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온전한 믿음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7-10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 요사팟 주교는 1580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동방 교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장사보다는 영혼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까지 맡아 수도회 개혁을 주도하였다. 주교가 된 뒤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1623년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께서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셨다.
(오늘의 전례에서)
**********
어떤 신부님이 자기 교구의 교인 한 명이 특별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그런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신부는 과거에 신학교 시절에 저지른 어떤 죄로 항상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정말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젊은 날에 죄지은 일로 늘 마음이 괴로운데, 내가 무슨 죄를 범했는지 하느님 앞에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기도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신부가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가 물론 기도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제가 옛날에 어떤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신자가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잊어버리셨답니다. 신부님.”
죄책감은 다른 이를 판단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그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서로의 탓으로 판단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먼저 이웃을 판단하게 만드는 나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이웃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 용서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설혹 용서가 된다고 해도 미워할 또 다른 사람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라는 주제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해달라고 하면 매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만이 용서의 힘임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늘의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온 종은 비록 힘이 들지라도 돌아와서 주인의 식사시중까지 들어야합니다. 그런 다음 먹고 마시게 되어있습니다.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그런 모든 분부를 다 수행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종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주인의 몫이지 종의 몫이 아닙니다. 종이 잘해서가 아니라 주인이 뽑아 주었기 때문에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종으로써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도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원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임을 믿는다면 순종하면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뿐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이유는 믿음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 구원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임을 알게 하기에 겸손하게 합니다. 겸손하다면 자신이 은총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웃을 판단할 수 없어집니다. 믿음이 생기면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면 용서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아니 누구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전삼용 신부님 「믿음이 있다면 용서할 필요가 없다」에서)
********
빠다킹 신부 조명연 신부님 글 드립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필요한 나.」
짐이 많아서 이사 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서 내게 필요한 물건만 빼고 가져가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거는 어때?”라고 묻는데, 생각해보니 필요 없는 물건인 것이다. 그래서 가져갔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가져가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
새로 이사한 집에 내 한 몸만 있었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또한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일까?”
이 글은 제 체험이 아니라, 김언 시인의 ‘집과 짐’이라는 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실 저 역시 짐이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필요하냐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곧바로 대답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나 자신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필요하냐고 물으면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것만 같아서 겁이 납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인은 '위기'를 두 글자로 씁니다. 첫 자는 위험의 의미이고 둘째는 기회의 의미입니다. 위기 속에서는 위험을 경계해야 하지만 기회가 있음을 명심하십시오.(존 F. 케네디)>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가 17,7-10)
自分に命じられたことをみな果たしたら、
『わたしどもは取るに足りない僕です。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ただけです』と言いなさい。」(ルカ17・7-10)
When you have done all you have been commanded, say,
‘We are unprofitable servants;
we have done what we were obliged to do.’
(Lk 17:7-10)
聖ヨサファト司教殉教者記念日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ノヒド ミョンリョンデロ モドン イル タ ハゴ ナソヌン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チョヒヌン ボザルコ オッヌン チョンイムニ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クジョ ヘヤ ハル イル ヘッスル タルムイムニダ。'ハゴ マラヨラ。
(루가 17,7-10)
自分に命じられたことをみな果たしたら、
지분니 메에지라레타 코토오 미나 하타시타라
『わたしどもは取るに足りない僕です。
와타시도모와 토루니 타리나이 시모베데스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ただけです』と言いなさい。」
시나케레바 나라나이 코토오 시타다케데스토 이이나사이
(ルカ17・7-10)
When you have done all you have been commanded, say,
‘We are unprofitable servants;
we have done what we were obliged to do.’
(Lk 17:7-10)
Memorial of Saint Josaphat, Bishop and Martyr
Lk 17:7-10
Jesus said to the Apostles:
“Who among you would say to your servant
who has just come in from plowing or tending sheep in the field,
‘Come here immediately and take your place at table’?
Would he not rather say to him,
‘Prepare something for me to eat.
Put on your apron and wait on me while I eat and drink.
You may eat and drink when I am finished’?
Is he grateful to that servant because he did what was commanded?
So should it be with you.
When you have done all you have been commanded, say,
‘We are unprofitable servants;
we have done what we were obliged to do.’”
2024-11-12「わたしどもは取るに足りない僕です。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ただけです」
+神をたたえよう。神は偉大、すべては神に造られた。
おはようございます。
今日は聖ヨサファト司教殉教者記念日です。
慈しみ深い主・イエス・キリストと奇(くす)しきばらの花聖母マリア、聖母の配偶者聖ヨゼフ、聖ヨサファト、諸聖人の大いなる祝福がありますように!
