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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무기와 인간(Arms and the Man)
“어떤 도덕적 문제가 관련되어 있든, 도덕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권력의 문제가 존재한다.”
- E.H. 카. <20년의 위기> 중.
알베르트 푀글러는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 그다지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괴링, 힘러, 슈페어 모두와 가까웠고, 루르 공업지대에서 강제노역이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그 효율이라는 단어에는 대개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숫자와 생산량과 배정표와 운송계획의 언어였습니다.
다만 그와 가까웠던 이들은 푀글러가 정치에는 놀라울 만큼 관심이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이념가도 아니었고, 군중 앞에서 독일민족의 운명을 외치는 종류의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세계는 우선 환경이었고, 문제였고, 제약조건이었습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전문성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합리성이 무엇을 위해 쓰이는지는, 불행히도 그에게 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총리가 된 푀글러에게 재무장은 상처 입은 독일민족의 중흥이나 베르사유의 치욕을 씻어내는 성스러운 복수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말은 DNEP의 전당대회장이나 왕당파 귀족들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더 잘 어울렸습니다. 푀글러가 본 것은 조금 달랐습니다.
서쪽에는 프랑스가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소련과 폴란드가 있었습니다. 남쪽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자기 앞마당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다에는 영국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다시 강대국이 되려 하고 있었지만, 사방의 외부변수에 유달리 취약한 경제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푀글러에게 재무장이란 이 취약성을 줄이는 일이었습니다.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문제였고,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제의 문제였습니다.
산업합리화, 직업훈련 강화, 공공근로 확충, 운송산업 진흥, 국가기반시설 현대화. 말로만 들으면 평범한 경제개발 목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에서 그런 말들은 늘 다른 의미를 품고 있었습니다. 산업합리화는 군수공업의 준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직업훈련은 예비병력의 기술교육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공공근로는 군용도로와 병참망의 이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운송산업 진흥은 트럭과 엔진과 철도수송의 확장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한 대부분의 것들을 재고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칼을 빼 들고 외치는 대신, 장부를 펴고 적어 내려갔을 뿐입니다. 독일은 다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군가가 아니라 회계표의 형태로였습니다.
그러나 독일 혼자 장부를 정리한다고 유럽이 조용히 넘어가줄 리는 없었습니다. 푀글러 내각은 영국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독일 입장에서 영국은 유일하게 “문명적으로 대화 가능한 강대국”이었습니다.
영국은 독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매우 미심쩍은 방법으로 오스트리아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기 앞마당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독일만 유독 문제 삼는 것도 비합리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독일의 재무장은 이미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제한하고 통보받으며 비율을 정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 역시 이런 분위기에 일정한 언어를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베르사유 체제를 더 이상 신성한 경전처럼 읽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계약서처럼 읽었습니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같은 사람들에게 국제정치는 도덕극이 아니라 힘의 배열이었습니다. 그들은 독일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독일의 불만을 영원히 금고에 넣어둘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반독 일변도의 대유럽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독일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유럽의 중재자 행세를 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영국은 독일을 용서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영국 외교관들에게 그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고, 프랑스인들에게는 거의 같은 말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런 말을 싫어했습니다. 영국의 지식인들이 독일을 이해하려 하면,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배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약의 언어는 생각보다 빠르게 완성되었습니다. 1935년 3월 16일, 독일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Konstantin von Neurath) 남작과 영국 외무상 존 사이먼(John Simon) 자작 사이에 영독 군비조정협정(Anglo-German Armaments Control Agreement)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름은 건조했습니다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협정은 독일 육군의 단계적 증강을 인정했습니다. 공군의 제한적 보유를 묵인했습니다. 해군에 대해서는 영국 해군의 3할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해군만 놓고 보면 독일은 실제 역사의 영독해군협정보다 더 엄격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나머지 모든 것을 받아냈습니다.
더 민감한 조항도 있었습니다. 독일은 “서부 국경에서 즉각적 공세배치를 자제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언뜻 보면 프랑스를 안심시키기 위한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외교문서의 세계에서 형용사는 대개 문 뒤에 숨겨둔 손잡이였습니다. “즉각적”이고 “공세적”인 것만 아니라면, 라인란트에 다시 군을 배치해도 된다는 암시나 다름없었습니다.
