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도 조심하라! (2023년 6월 10일 토요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세기 13:10, 14).
벧엘 근처에 장막을 친 아브람과 조카 롯의 사이에 목초지를 두고 갈등이 생기자 아브람이 양보했습니다. 롯은 물이 넉넉하고 풍족해 보이는 요단강 동쪽의 땅을 선택했습니다(10절). 롯의 선택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롯이 간 땅의 소돔 성 사람들은 악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13절). 롯은 소돔 성이 겉으로 보기에 좋다고 판단해서 그곳을 택했습니다. 롯은 그때의 판단의 실수로 인해 두고두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안수 받은 목회자가 아니었지만 설교하는 일로 왕의 명령을 어겼고 그 일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간수장이 평소 존경하는 번연에게 관행을 따라 잠시 집에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존 번연이 감옥을 나섰다가 돌아와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맙지만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돌아왔습니다.” 한 시간 후에 왕이 감옥을 시찰했고 가슴을 쓸어내린 간수장이 말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저도 살았고 목사님도 사셨습니다.” 관행으로 그래왔다고 해서 그저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롯은 먼저 선택권을 받았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판단하여 요단 땅을 선택했습니다. 삼촌이 자기더러 먼저 선택하라고 해도 윗사람을 공경하며 우선 선택하라고 할 수 있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예의만 갖추었어도 롯은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가 늘 하는 선택의 기준을 잘 정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이 어떤 것일지 기도하며 찾을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이해하지 못할 어려움이 닥쳐와도… (2023년 6월 9일 금요일)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역대하 31:20-21).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사람인데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다 왕국의 뛰어난 왕이었던 히스기야가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복을 주어 평안과 기쁨을 누리면서 정치하여 유다 왕국을 잘 이끌면 좋았을 텐데 느닷없이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받았습니다(대하 32:1).
히스기야 왕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잘 해왔는데 왜 그런 어려움을 주시는지 기도의 목소리가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그런 식의 불평 대신 유다 왕국의 지도자로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으며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불평이나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그런 어려운 일도 하나님이 주신 훈련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더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믿음입니다. 쉽지 않지만 어려움이 닥쳐와서 정신이 없을 때라도 그 때 하나님의 안목으로 잠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감당해야 할 책임을 생각하며 일상에 충실할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도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진정한 ‘워라밸’은? (2023년 6월 8일 목요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명기 5:13-14).
‘워라밸’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Work and Life Balance’의 첫 자들만 모은 축약어입니다. 60~70년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잘 살아보세!’라고 누구나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그렇게 밤낮없이 일한 아버지 세대 덕에 대한민국은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게 되었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풍요와 안락을 누립니다.
그런데 아버지 세대의 노력으로 일정한 풍요를 누리며 살아온 오늘날의 정보화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합니다. 휴가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취미를 위해 모은 돈을 아낌없이 쓰고 좀 더 많은 여유를 즐기기 위해 힘씁니다. 이렇다보니 산업화세대의 상식으로는 정보화세대의 생활방식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정보화세대는 이전세대의 사고방식에 답답함을 느낍니다.
십계명 속 안식일 규정은 안식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을 전제합니다. 엿새 동안의 땀 흘림이 있어야 일곱째 날 맞이하는 안식이 참된 안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십계명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워라밸은 단순히 좀 더 많은 여가와 여유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을 통한 땀 흘림을 통해 안식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원하십니까? 엿새 동안의 노동에 전력을 다하십시오. 엿새 동안의 땀 흘림이 참 안식을 선물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워라밸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겠습니다. 땀 흘린 뒤 얻게 되는 꿀 같은 안식의 기쁨을 추구하게 도와주소서. (by 정병한 목사)
불편해도 불안해하지 말라! (2023년 6월 7일 수요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지갑에 돈이 없으면 왠지 불안해집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되지만 이런 현상이 우리의 삶 전체에서 나타날 때는 문제가 됩니다. 돈이 없어서 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돈이 없는 데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칫 무책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마음에 ‘불안’이 찾아오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풍부에도 처하고 궁핍에도 처한다는 것은 돈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는 비결을 말합니다. 그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며 참 평안을 누릴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풍부’에 처할 때에도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재물관을 가진 크리스천들은 돈이 많을 때에도 불안해하지 않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돈을 꼭 필요한 곳에 쓰는 것입니다. 돈을 나누지 않고 움켜쥐고 있으려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을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쓰지 않고 기꺼이 나누는 사람은 가진 돈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불안하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돈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자족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돈 때문에 조금 불편해도 그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능력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돈 때문에 불안하지 않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민족을 위한 영적 책임감으로… (2023년 6월 6일 화요일)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출애굽기 32:11).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책임은 궁극적으로 지도자에게 있다는 말에 공감하십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실을 모세에게 알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고 모세로부터 새롭게 민족을 시작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10절).
이때 모세가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화가 났겠지만 하나님과 같이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의 ‘약한’(?) 부분에 집중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으로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렸습니다(11-13절).
이 기도 속에는 모세가 지도자로서 자기가 인도하는 백성들의 죄악을 스스로 감당하며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 반영되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출 34:9). 오늘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이 이런 영적 책임감을 갖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멋진 모세의 리더십을 본받을 수 있기 위해 노력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담판하는 심정으로 나아가는 리더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제가 그런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에서 삶으로 전도하기 (2023년 6월 5일 월요일)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26:22).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얌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통계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겠지만 간혹 예수를 믿는다면서 자기희생은 조금도 않으려 하고 잇속을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서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손해도 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고난일 것입니다.
이삭이 직업 현장에서 바로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유목을 하는 사람에게 생명과도 같은 우물을 계속 빼앗기는 그의 행동은 조금은 바보스럽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믿지 않는 동업자들에게 결국 인정받았습니다(28절). 상황에 몰려서가 아니라 확신에 근거해서 일관성 있게 행동한다면 분명히 우리들도 이삭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상대방이 오른뺨을 때릴 때 왼뺨을 대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그런 반응을 일관성이 있게 보여준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분명히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말과 글로만 전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낼 때 우리의 일터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삶으로 보여줄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래야 일터에서 전도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 살아갑시다! (2023년 6월 4일 주일)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사무엘하 5:4).
다윗은 어린 시절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3). 그 시절에 다윗은 군대에도 징집되지 않았고 ‘소년’이라고 불렸으니(17:33) 스무 살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위에 오른 때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 10여 년의 기간 동안 다윗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고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자신이 왕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때에 참모들은 사울 왕을 죽이라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부추겼지만,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자신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헛되이 죽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 직업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름부음 받은 왕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왕 노릇 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이 시간이 흐른 후에 왕위에 오른 것같이 우리도 재림의 때에 확실한 왕관을 쓸 것입니다. 그 이전에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우리는 왕입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녀로서 세상에 왕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일터에서 왕의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왕의 영토인 우리 일터에서 왕으로 살아갑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가 세상에서 왕이라는 신분을 잊지 말게 하소서. 왕의 신분에 걸맞게 일터에서 일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말짱 도루묵’을 만들지 말라! (2023년 6월 3일 토요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2-3).
아무 소득이 없는 헛된 일이나 헛수고를 이르는 ‘말짱 도루묵’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몽진을 떠났을 때 한 어부가 동해안에서 잡은 물고기를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선조는 그 물고기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묵’이라고 하자 그 이름이 좋지 않다며 즉석에서 ‘은어(銀魚)’라는 근사한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이후 환궁한 뒤 피난지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난 선조는 은어를 찾았으나 예전의 그 맛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에이, 도로 묵이라고 해라.”라고 해서 ‘도루묵’으로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심각한 배고픔에 직면했습니다.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적을 체험했고 물이 없을 때 쓴 물이 단 물로 변하는 이적을 체험했는데 이제 주린 배를 붙잡고 하나님을 향해 불만과 불평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은망덕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씀에 은혜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우리지만 당면하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숙된 신앙의 모습이 말짱 도루묵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신앙의 도루묵을 경계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저의 변덕스러움을 훈련하여 항상 하나님 곁에 머물게 도와주소서. (by 정병한 목사)
불의한 청지기의 윈-윈 전략 (2023년 6월 2일 금요일)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누가복음 16:7-8).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결론으로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절)는 말씀은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매우 실제적이고 유익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해고 통지를 받은 청지기가 주인의 부채를 탕감해 주어 결국 주인의 재물을 허비했다는 이야기가 이 비유의 골자입니다.
청지기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위기를 독특한 지혜로 해결했습니다. ‘기름 백말’이나 ‘밀 백석’은 농부 한 사람이 한 해 농사를 지어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해묵은 부채였습니다. 빚이 빚을 낳는 악성부채였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그 빚의 일부를 탕감해주어 주인의 너그러움을 채무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또한 엄두도 못 내던 빚을 갚아야겠다는 의지를 그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평판 때문에 청지기의 부당한 조치를 도로 물리자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를 향해 “고놈 참, 영특한 도둑놈이네!”라면서 혀를 내둘렀습니다.
결국 불의한 청지기는 ‘윈-윈 전략’을 사용하여 위기를 벗어난 것입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도 일을 지혜롭게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더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주시는 결론입니다. 쉽지 않은 일을 불의하지도 않게 지혜롭게 해내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사명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세상의 지혜를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하소서. 불의한 점을 걸러내고 순결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세요!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9:11).
모든 것을 만족할만한 환경은 쉽지 않겠지만 고통스러운 일터 환경 때문에 힘드십니까? 그 고통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망해 나라를 잃고 포로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면 단순히 죄에 대한 징계의 차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다 나은 신앙으로 성숙하게 하는 훈련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은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전보다 더욱더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그 분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겉으로는 재앙일지 몰라도 속 깊은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전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고통을 그저 죄에 대한 징계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보다 더 하나님에 대해 잘 깨닫고 잘 섬길 수 있도록 소망스러운 미래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현재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 악전고투하는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와 꿈으로 인해 가슴 벅찬 하루를 오늘도 우리 일터에서 보내봅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힘이 드는 상황만을 바라보고 좌절하지 않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소망을 발견하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힘들 때 기대하는 평안과 소망! (2023년 5월 30일 화요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9:11).
모든 것을 만족할만한 환경은 쉽지 않겠지만 고통스러운 일터 환경 때문에 힘드십니까? 그 고통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망해 나라를 잃고 포로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면 단순히 죄에 대한 징계의 차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다 나은 신앙으로 성숙하게 하는 훈련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은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전보다 더욱더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그 분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겉으로는 재앙일지 몰라도 속 깊은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전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고통을 그저 죄에 대한 징계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보다 더 하나님에 대해 잘 깨닫고 잘 섬길 수 있도록 소망스러운 미래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현재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 악전고투하는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와 꿈으로 인해 가슴 벅찬 하루를 오늘도 우리 일터에서 보내봅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힘이 드는 상황만을 바라보고 좌절하지 않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소망을 발견하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하나님께 매달려 보십시오! (2023년 5월 29일 월요일)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에스라 8:22-23).
경건하게 산다고 하여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열쇠는 바로 기도입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자기들을 보호할 군인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왕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자랑했기에 군인들을 요청하기가 겸연쩍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고 에스라는 왕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니엘도 믿음의 기도 덕분에 바벨론 왕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제대로 사역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에스라와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일터에서 그들과 같은 믿음의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큰소리를 쳤기 때문에 아쉬운 변명을 하기 어려운 상황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럴 때 한 번 하나님께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매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으로 매달린 우리의 기도에 적절한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의 어려운 문제 앞에서 다른 어떤 대응보다 기도하는 믿음을 주소서.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일하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맛 잃은 소금? (2023년 5월 28일 주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산위에 올라가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복에 대한 귀한 말씀을 하신 후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해 두 가지 의미 있는 은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금방 이해했습니다. 겨울에 화로(火爐)의 보온을 위해 숯불 바닥에 소금을 깔았는데 열로 짠맛이 없어진 소금을 비가 올 때 질퍽거리는 골목에 깔았다고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런 신세가 되고 맙니다.