また、大天使とすべての天使、私たちの守護の天使が今日も皆さまを見守り平和でありますようお祈りします。
**********
ルカによる福音
<わたしどもは取るに足りない僕です。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ただけです>
そのとき、イエスは言われた。17・7「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かに、畑を耕すか羊を飼うかする僕がいる場合、その僕が畑から帰って来たとき、『すぐ来て食事の席に着きなさい』と言う者がいるだろうか。8むしろ、『夕食の用意をしてくれ。腰に帯を締め、わたしが食事を済ますまで給仕してくれ。お前はその後で食事をしなさい』と言うのではなかろうか。9命じられたことを果たしたからといって、主人は僕に感謝するだろうか。10あなたがたも同じことだ。自分に命じられたことをみな果たしたら、『わたしどもは取るに足りない僕です。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ただけです』と言いなさい。」(ルカ17・7-10)
********
田サンヨン神父様の黙想文「信仰があれば赦す必要はない」です。
ある神父さんが、自分の小教区の信者の一人が特別な神の恩恵を受けて、過去、現在、未来をすべて知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知らせを聞きました。そこで、その人が本当にそのような恩恵を受けたのか知りたいと思い、会いに行きました。その神父さんは、過去の神学校時代に犯したある罪について常に悩んでいました。
「神様があなたに本当にそのような恩恵を与えたのですか?」
彼はもちろんだと答えました。
「では、私が若い頃に犯した罪についてずっと心が苦しいのですが、私がどんな罪を犯したのか神様に聞いてもいいですか?」
彼は祈ればわかると答えました。しばらくして、神父さんは再び彼に会いました。
「祈ってみましたか?」
彼はもちろん祈ったと答えます。
「では、神様は私が昔どんな罪を犯したと言っていますか?」
その信者は答えました。「神様はすでに忘れてしまった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神父様。」
罪の意識は他人を裁くようにさせます。アダムとエバが罪を犯した後、その罪の意識を軽減するためにお互いを責め合ったのと同じです。したがって、誰かを赦すためには、まず隣人を判断させる自分の罪の意識から自由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罪の意識から自由になるためには、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すでに私たちの罪が赦されたことを「信じなければ」なりません。自分が罪から解放されたと信じることで、隣人を裁く必要もなくなり、したがって赦す必要もなくなります。しかし、信仰がなければ、どんなに赦そうとしてもできません。仮に赦せたとしても、また別の人を憎む理由を探していることでしょう。
今日の福音は「赦し」というテーマから続いています。一日に七回罪を犯し、七回赦しを求められたら、毎回赦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使徒たちはこの言葉を聞いて、信仰なしでは不可能だと直感し、イエス様に「信仰を増してください」と願います。イエス様はただ信仰だけが赦しの力であることを否定せず、今日のたとえ話を話されます。
畑を耕し、羊を飼った後に帰ってきた僕は、たとえ辛くても、帰ってきて主人の食事の世話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後に食べて飲むことになります。これは僕だからです。僕はすべての命令を遂行した後でこう言います。
「わたしどもは取るに足りない僕です。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しただけです。」
信仰のない僕は、このようなことを言えません。神の僕になるということは、救わ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救いは主人の分であり、僕の分ではありません。僕がうまくやったからではなく、主人によって選ばれたから僕になったのです。したがって、主の僕としてするべきことをすべて終えた後でも、常に感謝せざるを得ません。このように、救いが私の功績ではなく、主の功績であると信じるなら、従いながらも幸せでいられます。
ヘミングウェイの小説の中にこんな話があります。あるスペイン人の父親が、家を出てマドリードに向かった息子と和解することを決心します。父親は遅ればせながら良心の呵責を感じ、「エリベラル」新聞に広告を出します。
「パコ、火曜日の正午にモンタナホテルで会おう。すべてを赦した。お父さんより。」
パコはスペインで非常に一般的な名前です。父親が約束の場所に行くと、パコという名前の若い男性がなんと800人も出てきて、それぞれが父親を待っていました。
私たちは皆、神なる父の赦しが必要な人々です。御父の赦しが必要ない人は一人もいません。ただ御父が赦してくださったと信じる人と、信じない人に分かれるだけです。
人を裁う理由は、信仰によるものではなく、自分の努力によって救いに達するという錯覚によるものです。信仰は、私たちの救いが自分の功績によるのではなく、イエス様の血によるものであることを知ることで、謙遜にさせます。謙遜であれば、自分が恩恵によって罪が赦されたことを知っているため、隣人を裁くことができなくなります。信仰が芽生えると、謙遜になり、謙遜になると、赦すことが容易になります。いや、誰も裁くことができないので、赦す必要もなくなります。
*********
人を裁かず、赦しもできるた
め、わたしたちに信仰を増してくださる聖霊、き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