런던은 독일을 제한했다고 믿었습니다. 베를린은 독일을 풀어냈다고 믿었습니다. 파리는 둘 다 맞는 말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영독협정은 독일 외교의 대승리였습니다. 베를린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신문은 주권회복의 새 장을 말했고, 우익은 더 큰 요구를 준비했으며, 중도파는 독일이 드디어 정상국가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푀글러는 환호를 싫어했습니다. 환호는 예산항목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협정은 감동적인 승리가 아니라, 훨씬 큰 장부를 펼쳐도 된다는 허가서였습니다.
프랑스에게는 달랐습니다. 영독협정은 단순한 외교적 불쾌감이 아니었습니다. 1919년 이후 프랑스가 의지해온 대외 안보체제가 흔들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국내적으로도 치명타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오래전에 던져진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6편에서 프랑스 공산당(PCF)이 1930년 코민테른의 “생활노동전선 장악을 위한 행동계획” 이후, 행동에 중점을 두는 청년간부 셋에게 중책을 맡겼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크 도리오, 앙리 바르베, 피에르 셀로르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 도리오는 1930년대 초 온건 사회주의 정당들과의 통일전선을 주장하다가, 제3기 이론을 추종하던 PCF에서 출당되었습니다. 그리고 당 지도부에 대한 복수심과 정치적 야심 속에서 아예 파시스트로 전향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제3기 이론과 사회파시즘론은 더 강고하게 자리잡았습니다. 도리오는 30대 초반에 생드니(Saint-Denis) 시장이자 PCF의 핵심 이데올로그가 되었고, 그의 전투적인 성향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현되었습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PCF 안에서는 계급투쟁의 언어와 프랑스적 국민동원의 언어가 점점 결합되었습니다. SFIO와의 연대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 민중 자체를 혁명주체로 호명하자는 전략이 힘을 얻었습니다. 평화주의가 아니라 반독 애국주의였습니다. 국제주의가 아니라 국민적 혁명전쟁론이었습니다.
의회공화국은 부르주아적 무능과 기만의 상징이었습니다. PCF는 공화국을 공격하는 우익과 적대했지만, 반독과 반의회라는 두 전선에서는 기묘하게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서로를 증오하는 두 세력이 같은 건물을 가리키는 일은 프랑스 정치에서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건물이 대개 의회였다는 점입니다.
이 국민공산주의자(National-communiste)들이 찾은 혁명 전통은 좌익 자코뱅주의, 그리고 좌익 보나파르티즘이었습니다. 붉은 깃발로 삼색기를 감싼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정치에서 그런 물건은 언제나 위험물질이었습니다.
이 급격한 기류 변화를 견디지 못한 정통 국제공산주의자들은 결국 국제주의공산당(PCFI)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분당은 PCF를 약화시키기보다 더 단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해진 정당은 대개 더 크게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1934년 2월 6일, 파리에서는 극우와 극좌가 거의 동시에 봉기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봉기의 수혜는 우익의 프랑수아 드 라로크(François de La Rocque)의 불의 십자가단(Croix-de-Feu)이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에두아르 달라디에(Edouard Daladier) 총리와 급진사회당(PRRRS) 내각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달라디에는 프랑스를 장악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가 자기 손에서 미끄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비상사태란 때로 국가가 강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국가가 자기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팔걸이를 붙잡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여러 집단으로 흩어져 있던 우익은 이 조치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반면 하나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공산당은 오히려 자신들이 진정한 애국자임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선보였습니다. 그들은 부르주아 의회도, 독일 반동도, 영국 제국주의도 모두 비난할 수 있었습니다. 비난할 대상이 많다는 것은 언제나 선전가에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좌우 양쪽에서 핀치에 몰린 급진사회당 내각은 더 흔들렸습니다. 이 중도정부의 대내외노선은 점점 더 반응적이고, 신경질적이고, 비일관적으로 변해갔습니다. 독일 문제에서는 더 그랬습니다.
만약 독일의 재무장이 히틀러식이었다면, 프랑스 정부의 정책이 그렇게까지 비이성적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함치는 독일은 다루기 쉬웠습니다. 야만이라고 부르면 되었습니다. 조약을 찢는 독일은 고립시키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푀글러의 외교적 재무장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영국에게는 안도의 한숨을 주었지만, 프랑스에게는 최악의 악몽을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육로 국경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교정책에 아주 나쁜 영향을 주는 지리적 사실이었습니다.