또한 소금은 짠 맛을 내어서 음식물의 부패를 막고 음식의 맛을 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빛도 어둠을 밝히는 본래적인 기능을 살려야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성도들의 삶은 성도들이 가진 기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직업인이면 일로, 전업주부이면 가사로, 학생이면 공부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빛을 사람 앞에 비추듯이 크리스천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빛과 소금의 삶은 ‘종교적’인 모습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소금과 빛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16절). 오늘도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우리 동료들은 우리가 교회생활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행동을 통해서 감동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보여주는 착한 행실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오늘도 제가 일하는 곳, 세상에서 맛을 잃지 않는 소금으로 살겠습니다. 착한 행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교회 같은 일터, 일터 같은 교회! (2023년 5월 27일 토요일)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하박국 2:14).
미국의 텍사스 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일터사역 컨퍼런스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직장사역에 대한 비전을 본 후에 목회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그는 교회를 자신의 일터로 이해하면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있으면서 우편배달부, 전기공, 배관공 등 교회를 찾아오는 직업인들에게도 관심을 가지는 목회를 실천했습니다. 둘째, 그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일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직업인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도움이 되는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셋째, 그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목회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교회 건물로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지역사회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교회 주변의 몇몇 일터 현장을 분석한 후 그곳을 방문하여 마치 자신의 교회 성도들을 목회하듯이 그곳의 직원들을 돌보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목회가 확산되면 그야말로 하박국의 예언대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교회를 목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역사회 전체를 목회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접근으로서 이것이 우리 교회의 DNA가 되었습니다.” 이 간증을 들으면서 교회 같은 일터가 가능하듯이 일터 같은 교회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이 세상 끝까지 확산되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이원론의 폐해를 극복하고 온 세상을 사역지로 삼을 수 있도록 특히 목회자들을 깨워주시기 원합니다. (by 방선기 목사)
일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 (2023년 5월 26일 금요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상대적으로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한복판에 있는 일터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 속에서도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를 부인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화가 날 때도, 이해관계로 인해 예민해질 때에도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또한 제자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상징은 어느 시대에나 고통과 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물리적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에게도 비상한 순교적 상황이 주어질 수도 있으며 그 때는 기꺼이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쉽게 접하며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귀찮다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일과 관련된 비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남들이 다 받던 선물도 우리는 거절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 일터에서 이렇게 직업인으로서 겪을 수 있는 거룩한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하며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에서 주님과 고통을 나누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도와주소서. 크리스천이기에 겪는 불편이나 괴로움도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게 힘을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억지로 한 일을 통한 예상 못한 유익! (2023년 5월 25일 목요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마가복음 15:21).
억지로 하는 일이 기꺼이 하는 일에 비해 효과도 떨어지고 보람도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밤새 당한 고문으로 인해 자꾸 넘어지셨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마침 옆에 있던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란 사람을 억지로 불러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그는 우연히 지나가다 괜한 고생을 억지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한 그 일 때문에 나중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의 아들 루포는 나중에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롬 16:13).
이런 예를 보면 즐겁게 기꺼이 하는 것이 좋지만 간혹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유익을 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하기 싫고 또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그냥 억지로 한 일로 인해 나중에 생각지 않은 유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음악가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억지로 하는 바람에 나중에 위대한 음악가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도 어릴 때 부모 때문에 억지로 따라 다니다가 제대로 복음을 깨닫기도 하고, 미션스쿨에서 억지로 예배드리다가 주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능하면 우리의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하지만 원하지 않게 주어진 일들도 해냅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지로 하는 그 일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가 하는 일을 억지로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마가복음 15:21).
억지로 하는 일이 기꺼이 하는 일에 비해 효과도 떨어지고 보람도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밤새 당한 고문으로 인해 자꾸 넘어지셨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마침 옆에 있던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란 사람을 억지로 불러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그는 우연히 지나가다 괜한 고생을 억지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한 그 일 때문에 나중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의 아들 루포는 나중에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롬 16:13).
이런 예를 보면 즐겁게 기꺼이 하는 것이 좋지만 간혹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유익을 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하기 싫고 또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그냥 억지로 한 일로 인해 나중에 생각지 않은 유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음악가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억지로 하는 바람에 나중에 위대한 음악가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도 어릴 때 부모 때문에 억지로 따라 다니다가 제대로 복음을 깨닫기도 하고, 미션스쿨에서 억지로 예배드리다가 주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능하면 우리의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하지만 원하지 않게 주어진 일들도 해냅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지로 하는 그 일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가 하는 일을 억지로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크리스천다운 승진 (2023년 5월 24일 수요일)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다니엘 5:17).
일터에서 바람직한 동료 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합니까? 동료의 정의를 좁히면 입사동기쯤 될 터이고 조금 넓히면 함께 승진 대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진을 할 때는 동기간에도 라이벌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암암리에 승진을 다투다가 관계가 틀어지기도 합니다. 정당하게 실력을 겨루지 않고 한쪽에서 편법이라도 동원한다면 더욱 관계는 꼬이고 맙니다. 다니엘은 어땠을까요?
바벨론 왕국의 역사가 끝자락을 보일 무렵에 다니엘은 벽에 나타난 글자를 보고 놀란 벨사살 왕에게 글자를 해석해 줍니다. 그러면서 왕이 약속한 포상은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란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총리의 지위였습니다. 당시 상왕이 섭정을 했기에 세 번째 자리에 실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이렇게 지위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승진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자세가 동료 관계의 원만함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이런 멋진 자세를 가진 사람은 승진을 위해서 편법이나 불법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승진에 욕심 없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승진을 목표로 삼아 최대한 노력하되 페어플레이를 하는 태도가 멋집니다. 능력이 탁월하고 정당하게 인정받아 승진하는 사람을 누가 어쩌겠습니까? 질투할 수는 있을지언정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승진도 멋지게 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사람들이 선망하는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걷는 용기를 주소서. 승진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리더십 (2023년 5월 23일 화요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사무엘상 12:3하).
간혹 정년퇴직을 하거나 자리를 옮기는 부서장 혹은 회사 책임자의 이임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훌륭한 리더였을 경우에는 더욱 감동적이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요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이임사에는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이가 많이 들어 은퇴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며 섬기는 리더로서 어떤 부정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그것을 백성들이 시인했습니다(4절). 오늘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또한 사무엘은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23-25절).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물론 사무엘에게도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리더십이 자식들에게까지 전해지지는 못해서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사로서 실패했습니다(삼상 8:1-3). 이 일은 오늘날 한국 교계에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 세습과도 관계된 문제로 사무엘의 인생에서 옥의 티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 속에는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고 모델이 되어준 지도자 사무엘이 오래도록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리더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일터나 교회, 우리나라에 이런 리더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정직한 윗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랫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리더가 되게 하소서. 사무엘 같은 멋진 리더들이 많아지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당신의 “강한 나”를 찾으셨나요? (2023년 5월 22일 월요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라디아서 6:4-5).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 강한나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얼짱 가수의 목소리를 내주는 숨은 가수인데 몸무게가 95킬로그램입니다. 성경 속에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가 나옵니다. 성경 속의 한나는 성막으로 가서 기도했지만, 영화 속의 한나는 성형외과로 달려가 수술했습니다. 그래서 1년 만에 제니라는 이름으로 몸무게 48킬로그램의 퀸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강한나는 그렇게 뚱뚱한 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자신’을 찾은 것 같은데 또한 찾아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정신질환이 있는 아버지도 찾아야 하고 상할 대로 상한 마음의 상처도 다스려야 하고 그렇게 원하던 사랑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못 찾았습니다. 얼짱 가수의 추적으로 제니의 콘서트장이 엉망이 되었을 때 한나는 눈물로 고백합니다. “이렇게 달라지니 행복했는데, 근데 미안해요. 친구도 못 믿고, 아빠도 버리고, 나도 버렸어요.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외모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 나에게 잘하라고 주신 것, 바로 그것을 찾으면 됩니다. 영화 속에서 한나는 얼짱 가수한테 말합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그건 하나님이라고 우리 아빠가 그러셨어요.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 것 하고 살면 된다고요.” 이 “강한 나”를 찾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돌아봐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한 나”입니다. 그 강점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영화 속의 ‘강한나’처럼 “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하소서. 그래서 저의 소명을 찾아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부부 간의 귀한 선물: 대화 (2023년 5월 21일 주일)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사사기 13:9-10).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할 때는 별것 아닌 시시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일단 결혼을 하면 둘 사이에 말수가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들의 불평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가정에서 남편과의 대화 부족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대화의 부재가 부부의 관계를 건강치 못하게 만듭니다.
삼손의 부모는 성경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은 아니지만 대화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는 부부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아내에게만 계시를 주셨는데 이때 아내는 지체하지 않고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계시를 자신도 듣기 원했습니다.
만일 마노아가 아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과 일일이 모든 문제를 이야기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부간의 대화는 부부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대화야말로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도 귀한 부부간의 선물입니다.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화가 중요하지만 오늘 부부의 날에 특히 부부 간 대화에 대해 돌아보고 새롭게 결심해 봅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부부간에 마음을 열고 대화하여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일터에서도 사람들과 잘 소통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방선기 목사)
에클레시아와 디아스포라 (2023년 5월 20일 토요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어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교회는 교회 그 자체로만 의미 있는 기관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폴 스티븐스는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에서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모여 있는 교회인 ‘에클레시아’(ecclesia)와 세상 속에 흩어져 있는 교인인 ‘디아스포라’(diaspora)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에클레시아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합니다. 교회 안에 뭉쳐 있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나 헌금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초기 3세기의 역사를 보아도 성도들은 에클레시아 안에 있을 때보다는 세상 속에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활동할 때 더 많이 전도하여 교회의 본질에 충실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선택하신 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강조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모습은 모여서 흩어지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모인 교회인 에클레시아에서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디아스포라로서 일터와 가정과 세상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를 중보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들이 이 두 교회들 중 중심축을 두어야 할 곳은 바로 흩어진 교회인 디아스포라입니다. 에클레시아에서 예배와 교제와 안식을 통해 힘을 충전하여 세상으로 나가 디아스포라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에클레시아에서 힘과 위로를 얻겠습니다. 디아스포라로서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기도: 하나님을 알아가기 (2023년 5월 19일 금요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누가복음 24:30-31).
우리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를 더 알아가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수단 중 하나가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지만 기도도 역시 하나님을 알아가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은 특히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자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없으나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3:21). 누가복음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 예수님의 기도의 특징 중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 주신다는 점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 마을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에서 기도를 통한 예수님의 계시(啓示)를 볼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내내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식탁에서 축복 기도를 해주시자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기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여러 차례 기도하신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들에게 기도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기도하면 주님을 조금 더 알아갈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알아가는 깨달음을 주시기 원합니다. (by 원용일 목사)
세상의 환난을 대하는 자세 (2023년 5월 18일 목요일)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편 10:4, 12).
한 철학자가 엄청난 참사가 벌어지는 비참한 현실을 보고는 하나님이 있다면 세상이 이럴 수 없다고 탄식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 의문을 가지는 것이 한편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번쯤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엄청난 재난이 닥치거나 고통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 같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는 악인이 있다고 합니다(4절).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하나님께 나아가서 외쳐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절). 그리고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친히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감자탕교회’로 알려진 서울광염교회의 조현삼 목사님은 재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곧장 구호팀을 조직해 달려갑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재난이 일어나느냐?’라는 존재론적이거나 철학적인 질문을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환란은 하나님의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인 것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고통 중에 계신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소서.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손과 발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망원경 모심(母心) (2023년 5월 17일 수요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시편 33:13-14).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십니까?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섬길 때 자폐성 장애가 있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학교에 간다고 나갔는데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걸려오곤 했습니다. 학교 간다고 나간 때가 한참 지났기에 걱정하면서 등굣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가 개미들을 보느라고 쪼그려 앉아 있고,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판을 읽고 있기도 했습니다.
