다(계 3:17). 소경은 자기의 생활을 위하여 일할 수 없고 눈이 멀었기 때문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들의 먹을 양식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길가에 있는 자비를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그대로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보통 걸인에게 자비로운 눈을 돌리셨다. 이런 걸인 중에는 속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두가 가짜 걸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Ⅱ. 무리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소경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36절). 이렇게 묻는 일이 전에는 성경에 기록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어떤 일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며, 이렇게 호기심을 갖는 사람은 언젠가는 유익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시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들의 청력을 잘 이용해야 하며, 자기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때에는 질문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이용해야 한다. 이 소경이 바로 그렇게 했으며 이 수단에 의하여 나사렛 예수가 지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37절). 그리스도와 가까이함에 있어서는 이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의탁할 기회가 왔을 때에는 이 방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Ⅲ. 소경의 기도에는 믿음과 정열이 넘쳐흘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절). 소경은 그리스도께서 언약된 메시야, 다윗의 자손이심을 인정하고, 그를 구주이신 예수로 믿었으며, 자기를 돕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주님의 자비를 열심히 간구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비참함을 긍휼히 여기소서." 그리스도는 자비스러우신 왕이시다.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메시야이신 다윗의 자손이심을 알게 되고, 기도할 때에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간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다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Ⅳ. 그리스도의 사랑과 축복을 열심히 간구 하는 사람들은 비록 반대와 힐책을 당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의 간구 하는 바를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가는 사람들은 시끄럽고 당치않은 짓을 하여 주님을 괴롭히는 소경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소경은 계속하여 탄원했으며, 그에게 가해지는 제지는 오히려 넘쳐 흘러가는 냇물을 막으려는 둑과 같아서 더욱 큰 파도를 치게 하여,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다. 기도의 응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이 18장의 결말에 있어서의 이 소경에 관한 이야기는 이 장의 첫머리에 있는 비유와 비슷한 것으로써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쳐 준다.
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눈살을 찌푸리는 불쌍한 걸인들을 격려하시고, 당신께로 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환영하셨다.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실망하고 있는 탄원자들에 대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온유한 마음과 동정심으로 대해 주신다. 이 때에 주님은 여행을 하시는 중이었다. 그러나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다." 소란을 피우는 소경을 제지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할 수 없이 손을 내밀어 소경을 이끌고 그리스도께로 오게 되었다.
Ⅵ.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원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에게서 우리의 소원을 알려고 하신다(41절).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의 원하는 바와 무거운 짐을 특별한 진술로써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정을 아뢰움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주님의 자비의 귀중함을 스스로 배우게 되고 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른 방법으로써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소경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할 때에 자기의 온 영을 그리스도 앞에 쏟아 놓았다. 이와 같은 우리가 특별한 경우를 당해서 기도할 때에는 특별한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Ⅶ. 그리스도의 용기를 돋구는 언약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토대로 하는 믿음의 기도는 절대로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그 기도는 "평안한 대답"을 받을 뿐 아니라 존귀한 응답을 받게 된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다(42절). 참 믿음은 기도의 열심히 생기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받게 되며,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의 은총을 받게 되면 이중으로 복을 받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Ⅷ.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면 감사히 여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43절).
1. 불쌍한 걸인은 다시 보게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림을 본분으로 삼으시고 당신이 병 고쳐 주신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때에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에게 존경하는 사람들을 가장 좋아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고백함을 곧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눈뜸을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를 때는 이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눈뜸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를 때는 이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 걸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따름을 볼 때에, 인자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자녀들에게 그러한 은사를 내려 주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자신들에게 베풀어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짐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