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점논쟁
미국 종교학회 (Americo Acodemy of Relgion) 연례 총회
한국불교 분과 모임에 다녀와서
조은수(버클리 대학고, 불교학 박사과정)
한국불교의 중심문제중의 하나인 「돈오점수• 돈오돈수」 논쟁이 한국에 이어 국외로 번졌다.
1991년 미국 종교학회 연례학술회의가 지난 1992년 11월 20일 부터 샌프란시스코 힐튼호텔에서 열려 한국분과에서는
21일 「돈오점수• 돈오돈수」라는 주재로 약 60여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토론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돈오점수• 돈오돈수」라는 주제로 몇 차례 대규모 학술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본지에서는 한 가지 주제로 한국불교언론사상 가장 오랫동안 2년이 넘게 이 문제를 특별기획으로 다루고 있다.- 편집자 주.
(1) 미국 종교학회 연례총회는 매년 가을 추수감사절을 전후하여 각종교 전통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모여 종교의 다양성을 논의하고 그 보편성을 같이 탐구해 보는 종교인들의 가장 큰 잔치 중의 하나입니다. 오. 육천명이 모이는 이 커다란 집회가 올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려 한국불교라는 독립된 분과 속에서 "돈오돈수, 돈오 점수"라는 주제를 놓고 논의의 장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뜻깊었습니다. 약 40명이 비좁게 들어찬 좁 은 방에는 국적의 다양성을 보이는 청중들이, 단지 불교인 뿐 만 아니라 여러 종교전통을 망라하는 학자들과 종교인들로서, 경청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한국불교가 점점 국제적인 학문의 장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가고 또한 돈점론이라는 종교수행의 영원한 문제를 다룬다는 데서 비롯한 보편적 관심이 드러나는 듯하였습니다.
15분씩 이라는 짧은 배당 시간에 맞추어 다섯 분의 논문 발표자들이 열심히 자신의 논지를 전하려고 애쓰셨으며, 전체 회의가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이 모임을 주관하시고 계획하시느라 수고하신 여러 분들께 위로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2)먼저 인하대학교 철학과의 김 영호 교수님께 서는 "깨달음에 대한 논의의 기원과 원형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돈점의 논쟁이 선에서 논의 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후대의 종파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이러한 문제가 '돈’ 이라던가 '점'으로 간단히 나누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다 복잡한 구조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또한 불교 뿐만 아니라 도가나 유가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논의가 알려지고 있음을 보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심재룡교수는 "현대 한국에 있어서 돈점 논쟁의 비판적 평가"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와 지눌의 돈오점수론의 역사적, 철학적, 종교적 차원을 놓고 논의를 전개 했습니다. 우선 역사적 접근을 통하여 성철스님의 입장이 중국 선불교의 정통 가르침을 대표하는 것 임을 보이고, 둘째로 돈오돈수의 철학적 근거를 살피면서 성철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을 무명과 관련하여 고찰했습니다. 또한 종교적 차원으로 불교 수행의 네 가지 측면, 즉 정진, 믿음, 올바른 이해, 그리고 방편에 대해 살펴 본 후 최근 한국에서의 논쟁이 갖는 의미에 대해 잠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 다. 다음으로, U.C.L.A.의 버스웰교수는 "지눌 사상에 있어서 온건한 돈오론과 과격한 돈오론에 대한 논변"이라는 제목으로, 흔히 지눌은 온건한 돈오론을 지지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미 초기 지눌사상 내에 이 두가지 경향이 동시에 자리잡고 긴장관계에 있었으며, 지눌은 후기에 가서는 간화선과 연관하는 한에 있어서 오히려 과격한 돈오론의 입장을 보다 동조하고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었음을 말했습니다.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캠퍼스의 박사과정에 있는 윤 원철씨는 "성철스님의 돈오수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육조 혜능에서 시작하는 돈오의 전통이 후대 신회의 점수론과 마조의 돈오론간으로 갈등하는 것을 살펴본 후 종밀 이후로는 중국에 있어서 돈오설이 지배적으로 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철 스님의 과격한 돈오론의 입장은 이 두가지 경향를 쪼개나눔으로써 순수한 임제선의 기풍을 되살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은 뉴욕 주립대학교의 박성배 교수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성철스님은 임제선의 정신을 추구하여, 지눌이 화엄 사상과 선 수행을 절충하여 화엄선을 주장하는 것을 공격하며 화두선을 따르는 수행자들은 지눌의 지해선에 현혹되지 말고 증오를 추구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라고 요약한 후, 그러나 성철 스님은 이론적으로는 한치의 타협도 없는 돈오돈수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문도들을 제접하는 데에 