늘 데려다주는 것도 좋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고민하던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지켜보았습니다. 망원경을 구입해서 그것으로 아이의 등교 길을 죽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무엇에 몰두하여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아이 어머니는 말없이 아파트를 뛰어 내려와서 아이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망원경 모심(母心)’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꼭꼭 숨기만 하면 안 보일까요? 하나님의 CCTV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분의 카메라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코람 데오’의 정신으로 살았던 종교개혁자들의 자세가 바로 이런 의미였을 것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기도하며 일하라! (2023년 5월 16일 화요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느헤미야 4:9).
전에 한 사무실에서 아주 멋진 말을 적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할 때는 우리가 일하고 우리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그런데 이 말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지만 자칫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는 일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때 방해자들의 공격을 받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파수꾼을 두어 밤낮으로 막을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방해자들의 침입에 방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14절하)고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수고를 돌아보시고 그들을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셨습니다.
물론 기도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위급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하면서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기도를 빙자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사람의 무책임을 덮어주는 종교적인 피신처는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합니다. 그래서 베네딕트수도회에서는 “ora et labora”(기도하며 일하라)라는 모토를 가졌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또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기도하며 일하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보사부일체? (2023년 5월 15일 월요일)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사무엘상 24:6).
일본의 한 기업인은 학교교육을 거의 못 받았지만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 배울 것이 있으니 만나는 사람은 스승으로 여기며 배울 것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누구에게서나 배울 것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일터의 윗사람들에게도 우리는 당연히 배워야 합니다.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사부일체’라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보스와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가 같다’는 뜻입니다.
오늘 스승의 날에 이 재미있는 표현의 의미를 살려 우리는 일터의 윗사람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대하기가 까다로운 윗사람들인데, 다윗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윗사람인 사울 왕의 미움을 받는 상황에서 기꺼이 자신이 희생함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궁궐에 남아 왕을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인 자신이 떠났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을 추격해 온 사울 왕을 맞아서도 동일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으니 결심하라고 촉구하는 참모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자신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 때 다윗 왕이 자신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고 하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윗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며 잘 섬겼더니 그 자신도 역시 아랫사람들이 귀하게 인정해주었습니다. 다윗이 바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의 인생에서 귀한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들을 축복합니다. 일터의 윗사람들도 저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세워주시고 복 주시기 원합니다. (by 원용일 목사)
바울의 지혜로운 전도를 배웁시다! (2023년 5월 13일 토요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사도행전 17:22-23).
크리스천들은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못하는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람들이란 비난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을 배척하고 모든 종교는 결국 같다는 종교다원주의의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비난을 지혜롭게 피하는 방법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덴(아테네)에서 전도하면서 우상을 보고 영적 분노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는 대단한 종교성이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반어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칭찬을 한 후에 그들의 종교가 가르쳐 주지 못하는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그들이 단번에 설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매우 종교적인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제대로 전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우리도 일터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면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용납하면서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복음의 진리를 조심스럽게 전할 기회를 찾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 전파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주님의 권면은 여기서도 적용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에서 복음을 전할 때 지혜를 주소서.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들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가족이 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2023년 5월 12일 금요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 14:26).
정치인들이나 저명인사들의 자녀들이 연루된 비리나 고위 공무원들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관련된 비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척 간의 정이 깊어서 끊어야 할 상황에서 그러지 못하고 법을 어기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때에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을 미워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을 믿고 제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때로는 믿지 않는 가족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아야 비로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가족으로부터 신앙의 핍박이 있을 때나 실감나는 말씀일 것 같지만 사실 직장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부정한 돈에 대한 유혹이 있을 때 당장 돈이 필요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들이 떳떳치 않은 일을 부탁해올 때 정 때문에 쉽게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따라 바로 살기 위해서는 가족과 친척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인간적인 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다면 주님은 그런 우리를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가 가족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러나 제 가족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도록 분별력 있는 용기를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늘 하는 일도 주님께 하듯이! (2023년 5월 11일 목요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23).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우유 따르는 하녀>(Milkmaid)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녹색의 식탁보 위에 곡식 알갱이가 보이는 거친 빵이 담긴 바구니가 있고 작은 항아리 모양의 큰 그릇에 담긴 우유를 하녀가 따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진지합니다. 경건해 보일 정도로 위엄이 있습니다. 표정은 없지만 우유 그릇을 조금만 기울여 따르는 모습은 마치 수도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성찬식을 준비하는 듯한 느낌이 날 정도입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하녀의 상반신과 얼굴 그리고 장식 없는 벽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유를 따르는 일은 그리 특이하거나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아침마다 반복하는 일상의 일을 이렇게도 진지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는 하녀의 모습은 우리의 일도 역시 그렇게 중요함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오늘 하는 일상적인 일도 바로 하나님께 하는 일입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듯 오늘도 우리의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오늘도 일하면서 주님께 하듯이 일하는 제가 되게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쉽지 않은 이 말씀을 잘 실천하는 직업인이 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까지 확대되는 가족 개념 (2023년 5월 10일 수요일)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3-35).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혈육의 정이 강합니다. 서양 사람들에 비해서 가족 간의 관계가 훨씬 친밀합니다. 반면에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쉽게 정을 주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양이 국내에는 적고 입양 후 파양이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 혈연에 대한 애착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지만 가족 간의 끈끈한 정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가족들을 향한 지나친 정 때문에 직장 생활에서 실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당사자인 가족이 들었다면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가족의 개념을 넓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대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도 감정적으로는 쉽지 않으므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까지도 가족처럼 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터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소생(所生)’이라는 생각을 해본다면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도 일하면서 동료들을 하나님 공동체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대해 봅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의 사람들을 가족을 돌보듯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게 인도해주소서. 고객들과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하나님의 가족으로 여기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사람을 얻는 지혜를 주소서! (2023년 5월 9일 화요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언 11:30).
『삼국지』에 보면 수많은 장수들과 군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무술 능력이 뛰어나고 용맹하거나 지략이 출중한 사람들만이 늘 전쟁에서 승리하고 결국 천하를 얻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하를 얻는 군주들은 필요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어떤 큰일을 성취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잃어버려 인간관계에 실패한다면 성공이라고 보기 힘들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사람을 얻는 것이 지혜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결국 사람을 얻는 지혜를 강조하십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주인으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은 청지기는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면서 주인에게 막대한 빚을 진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줍니다. 그것을 확인한 주인은 청지기의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청지기는 자신의 이익만을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자신에게 붙어있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악명을 조금은 씻어주었음을 알고 ‘지혜로운 사기꾼’이라며 칭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눅 16:8). 사람을 얻는 것이 지혜의 핵심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윈윈의 전략을 통해 인간관계를 잘 유지한다면 성공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반대로 목적하는 ‘일’을 성취했어도 그 과정에서 ‘사람’을 잃으면 결국 실패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잠언 기자는 의인의 열매가 생명나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사람을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일해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이라는 목표와 ‘사람’ 사이에서 수시로 갈등합니다. 사람을 잃지 않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결단의 용기를 주시기 원합니다. (by 원용일 목사)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2023년 5월 8일 월요일)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3).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나와 대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행자가 아버지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저 애비인 제가 하는 말 좀 잘 들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런 바람을 가진 아버지가 정작 자신의 부모의 말씀에는 얼마나 순종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부모가 된 사람은 다들 자녀들이 말을 잘 들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자녀들에게 가르치시는 주님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모들이 모든 면에서 자식들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고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모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굴복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특히 결혼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창 2:24). 그러므로 결혼한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부모에게 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부모님을 주 안에서 공경하는 길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부모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하소서. 가정에서 합당한 질서를 배워 일터에서도 윗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방선기 목사)
갈등을 통해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 (2023년 5월 7일 주일)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미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사도행전 15:39-40).
일을 하면서 의견이 달라 갈등을 빚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때에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갈등과 마찰을 시원하게 해결해줄 하나님의 뜻이 좀 분명하게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바울과 바나바가 자기들의 주장을 꺾지 않고 싸우다가 결국은 헤어져서 각각 따로 선교팀을 꾸리게 된 일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겪으며 그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장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을 때 때로 헤어지는 방법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로운 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가 갈등을 빚어 헤어진 일을 통해서 안디옥 교회는 두 개의 선교 팀을 보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일하면서 중요한 선택을 하거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잘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대화 중에 갈등이 생긴다면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 3의 대안인 다른 방향도 참조하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 답답할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조언이 중요합니다. 갈등이 생겨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대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갈등이 있거나 나와 다른 의견이 있어도 무시하지 않고 더 바람직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거룩을 추구하는 결혼 (2023년 5월 6일 토요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후서 1:4).
요즘 우리 시대는 청년실업의 여파로 청년들의 결혼 연령도 늦어지고, 아예 결혼하지 않겠다고 비혼(非婚)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혼의 만연을 넘어 황혼이혼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이 든 부부가 이혼하지 않으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산다는 졸혼(卒婚)이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합니다. 결혼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우리 시대의 외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의 목적은 과연 행복입니까? 영성신학자 게리 토마스는 『결혼, 영성에 눈뜨다』(Sacred Marriage)라는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결혼의 참된 목적을 알려줍니다. 성경은 결혼의 목적이 행복의 추구가 아닌 거룩의 추구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세상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거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목적도 바로 이 거룩의 추구입니다. 게리 토마스의 책 제목대로 우리의 가정은 거룩의 영성을 추구하는 우리 삶의 중요한 마당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과거 수도사들처럼 독신으로 살아야 추구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복잡한 것들은 다 제쳐두고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결혼생활에는 당연히 갈등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은 거룩을 추구하는 부부에게 주어지는 귀한 선물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거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결혼에 담긴 거룩의 추구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갈등과 어려움도 헤쳐 나갈 힘과 지혜를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2023년 5월 5일 금요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태복음 20:21-22).
이른바 ‘치맛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이 예수님 덕분에 영광을 누리길 바랐습니다. 그것도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나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습니다. 대다수 부모들의 심정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이 원하시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가 받을 영광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녀가 받을 고난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 문제가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학원이나 과외 때문에 가정에서 자녀로서의 책임이 면제되고 학교공부나 시험이 있다면 교회생활도 무시하거나 대학입시를 위해 교회출석을 아예 중단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자녀 교육은 우상숭배의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녀가 명문 학교에 들어가면 부모들이 왜 기뻐하는 것 같습니까? 따지고 보면 부모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자녀의 장래를 위한다고 해도 부모의 욕심이나 허영을 투사(投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청지기 의식으로 부모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입시와 취업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인생을 길게 보고 세상 속의 한 크리스천으로 서 가도록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자식이 저의 소유인 것으로 착각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소유인 자녀들을 주님의 뜻에 따라 양육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사랑으로 응원해 주세요! (2023년 5월 4일 목요일)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2-3).
『마이클 야코넬리의 영성』이라는 책에 보면 몬로 박사가 빈민 지역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급영어 반에 영특한 학생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몬로 박사가 그 학생을 만나서 도전도 하고 간청도 하면서 조언했지만 학생의 성적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출근하는 몬로 박사 앞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 청년이 다가왔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을 기억하는지 물었고 몬로 박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이 친구야. 기억하고말고. 자네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 재능을 모두 살리지 못해 더욱 안타깝게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네.”
그러자 청년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믿어주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타임』지의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당시 졸업반일 때 저희 집에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투옥되고 어머니는 매춘을 하셨고 형은 마약 밀매에 가담해서 제가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선생님, 그 당시 70점 정도가 선생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성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70점’이 그 사람의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와 함께 일하는 일터 동료 중에, 가족 중에, 우리 관계 속의 사람들 중에 어렵게 ‘70점’인 사람들이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하고 찾아보십시오. 게으르고 불성실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70점이 그 사람의 최선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한 번 더 살펴봐 주고 격려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으면서 용납하는 사랑이 사람들을 세워줄 것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사람들을 세울 수 있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겪는 고난 (2023년 5월 3일 수요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12).