영독협정 이후 프랑스 내각은 독일정책을 세운 것이 아니라, 독일정책에 떠밀렸습니다. 우익은 독일을 막지 못한 내각을 무능하다고 공격했습니다. 도리오파 PCF는 부르주아 내각이 독일 반동과 영국 제국주의 앞에서 굴복했다고 공격했습니다. 군부는 라인강을 보았습니다. 외교부는 런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 급진사회당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기대지 못한 채, 매번 한 박자 늦게 반응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자연스러운 선택은 이탈리아와의 밀착이었습니다. 독일이 제1의 위협이라는 것 자체에 이제 별로 동감하지 않는 영국과의 공조는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소련은 여전히 독일의 사회주의화가 가능하다는 희망 아래 프랑스와의 상호원조조약 체결 논의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을 막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쉬운 대로 이탈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라도 확실히 붙여두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 입장에서 오스트리아에서의 승리는 영광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과팽창이기도 했습니다. 알프스에는 병력이 필요했고, 독일은 분노했으며, 프랑스와의 협력은 필수가 되었습니다.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를 원했지만, 오스트리아도 붙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두 손으로 두 개의 제국적 장난감을 들고 있으면 세 번째 손이 필요했습니다. 파시스트 선전은 세 번째 손을 그릴 수 있었지만, 이탈리아 총참모부는 그 손을 실제로 지급하지 못했습니다.
1934년 말, 에티오피아의 왈왈(Walwal) 오아시스에서 우발적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왈왈은 지도 위에서 큰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작은 지명을 좋아했습니다. 작은 지명은 큰 전쟁의 문손잡이로 쓰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 왈왈 사건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전면침공 명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조금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라는 부담을 떠안은 이탈리아는 처음부터 크게 베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겠다고 바로 나서기보다, 가장 싼 비용으로 큰 이득을 얻을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오가덴(Ogaden)과 티그라이(Tigray)를 뜯어내고, 나머지 아비시니아에는 친이탈리아 정부를 세우는 방식이면 충분할지도 몰랐습니다. 한마디로, ‘조심스러운 제국주의’를 하려 했습니다.
물론 조심스러운 제국주의라는 말 자체가 이미 농담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참모들은 적어도 그 농담을 진지한 정책문서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아비시니아 위기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합이 계속 어긋났다는 점입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가 필요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붙잡고 있어야 독일의 남쪽 문이 닫혔습니다. 반면 영국은 중부유럽의 균형을 깨뜨려 놓고 이제는 동아프리카에서까지 난리를 피우는 파시스트들에게 호의를 베풀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비일관적이고 신경질적인 프랑스 정부는 사고를 쳤습니다. 1935년 7월, 한 장의 짧은 전문이 로마 주재 프랑스대사관을 통해 무솔리니에게 전해졌습니다. 프랑스 총리 겸 외무장관 피에르 라발(Pierre Laval)의 이름을 따 라발 노트라고 불린 이 문서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동부 오가덴 및 북부 티그라이를 점유하고, 나머지 아비시니아 지역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외교문서의 언어는 늘 예의 바릅니다. 그러나 예의 바른 문장이 언제나 얌전한 뜻을 담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서는 사실상 백지수표였습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든, 식민지화하든, 프랑스는 전부 동의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알프스에서 독일을 견제해야 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처음에는 이것이 함정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프랑스가 정말 이만큼 주겠다는 것인가. 혹시 영국과 짜고 이탈리아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그러나 지도 위의 빈 공간은 독재자의 의심을 빠르게 말려 죽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 깨달았습니다. 프랑스어는 아름다운 언어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군은 오가덴과 티그라이로 진군했습니다. 명분은 질서회복이었고, 설명은 안전보장이었고, 실제 목적은 더 오래된 단어였습니다. 제국이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인들의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이탈리아의 침략도 싫었지만, 프랑스가 독일을 막겠다며 이탈리아에게 아프리카를 내미는 방식도 싫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에티오피아 제국이 위치한 아비시니아 고원 주변에는 소말릴란드, 수단, 케냐, 우간다 등 영국령 영토들이 즐비했습니다. 런던은 점점 프랑스-이탈리아 블록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편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편에 자동으로 서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 봅시다.
1935년 가을이 되면 베를린에서 본 유럽은 이렇게 보였습니다. 영국은 독일 재무장을 적어도 일부 인정했습니다. 프랑스의 반독노선은 발작적으로 보일 만큼 심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을 사실상 일방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붙잡은 채 동아프리카로 손을 뻗었습니다. 동쪽의 소련은 언제나 그랬듯 독일을 적화시킬 생각만 한가득이었습니다.
