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2.11]
동학세상
동학농민혁명지 여수역사기행(3)
-여수 동학혁명군의 좌절과 역사적 의미
정암 이무성_광주교구, 소설가
호남지역 동학혁명 유적지를 탐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3가지
첫째는 해당 지역의 동학역사로서 객관적으로 기술,
둘째는 동학혁명의 인물묘사,
셋째는 해당 지역에서 현재 상황과
향후 과제란 형식으로 매듭하였다.
기록 등이 많이 남아 있으면
위 세 가지 얼개로 기술하는 데엔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여수지역처럼 기록이 많지 않고
그 기술마저 한쪽 시각인 관에 의해 서술된 경우엔
구술자료나 전해 내려오는 야사 등을 고증하여
그 내용을 재해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지난 호까지 두 차례 연재는
필자가 일전에 소장으로 봉직한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 자료를 통해
그 내용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기술했다.
이번 호에는 황현의 『오하기문』 기록과
동학정신의 여수에서 향후 구현 등을 중심으로
3회의 연재를 마무리한다.
••
영호도회소 활동으로 여수동학 활발해져
김갑규는 전봉준의 호의로
1892년 6월 순천 부사로 부임하였다.
부임 과정은
동학지도자들에 의해 임지까지
수행 배려를 받는 등의 수혜에도
그는 동학군을 철저히 탄압하는 등
배덕행위를 자행하였다.
그의 가혹한 탐학은
고부봉기 후 여수지역의 항쟁을 촉발했다.
순천에서의 영향은 바로 여수로 이어졌다.
“1894년 2월 25일(음)
순천부의 백성 수천 명이 부 동쪽에 모여서
난이 일어날 듯 하였다.
부사 김갑규가 백성을 향하여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애걸하자
백성들은 곧 흩어졌다.
김갑규는 민영준의 매부로서
관직에 오른 지 2년 정도 되는데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탁하는 것이
도리어 민씨들 보다 심해 1893년 가뭄에
백성들은
겨우 원래의 세금이나 납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봄이 되어
갑규가 백성들에게서 또 세를 징수하였는데
토지 매결마다 쌀 일곱 말씩 거두어들였다.
백성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난이 일어날 뻔하였다.”
『오하기문』에서 황현은 위와 같이 기술하였다.
농민봉기를 난으로 표현하는 등
기록 자체에 한계는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순천은 동학의 확장세가 여수에 비해 강하였다.
여수는 전라좌수영의 존재로
다른 지역에 비해 주변 분위기에 편승하는 등
그 동조가 약한 편이었다.
황현의 이전 기술을 살펴보겠다.
“1893년 동학인들은
서쪽으로 임피, 함열에서
동남쪽으로 광양 순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를 팔고 행장을 꾸려 식량을 준비하고
표주박을 이고 배낭을 짊어지고
기일에 맞추어 도착하느라 도로가 메워졌다.
민간에서는 소동이 일어났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수령들도 두려움에 위축되었고
장수들은 아무 말도 못 하였다.”
1894년 1차 동학혁명이 발발한 이후
고부 백산에 호남창의소가 설치되고
여수 농어민들은
순천 출신 백낙양이 두령으로 있는
백산봉기에 참여하였다.
백산 1만여 명 동학군은 5월에
정읍, 부안, 흥덕, 고창, 무장, 전주성을 점령하고
국내정세를 살피면서 폐정개혁안 제시,
신임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봉준과 각 군마다 집강소 설치를 합의한다.
6월, 김인배의 동학군이 순천성을 점령하고
영호도회소를 설치하면서 김개남의 지도하에
순천, 여수 일부 지역에 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통치도 하게 된다.
영호도회소를 통한
폐정개혁과 포교활동이 행해지면서
여수지역에도 동학교도들이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김갑규 이임 후 부임한 이수홍01)은
‘도인은 있고 관리는 없다’라고 보고할 정도로
순천에 이어 여수도 확고하게 동학의 세가 구축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1) 1894년 음력 6월에 김갑규가 이임한 후
약 2∼3개월간 순천에는
새로운 부사가 부임하지 않았다.
신임부사 이수홍(李秀洪)은 음력 8월에야 부임하였다.
공백기에는
영호도회소가 순천성의 관아를 장악하고서
치안의 임무와 폐정개혁을 수행하였다.
••
왜군 전라도로 향하다
왜군과 관군은 우금티와 청주에서 동학군을 대파하고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향해 남진했다.
왜군은 3개 부대로 나눠 전라도로 향했다.
1개 부대는 충청도 서해안지대를 우회,
전라도 서남해안을 거쳐 여수로 향했다.
다른 1개 부대는 서울에서 충청도 중앙부를 지나
전라도 남단에 이르렀다.
나머지 1개 부대는
서울에서 강원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남하했다.
왜군 3개 부대의 최종 목적지는 모두 전라도였다.
동학군을
전라도의 서남부인 강진, 해남방면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전라도에 출동한 왜군은
각 부대마다 조선의 관군을 앞세웠다.
일본은 동학군 진압을 위해 창설한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를 11월 12일 남하시켰다.
왜군은 현대장비로 무장한 3개 소대 병력과
군수요원 350명으로 부산에 주둔하고
하동·광양을 공격하면서 조선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군 진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형제끼리 싸우지 말고 합심하여 일본 왜군을 막자”는
고시문을 좌수영에 보내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좌수영은 냉담하였다.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는 음력 11월 10일
수만 명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으로 향했다.