일하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굳이 이유라면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애매한 고통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세상에서 겪는 고난은 잘못으로 인해 벌을 받는 고통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경건하게 살려는 크리스천의 독특한 정체성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이야말로 떳떳한 아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하)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에 대해 강조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사환들이 윗사람에게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직업인의 특별한 정체를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가 일터와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히브리서 12장 7-8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아들로서 당하는 당연한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니라 사생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크리스천이기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잘 깨달으면서 주님의 고난을 본 삼고 침묵정진하는 삶을 산다면 고난 후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유 없이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일터에서 애매하게 고난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가족도 돌보지 않고 직장생활을? (2023년 5월 2일 화요일)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전도서 4:7-8).
오래 전에 한 기업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연구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일하느라고 집에 가본지 오래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만큼 좋은 제품을 만드느라고 애쓴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만든 광고겠지만 과연 그런 직장 생활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바로 그렇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도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왜 일하는지 잘 모릅니다. 정말 자식이나 형제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가족이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종종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왜 일하느냐고 물어보면 가족들을 위해서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위해서 하는 바로 그 일 때문에 직장인들의 삶에서 가족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내가 일하느라고 정신없이 사는 사이에 가족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잠시 가족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떠올리면서 현재 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생각해봅시다. 그런 여유도 가질 수 없다면 당신은 지금 일중독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왜 일하는지 깨닫게 하소서. 저 자신이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방선기 목사)
아브라함의 아량을 배운다면… (2023년 5월 1일 월요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세기 13:9).
조카 롯과 함께 유목을 하면서 이주하던 아브라함은 애굽에 갔다가 나오면서 더욱 부유해졌습니다. 벧엘에 머물 때 두 사람의 종들이 가축의 목초지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그 땅이 두 사람의 가축들을 다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제안했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아브라함은 롯이 먼저 두 곳 중 한 곳의 땅을 선택하면 나머지 땅을 자신이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롯에게 아량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마음이 넓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창 12:1)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또한 치안이 불안한 사회에서 한 사람이라도 함께 있어야 더 안전했으나, 나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인데 노측과 사측이 이런 아브라함의 아량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사관계에서 누구든 아브라함처럼 먼저 양보할 수 있다면 우리의 노사관계가 어떻게 변화될까요? 자기 자리에 앉아 한정된 자원을 더 많이 가지려고 다투기보다는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해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물론 롯이 좋은 땅, 물이 풍부한 소돔 땅을 선택해 갔을 때 아브라함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땅과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키셨습니다(14-15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양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욱 견고한 약속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도 아량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당장 마음에 불편이 있고 억울함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믿음을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시세를 알고 원칙을 지키는 인재! (2023년 4월 30일 주일)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역대상 12:32).
직장에서 채용을 할 때는 보통 그 사람의 학벌이나 스펙과 같은 것들을 중시했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을 한다고도 하지만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아직도 스펙을 중시해서 채용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취업한 사람의 능력과 인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은 그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전형적인 스펙을 쌓느라고 애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볼 때 중요하게 여기시는 인재상은 어떤 것일까요? 물론 전통적인 생각과도 다르고 요즘 현실적인 생각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이 잇사갈 지파 자손의 리더들 중에서 남다르게 평가하신 점을 살펴보면 의미 있는 인재 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세(時勢)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시세’는 요즘말로 하면 트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급하게 변하지 않는 시대에도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처럼 급변하는 시대에는 더욱 시세를 알고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시대 조류에 적응하다보면 자칫 ‘원칙’을 잃고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칭찬하신 인재들은 마땅히 행할 것을 알고 그것을 지켰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의 원칙을 알고 고수하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는 학벌이나 스펙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시세와 원칙’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자신을 키워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원칙을 결코 놓치지 맙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놓치지 않게 도와주소서. 말씀의 원칙과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직업인이 되게 인도해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제자다운 믿음을 가지게 하소서!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마가복음 9:23).
예수님이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 계실 때 산 아래 아홉 제자들은 곤경을 겪었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을 기대했던 아이 아버지가 제자들의 무능함에 실망했고 예수님을 만나서도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이 혹시 무엇을 할 수 있으면 도와달라고(22절)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꾸중을 섞어 질문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꾸중을 들은 아이 아버지에게 우리가 감정이입을 하면서 동시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일터와 학교와 가정과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빌빌대면 사람들이 우리를 얕잡아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도 우스운 대접을 받으십니다. ‘제자들을 보아하니 스승인 당신도 별 것 없을 것 같은데 뭘 할 수 있으면 불쌍한 우리를 좀 도와줘보십시오.’ 우리의 무능력과 부족함으로 이렇게 예수님이 모욕을 당하신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꾸중을 듣고 센스 있게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4절).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믿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더욱 영화롭게 할 수 있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하나님을 먼저 대접해드리는 황금률! (2023년 4월 28일 금요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교회에 나오지 않는 우리 동료들도 익히 알고 있는 ‘황금률’(Golden Rule)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다른 종교인들도 인간관계에 필요한 좋은 말로 사용합니다. 일종의 역지사지(易地思之)인데, 이 교훈은 대부분의 고등종교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인간관계에 필요한 원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적 교훈과 윤리적 교훈이 다 담겨있는 이 황금률은 우리 시대의 경영 혹은 마케팅, 직장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마 7:7)이라고 하시며 기도의 원리에 대해서 가르친 후에 이 황금률을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서로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그렇게 하나님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할 때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시는 분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드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대접해드리며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어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라! (2023년 4월 27일 목요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예레미야 32:15).
전쟁이 나고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는데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을 아십니까?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여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촌 하나멜이 와서 아나돗의 밭을 사라고 하면 그 밭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예언대로라면 곧 나라가 망할 텐데 밭을 살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밭을 산 행위는 장차 유다가 회복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장차 잃었던 땅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행동이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는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절망하는 동료들에게 자유정신을 심어주며 젊은 죄수를 가르쳐 검정고시에 합격시키기도 하면서 탈옥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교도소에 있었지만 교도소 밖에서 자유로운 삶을 보내는 꿈을 꾸었습니다.
현실의 어려움이 사람들을 좌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신뢰하며 꿈을 잃지 않는 자에게 약속의 성취를 선물로 주십니다. 예레미야가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을 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미래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절망스러워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고통과 어려움만 바라보는 것이 저의 부족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한 손에만 채우는 평안 (2023년 4월 26일 수요일)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 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전도서 4:4-6).
우리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사는데 비단 기업이나 국가 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개인도 무한 경쟁을 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조금만 주춤거리면 금방 추월당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도 느끼고 학교 교실에서나 직장에서도 쉽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그것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미 3천 년 전에도 그런 갈등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다. 한 손에만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6절). 결국 두 손에 가득 채우려는 욕심 때문에 평안을 찾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니 한 손은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두 손을 다 빈손으로 만들자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아예 스트레스가 없이 살기 위해서 게으르고 말겠다는 패배주의나 무기력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한 손에 가득 채우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그렇게 한 손에만 채우고 다른 손은 남겨 두어야 모은 것을 쓸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대개 욕심 때문에 생깁니다. 두 손에 가득 채우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쓰고 나눌 손이 더 이상 없으니 또 얼마나 불편하고 공허하겠습니까?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하나님, 욕심 부리지 않게 도와주소서.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지만 남을 돕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게 인도해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우리 시대의 인재, 전문 만능인! (2023년 4월 25일 화요일)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시편 105:21-22).
이라는 미국 잡지에서 전문화된 만능인(specialized generalist)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사는 평생직업인의 자기 계발 방향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우선적인 자기 계발의 방향은 전문가(specialist)이어야 합니다. 평생직장의 시대가 지나고 능력이 강조되는 시대에 평생직업인으로 살아가려면 자신의 핵심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 비교해도 그것만은 잘하는 직업 능력입니다. 젊은 날에 자기계발을 하면서 능력을 키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이가 들더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대조류를 접하며 새로운 능력의 함양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문 능력만이 언제나 능사인 것은 아닙니다. 만능인(generalist)이 되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복잡다변하게 변하고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적합합니다. 한 분야에 대한 전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전문 분야와 연관된 주변 분야에도 능통한 만능인이 더욱 대접받는 시대입니다. 하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또 더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오늘 우리 시대는 이런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물로 요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에 목동으로, 보디발의 집 노예로, 감옥에서 죄수로 지내면서 자신의 일에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인정받아 총무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실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이야말로 탁월한 전문 만능인이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탁월한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책임자와 매니저의 역할을 잘 감당해서 전문만능인이 되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지금 일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열왕기상 18:3-4).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운 직장이 있습니다. 주일성수가 어려운 직장도 있고 생산하는 제품이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덕이 되지 않는 직장도 있습니다. 그보다도 현실적으로는 직장의 가치관이 자신과 너무 맞지 않을 때 견디기 힘듭니다. 이런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이직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마도 성경에서 이런 고민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오바댜일 것입니다.
오바댜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 밑에서 궁궐을 관리하는 관리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시는 주군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면서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3절). 아마도 사직을 하고 그 당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를 따라 나서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궁궐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약 오바댜가 아니었다면 박해가 일어났을 때 100명의 선지자들을 누가 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일은 엘리야 선지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천 직업인들 중에 주님께 헌신하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한번쯤 직장을 떠나서 목회나 선교사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을 영적으로 살리는 기회는 목사나 선교사들은 들어가기 힘든 직장 안에 있습니다. ‘엘리야’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목회나 선교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성도들은 현재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에서 제가 바로 일터선교사임을 깨닫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충고보다 효과적인 중보기도 (2023년 4월 23일 주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언 9:8).
직업인으로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충고를 자주 하시는 편입니까? 한두 번 생각한 것도 아니고 고민하다가 직언이나 충고를 해주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던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충고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충고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고를 받지 못할만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고, 즉 직언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일단 아랫사람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건방지다고 느끼면 윗사람은 아무리 좋은 충고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충고보다 중보 기도를 해보십시오. 꼭 충고를 해야 하더라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급하니 기도부터 할 것을 권합니다. 그 사람에게 직접 말하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먼저 아뢰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이 충고하려는 것을 상대방이 깨달으면 충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더욱 빠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는 충고를 그 사람이 듣지 않더라도 다른 여러 상황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충고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충고하기를 원하는 나 자신의 마음과 태도도 하나님이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게 바뀐 자세가 표출되면 그것이 그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하나님이 선하게 바른 방향으로 섭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충고하기에 앞서 먼저 그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꼭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풀어 가시는 멋진 일의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인간관계도 잃지 않고 충고의 효과도 얻는 중보 기도를 잘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기도할 때 주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욕심으로 일터에서 범죄한 직업인: 게하시 (2023년 4월 22일 토요일)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열왕기하 5:26).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이었던 게하시는 열왕기하 5장에서 살펴보는 직업인들 중에 아마도 가장 믿음이 좋은 인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가장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아만의 선물을 엘리사가 거절하는 것을 보고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말았습니다. 나아만의 선물을 자기가 받으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아만에게 게하시가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이미 아는 엘리사가 추궁했을 때 게하시는 또 한 번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게하시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우리도 게하시와 같은 이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부정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도 이런 유혹에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일상의 삶에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 사람도 어느 순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이 죄악의 씨앗이 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거짓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애씁시다.
욕심이 생길 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기억하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한 이방인을 고쳐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선포하는 열왕기하 5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 교훈도 얻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에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저 자신을 돌아보겠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탐욕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신앙적으로 일하려는 초신자 : 나아만 (2023년 4월 21일 금요일)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열왕기하 5:17하-18).