DNEP는 이 모든 것을 선전물처럼 읽었습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게 아프리카를 주고, 독일에게는 족쇄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독일은 포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빨리 무장해야 했습니다. 더 많이 생산해야 했습니다. 노동과 산업을 국가방위에 묶어야 했습니다.
SPD는 정반대로 보았습니다. 재무장은 이제 외교문서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체제의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DNEP는 포위론을 이용해 권력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노동권과 시민적 자유는 “주권회복”이라는 말 아래 점점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푀글러는 다시 장부를 보았습니다. 철강, 석탄, 항공기, 철도, 예산, 노동시간, 외환, 병력. 숫자는 점점 한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더 많은 생산. 더 빠른 재무장. 더 강한 질서.
1935년이 끝나갈 무렵, 푀글러 내각은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영국과의 협정은 독일의 손을 풀어주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접근은 독일의 목을 조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실은 같은 결론을 가리켰습니다.
독일은 더 빨리 무장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더 빨리 무장하려면 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14. 전독일의 생산자들이여, 복무하라!
“사회화란 노동자를 경제적 기능자로, 고용주를 책임 있는 감독관료로 서서히 전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 오스발트 슈펭글러,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 중.
“더 오른쪽으로 간다”는 것은 단순히 내각 안에서 우파 각료의 비중을 늘린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BVP나 KVP에 더 많은 발언권을 주거나, DNEP 소속 장관 몇 명을 새로 입각시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푀글러 내각이 지난 몇 년 동안 의지해온 통치 방식 자체를 바꾼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동안 푀글러 내각은 SPD와 DNEP를 번갈아 달래며 버텼습니다. 왼쪽 야당에게는 노동권 보장, 합법노조의 잔존공간, 공공근로와 사회정책 일부를 내주었습니다. 오른쪽 야당에게는 재무장, 주권회복, 군의 명예, 오스트리아와 독일민족 문제의 언어를 던져주었습니다. 양쪽 모두 만족하지 않았지만, 양쪽 모두 당장 내각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독일은 더 빨리 무장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빠른 재무장은 더 많은 철강과 석탄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예측 가능한 노동시장, 더 순종적인 공장, 더 훈련된 기술자, 더 빠른 행정, 더 안정적인 치안체계를 요구했습니다.
푀글러는 이념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숫자는 볼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들은 모두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비상대권과 임시 용인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합법적 기반, 다시 말해 과반내각이었습니다.
이 대체역사의 독일에서 마지막 과반내각은 1930년 실업보험 위기와 SPD의 불신임 선언으로 무너진 비르트 내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5년 넘게 독일의 통치는 사실상 헌법 제48조상 비상대권에 의존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공화국 헌법은 그렇게 운영하라고 만들어진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비정상이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버렸습니다.
의회가 정상적으로 정부를 떠받치는 일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낡은 풍습처럼 보였습니다. 푀글러 내각이 과반을 구하려 한 것은 자유주의적 정상성으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비정상을 더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DNEP가 필요해졌습니다.
다행히도, 또는 불행히도, DNEP는 단순히 제국 시절을 추억하는 늙은이들의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권을 계속 움켜쥐기에는, 네덜란드 시골에서 매일 나무를 베는 노인이 국가지도자였던 시절의 기억이 너무 암담했습니다. 제국의 낡은 초상화만으로는 공산당을 막을 수 없었고, 노동자를 설득할 수도 없었으며, 독일의 새로운 산업국가를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DNEP는 거대한 혼합물이었습니다. 왕당파, 보수 귀족, 탈나치 우익, 반공 청년, 군부 주변 인사, 산업계 후원자, 보수혁명주의자, 기독교적 사회국가론자, 민족주의적 노동정책가들이 그 안에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단순한 군주제 복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푈키셔 민족주의(Völkischer-nationalismus)였습니다.
Volk란 무엇인가.