동학군은
현재 여수시 소라면에 위치한 덕양역에서
전라좌수영의 정찰병을 물리쳤다.
11월 16일 동학군은 좌수영을 공략하여
24시간이나 전투를 벌였으나,
좌수영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60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덕양역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좌수사 김철규는
이미 왜군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이주회02)을 보내
왜군과 통영·부산 등지의 관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동학군을 공격하기 전에
이미 일본군함 츠쿠바함이 도착하여
육전대를 상륙시켰다.
11월 26일 덕양역에 주둔해 있던 동학군은
좌수영에 도착, 서문밖과 종고산에 진을 쳤다.
이때 이주회는 왜군을 이끌고 동문을 빠져나가
흥국사에 매복해 있다가
종고산 우측을 향해 동학군을 기습하였다.
또한 좌수사 김철규는
병사들 일부에게 왜군처럼 보이는 옷을 입히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학군이 왜군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밤이 되자 왜군 복장을 한 좌수영 병사들이
남문을 통해 몰래 나와 동학군을 향해 달려가자
이에 놀라 흩어졌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2) 이주회(1843-1895).
경기도 광주 산성리 출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 물리친 공로로
대원군의 심복이 됨.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사면 후 귀국. 일본낭인들인 흑룡회 조직과
순천 앞바다 금오도에서 개간사업.
여수 순천지역 동학군 진압 공적으로
박영효 추천으로 차관급인 군부협판이 되고,
군부대신서리도 지냈다.
1895년 10월
일본인들과 민비 살해에 가담하여
을미사변 당일 대원군을 옹위하며 입궐.
민비 시해 직후 김홍집 친일내각은
일본의 개입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이주회를 사건의 책임자로 몰아
윤석우·박선과 함께 처형했고,
일본인 자객 48명은 일본에서 모두 무죄 선고.
이후 민비살해의 주역인 미우라 등 흑룡회는
이주회의 유골을 수습하고 묘를 크게 단장하고
일본 등지에서도
이주회를 ‘의인이자 영웅’으로 추모하였다.
좌수영 공격 과정에서 체포된 동학군 및
여수·순천 일대에서 체포된 동학군은
남문에서 처형되었다.
좌수사 김철규는 좌수영 공방전이 끝난 후
전사한 동학군의 목은 남문에 걸어놓고
그 몸뚱이는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특히 김철규는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동학군 1인당 5냥씩 현상금을 걸어
약 500명을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이때 영호 도집강 이우회, 성찰 권병택 등도
이곳에 끌려와 처형되었는데,
좌수사 김철규는
이들의 목을 베어 좌수영 남문에 걸어두고
시체를 방치하여 그 참상을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여수 동학군의 강력한 지원세력인
순천의 영호도회소는
1894년 12월부터 쇠락단계로 접어든다.
순천으로 물러난 영호도회소는 반동학군,
이른바 수성군에 의해 기습을 당하면서
광양으로 퇴각했으나
여기서도 수성군의 공격을 받아
김인배 이하 약 2백여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영호도회소의 주력 부대는 붕괴되었다.
동학군 패배의 주요 원인의 하나는 무기 열세였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동학군 무기의 열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대개 우리나라 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일본 총의 사정거리는
400내지 500보 더 되었고,
불이 총대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이 없다.
따라서 눈이나 비가 내린다고 하여도 계속 쏠 수 있다.
적과 수백보 떨어진 거리로서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을 뻔히 쳐다보면서
총 한 발도 쏘지 못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대패하였다.”
••
여수지역 동학활동 조사연구, 천도교당의 필요성
여수지역 동학기록들은
관에 의해 왜곡되어 이를 바로 잡고
누락된 동학군의 활동도
세밀한 조사연구를 통해 복원해 나가야 한다.
빈농, 하층민 등
무명인사들, 어민들의 동학 참여에 대한 재조사,
그리고 이봉호3 전라좌수사 등
동학에 우호적인 관군에 대한 재조명 등
연구도 시급하다.
특히 외세배격 동학정신이
현대사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그 인과관계 정립도 필요하다.
현대화된 왜군에 의존한
외세 의존 조선의 친일세력들에 의해
여수에서의 동학혁명군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여수에서의 동학혁명 정신은
그대로 주저앉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항일의병, 3.1운동,
가까이로는 여순민중항쟁04)으로도 이어졌다.
여수는
고흥과는 통혼, 상업활동이 활발한 생활권역으로
여수 주민의 40%가 고흥출신이다.
남해와도 뱃길로 가까워
남해 사람들도 여수에 많이 거주한다.
여수, 순천, 고흥 등 전남 동부권에 천도교당은 없다.
남해는 천도교활동도 활발하고 교당도 유지되고 있다.
가까운 남해엔 뱃길이 없어
순천을 거쳐 차편으로 이동해야 한다.
광주로의 접근이 수월하나,
거리로 인하여 이를 권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수나 순천에
동학 천도교 모임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
여수지역 천도교인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음을 알리며
글을 마감한다. (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3) 전라좌수사 이봉호는 동학교인에 비교적 호의적.
그 부하 중에서도 상당수가 동학에 동조하자,
이봉호는 곧바로 면직되었다.
1894년 7월 3일
그 후임으로 김철규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04) 여순민중항쟁은
여순사건·여순반란사건 등으로 불린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고,
광양·곡성·구례·고흥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했다.
당시 군인들은
‘동족상잔 결사 반대’, ‘미군 즉시 철퇴’ 등을 요구하며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총 권기하였다.”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2천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