열왕기하 5장의 세 번째 인물은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 받았습니다. 그러자마자 그는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림몬 신을 섬기는 자신의 주군이 신당에서 절을 할 때 부축을 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우상에게 절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엘리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평안히 가라”(19절)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생각은 이제 막 신앙을 가진 초신자에게 너무 수준 높은 신앙의 경지를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차선책이고 제한적 허용의 의미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겪는 이야기는 크리스천 직업인들이 종종 경험하게 되는 고민거리입니다. 크리스천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일터에서는 크리스천의 신앙을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양극단으로 가는 것보다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운 대안을 세우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도 나아만 장군처럼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신앙을 자신이 치유 받은 이적의 현장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일터,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일을 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그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저의 일터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지혜로운 조언을 하는 아랫사람 : 부하들 (2023년 4월 20일 목요일)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열왕기하 5:13).
열왕기하 5장의 두 번째 인물 역시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나아만의 부하들입니다. 이들도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요단강에 가서 목욕하라는 처방을 내리자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아람으로 돌아갔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할 뻔했습니다. 나아만의 부하들 중 한 사람이 지혜롭게 조언을 했습니다.
병을 낫기 위해서라면 엘리사가 명한 요단강 목욕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도 할 각오로 적국에 왔는데, 왜 쉬운 일을 포기하느냐는 조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때 그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조언하면서 “내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화가 나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윗사람을 감싸 안기 위해 그는 존칭이자 동시에 애칭으로 나아만 장군을 부르며 적극적으로 조언했습니다.
그 부하 역시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치는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가 병 고치는 능력이 있는지도 확실히 잘 모르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상관의 병이 치유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또한 사리판단을 잘했습니다. 그렇게 윗사람을 설득했습니다. 이 아랫사람의 사랑과 지혜가 담긴 용기는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자세 역시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일터에서 나아만의 부하들처럼 제안하고 윗사람을 잘 섬기면 그것이 바로 영향력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윗사람을 잘 섬길 수 있게 도와주소서. 일에 대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제안거리가 많아지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영향력을 발휘하는 신입사원 : 소녀 (2023년 4월 19일 수요일)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열왕기하 5:2-3).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치유 이적은 일하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이고도 유익한 교훈을 줍니다. 일터의 사람들에 견주어 네 사람의 직업인들을 차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아만 집의 여종은 나이도 어렸을 것이고 오늘날로 말하면 신입사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이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주인에게 일어난 불행을 보고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녀의 동정심, 공감하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소녀는 엘리사 선지자가 한센병을 고친 것을 듣고 보아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인이 엘리사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안했습니다. 여기서 또한 소녀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한센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은 믿음도 귀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소녀의 이런 제안을 듣고는 곧장 왕에게 보고하고 이스라엘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소녀의 말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충분히 믿음이 가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신입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나아만 집의 소녀는 지위는 낮았지만 이런 자세를 가지고 일하면서 일터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지위가 낮아도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리더입니다. 영향력이 능력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하는 사람으로서 사랑과 성실로 신뢰가 가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영향력을 발휘하며 일하는 사람이 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아랫사람을 위한 중보기도 (2023년 4월 18일 화요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사무엘상 12:23).
많은 크리스천들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새벽마다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하는 것이 목회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빌 1:3-4)한다고 했던 것처럼 목회자들에게 기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당신과 함께 일하는 아랫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일터의 부서장이거나 윗사람 혹은 사장이 자신의 아랫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사사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왕정을 원해서 퇴임할 때 지나온 역정을 돌아보며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그 선언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윤리적으로 지도자의 품위를 지켰고(12:3)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으니 그가 계속해서 선하고 의로운 길을 백성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아랫사람들을 잘 인도하고 그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일해 나가기 위해서는 아랫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아랫사람만이 아니라 윗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동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기도로 풀어주시는 경우가 많음을 기억합시다. 특히 아랫사람을 위한 기도는 일터의 윗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아랫사람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아랫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무엘처럼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한 윗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터에서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2023년 4월 17일 월요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미국 뉴욕의 리디머교회 팀 켈러 목사의 강의 중에 들었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교회를 찾아와 왜 우리 교회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텔레비전 방송국에 취업했는데 어느 날 치명적인 실수를 해서 해고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직속상사가 자기 위의 상사에게 가서 자기가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으니 자기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자기의 윗사람에게 신용을 잃은 셈이고 다행히도 그 여인은 해고되지 않고 일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꼭 그 상사에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만난 상사들은 아랫사람이 잘한 일은 자기가 한 것처럼 가로채고 아랫사람의 잘못은 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책임을 져서 손해 보는 일을 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처음엔 대답하지 않았지만 하도 물으니 대답을 하면서 자기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상사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 욕을 먹고 자기가 받을 책망을 다 받고 심지어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인데 자기는 예수님이 해주신 것을 아랫사람에게 조금만 해준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 교회에 다니는지 묻자 상사는 리디머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그 여인이 리디머교회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직장상사인 리디머교회 교인의 모습은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크리스천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잘 보여줍니다. 일터에서 아랫사람이 용서를 체험하게 하고 그녀의 커리어를 구할 수 있었던 이런 일이 바로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착한 행실”입니다. 이 일의 결과로 그 여인은 교회로 찾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도 일터에서 착한 행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그 사람의 말보다 사람을 먼저 알라! (2023년 4월 16일 주일)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사무엘하 17:5-6).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에게 모사 아히도벨이 조언했습니다(1-3절). 기습 작전으로 다윗 왕을 추격해서 사로잡으면 전쟁이 없이도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책략이었습니다. 압살롬뿐만 아니라 측근의 장로들도 그 의견을 옳게 여겼지만 압살롬은 또 다른 모사인 후새에게도 의견을 물었습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 당연히 압살롬에게 불리한 조언을 했습니다(삼하 17:8-13). 그는 여러 시각적 이미지를 동원해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결국 압살롬은 후새의 의견을 따랐고 다윗의 군대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중에서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지만(14절)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압살롬의 실수였습니다. 압살롬은 그 두 사람이 한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그들 중에 어느 편이 자기를 위하는 사람인지를 먼저 알아챘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들은 말 자체가 아닙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듣고 판단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들어야 합니다. 말은 얼마든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제대로 알면 그 사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분별하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사람을 잘 파악하는 지혜로운 안목을 저에게 허락해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하나님께 푹 빠져보라! (2023년 4월 15일 토요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 30:1-3, 6).
망명 생활을 하던 다윗이 어느 날 거주하던 시글락 성으로 돌아오자 아말렉 사람들이 침입해서 가족들과 재산을 모두 빼앗아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따르던 사람들이 재난을 다윗의 탓으로 여기며 그에게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정말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은 바로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이 분명하게 다윗이 극한의 상황에서 힘을 얻은 근거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키며 인도하신 바로 “그 하나님”을 다윗이 기억했습니다. 암담한 현실에 그냥 빠져버린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를 향해 비난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향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온전히 몰입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속으로부터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힘들여서 준비한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돌아올 때,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감정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잿더미밖에 남지 않았고 원망과 저주만 들리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힘을 얻은 다윗처럼 하나님께 푹 빠져보십시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게 닥친 어려운 상황을 보지 말게 하소서. 저의 문제보다 훨씬 크신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예수님을 위한 거룩한 과소비 (2023년 4월 14일 금요일)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마가복음 14:4-5).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다가온 한 여인이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 옥합은 보통 당시의 여인들이 결혼 지참금으로 오랜 세월동안 마련하던 것으로 노동자의 1년 품삯보다 높은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그 귀한 향유의 냄새가 순식간에 온 집안을 가득 채웠을 것인데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때 어떤 사람들은 향유를 허비한다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면 더 가치 있었을 것이라며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과소비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여인 대신 예수님이 대답해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도울 수 있지만 이제 함께 있지 못할 예수님을 위해 여인이 향유를 부어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고 하셨습니다(6-8절).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꾸준히 하셨습니다(요 13:29). 그런데 이 여인이 많은 비용을 들여 행한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처럼 단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니 이 여인의 ‘거룩한 과소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원하신다면 여인이 1년 이상 일해야 마련할 수 있는 향유를 드린 것처럼 기꺼이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예수님께 향유를 드린 여인처럼 제가 가진 귀한 것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주소서. 헌신의 삶을 연습하고 준비하며 살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한두 번 넘어져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 (2023년 4월 13일 목요일)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도서 7:16-18).
우리 크리스천들은 불의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고 싶은 목표를 가지고 애씁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일터의 현실은 그 목표를 실천하기가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현실 때문에 좌절하고 결국은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고는 아예 세상 밖으로 나가 격리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이원론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극단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회색지대에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살겠다는 목표로 살다보면 자기의 의를 드러내게 되며 윤리적인 결벽증에 빠지고 자칫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직은 헌신된 삶의 표현이자 의지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전할 수가 없어서 때로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두 번 실패했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명심하고 우리의 일터에서 끝까지 노력합시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 바람직한 윤리적 열매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우리가 이런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해 오늘도 노력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직장 생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열정을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by 방선기 목사)
골리앗이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라! (2023년 4월 12일 수요일)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사무엘상 17:37).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골리앗과 맞선 다윗에게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고함 소리에서 뭔가 다른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절하)?
다윗의 관심사는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다윗은 하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카드를 꺼냈습니다. 사울 왕을 만났을 때도 전황이 어떤지, 아군의 작전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사울 왕에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36절).
다윗과 골리앗 간 싸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아니라 “거인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느냐?”라는 싸움이었습니다. 세상은 골리앗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에게 정통했습니다. 이 세상의 골리앗에 대해 분석하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너무 많이 쏟지 말고 하나님에게 집중합시다.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세상의 골리앗을 향해 돌진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매출 저조, 무능함, 불안함과 편법과 같은 ‘골리앗’보다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 다윗의 방법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증거하는 삶 (2023년 4월 11일 화요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6:4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크리스천 직업인인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부활 신앙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일하는 일터 속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암울한 우리 일터의 상황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은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생명의 능력을 허락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일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기쁨과 생명의 일터로 바꾸어 줍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만나서 새 생명을 얻은 후 일터를 변화시킨 대표적 인물은 삭개오입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방 중동부 지역을 관할하는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으로 일하면서 백성들에게 혈세를 걷어 착복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며 잘못에 대한 보상과 사후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더 이상 물질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눅 19:8).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해서 여리고 세관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세리들이 더 이상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세리장인 삭개오가 조치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일터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사명감과 영적 부담감을 가지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 일터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일터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 가운데 행하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라! (2023년 4월 10일 월요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이 죽어서 묻혔던 무덤은 텅 비어 있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 후에 40일간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마지막 메시지로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 받았으니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명령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유대의 한 지방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던 목수 출신 전도자 예수님이 이제 더 이상 한 지역의 전도자가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일을 계속 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 모든 크리스천 직업인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 명령을 비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직업인들은 우리가 일하는 현장인 우리의 일터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전하는 일을 계속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달걀을 동료들에게 전하면서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소서. 저의 일터에서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 (2023년 4월 9일 부활주일)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27-28).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그 사실을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 하나인 도마도 자신이 빠진 제자들의 모임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너”라는 인칭대명사를 반복하며 말씀하셨습니다. 27절을 원문대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네가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네가 보고 네 손을 네가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네가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네가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이 이렇게 “너”를 강조해서 말씀하신 이유는 도마가 “나는 못 봤으니 안 믿는다”고 자기는 꼭 보아야만 믿는다고 선언한 회의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직접 자기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 자국에 넣어보고 옆구리에 자기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25절).
