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면한 시대, 청나라 제국의 적은 태평천국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평천국의 난이 도화선이 되어, 이와는 상관없는 소규모 반란, 민란, 비적의 약탈이 벌어지면서 국가 통제력은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증국번이 생각하기에는, 태평군을 물리치려면 우선 태평군의 판도에 들어서지 않은 지역부터 안정화를 시켜야만 했습니다. 증국번은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반체제 인사를 탄압할 요량으로 증국번이 세운것이 심안국(審案局) 입니다. 이름대로라면야 사건을 심사하는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고문을 행하는 장소였습니다. 한번 심안국 문턱을 넘은 사람들은 대다수 살아서 나오지 못할 정도였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가해져서 동지의 이름과 주소, 그 계획과 모든것을 실토하게 하는 극도의 공포 기관이었습니다.
비멸 결사 중에서도 천지회 계열의 비밀결사들은 대체로 극단적일 정도로 입이 무거워 자백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증국번은 이에 자신 역시 극단적인 공포정책으로 임했습니다. 심안국의 밀정들은 곳곳으로 파견되어 반체제 인사를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심안국 문턱을 넘었고, 옥사한 사람이 3천여 명이었으며, 사형되어버린 사람은 그 다섯 배가 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많은 인원이 모두 비밀결사 일리가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희생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사형같은 문제는 최종적으로 베이징의 재가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증국번은 초비상 시국이라는 명목으로 심안국을 초법률적인 기관으로 사용, 베이징에 통보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심안국은 살인국이었습니다. 법체제를 초월하여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증국번이 이렇게 한가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만을 하고 있었던것은 아닙니다. 증국번은 부대를 훈련시키고 있었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이징에서는 수차례 증국번을 독촉하여 반란군을 척결하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증국번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면서 병사를 훈련시키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싸움을 두려워해서 만은 아니었습니다. 증국번은 병선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장강에 면한 남경을 수도로 공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태평천국의 천왕의 천경에 들어서고, 증국번이 심안국에서 고문 당하며 울부짖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무렵, '헤르메스 호' 라는 이름의 영국 배가 난징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영국 전권공사 조지 본햄 경의 명령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영국의 전권공사를 움직이게 한 것은 상하이에서 영향력 있는 영국상인들의 압박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혼란이 모든 교역의 전면적인 붕괴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본햄 스스로도 이 전혀 새로운 집단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지나는 길마다 수만명이 불어나더니, 결국은 정성공도 하지 '못한', 영국도 하지 '않은', 남경의 점령에 성공한 저 사람들, 저 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지난 2년 동안 서양인들은 필사적으로 태평천국에 대한 정보를 모았지만, 쓸모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있었습니다. 간헐적인 소문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모호하고, 서로 모순되었으며, 부정확했습니다. 그들은 천지회 계열의 비밀결사와 배상제회의 차이에 대해서도 애매해 하였고, 태평군 지도자들의 이름 조차 확실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그리스도 교도가 맞는지 아닌지도 불분명 했습니다.
광저우에 있던 한 서양인은, 들려오는 소식들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사카 로버츠이며, 과거 홍수전이 찾아와 세례를 요청했던 인물입니다. 로버츠는 자신이 홍수전에게 세례를 주지 않고 거절한 일은 숨긴 채, 이제는 전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그 남자를 회상하는 글을 지방신문에 기고했습니다. 홍수전이 자신과 함께 성서를 공부했던 기간 동안, 그는 나무랄 데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천왕'의 실체를 두 눈으로 본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홍수전의 용모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외모의 남자이다. 키는 약 160~163cm 정도이고, 다부진 체격에 얼굴이 둥구스름하고, 호감이 가는 용모이며, 잘 생긴 편이고, 중년의 나이에 행동거지가 신사다웠다."
"그가 '우상의 파괴자' 로서 명성을 떨쳤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예언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행동하는것 같고, '종교적인 자유를 위해 투쟁' 하는 것 같다."
본햄을 압박하던 영국상인들의 가장 큰 시름은, 과연 태평천국이 현재의 청조보다 안정성과 미래의 교역화대라는 측면에서,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본햄은 우선,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국이 청조의 편을 드는 일은 "전쟁의 연장을 가져올 뿐" 이라고 생각하여 좋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상충되는 보고에도 불구, 사태를 좀 더 길게 보고 있을 형편은 못 되었습니다. 청조는 태평천국이 외국인들과 결합하는 절망적인 사태를 대단히 두려워했고, 선수를 쳐서 "서양인 야만자들의 배" 가 이제 모두 청조의 편이며, "영국인은 반란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고" "태평군을 전멸시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언제라도 지불" 할 용의가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태평군이 알아서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게 하려는 조치였습니다.