그들에게 Volk는 헌법 조항이나 국경선 속에 갇힌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혈통(Blut)에 의해 전승되고, 토양(Boden)에 각인된 유기체적 공동체였습니다. 독일민족은 단순한 시민의 합이 아니라, 역사와 피와 땅과 기억과 신화와 노동과 죽은 자들의 무덤이 뒤엉킨 살아 있는 신체였습니다. 게르만 신화, 숲, 기사도, 민속, 신이교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기독교 신앙은 그 신체를 구성하는 언어였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좌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계급투쟁론은 독일이라는 하나의 신체를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영구히 절단하려는 술책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화된 서유럽발 자유주의는 민족공동체의 뿌리를 뽑아, 인간을 계약과 권리와 개인적 욕망의 부유물로 만드는 영적 질병이었습니다.
의회주의, 자본주의, 국제금융, 계급투쟁, 국제주의. 푈키셔 민족주의자들이 혐오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말로 묶일 수 있었습니다. “뿌리뽑힘(Entwurzelung)”. 그들이 유독 유대인들을 배척했던 이유 역시 여기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을 각각의 개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독일이라는 단일한 신체 속에 침입한, 뿌리 없는 낯선 물질로 인식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적대 이전에 세계를 보는 방식이었습니다. 국제금융, 자유주의 언론, 도시적 지식인 문화, 마르크스주의, 보편주의적 인권 담론 같은 것들을 한데 묶어 상상할 때, 그 상징적 중심에 유대인을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DNEP가 입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시 약탈경제를 채택하거나, 군수공업에 돈을 더 쏟아붓는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프레임의 전환이었습니다. 부르주아 정부가 프롤레타리아에게 권리를 양보한다는 방식 자체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는 더 이상 양보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자본가도 더 이상 자유로운 사적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둘 다 Volk의 생산질서 안에서 자기 자리에 서야 하는 직능이었습니다.
이때 DNEP의 경제정책을 가장 선명하게 입안한 두 인물이 카를 폰 뢰벤슈테른(Karl von Löwenstern)과 막스 하버만(Max Habermann)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1920년대 기독교 노동조합과 그 주변 조직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출발점에서 전혀 같은 곳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뢰벤슈테른은 이론가이자 설교자에 가까웠고, 하버만은 조직가이자 사회구조의 관찰자에 가까웠습니다. 한 사람은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되찾으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마르크스주의가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들을 조직하려 했습니다.
발트 독일인 태생인 뢰벤슈테른은 공공연하게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지칭하는 몇 안 되는 우익 인사였습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KPD나 SPD의 사회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계급독재라는 개념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영향을 받은 그에게 사회주의란 평등한 인간들의 낙원이 아니라, 사적 이익이 공동체의 명령 아래 복무하는 질서였습니다.
소유권은 절대권이 아니었습니다. 소유권은 공동체가 부여한 위임이었습니다. 기업가는 자기 공장의 군주가 아니라 생산의 책임자였습니다. 노동자는 임금표 위의 숫자도, 혁명당의 병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국민생산전선 안에서 명예롭게 복무해야 하는 생산자였습니다. 국가는 시장과 계급 사이의 중립 심판자가 아니라, 생산질서의 지휘관이어야 했습니다.
뢰벤슈테른에게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넘겨준 것은 독일 우익의 가장 큰 죄였습니다. 사회문제를 방치한 우익은 공산주의를 키웠고,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한 자본가는 독일민족의 신체에 스스로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계급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더 큰 죄였습니다. 그는 자본가의 탐욕과 공산주의자의 혁명을 같은 문장 안에서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버만은 뢰벤슈테른보다 열 살 아래였습니다. 북독일 출신인 그는 철도기사, 설계사, 하급관리자, 숙련공, 사무직, 기술직 같은 계층에 주목했습니다. 그에게 현대 산업국가를 실제로 움직이는 주체는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순수한 노동계급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장의 설비를 알고, 도면을 읽고, 운송표를 짜고, 재고를 계산하고, 엔진을 수리하고, 하급 행정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공장점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와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계급혁명에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부르주아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버만은 이들을 ‘생산자(Produzenten)’라고 불렀습니다. 산업국가의 실제 신경망은 바로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을 잡는 자가 독일의 생산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KPD와 SPD의 언어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DNEP의 사회정책적 과제였습니다.
따라서 뢰벤슈테른과 하버만이 제시한 경제질서는 자본, 노동, 기술이 국가의 지휘 아래 충분한 보상과 철저한 감독을 받으며 복무하는 체제였습니다. 이들은 노동자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또한 자본가의 소유가 공공의 이익, 다시 말해 독일민족의 필요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는 논리에도 적극 찬성했습니다.