이 얼마나 크신 은혜입니까? 의심하던 도마의 의심을 해소해 주신 예수님께 도마가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분명하게 예수님이 자기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도마라는 이름의 뜻은 ‘쌍둥이’입니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도마의 나머지 한 형제는 누구일까요?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도마의 고백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터와 세상에서 담대히 전하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십자가 희생! 부활의 영광! (2023년 4월 8일 토요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3, 17).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중 영국군이 항구도시 칼레 시를 포위했습니다. 영국군의 포위망 속에서 1년을 버텼지만 시장인 쥐앙 드 뷔안느는 식량 고갈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 가운데 가장 명망 있는 여섯 명이 속옷만 입고 목에 오랏줄을 감고, 칼레시와 요새의 열쇠를 들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고 교수형을 당하면 다른 모든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항복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시장이 여섯 명의 인질을 모집하자 위스땃슈 드 쌩 삐에르가 가장 먼저 나섰는데 그는 칼레 시에서 가장 부자였습니다. 다섯 사람들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영국 왕 앞에 나서서 죽기를 자청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시장은 칼레 시민들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영국 왕의 요구대로 준비된 여섯 명의 인질들을 성문 밖의 영국군 진영으로 인도했습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영국 왕이 그들의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임신 중이던 영국 왕비 필라파 드 에노가 왕에게 장차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여 그들을 사면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영국 왕이 감동해서 여섯 명의 인질들을 살려주었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칼레 시민들을 구하기 위한 희생과 사랑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큰 사랑이었습니다(13절). 이제 우리도 큰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17절). 우리도 희생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16절).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주님의 큰 사랑을 받아 구원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을 택해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과 용기를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은? (2023년 4월 7일 금요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0-11).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 한 분이 인상적인 ‘원맨쇼’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이라고 하면서 강단 위에 드러누우셨습니다. 누워서 계속 이야기를 하시다가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말할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다가 죄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다시 누워버리셨습니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인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하나 된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하나 된 성도들 역시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이 말은 직장에서 일할 때는 죽은 것처럼 지내다가 주일에 예배를 드릴 때는 다시 살아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중에, 죄악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죽은 사람처럼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확신이 있을 때면 살아서 움직이라는 말입니다. 남들은 다 살아있는데 혼자 죽은 듯이 지내기가 쉽지 않고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혼자 나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부활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크리스천 직업인의 행동 지침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일터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게 하여 주소서. 일터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살게 하여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그 애는 내 친구니까요!” (2023년 4월 6일 목요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한복음 15:13-14).
베트남 전쟁 시절에 한 마을의 고아원이 베트콩의 박격포 공격을 당했습니다. 선교사들과 두 아이가 죽었고 몇몇 아이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한 아이에게는 당장 수혈이 필요했습니다. 고아원 아이들에게 피를 나눠줄 수 있냐고 묻자 한 아이가 손을 들었고 수혈을 했습니다. 수혈이 시작되자 소년은 갑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흐느끼는 소리를 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흐느끼던 소리가 큰 울음소리로 변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아이는 수혈을 하면 죽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왜 죽는 줄 알면서도 피를 나눠주었느냐고 묻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 애는 내 친구니까요!” 베트남의 그 고아 소년은 자기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피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각오를 했더니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친구를 위한 희생으로 살아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큰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아끼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 사랑이 바로 부활을 가져오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이런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친구인 예수님이 보여주신 큰 사랑을 우리도 우리의 친구들에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친구들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까다로운 윗사람이 나의 십자가! (2023년 4월 5일 수요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2:18-21).
까다로운 윗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여러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직장 상사들은 대부분 아랫사람에게는 모질고 인정받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직위가 올라가면서 많은 상사들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윗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으나 윗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윗사람들에게 일단 순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까다로운 윗사람에게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직장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메시지입니다. 까다로운 윗사람 때문에 힘들 때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바로 그 까다로운 상사가 주님이 내게 맡기신 ‘십자가’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일터에서 아랫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부담 느끼는 그런 십자가를 결코 지우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시간이 흘러 직급이 올라가고 아랫사람이 많아질 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겪었던 아랫사람의 심정을 잊지 말고 괜한 십자가를 지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의 상사가 까다롭더라도 그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감당할 힘을 주시고 저도 아랫사람들에게 올바른 윗사람이 되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2023년 4월 4일 화요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누가복음 23:33).
렘브란트의 <십자가를 세우다>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로마 군병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처형을 당연시하는 유대교 지도자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베레모 같은 모자를 쓴 남자가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함께 세우고 있습니다. 참 안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렘브란트가 왜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는 그림 속에 넣었을까요? 아마도 렘브란트의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당신도 거기에 있었는가?” 2천 년 전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자신도 그 현장에 있었다고 렘브란트가 고백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십자가를 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위기의 때,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는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는 못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희생하신 예수님처럼 당신도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희생하는 십자가를 저도 질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2023년 4월 3일 월요일)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4).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1904-1989)가 그린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달리는 그림의 아래쪽에 자신이 살던 리가트 포구를 그렸습니다. 그 위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이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이도록 그린 특이한 구도와 시점(視點)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위에 높이 매달려 있고, 위에서 하나님이 바라보는 듯합니다.
위에서 바라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누가 보았단 말입니까?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장면을 볼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통해 구원 얻었으니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들 예수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찢어집니다.
십자가 위에는 더 이상 긍휼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하심이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예수님은 버림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안타깝게도 예수의 머리가 땅을 향하여 툭 떨어졌습니다. 그 때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순간입니다. 아버지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이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인인 저를 향한 크나큰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예수님의 십자가 : 관계 (2023년 4월 2일 주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
‘십자가’는 기독교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바로 죄인인 나를 위해 예수님이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신 구원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들 중 하나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호칭은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쓰이던 아람어인데,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이렇게 친밀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이런 친근한 부자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또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특정한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신조에 동의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임종 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신학을 네 마디로 줄일 수 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me.)”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비밀이고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십니다. 오늘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되는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해봅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죄인인 저를 위해 친히 십자가 형벌을 당하고 죽임당하신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기다렸다가 말하는 지혜 (2023년 4월 1일 토요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에스더 5:3-4).
같은 말도 기분이 좋을 때 하면 쉽게 전달되는데, 때를 잘 못 맞추면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의 내용만큼 말을 하는 적절한 타이밍에 신경을 잘 쓰지 않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해도 언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습니다. 윗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를 피하면서 눈치를 보는 것도 일종의 지혜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할 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페르시아의 왕비였던 에스더가 왕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과정에서도 의사소통의 지혜를 발견합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것이고 민족을 몰살의 위기로부터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총리였던 하만이 유다 민족을 죽이려고 하니까 그의 흉계를 왕이 파악하여 자신과 민족을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꼭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같은 말을 하면서도 조금 기다렸다가 했습니다. 먼저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해서 왕의 기분을 한껏 고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결정적인 순간, 왕이 기꺼이 부탁을 들어줄 만한 때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에스더는 왕을 설득해서 민족의 원수였던 하만을 몰락시키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옳은 말을 하기는 해야 하지만 그것을 하기 위한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할 때도 지혜가 필요하지만 특히 일터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이렇게 기다렸다가 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내용이 같은 말도 언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잘 압니다. 기다렸다가 말하는 지혜를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돌려서 말하는 지혜 (2023년 3월 31일 금요일)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사무엘하 12:4-5).
직장에서 대화하다가 별 것 아닌 일로 갈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큰 실수를 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 것 아닌 일들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보통 말하는 내용에만 신경을 쓰지, 말하는 태도나 타이밍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부녀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인 교사한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가 하려던 말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단이 만일 왕을 찾아가 자기가 할 말을 직선적으로 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나단이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생명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릅니다. 나단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지만 그는 비유를 들어 다윗 왕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 자신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의사소통의 지혜입니다.
직장에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른 말이라도 단도직입적으로 할 경우 효과가 별로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고 자기방어 본능이 있는지라 어떻게든 변명을 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꾸로 상대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내용은 그대로 전하면서도 돌려서 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말 때문에 갈등이 점점 심화되는 안타까운 일도 경험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제대로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흩어진 교회에서 사명을 다하는 삶 (2023년 3월 30일 목요일)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서 4:11-12).
바울은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 등 교회 안에서 친숙한 직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직분자들이 하는 일, 즉 성도들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보여줍니다. 모인 교회는 성도들이 흩어진 교회에서 사명을 다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은 우리의 직업을 사명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소명은 사회 속에 성경적 가치들이 스며들게 하고 성경에서 세워놓은 원리들을 따르도록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학교의 교사들이라면, 학교의 제도를 변화시켜서 모든 학생들이 귀하게 여겨지고 개인적인 면에서와 학구적인 면에서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학교로 만드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기업의 경영자는 정의와 공평을 이윤 추구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일터에서 정의가 실현되고 생산하는 제품으로 세상을 복되게 하도록 사업을 운영해야 합니다. 직장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하고 정직함으로 사회에 기여하며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은 부가 편중되지 않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도 고르게 혜택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온전하게 세우고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오늘도 제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흩어진 교회를 바람직하게 세우는 사명의 실천이 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염려를 극복하고 평안을 얻는 방법 (2023년 3월 29일 수요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맥스 루케이도 목사의 책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에 보니 진정한 평안(PEACE)을 얻는 방법을 첫 글자로 이어가며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기도하십시오(Prayer). 나의 문제를 나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다음으로 느긋해지십시오(Easy). 기도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실을 그대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명확하게 말씀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상황을 다 파악하셨으니 나는 마음이 편한 것이지요. 그러니 기도했으면 느긋해지십시오.
다음으로 행동하십시오(Act). 걱정거리를 해결하는데 앞장서십시오. 엉뚱한 것을 붙들고 씨름하지 마세요. 윗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고민하지 말고 얼른 가서 속 시원하게 질문해보세요. 암에 걸렸다고 지레짐작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보십시오.
다음으로는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Compile).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들이 뭔지 적어 보십시오. 적어놓고 보면 괜한 두려움 때문에 감정과 시간과 돈과 내 인생의 자원을 낭비한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평가해 보십시오(Evaluate). 적어놓은 목록을 죽 훑어보면 나의 걱정과 두려움이 드러납니다. ‘나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구나, 재정 문제에 대해 많이 걱정하네, 가정 문제가 걱정거리구나, 내 일에 대해 자신감이 없구나.’ 걱정거리들의 가치를 분석하고 검토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다섯 단어의 앞 글자를 따면 PEACE가 됩니다. 이런 평안을 누리세요!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예수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멋진 인생을 위한 균형 (2023년 3월 28일 화요일)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도서 7:16).
요즘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대로 양극단으로 치닫는 사회는 위험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다소 치우칠 수 있으나 그 생각만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전도서 기자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고 합니다(전 7:16-18). 이런 균형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도 부부가 균형 있는 책임감을 가져야 제대로 유지됩니다. 경제적 책임도 함께 져야 하고 자녀 양육이나 복잡한 가족관계나 영적 성장도 부부가 서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도 균형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멋지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일과 여가의 균형, 직장과 가정의 균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균형 감각이 치우쳐 어려움이 생기면 그 부작용의 소리가 들립니다. 작은 소리라도 잘 들어서 균형이 찌그러진 부분을 바로 잡아 보십시오.
신앙생활도 균형을 잃으면 안 됩니다. 광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균형을 잃은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 신앙은 초월적이어서 정상적인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적(異蹟)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상식(常識)을 무너뜨리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별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절대성을 갖는 것은 틀림없지만 신앙을 표현하는 그릇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좌로나 우로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람직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멋진 인생을 위한 관계 (2023년 3월 27일 월요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사람은 근본적으로 관계가 있을 때 ‘사람’입니다. 한자도 인간(人間)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사람의 삶에서 필수적입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는 일의 핵심도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관계입니다. 부부 관계는 돈도 아니고 자존심도 아니고, 둘만 평생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약속, 바로 그 관계에 핵심이 있습니다. 자녀 교육도 관계로 풀어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만 있으면 부모 자식 관계에 문제가 없습니까? 공부시켜 주고 직장 구해주고 결혼시켜주기만 하면 부모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까? 부모 자식 간에는 관계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우리 일터에서도 일하면서 이 관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성실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능력만 있다고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태도가 바람직해야 하고 동료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능력이 좀 부족해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력만 있고 관계가 안 좋은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도 합니다. 팀워크는 직업인의 멋진 캐릭터입니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잘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결국은 관계입니다. 포도나무 비유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는 가지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께 절대적 의존을 통해서만 인생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관계를 바로 세울지 확인하고 점검해 봅시다. 문제점이 있는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고 세워갈지 기도하며 풀어봅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바람직하게 풀어가게 도와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하나님께 올라가는 구두 (2023년 3월 26일 주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로새서 3:23-24).