시간을 끌어봐야 사태만 더 안좋아질 듯 싶었기에, 1853년 4월 23일, 무장한 영국 증기선 헤르메스 호는 난징으로 출발했습니다. 본햄은 만족스러운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것은 조지 본햄의 직함이었습니다. 그의 직함을 고려하자면, 태평천국의 '천왕' 이나, 그게 아니라면 다른 '왕' 들 중 한명은 나서야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4월 28일 고위급 회담을 요구한 본햄의 요구에 태평군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 멀리서 온 형제들이 의례규칙을 전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통지하는 공문
조물주이신 천부상제께서 우리의 군즈를 지상에 보내시어 천하민국의 진정한 군주가 되게 하셨다. 그분의 궁정에 입조하기를 바라는 천하만민은 의례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입조하려는 자는 진술서를 준비하여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혀야 한다. 사전에 이것을 제출해야만 알현이 허락될 것이다. 이 명령에 복종하라.
본햄은 이 문서의 '상당히 불쾌한 어투' 때문에 화가 났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영국 당국은 이런 명령조의 문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이야 의례적인 표시고, 본햄 본인은 "의례에 대한 고충" 때문에 태평천국 지도부와 마찰을 일으킬까 염려했습니다. 그는 태평천국의 여러 왕 중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본햄 본인은 결국 난징 땅을 밞지 않았습니다.
전권대사 본햄이 그의 거대한 직책 때문에 지구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집단의 실체를 가까이 볼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면, 그의 통역사인 메도즈와 헤르메스 호의 선장 피시번은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강변에 상륙한 그들은 태평군의 환대를 받았고, 특별히 허락을 받아 난징 성 안으로 진입하여 이곳 저곳을 구경했습니다. 무엇보다, 태평천국의 가장 핵심인 '왕' 들을 만날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왕'을 만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태평군은 그들에게 먼저 겁을 주려고 했습니다. 메도즈와 피시번은 위압적으로 정렬해 있는 시종들 사이를 쭈삣거리며 걸어간 뒤, 무릎을 꿇고, 허리에 찬 칼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태평군은 그 두 사람이 뻔히 보는 앞에서, 두 사람을 인도해온 안내인을 갑자기 건방지다는 이유로 매질을 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뻔한 연극은 메도즈가 "영국인은 지난 900년 동안 하느님을 존경해왔다." 고 대답하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었습니다.
태평군의 '왕' 중 한명이자, 젊은 영웅인 석달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하나뿐인 하느님을 섬기는 신도이자 자손이므로,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혹시, 당신들은 '하늘의 계명'을 알고 있습니까?"
메도즈는 '하늘의 계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일단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잠깐의 생각 끝에, 그는 석달개에게 혹시 그 하늘의 계명이 '열개의 조항' 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물었고, 석달개는 긍정하는 대답을 했습니다. 메도즈는 '십계명' 의 첫 부분을 암송하기 시작했고, 그가 암송을 다 끝내기도 전에, 22살의 석달개는 메도즈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기뻐하며 소리쳤습니다.
"우리와 같은 자들이구나! 우리와 같아!"
석달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동료들을 바라보았고, 석달개의 동료들도 위압스러운 태도를 버렸습니다. 석달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평천국과 그대들 사이에는 평화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친밀한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만남과 대화의 기록은 통역사 메르즈의 기록입니다. 피시번 선장은 이때의 만남에 대하여, 자신이 만난 석달개를 비롯한 태평군은 "영리하며 과감하며, 단호해" 보일 뿐만 아니라, "정중하고 유머감각이 있는" 것 같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고 감동적인 태도로 피시번이 선물한 영문판과 중문판 성서를 받았고, 피시번이 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를 훎어 보았습니다. 피시번이 그 신문을 가지고 가도 좋다고 하자, 그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피시번은 태평군 중 일부를 헤르메스 호에 초대했고, 태평군 방문객들은 배의 증기기관을 구경하거나, 쌍안경을 들여다보면서 감탄하거나, 심지어 영국 전권공사 조지 본햄의 모자를 벗겨 머리 모양이 어떤지 살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인 좋은 인상에도 불구하고 양수청은 오만하고 퉁명스러운 서한을 보냈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영국인도 태평천국의 군주에게 예속이 되어 있다" 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본햄은 이에 대해 불만스러운 답서를 보내고 더 볼것도 없다는 듯이 철수했습니다. 33시간 만에 ─ 중간에 그들을 청군으로 오해하고 포격한 태평군 수비대와 교전도 치룬 끝에 ─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영국 런던의 화이트홀 궁전에 있는 상관들에게 보고서를 썼습니다. 그가 보기에 태평천국의 종교는 아무래도 구약으 바탕으로 "하늘의 계시를 위조한 것" 이며, "거기에 미신과 터무니없는 주장을 덧붙인 것." 이라는 시각입니다.