이것은 우익의 경제정책이었지만, 단순한 자본가의 경제정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반평생을 기독교 노동조합의 활동가이자 지도자로 살아온 아담 슈테거발트 대통령에게, 이 구상은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뢰벤슈테른의 개신교적 프로이센 사회주의는 과격했고, 하버만의 생산층 조직론은 정치적 냄새가 짙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손보고 타협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공동체정신에 입각한 노사협조 직능질서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지긋지긋하게 대립하던 노동과 자본을 화해시키는 길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너그럽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점점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 식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 색깔로 물들어가던 FStP에게 이 괴상한 사회국가론은 불쾌했습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한다고는 하지만, 국가가 원자재 배분과 투자 우선순위와 생산목표에 개입한다는 발상은 결코 자유주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FStP는 더 불쾌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였습니다.
뢰벤슈테른-하버만 안은 적어도 시장경제의 요소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자본가와 경영자의 전문가적 특질도 인정했습니다. 국가가 너무 많이 간섭한다는 점은 싫었지만, 공장마다 붉은 깃발이 걸리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코를 막으면 그럭저럭 먹을 수는 있는 고약한 한 끼 식사였습니다.
가장 놀라운 전환은 구스타프 뵐러의 SPO에게서 나왔습니다.
SPO는 더 이상 자신들이 사회민주주의(Sozialdemokratie)를 추구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DNEP와 함께 과반내각을 구성하고, 국가방위산업의 파업권 제한을 받아들이며, 노동자를 계급이 아니라 생산자로 부르는 순간, 그들은 이미 SPD의 우파 반대파 이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주의(Sozialismus)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사회’ 그 자체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당명도 사회인민당(Soziale Volkspartei, SVP)으로 바뀌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위로부터의 사회혁명과 계급통합을 주장하던 마르셀 데아(Marcel Déat)의 신사회주의(neosocialism)와도 일정 부분 닮은 변화였습니다.
SVP는 더 이상 노동자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당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독일이라는 사회 전체에 헌신하는 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노동자는 여전히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제 독립된 계급이 아니라, 독일 사회 전체의 생산질서 안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구성원이었습니다.
SPD는 이를 배신이라고 불렀습니다. KPD는 사회파시즘의 완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뵐러는 둘 다 낡은 언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SPD를 유기해버리고 오랜만에 갖추어진 의회 과반내각이 채택한 경제노선은 “국민공동생산전선(Nationale Gemeinschaftsproduktionsfront)”이었습니다.
이 정책은 독일 경제를 전면 국유화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시장 자본주의도 아니었습니다. 철강, 석탄, 화학, 기계, 항공, 기반시설 분야가 국민공동생산 핵심시설로 지정되었습니다. 국가는 ‘전문가 계층’인 경영자들과 협의해 생산목표, 원자재 배분, 투자 우선순위, 운송 우선권을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콘체른이 유리했습니다. 수많은 작은 기업과 끝없이 교섭하는 것보다, 이미 거대하게 통합된 기업집단과 협의하는 편이 훨씬 빨랐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생산을 지휘하려 할수록, 소통 비용을 줄여주는 거대 조직은 더욱 편리한 상대가 되었습니다. 국민공동생산전선은 반자본주의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역설적으로 대형 콘체른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완전히 자유로운 사적 권력은 아니었지만, 국가생산질서의 필수적인 행정단위가 되었습니다.
국민공동생산 핵심시설에서의 파업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설은 사실상 독일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대형 사업장이었습니다. 철강, 석탄, 화학, 기계, 항공, 철도, 항만, 전력 없이 현대 독일경제를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파업권 제한은 특정 부문에 대한 예외조항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독일 노동정치 전체의 중심을 건드리는 조치였습니다.
대신 노동자들의 임금 보장, 가족수당, 산업재해 보상, 주거복지 역시 법적으로 보장되었습니다. 국가는 노동자에게 침묵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봉투와 집과 치료와 아이들의 식사를 약속했습니다. 바로 그 약속 때문에 이 정책은 더 위험했습니다. 단순한 탄압은 증오를 낳았습니다. 보상이 붙은 규율은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주요 사업장에는 생산평의회(Produktionsrat)가 설치되었습니다. 노동자, 기술자, 사무직, 경영진, 국가중재관이 함께 참여하는 기구였습니다. 일견 이는 슈티네스-레기엔 협정(Stinnes-Legien-Abkommen)으로 대표되는 1920년대 초의 노사공동결정 타협과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의 역할이 훨씬 컸습니다.