『일터에 사랑』의 저자 토니 캠폴로 교는 어린 시절에 다니던 주일학교 교실의 벽에 걸려 있던 그림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한 늙은 제화공이 작업대에 앉아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한 줄기의 빛이 제화공을 향해 내리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정말 특별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빛줄기를 따라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구두의 행렬입니다. 늙은 제화공이 만든 구두들은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그림에 대해 토니 캠폴로는 훌륭한 구두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선물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제화공이 작업대에서 하는 일이 곧 주님께 바쳐지는 감사의 기도였다는 뜻입니다. 어떤 직업이든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주님께 하듯이 감당할 때 그 일이 참된 노동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 속에 참된 의미가 부여되어 있고 그 일 자체가 바로 사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제화공이 만든 구두를 신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 구두를 평가했을까요? 제화공이 하나님께 하듯이 일한 결과로(23절) 멋진 구두를 신게 된 것을 감사하며 칭찬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이 땅에서는 혹시 그런 칭찬이나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賞)을 주님께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24절). 이 땅에서는 혹시 보상을 받지 못해도 천국상급은 분명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주님께 하듯이 일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소서. 믿음과 용기를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일상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 (2023년 3월 25일 토요일)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사무엘하 16:10-11).
사울 왕의 집안사람인 시므이가 압살롬의 반정으로 궁궐을 떠나는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아비새 장군이 그를 죽이겠다고 하자 다윗이 만류하면서, 시므이의 말은 하나님이 그에게 시키신 것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시므이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다윗 왕을 저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감정을 쏟아낸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기분이 나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다윗은 멋진 인격자였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종종 합니다. 저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난을 당하거나 책망을 받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면전에서 비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개인적인 감정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감정대로만 반응하면 상대에게 좋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혹시 비난을 받는 상황이더라도 다윗에게 배웁시다. 마음은 아프고 화가 나지만 그 비난의 말을 하나님이 내게 하신다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자신을 책망하거나 비난하신다면 그것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나의 잘못도 깨닫게 되고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비난과 비판의 목소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상의 영성을 배울 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2023년 3월 24일 금요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라디아서 5:14).
예수님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2).
한마디로 황금률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본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바울 서신에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말씀을 비교해보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그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노안(老眼)이 와서 돋보기안경을 맞추러 갔습니다.
안경점의 주인은 제가 아는 사람이었는데 저의 눈을 검사하더니 돋보기를 쓰면 잘 보이기는 하는데, 그러면 이후로 계속해서 안경을 쓰고 다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안경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냥 버티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돋보기안경을 맞출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안경을 사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 안경점의 주인은 그저 저에게 안경을 팔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런 설명을 하는 바람에 안경을 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돋보기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분이 저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저에게 대접한 것입니다. 사람을 일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멋진 이웃 사랑을 실천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하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연구하여 실천하게 하소서. 그래서 저의 일로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기쁨이 넘치게 인도해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 (2023년 3월 23일 목요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8).
삼상26:1~12 생명의삶 참고
직장에서 윗사람과 관계가 안 좋아서 나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특히 오늘 평생직장 시대를 지나 평생직업 시대가 된 우리의 일터 사회를 고려할 때 그런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퇴사할 때 회사나 남아있는 상사들과 감정의 앙금을 가진 채 나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모두 해결된 문제이지만 저도 과거에 그런 아픈 경험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하던 곳을 나가더라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좁아서 언제 어떤 이유로 그 사람들을 또 만날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 회사에 다시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앞날을 바라본다면 감정적 앙금이나 불화한 관계의 흔적을 남겨두고 회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꼭 퇴사와 같은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와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 채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하나님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큰 것 같더라도(사실 누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저도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은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제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정말 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명령입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의 알량한 자존심이 일터의 인간관계를 원만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멋진 관계를 얻을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포용력 있고 아량 있는 리더십 (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수기 11:29).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던 중 모세가 장로 칠십 명을 선출하였는데 장막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엘닷과 메닷이 장막에 나가지 않고도 그들이 있던 곳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런 무질서한 행동을 금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지 조언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질문했습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모세는 만약에 하나님이 모든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모두 예언을 한다면 더욱 좋겠다고 말했습니다(29절). 모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이 자신 외에 다른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무질서하지만 않다면 다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멋진 아량을 가진 인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지도자만 있다면 요즘 우리 사회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리더십 갈등은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터에서 이런 종류의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가 열심히 잘 해서 인정을 받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못하고 실수해서 내가 우월하다고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능력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끝없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남의 험담거리를 찾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모세의 멋진 리더십을 배웁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동료들을 질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하는 자세 (2023년 3월 21일 화요일)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애굽기 22:21).
오래 전 미국에 유학을 가서 몇 년 사는 동안 동양인으로서 차별을 조금은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할 때 조금은 신경을 쓰게 됩니다.
외국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으니 아무래도 그들을 대할 때 조금이라도 호의를 베풀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나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는 나라에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일하기 위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서 오기도 하지만 일단 먹고 살기 위해서 몰려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토 사람들에게 아무래도 차별을 당하거나 멸시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출 22:21)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차별을 당했고 노예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빼앗겨 나일 강에 버려지는 엄청난 일도 겪었습니다. 그런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을 박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에 잘 사는 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했는지 역사가 말해줍니다.
그런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찾아온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잘 돌보아 주어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해 기본적 호의와 긍휼을 베푸는 우리 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게 도와주소서.
저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by 방선기 목사)
바보 되는 연습! (2023년 3월 20일 월요일)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26:22).
우리나라 엄마들은 대개 자식이 나가서 놀다가 맞고 들어오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너도 가서 좀 때리고 오지 맞고만 오느냐고, 매 맞고 온 아이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심하면 자기 아이를 때린 아이를 찾아 혼내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기도 하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좀 달랐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어쨌든 손해 보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그런 정서를 가지고 이삭이 우물을 빼앗긴 이야기를 읽으면 공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삭은 좀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유목을 하는 상황에서 생명과도 같은 우물을 두 번이나 빼앗기면서 쫓겨 다녀야 했다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살벌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이삭처럼 살았다가는 재산을 다 날리고 패가망신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우리가 직장 생활이나 사업을 하면서 이런 갈등 상황이 닥치면 이삭처럼 행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자기 것을 남에게 무작정 빼앗기는 것이 경건한 삶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섹과 싯나, 두 우물을 빼앗기고 나서 또 우물을 팠더니 더 이상 블레셋 사람들이 덤비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음이 좀 쓰리더라도 이삭처럼 손해 볼 준비, 바보가 될 준비를 한 번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세상에서 강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정의로운 자가 되게 하소서. 또한 너그러운 자가 되게 인도해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소서!” (2023년 3월 19일 주일)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5).
오늘도 재계약을 해야 하는 중요 거래처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실랑이를 벌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은근히 돈을 요구하는 것을 모른 척하고 거절하기도 힘들고 알아채서 손을 쓰기는 더욱 힘든 일이 마음을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지저분하고 쓸데없는 고민은 아예 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함께 일하다가 2년 전에 사표 던지고 나가 신학교에 입학한 김 과장은 속편하게 성경 공부만 하면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세가 더욱 처량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가서 목사가 된 사람도 죄악된 세상을 떠날 살 수 없는 현실은 동일합니다. 세상을 초월해 고고하게 학(鶴)처럼 살아가는 것을 주님이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8절하).
단 세상에서 죄악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죄악된 세상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입니다. 다만 주님의 기도대로 죄악에 빠지지 않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극복해나갈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남연화 추가:너희는 세상의빛소금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는 세상으로 파송 받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일하는 제자로서 일터에서 악에 빠지지 않게 믿음과 용기를 더해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엘림에서 누리는 복된 안식! (2023년 3월 18일 토요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출애굽기 15:27).
마라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에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물이 충분한 샘이 열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 칠십 그루가 있었습니다. 12나 70이라는 숫자는 실제의 숫자이기도 했겠지만 충분하고 완전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천지창조 때에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셨습니다(창 2:10). 장차 우리가 갈 천국에서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고 묘사됩니다(계 22:1-2).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십니다.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도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이스라엘 백성들이 험난한 광야생활 중 온전히 쉬면서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그곳이 바로 엘림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치열하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쉬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엘림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퇴근해서 쉬고 주말에 쉬고 휴가 내서도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엘림의 축복을 준비해두고 계십니다. 엘림을 기대하며 수르와 마라의 힘든 여정을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인생길을 걸어가십니까? 홍해와 수르, 마라, 엘림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장벽이 있을 때나 고통이 있을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를 인정하며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귀한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엘림의 귀한 안식을 감사하며 누리게 하소서. 홍해, 수르, 마라, 엘림의 인생 여정을 염두에 두며 멋진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물이 쓰다고 원망하지 말라! (2023년 3월 17일 금요일)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출애굽기 15:23-25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 광야에서 고생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마라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거기에 물이 있었는데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곳, 마라와 같은 곳에 있습니까? 일이 꼬이고 더욱 악화되어 난감합니까? 이런 때 과연 우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인생의 마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모세도 그 물이 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호들갑을 떠는 대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리면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함을 모세는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문제에 대해 부르짖기를 기다리십니다.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그 나무의 가지를 모세가 물에 던지자 쓴 물이 달아졌습니다.
이런 귀한 경험 후에 하나님이 중요한 약속을 주십니다. ‘여호와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알려주십니다(26절하). 이런 교훈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법도, 율례, 말씀, 계명 등의 단어가 연속해서 등장하며(25하-26절) 아직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말씀의 필요성을 미리 맛보여 주십니다. 우리도 시험 받을 때 원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인생에서 겪는 고통의 시간인 ‘마라’에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하던 모세를 배우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물 없는 곳, 인생의 장벽! (2023년 3월 16일 목요일)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출애굽기 15:22).
홍해에서 얻은 구원은 한 사람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지만 결코 끝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적으로 홍해에서 구원받은 후 바로 맞닥뜨린 곳은 수르 광야였습니다. 이 ‘수르’라는 말은 ‘벽’이라는 뜻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중동 지역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동방 종족들의 외침을 막기 위해서 방어용 장벽들을 세워놓은 곳이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으로 아직 가슴이 벅찬데 곧바로 장벽들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더구나 그 광야를 사흘이나 힘들게 장벽들을 피하고 넘어서 지나가는데도 물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가축들이 픽픽 쓰러지고 아이들이 보챘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이런 수르 광야를 경험하십니까? 장벽을 체험하고 계시나요? 직장에서 일할 때 어려움을 겪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바로 수르 광야입니다. 왜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생기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명쾌한 답을 줍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허락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도 주십니다. 이런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엉뚱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수르 광야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수르 광야의 삶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홍해에서 구원받은 감격! (2023년 3월 15일 수요일)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애굽기 15:1-2).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의 바닷물이 두렵고, 뒤에는 집안의 장자를 잃고 분노한 애굽의 군인들이 추격해왔습니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밤새 바람이 불어서 물 벽을 만들었습니다. 유명하다는 전 세계의 어떤 아쿠아리움들과 비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거대한 물 벽 사이를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구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강 군대 애굽 군의 주력은 그 물 벽 사잇길로 뛰어들었다가 물 벽이 합해지면서 홍해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이런 감격적인 ‘홍해’를 경험하셨습니까? ‘구원의 감격’ 말입니다.
이런 가슴 벅찬 홍해에서 우리의 인생이 진정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나의 죄와 허물, 연약함, 나 혼자서 도저히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는 나약하고 죄악된 존재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부각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주라는 사실이 어느 날 물컹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분명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 자신의 구원주로 믿어 인생의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홍해에서 우리의 인생도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당신은 ‘홍해’에서 구원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크리스천의 인생이 그곳 ‘홍해’에서 출발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연약한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크리스천으로서 일터 속에서 크리스천다움을 온전히 드러내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한 사람의 말만 듣고 경솔하게 판단하지 말라 (2023년 3월 14일 화요일)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사무엘하 19:26-27).