별개로 청나라의 관리들은 영국의 전권대사가 "태평천국의 지도부와 만찬을 같이 하였다." 라는 보고를 받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본햄의 서한을 받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영국인들이 '한 건' 을 하고 돌아오자, 프랑스 인들도 움직이기를 갈망했습니다. 상하이 지역에 꽤 큰 조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였지만, 난징까지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 증기 동력을 사용하는 프랑스 군함은 카시니 호라는 배가 한척 있었을 뿐입니다.
카사니 호의 선장, 프랑수아 드 플라는 근래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이고, 경험이 풍부한 장교였습니다. 그는 난징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치안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태평천국과 별개의 봉기군인 소도회(小刀會)가 상해에서 봉기하자 떠나는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드 플라는 남경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학살당한다는 소문을 듣고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고, 마침내 영국인들이 돌아온지 6개월 만에 출발이 가능했습니다. 프랑스 공사였던 M.드 부르불롱이 함께 했고, 그의 아내도 동행했습니다.
12월 6일, 카사니 호는 남경 근처에서 닻을 내렸습니다. 곧 태평천국에서 파견한 사자들이 그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프랑스인들은 태평천국 지도부와 접견을 하고 싶다고 말했고, 태평천국 지도부는 반나절 동안 논의를 하다 해질녘이 되서야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습니다.
이튿 날 아침, 말을 끌고 온 태평군 안내자들이 보이자, 프랑스 일행은 그들을 따라 남경 - 이제는 천경이라고 불리우는 도시에 진입했습니다. 징소리와 펄럭이는 태평군의 깃발 아래로 말을 타고 들어서자, 잿더미로 변한 건물들이 보였고, 일군의 여자들이 쌀을 짊어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성벽 위에는 아편흡연자들의 머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마태복음이 계속해서 인쇄되고 있었습니다. 이 책들을 비롯한 다른 종교서적들을 근거로 '과거시험' 이 벌어지고 있었고, 하루에 두번 천왕이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열 발의 대포가 발사되었습니다. 마침내 프랑스인들이 태평천국의 관료들과 만나기 위해 접견실로 초대되어을 떄, 그들은 황폐해진 거리의 황량함이나 소란스러움과는 대조되는 화려한 분위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서 드 부르불롱은 영국의 본햄이 직면했던 일과 마찬가지의 외교적인 곤경에 처해졌습니다. 태평천국을 대표해서 나온, 천왕과 다른 '왕' 들을 제외하면 가장 급수가 높은 인물인 친르강(秦日綱) ─ 홍수전의 죽마고우 ─ 이 드 부르불롱 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자기 보다 밑에 있는 의자들 중 아무 곳이나 않으라고 손짓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 것입니다. 결국 논쟁이 벌어지고 회담이 아예 취소되기 직전에, 절충안이 마련되었습니다. 벽을 나란히 하고 붙어있는 두 개의 방에 서로 들어간 채 '비공식적인 회담' 을 하는 것입니다.
드 부르불롱은 우선 천경 내 가톨릭 신자들의 안전을 요구하고, 태평군의 신앙에 대해 질문하였으며, 프랑스는 청조와 태평군 사이에 중립을 유지하고 있고 함풍제와 프랑스가 맺은 모든 약속들이 아직 유효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애매한 소리와, 무엇보다 함풍제를 가르켜 '황제' 라는 표현을 한 사실에 대해 친르강은 화를 내었습니다. '만일' 프랑스인이 청조의 통치제는 함풍제를 그렇게 공경한다면, 마땅히 프랑스인들은 함풍제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고, 또 프랑스인이 함풍제의 친구라면, 프랑스인은 태평군을 반란군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프랑스인이 태평군을 반란군으로 간주한다면, 프랑스인은 태평군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는, "당신들은 친구를 더 잘 돕기 위해, 우리에게 와서 첩자노릇을 하고 있으며, 우리의 허실을 염탐하고 있다." 는 말이 나오는 결론까지 나와버렸습니다.
태평군의 이런 강경한 입장이 나온 후 며칠간의 침묵이 있었고, 카사니 호에 다른 서한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북왕 위창휘가 쓴 서한으로 프랑스인들에게 자신의 궁전을 방문하여 자신의 '구두지시' 를 받으라는 '명령' 이 었습니다. 드 부르불롱은 편지를 다 읽고 난 후에 곧바로 상하이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는 본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외교부에 자신의 보고를 올렸습니다.