1920년대의 타협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협정이었다면, 국민공동생산전선은 자본과 노동과 기술을 국가가 한 테이블에 앉히는 질서였습니다. 생산평의회는 노동자의 권리기관인 동시에 감시기관이었고, 협의기구인 동시에 동원기구였습니다. 그 안에서 노동자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방식과 말할 수 있는 범위는 국가가 정했습니다.
구호는 단순했습니다.
빵, 명예, 질서(Brot, Ehre, Ordnung).
사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대부분의 독일인들에게 푈키셔 민족주의니, 생산전선이니, 기독교적 공동체의식이니 하는 개념어들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었습니다. 다음 달 월세를 제때 낼 수 있는가.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지 않아도 되는가. 내일 아내와 아이들이 점심을 굶지 않아도 되는가.
그 질문들의 답이 “Nein”이라면, 그들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무장질서단의 곤봉과 총구 앞에 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 질문들의 답이 “Ja”라면, 그들은 포스터 문구의 철학적 의미를 따지지 않고 일터로 향했습니다.
국민공동생산전선 정책은 곧바로 지상낙원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임금은 여전히 빠듯했고, 주거는 여전히 좁았으며, 노동시간은 짧지 않았습니다. 공장 안의 국가중재관은 친절한 목사가 아니었고, 생산평의회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토론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공공근로 확대와 배상금 탕감, 국제경제의 완만한 회복이라는 대외변수가 맞물리자, 정책은 실제 효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들에 “Ja”라고 답할 수 있는 가장들의 수가 빠르게 늘었습니다.
푀글러 내각은 천국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다시 출근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업자 명단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직업훈련소에 등록자가 늘고, 군수공장과 철도공사와 항만시설에서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가족수당 신청서가 접수되었고, 산재보상 절차가 정비되었으며, 기술자와 사무직은 하버만 계열 조직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독일 노동자는 해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편입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KPD에게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15. 공장은 멈추지 않는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하는 정당은 아니다.”
- 카를 카우츠키, <권력으로의 길> 중.
KPD에게 가장 나쁜 소식은 무장질서단과 경찰의 기습 수색이 아니었습니다. 우익 신문들의 반공 선전도 아니었습니다. SPD의 배신도, 심지어 국군의 비상출동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나쁜 소식은 사람들이 다시 출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붉은 깃발 대신 작업도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그 작업도구들이 누군가를 때리는 무기가 아니라 원래 사용 목적에 맞게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망치는 못을 박았고, 렌치는 볼트를 조였고, 삽은 흙을 팠습니다. 공장 문으로 들어가는 노동자들의 발걸음은 혁명의 패배를 선언하는 군악대처럼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그것은 조용했고, 반복적이었고, 매일 아침 조금씩 더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국민공동생산전선의 대대적인 선전과 달리, 임금은 여전히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주거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노동시간은 오히려 길어졌습니다. 공장 안의 국가중재관과 생산평의회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로운 발언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목소리가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를 재는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습니다.
급격히 늘어나는 군수공장과 사회간접자본 공사장은 실업자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습니다. 얼마 전까지 거리와 구호소와 당 회합장 사이를 떠돌던 사람들은 다시 작업복을 입었습니다. 노동자들의 걱정은 이제 KPD의 선동가들이 손으로 주무르기 좋은 무형의 관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족수당 신청서와 산재보험 가입서류 안의 잉크로 존재했습니다. 배고픔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 배고픔은 이제 혁명적 구호만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서류번호와 지급일과 담당 창구의 언어로도 설명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굳이 나라를 뒤집어엎는 위험한 도박을 하지 않아도 근근이 먹고살 수는 있었습니다.