다윗이 아들의 쿠데타로 몽진을 떠날 때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보고 므비보셋이 함께 따라오지 않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때 시바는 므비보셋이 정권을 회복하는 기회를 삼는다고 말했습니다(삼하 16:3).
나중에 알고 보니 므비보셋은 장애인이라 같이 따라 올 수 없었고 시바가 모함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바의 말만 듣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다 주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므비보셋을 오해했고 불공평한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사실을 확인하고 밭을 반씩 나누는 것으로 정리를 하기는 했지만(삼하 19:29)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므비보셋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한 사람의 말만 듣고서 판단했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하고 사실이 확인 되었더라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갈등 상황이나 이권이 걸린 때는 절대 한 사람의 말로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결정을 내릴 때는 성급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여러 경로로 확인한 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때는 반드시 당사자의 말을 들은 후에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은 보통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판단을 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2023년 3월 13일 월요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누가복음 12:20).
21세기 직업 사회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직업인은 도태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해야 하고 그 성과가 가시화되지 않으면 현재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변화무쌍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으면 직업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 농부는 능력 있고 장래가 촉망되었습니다.
소출이 풍성했기에 새로운 창고를 지을 계획도 세웠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도 이 농부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농부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매사가 자기중심적이었으며 자기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어느 때에라도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재물을 더 우선시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잘못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을 때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재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돈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이고 생명입니다. 돈 중심이 아니라 오늘 당장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더라도 안타깝지 않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읍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인생의 가치를 생각하며 일하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오바댜갸 아합 왕의 궁궐에서 일하다니? (2023년 3월 12일 주일)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열왕기상 18:3).
직장에서 일하면서 때로 짜증이 나거나 일이 지겨울 때가 있습니다.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회사가 잘되는 것이 경영자에게는 신나는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월급 이상의 어떤 다른 의미가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회사에 비리가 있음을 알게 되면 정말 일하고 싶은 맛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천하의 악한 왕 아합 아래서 왕궁 맡은 자로 일했던 오바댜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바댜가 하는 일은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오바댜는 날마다 해야 하는 왕궁의 업무가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출근할 때 의욕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퇴근하면서도 별 보람을 못 느꼈을 것입니다. 그냥 당장 사표를 던지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합류하여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궁내 대신으로 계속 일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지위나 월급 때문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오바댜가 아합 왕의 궁궐에서 그 일을 하고 있었기에 핍박이 있었을 때 백 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4절). 그리고 아합 왕과 엘리야 선지자가 만나도록 주선하여 갈멜산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16-19절). 일의 의미를 찾기 힘들 때 아합 왕의 왕궁 맡은 자였던 오바댜를 기억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의 상황을 탓하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저의 일터에서 오바댜 같은 존재가 되게 인도해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나의 피난처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 (2023년 3월 11일 토요일)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편 91:2-3).
J. C. 페니는 1907년에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는 매장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1910년에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3년이 지난 후 그는 “J. C. Penny”라는 주식회사를 세웠는데 1923년에는 두 번째 아내가 아들을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9년에는 주식시장이 붕괴하면서 4천만 달러를 잃고 맙니다. 1932년까지 페니는 빚을 갚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야만 해서 거의 파산한 상태였습니다. 잃어버린 모든 것 때문에 낙담했고 그의 건강도 급속도록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미시건 주의 한 요양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요양원 직원들의 찬송 소리를 멀리서 들었습니다. 페니는 찬송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서 맨 뒷줄에 앉았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그 후 페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원주로 고백했습니다. 건강도 회복되고 그의 영혼이 새 힘을 얻었습니다. 56세의 나이에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여 1951년에는 J. C. 페니라는 간판을 단 매장들이 많이 생겼고 한 해에 1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최초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어렵고 힘든 순간에 보호와 인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겠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새 힘을 얻도록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2023년 3월 10일 금요일)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누가복음 5:15-16).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가끔 멀찍이 떨어져서 자기의 그림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가까이서 보며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뿐 아니라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할 때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생각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리 두기를 못하면 그것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룰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올 때 예수님은 물러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일단 인기 있고 바쁜 사역으로부터 거리를 두신 셈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그것에 빠져있으면 다른 시각으로 보는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현장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도피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책임을 회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소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바쁘면 바쁠수록 현장에서 거리를 두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관점이라는 렌즈의 초점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신이 하던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좋습니다. 예수님에게 거리 두기가 필요했다면 우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을 쉬게 되는 주말에도 우리가 일하는 삶의 현장에서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거리를 두면서 생각해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저의 일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저의 일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목수로 많은 시간을 보낸 하나님의 아들 (2023년 3월 9일 목요일)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13:55).
사람의 일생을 돌아보면 특히 청장년기에는 깨어 있는 시간 중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도 때로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직업을 포기하고 전임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의 영혼 구하는 일을 할까 생각하는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임사역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인가 고민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하신 일은 목공 일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할 나이부터 공생애를 시작할 때까지 적어도 십 수 년, 길게 잡으면 한 이십 년쯤 예수님은 목수로 일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목수의 일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해서 대충 일하셨겠습니까? 대패질을 하다 말고 예수님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셨을까요? 납품하는 물건을 대충 만들어서 반품이 되어 돌아왔을까요?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하나님께 하듯이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일을 어떤 자세로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께 하듯이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2023년 3월 8일 수요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4).
예수님은 여러 비유를 들어서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인 의식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루에 사람이 하는 생각이 5,6만 가지 쯤 된다고 하는데 그 중 부정적인 생각이 85%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일에 대해서 들으면 안 되는 이유, 전에 해봤는데 안 된 것이 먼저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런데 이 염려는 종교적인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하면서 염려를 기도와 비교합니다.
기도가 종교적 행위이듯이 염려도 종교적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염려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염려하는 마음이 들면 바울의 교훈을 따라서 기도해보는 것입니다.
염려거리를 기도 제목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가르칩니다.
기도는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께 내 모든 염려를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염려는 붙들고 있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일 일에 대해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수많은 염려 속에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염려 대신 기도하며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는 믿음을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하나님이 이미 주셨다! (2023년 3월 7일 화요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여호수아 1:3-4).
일터에서 새로운 일을 맡아 해야 하거나 승진했을 때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의욕이 생기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특히 전임자가 일을 잘하는 사람이어서 자기와 비교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긴장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새로운 일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하지만 마음에 생기는 부담감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던 여호수아의 심정이 꼭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맡는 새로운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심정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6-9절).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겠다고 약속하신 표현에는 이미 이루어졌다는 완료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시되 너무나 확실하기에 이루어진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혹시 미래에 대해 두려움이 있다면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이 메시지를 가슴깊이 간직하십시오. 온갖 험한 세파 속에서도 우리는 나를 두렵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것들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며 담대하게 하소서. (by 방선기 목사)
파인애플 밭을 주님께 드립니다! (2023년 3월 6일 월요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34).
뉴기니에서 사역하던 한 선교사가 파인애플 밭을 일구었습니다. 그러나 파인애플이 채 익기도 전에 원주민들이 다 훔쳐가 버렸습니다. 신선한 과일을 먹을 기대를 했지만 전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원주민들의 파인애플 도둑질을 막을 수가 없었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결국 그 선교사는 그 파인애플 밭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하고 기도했습니다. “이 파인애플 밭을 주님께 드립니다.”
물론 그 후에도 원주민들은 여전히 파인애플을 훔쳐갔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선교사에게, ‘왜 더 이상 화를 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이미 파인애플 밭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원주민들은, 언제부터인가 사냥과 고기잡이가 안 되고, 가족들이 병드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원주민들의 버릇은 고쳐졌고 선교사가 파인애플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원주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선교사는 중요한 공부를 하면서 그 때부터는 파인애플 밭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건강, 돈, 친구들, 계획들뿐만 아니라 선교사역까지도 말입니다. 이런 우선순위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세상 염려가 많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도 하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일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당신은 인생의 우선순위가 분명하게 서 있습니까?
* 일하는 제자의 기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인도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 찾기 (2023년 3월 5일 주일)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8:3-4).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어딘가 일본사람 같은 느낌이 나고 프랑스에 사는 교포들은 프랑스 사람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국과 같이 본토인이 따로 없는 곳과 달리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가진 나라들에 가서 사는 사람들은 그 나라 사람들과 동화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문화의 힘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애굽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가나안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3절). 이것은 다양한 문화의 차이를 부정하는 답답한 배타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죄악된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버리지 않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4절).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롬 12:2)라고 한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 산다면 세상 문화와 언어를 잘 이해하고 적응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 살다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바벨론 궁궐에서 왕이 하사하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단 1:8). 오늘 우리는 어떤 것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처신해야 합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을 핑계 삼아 세상의 악한 문화에 동화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시험을 통해 강해진다! (2023년 3월 4일 토요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조상들의 광야생활에 대한 교훈을 하면서 조상들의 실패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조상들의 잘못된 행적이 기록되었다고 적용합니다(11절). 따라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절)고 하면서 우리 인생에서 겪는 ‘시험’에 대해서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어 온 수많은 훈련의 과정들은 사실 감당할 만한 것들이었지 않습니까? 감당 못해 죽음을 택하거나 극단적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고 그 어려움이 우리를 집어삼켜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만한 시험만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허락하십니다. 피할 길을 이미 하나님이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절)고 하면서 신앙 선배들의 잘못된 길을 답습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고 깨닫고 경험을 통해 내공이 쌓이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닥쳐오는 시험들을 감당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강해집니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제가 인생에서 겪는 시험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시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며 대응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by 원용일 목사)
사람이 없음을 보고? (2023년 3월 2일 목요일)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출애굽기 2:11-12).
예외가 있긴 합니다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일에는 분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를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세가 애굽의 관원이 히브리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낀 것은 바람직한 반응이었습니다.
다만 모세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그를 죽여서 시체를 은닉한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11절). 특히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살인을 행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켕기는 일이 있으면 좌우를 살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하지 못할 일을 사람이 없으면 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좌우에 사람들이 없더라도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보신 것이 아니라 나중에 보니 한 히브리 사람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의 시비를 가려주려 하자 항변했습니다(14절). 저도 경찰관이 안 보인다고 과속을 했다가 과속위반 범칙금을 낸 적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는 곳곳에 CCTV가 있어서 숨길 수도 없습니다. 카메라보다 무서운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꼭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일터에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사람들의 눈만 피하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게 인도해주소서. (by 방선기 목사)
곡식을 팔아 세상을 복되게 하라! (2023년 3월 1일 수요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잠언 11:26).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7년 풍년 후에 흉년이 닥쳐오자 애굽 땅 곳곳에 마련했던 창고들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팔았습니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창 41:56).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은 자선 사업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곡식을 백성들에게 팔았습니다. 풍년이 들었을 때 흉년을 대비해 잘 보관해 둔 곡식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살려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는 일도 좋지만 파는 일을 제대로 하면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비즈니스를 잘하는 회사가 진정 크리스천 기업입니다. 돈 벌어서 선교한다고 강변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대로 파는 비즈니스를 잘하면 그것 자체가 선교가 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요셉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요셉은 곡식을 쌓아 놓기 위해 저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필요한 때에 곡식을 팔아서 결국 사람들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거나 가족 부양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이 고통 받을 때를 위해 우리의 ‘창고’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과 지식과 열정을 담은 ‘곡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고통 받을 때 창고를 열어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직업인의 이런 멋진 비전을 꿈꾸며 3월 한 달을 시작합시다.
* 일하는 제자의 기도
세상을 복되게 할 귀한 곡식을 잘 준비하게 하소서. 그래서 세상이 어려울 때 창고를 열어 세상을 아름답게 세울 수 있게 인도해주소서. (by 원용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