"내가 본 모든 것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 혁명운동의 힘이다. 이 힘은 전통에 의한 관습과 부동에 익숙한 이 엄청난 제국에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단번에 완전한 변혁을 이룩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것인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또 대중의 무관심과 만주족 왕조의 방책이 반란의 승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이 반란이 가공할 만한 특징과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란을 이끄는 사람들은 광적이고 야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들의 모험이 성공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들은 대담무쌍할 뿐만 아니라 이념과 조직, 전술 면에서도 유리하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상대를 월등히 압도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있다."
영국이 '선수를 쳐서' 남경에 다녀온 사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공공사 험프리 마셜은 역시 남경으로 배를 보내고 싶었지만, 때마침 그 시기는 페리 제독이 극동해역의 모든 선박을 동원하여 일본에서 '그 유명한 사건' 을 일으키려고 떠났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1853년 봄 무렵, 광저우에 머물고 있던 이사카 로버츠는 홍수전으로부터 천경 방문을 초대받았습니다. 로버츠는 마셜에게 승인을 요청했고, 마셜은 그런 식의 여행이 미국과 청조의 협정에 위배된다고 하여 거부했습니다. 로버츠는 이번에는 상해로 직접 와서 요청했지만, 마셜은 거부했으며, 만일 계속 자신의 말을 무시하면 교수형에 처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마셜은 지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바보 같은 녀석은 왜 그 일에 대해 굳이 나에게 말하고 가려는 거지? 나는 물론 '안된다' 고 말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조약을 준수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어. 하지만 만약 그 녀석이 남경에 다녀와서 반란자에 대해 신뢰할 만한 보고서를 가져왔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로버츠는 개별적으로 배를 마련해서 가려는 시도 자체는 해보았지만, 청나라 수비대에 발각되어 실패했습니다. 마셜을 대신해 새로 부임한 로버트 매클레인이라는 신임 공사는 1854년, 자신이 남경으로 가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버츠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1854년 5월 22일, 로버트 매클레인을 태운 서스쿼해너 호는 천경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태평군 수비대는 외국선박의 깃발에 익숙하지 않아 경고의 의미로 발포를 했고, 이전까지 성조기를 본 적이 없었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대해 엄중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미국기는 특히 미국기의 우호적이고 중립적인 성격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태평군은 왜 미국인들이 여기 왔는지 이해를 못했지만, 매클레인은 답변 하기를 거부했고, '만족스러운 사과' 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미국인들은 그러면서 남경의 유명한 명물이었던 대보은사탑(大報恩寺塔)을 구경시켜 달라는 태평한 이야기를 해씨만, 천경에서는 이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계속해서 대치상황이 이어지고, 틀어박혀 있는 것을 참다못한 한 젊은 해군 사관생도가 미군의 군함에서 튀어나오더니, 독자적으로 탐사를 위해 성벽을 기어올랐고, 이 때문에 분위기는 한층 험악해졌습니다. 태평군은 자신들의 견해를 담은 문서를 전달했습니다.
"우리의 군주이신 천왕께서는 천하만국의 태평진주이시다."
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문서는, "너희들은 천조의 은혜와 사랑을 영원히 받을 것이며, 너희 땅에 거하여 조용히 큰 영광을 누릴 것이다." 라는 식의 말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미국 측에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언어상으로 너무 독특하고……이해하기 어렵게 표현되어 있어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비슷한 시각, 8명의 미국인 소대가 중국인들의 허가 없이 배에서 내려 남경 성 주변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태평군 수비대는 물러나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아랑 곧 하지 않고 대보은사탑 근처까지 접근했으며, 심지어 탑을 기어 올라가 탑 꼭대기에 달려있는 구면체를 때어내려고 시도했고, 그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8명은 혹독하게 심문을 받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서스쿼해너 호는 닻을 올리고 남경을 떠났습니다.
매클레인 역시 국무장관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그들이 "성서의 진리를 엄청나게 오해" 하고 있으며, '평등이라는 관점' 에서 대외 교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태평천국의 신앙과 관행에 나타나는 비합리적인 측면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다만, 쇠락해가는 청조와 태평군 사이에서 어느 쪽의 편을 잡는 일이 좋을지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비쳤습니다.
태평군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서양의 무역강국 및 선교국가들의 대표들과 만날 기회를 충분히 가졌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어느정도의 유사함도 있었지만, 실제 간격 자체는 만나고 난 후 더욱 멀어졌습니다. '모두 똑같이'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 밑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태평천국 지도자들의 시각이, 인류의 '형제애' 에 대한 마음보다는 더 큰것이 아니었나 싶은 이야기입니다.
첫댓글 사이비교주라는 말은 지나친 혹평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