있어서는 법문, 삼천배, 염불, 간경등의 형태를 통하여, 깨달음으로 이끌어 나가는 점수적 방편을 쓰시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을 제기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지적인 틀로 분석하려 해 본다면, 성철 스님의 선은 이론적인 측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다 이미 완전한 부처이라라는 주장과 일관성을 가지며, 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때로는 일견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각종 근기의 중생들을 접함에 있어서 부처의 지혜와 자비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비일관성 때문에 성철의 체계를 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정말 논리적인 지, 그렇다면 같은 근거에서 이 세계를 던져버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강평은 오강남 교수와 피터 그레고리(Peter Gregory)교수가 맡았습니다. 한 분은 비교종교학적 입장에서, 또 한 분은 선불교를 전공하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핵심을 찌르는 논평을 했습니다.
오 교수는 각 발표자에게 한 가지씩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강평을 했습니다. 먼저 김용호 교수에게는 과연 돈점론에 '원형(archelype)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으며, 심재룡 교수에게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가 돈오점수를 이단이라고 몰아 붙인 것을 수사학적(rhetoric. 말과 글을 통해 타인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기술 )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돈점론 자체가 수사학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제기했으며 이에 대해 발표자는 긍정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다음으로 버스웰 교수에게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방편'을 전략(strategy)이라 고 번역한 것을 들어 돈점의 문제는 전략이라기 보다는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표현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아닌가 하는 제안을 했습니다. 윤원철씨 에게는 마음의 不二論적인 단일성(unity)이 돈오돈수와 직결된다면 그와 같은 존재론적 단일성을 어떻게 인식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돈오돈수를 과연 깨달음의 체험이 자연스럽게 발로하는 것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성배 교수에게는 Underhill이 말 하는 신비체험의 다섯 단계와 비교할 때 선의 깨달음도 종교체험인 이상 비교종교학적 입장에서 선의 깨달음과 수행은 그 어느 단계에 배당될 수 있겠는가를 물었습니다.
피터 그레고리 교수는 강평에서 심재룡교수 논문은 돈점이라는 보편적 주제가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법맥의 전개와 더불어 생기있게 논의되고 있는 점을 밝혀주고 있으며,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요소 외에 다른 요소를 논의의 대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평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돈점론을 다룰 때에 는 우리 모두가 깨침을 실체화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돈점은 모두 지눌이 지적한대로 모두 수사적 용어들이며,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 '돈'이나 '점'이라는 수사적 언표를 실체화하는 오류에 빠진다면 독단론이 된다는, 한국의 돈점논쟁을 바라보는 자신의 견해를 덧비였습니다. 또한 버스웰 교수의 논문에 대하여, 자신은 지눌이 종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한다며, 마찬가지로 성철 스님이 지눌의 맥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곧 버스웰 교수는 지눌의 입장을 옹호하여, 지눌과 종밀은 역사적으로 다른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지눌은 종밀 이후 홍주종의 득세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만년에는 대혜의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답하고, 그 때문에 같은 돈오의 전통에 있으면서도, 종밀식의 온건한 돈오점수론과 대혜의 과격한 돈오점수를 절충하고 있는데서 지눌의 선불교의 긴장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이상의 열띤 논의가 끝난 후 이러한 논의는 이 한자리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지적하며 청중에게 토론의 문을 열어 몇 가지 진지한 질문들이 오간 후 아쉬운 자리를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긴 논의를 한 두장의 글로 요약하여 전하기는 발표자에게건 청중에게건 지나친 요구입니다. 바로 깨쳐서 바로 닦는, 또는 차츰 닦아간다는 불교 체험의 긍국은 바로 말이나 논의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993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