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Aiyo0n7Sbeo?si=efVHF9VJouUaz5Om
마태복음 강론 35
마태복음 6:9-15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6)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우리는 네 번째 기원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가 단순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의식주 문제를 매일매일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신 그 양식을 넘겨달라는 기도임을 확인하였다. 사람들의 평생 관심사는 의식주에 대한 문제인데 이방인들이 구하는 이런 것들을 구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5-58).
이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에 이어 다섯 번째 기원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죄”라고 번역된 ‘오페일레마’는 ‘빚, 의무’라는 뜻인데 신약에서 두 번 사용되었다(누가는 11:4에서 ‘하마르티아’로 썼다). “죄 지은 자”의 ‘오페일레테스’로 ‘채무자’라는 뜻이다.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말의 ‘아피에미’는 ‘아포’(~으로부터)와 ‘히에미’(보내다)의 합성어로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쫓아내다, 떠나보내다, 포기하다, 탕감하다, 면제하다, 법적 속박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 4:4 / 개역한글)
개역개정에서는 “보수”로 번역한 단어가 ‘빚’이라는 단어 ‘오페일레마’이고, “삯”의 ‘미스도스’는 ‘품삯, 보상, 보수’라는 뜻이다. 즉 은혜는 어떤 일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이나 삯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은혜와 대비된 개념으로 빚을 사용하였다.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3-27, 32-35)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하여 하나님 왕국 비유임을 말씀하였다. 그런데 만 달란트 빚진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다는 은혜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빚은 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이고 주인에 의해 그 빚을 탕감받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 왕국임을 나타내셨다. 죄 용서함을 도무지 받을 수 없는 자가 은혜로 빚을 탕감받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는 율법을 어긴 것이었다. 그래서 살인이나 간음을 하면 죄고 살인이나 간음을 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보았다(마 5:21, 27). 오늘날 교인들의 생각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교회에서 정해주는 율법과 같은 조항들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으로 죄를 규정한다.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
죄란 우리의 마음에 따른 결과로 말미암은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라 행동이 나오기 전의 우리의 마음 상태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죄의 본성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으로 말씀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원수된 상태이고 그 원수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3-28)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죄에서 놓임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죄에서 놓임을 받는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 말의 어법상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이 앞부분에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뒷말의 전제 조건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성경적 원리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덕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말에서는 조건절이 앞에 나오고 주절이 뒤에 나오기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언어의 문장에서는 주절이 먼저 나오고 뒤에 조건절이 나온다. 그래서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에게 탕감하라, 우리의 그 빚들을, 우리가 우리의 채무자들을 탕감해 준 것과 같은 방식으로’라고 말이다. 이 역시 앞의 표현과 같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언약의 말씀이다.
말의 순서를 이렇게 하고 나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사고의 순서도 이렇게 된다.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중심이 되어 우선적으로 생각되며, 그다음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부차적인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그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주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다는 말씀은 이미 우리가 탕감받은 자임을 알라는 말씀이다. 그 탕감을 아는 자가 탕감을 해 줄 수 있다.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지고 있는 모든 인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그 죄의 빚을 다 탕감받은 자가 성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한 언약대로 이루신 것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죄사함은 새 시대의 특징이다(겔 36:25-36, 사 55:6-7).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고 그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선언하고 있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죄사함, 용서를 절감하는 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를 외면할 수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를 할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죄사함의 참된 가치를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자는 그것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용서의 삶을 사는 자이다(참고 요일 1:8-9). 내가 용서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 살기 때문에 그 용서를 보여 주는 차원에서의 삶이라는 뜻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하였다. 이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4-17)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죄의 은총을 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강하게 선언한다. 따라서 성도의 삶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음에 던져져야 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세우는 동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간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어떤 용서를 이루어 내셨는가를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다섯 번째 기원인 죄 용서에 대한 간구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공로나 행위에 근거하여 조건적으로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가 드리는 기도이다. 이미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참여된 자의 기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간구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며 용서할 수도 없는 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성도들이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항상 상기시켜 주는 간구이다(202502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