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歌曲-荒城の月 / 作曲 : 滝廉太郎
일본의 산성, 아무튼 산 속에 높고 넓게 자리 잡은 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솔직한 말로... 뭐할라꼬
이 미친짓을 했을까 싶다. 난공불락이라지만 공격하기 어려워서 함락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그냥
너 혼자 천년만년 행복하게 사세요' 싶어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성에서 대략
80여 미터 아래에 사무라이들이 살았던 마을이 있다. 출퇴근도 어려웠겠지만, 성주가 야밤에 긴급
호출이라도 하면 욕을 바가지로 하며 기어올랐을 것이다.(출처:네이버 블로그- 취생몽사)
※다섯줄 넘는 글은 아예 클릭을 기피한다는 30대 아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글은 일반적 사고의 젊은이
들(30~40대)은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을 줄 알지만, 행여나 근거를 알고 들어도 들어놔야 유사시에 아는
척 고개라도 꺼덕일 수 있으리라 생각할 될성부른 이를 위(오지랖도 넓다 ㅠㅠ.)해, 대 선배분들의 블로
그에서 퍼온 일부 자료를 편집, 딴에는 되도록 짧고 현대적이며 보기 편하시라고 살짝 손질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발 아는채 하네~ 라던가, 지랄~~ 할 者"들은 아예 '클릭'도 안하면 좋겠다. 혹 실수
로 접속했더라도 자신이 상식없는 천박무지한임을 안다면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염원하며....
作曲者 다끼렌따로{滝廉太郎-明治12年(1879.8.24~明治36年(1903.6.29)}는 東京胎生, 父 '吉弘'는 대장
성 내무성을 오가며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벤또 폭탄에 즉사?한 조선총
독)등 명치시대 개혁기의 리더들 휘하에서 지방관리로서 카나가와켄, 토야마켄 토야마시, 오이타縣 다께
다市등지로 자주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서 일본 각지를 두루 섭렵한다.
메이지27년(1894), 15세에 도쿄 음악학교(현재의 도쿄예술대학)에 입학, 메이지31년(1898)에 본과를 졸업,
연구과에 진학하며 작곡과 피아노 연주로 재능을 길러 갔으며 메이지33년(1900)10월에는 도쿄에 있던 교
회에서 세례를 받아 크리스챤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전반에 많은 번역 唱歌(가곡)가 생겼으나 일본어 가사를 무리하게 끼워 넣은 어색한 것이
많아서,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오리지날의 노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다끼 렌따로'는 가장
빨리 그 타이밍에 응한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荒城の月은 하코네 80리(箱根八十里)와 함께 문부성 편찬의 <중학 애창곡>에 게재되었고
가장 인기가 높은 가곡중에 손꼽히는 꽃(花)은 明治33年(1900) 8월에 작곡 되었으며 모음곡 四季의 제 1
곡으로, 제 2곡 설날(お正月), 제 3곡 비둘기 포포(鳩ぽっぽ), 제 4곡 눈이 내린다(雪やこんこ)등은 일본에
서 가장 오래된 동요이기도 하다.
메이지33년(1900)에 편찬 된 유치원 창가(幼稚園唱歌)에 등재된 명곡이며 또, 황성의 달(荒城の月)은
1910~1930년대 벨기에에서 찬송가가 된 일도 있었다고 최근에 판명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메이지34년(1901) 4월 일본인 음악가로서는 2번째로 독일의 Leipzig 음악원(Mendelssohn 설립)에 유학하여
문부성 외국 유학생으로 입학, 피아노나 대위법등을 배우나 불과 2개월 후에 폐결핵으로 1년만에 귀국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부친의 고향인 온천지역 오이타현에서 요양하고 있는 도중 메이지36년(1903) 6월 29
일 24세를 일기로 절명한다. 최후의 유작은 피아노곡 원한{憾(うらみ)}으로 절명 4개월전인 명치36(1903)
년 2월 발표되었다. 쇼와33년(1958) 제작, 개봉된 영화 '황성의 달'은 작곡자 다끼 렌따로의 짧은 생애를 드
라마화한 것이다.
작사자 도이 반스이{土井 晩翠-메이지 4년(1871)~쇼와27년(1952)는, 시인, 영문학자로 본명은 쓰치이 린키
치{土井林吉:센다이현 미야기군 센다이(仙台県 宮城郡 仙台:현재의 미야기현 센다이시 아오바구('宮城
県 仙台市 青葉区') }태생이며 도쿄 제국대학 영문 학과 졸업생이다.
제국대학 재학중 제국문학을 편집하여 시를 발표하였으며 남성적인 한시(漢詩)풍으로 유명하였고 메이
지 4년(1871) 12월 5일, 센다이의 키타카지마치[北鍛治町 18번지에서 출생, 부친은 문학 취미를 가졌었고
조모 이세(伊勢)도 와카(和歌) 창작에 소양이 있었다고 한다, 메이지27년(1894)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 '제국문학'을 편집하였고 다수의 詩를 발표, 메이지31년(1898)에 Carlyle의 영웅론을 번역출판한다.
메이지32년(1899)그의 첫 시집 천지유정(天地有情)을 발간하였고, 이 시집으로 당시의 일본의 저명 시인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과 대등한 대표적 시인이 되었고 부교수로서 부임후 滝廉太郎의 작곡으로 유명
한 荒城の月을 발표하어 국민들에에게 확실하게 인지되었다.
일본 전국의 학교 교가를 작사 한 것에서도 유명하고, 특히 아사미즈 소학교(浅水小学校-미야기켄 토요
마시-宮城県 登米市)등의 교가는 유명하며 모교인 다찌마찌(立町) 소학교의 교가도 작사 했다. 쇼와42년
(1967), 도이 반스이가 작사한 교가를 모은 노래 모음집 반스이 선생 교가집(晩翠先生校歌集)이 만들어졌
으나 탈루작이 너무 많다고 불평할 정도 였으니, 얼마나 많은 교가를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며, 詩集
새벽종(暁鐘)등을 간행한 후, 다이쇼기(大正期)는 영문학자로서의 활약이 보이는데, 타이쇼13년(1924)에
는 바이런의 사후 100주년을 기해 "차일드 할로의 순례"을 번역 간행하였다.
쇼와 7년[1932], 이름의 성 쓰치이(つちい)을 잘못 읽어서 도이(どい)라고 읽혀진 것을 받아들여서 이름을
바꾸고, 쇼와 9년(1934)부교수직을 정년퇴직하여 명예 교수가 되었고 심령학에도 관심을 나타내어 쇼와
21년(1946)에는 재단법인 일본 심령 과학 협회의 설립에 고문으로서 재직하였다.
태평양전쟁에 자택이 공습을 당하여 30000권에 이르는 장서를 잃었고, 패전 이후는 한시조시(漢詩調詩)
가 쓸모없게 되어 교가의 작사에 전념였으며 쇼와25년(1950) 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문화 훈장을 수상.
문화 공로자 및 센다이시 명예 시민으로 쇼와27년(1952) 10월19일,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 Midi = 日本の歌・世界の歌・童謡・民謡・わらべうた http://classic-midi.com/utatop.htm
荒城の月 - 歌:鮫島有美子
春 高楼(こうろう)の 花の宴(えん) 봄날 고루의 꽃의향연
巡(めぐ)る 盃(さかずき) かげさして 돌고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千代(ちよ)の 松が枝(え)わけ出(い)でし 천년송 가지 사이로 비추는 달빛
昔の 光 いまいずこ 그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秋 陣營(じんえい)の 霜の 色 전쟁터의 가을, 서리내리고
鳴き行く 雁(かり)の 數 見せて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 몇마리
植うる 劍(つるぎ)に 照りそいし 빛나던 긴칼에 비추이던
昔の 光 いまいずこ 그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今 荒城の 夜半(よわ)の月 지금 폐허가된 성터의 밤하늘에 높이 떠있는 저달
替(かわ)らぬ 光 たが ためぞ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저달빛은 누굴 위함인가
垣(かき)に 残るは ただ 葛(かずら) 성곽에 남은건 칡넝쿨뿐
松に 歌うは ただ 嵐(あらし) 소나무에게 노래함은 바람소리뿐
天上 影は 替らねど 대 자연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榮枯(えいこ)は 移る 世の姿 영고 성쇠 변하는 세상의모습
寫さん とてか 今も なお 비추려 함인가 지금도 역시
嗚呼(ああ) 荒城の 夜半の月 아~ 황성의 달밤이여
※목요일 오전 9시현제 음원은 살아있음을 확인, 들으려면 삐딱 삼각형 눌러야.....
演奏:ニ胡 /姜建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