헤르만 레멜레와 KPD 중앙위원회는 국민공동생산전선을 반동적이고 파시즘적이며 노동계급을 기만하는 저급한 술수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는 편입되고 있었고, 노동자의 조직은 감시되고 있었으며, 국가는 빵을 주는 손과 명부를 쥔 손을 같은 팔에 붙여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장 보고는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여전히 가득했습니다. 파업권 제한에 대한 분노도 컸고, 공장 안의 국가중재관을 불신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장 임금보장과 가족수당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RGO 계열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기독교 노조나 SVP와 연대한 우익 ADGB, 또는 하버만의 전독일자유생산자연맹(ADFPB)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보고도 이어졌습니다. 실업자위원회의 영향력은 날로 줄어들었고, 당의 세포조직은 더 이상 예전처럼 공장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노동계급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쪼개지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는 독일 상황을 심각하게 보았습니다. 독일 혁명이 물건너간다면, 소련이 직면해야 할 것은 단순한 사상적 패배가 아니라 심각한 안보 위기였습니다. NEP를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대대적 집산화를 유예한 소련은 우크라이나 대기근(Голодомор)과 같은 식량정책 실패를 겪지 않았습니다. 소비재 부족 현상 역시 실제 역사보다 훨씬 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급부는 분명했습니다. 산업역량의 성장은 더뎠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더 넓게 남아 있었던 만큼, 대공황의 영향도 더 많이 받았습니다. 독일과의 산업력 격차는 냉정하게 아직 컸습니다. 소련은 독일 혁명을 기다릴 수는 있었지만, 독일의 재무장과 생산동원이 안정적으로 결합하는 장면을 오래 지켜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치국과 코민테른 집행위원부는 KPD에게 ‘행동’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압박뿐이었습니다. 모스크바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역사를 밀어붙이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경까지 충분한 전차를 밀어붙일 수는 없었습니다.
KPD 내부의 논쟁은 급격히 가열되었습니다. 당 원내지도부의 의장이던 에른스트 토르글러(Ernst Torgler)는 현 상황을 기존 지도부의 무제한 투쟁노선이 실패한 결과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오히려 합법주의 노선을 강화해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우리가 거리에서만 싸우던 입장이라면 공장점거가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독일의 제1당이다. 제1당이 스스로 불법정당이 될 이유가 있는가?
토르글러의 말은 당황스러울 만큼 상식적이었습니다. KPD는 더 이상 술집 뒷방과 공장 지하실과 거리 바리케이드만의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의석이 있었습니다. 신문이 있었습니다. 지방조직이 있었습니다. 수백만 표가 있었습니다.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합법적 지위가 있었습니다. 굳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부가 기다리는 함정으로 뛰어들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은 쉽게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KPD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습니다. 이제 와서 브란들러-탈하이머의 우파 노선으로 회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공허한 약속들이 뿌려져 있었습니다. 당은 공장과 거리와 회합장에서 노동자들에게 곧 결정적 순간이 온다고 말해왔습니다. 국가공동생산전선은 파시즘의 새 형태이며, 그것을 부수지 않으면 노동계급은 영원히 국가와 자본의 쇠사슬에 묶일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 당이 갑자기 기다리자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전술수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목소리의 절반을 스스로 삼키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당은 더 이상 독일 노동자들만의 당도 아니었습니다. KPD는 국제공산주의의 전위였고, 코민테른 안에서 사실상 2인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PCF가 국민주의적 이단으로 자리매김한 이래, KPD가 코민테른 노선을 버린다는 것은 독일 국내정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국제공산주의의 중심축이 흔들리는 문제였습니다.
레멜레는 결국 토르글러와 브란들러, 탈하이머 등을 제명하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그것은 논쟁의 종결이라기보다 조급증의 제도화였습니다. 당 간부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혹은 그렇게 믿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설령 당에 대한 사형집행 명령서일지라도,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37년 봄, KPD와 RGO는 루르와 작센, 튀링겐, 브레멘의 핵심 국가방위 산업지대를 중심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준비했습니다. 파업 일자를 노동절이 아니라 그보다 이른 4월 초로 설정하는 나름의 치밀함도 보였습니다. 정부와 경찰과 무장질서단이 5월 1일만 바라보게 만든 뒤, 그보다 먼저 국가의 생산동맥을 끊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국민공동생산전선을 분쇄하는 것. 국가방위산업을 마비시켜 재무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국가의 생산을 인질로 잡아 푀글러 내각을 붕괴시키는 것. 그리고 나라를 다시 혁명 전야로 되돌리는 것.
이것은 단순 노동쟁의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총공세였습니다.
4월 7일, 총파업 1일차. 루르 철강공장지역, 석탄과 철광석 광산, 철도의 주요 분기점, 라인-루르 운송망, 주요 항만, 베를린과 드레스덴의 화학공장들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초반에는 대단한 성공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리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3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30% 언저리를 득표했던 대형 정당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 결과가 결코 미약할 리는 없었습니다.
일부 공장 문에는 붉은 깃발이 걸렸습니다. 생산평의회 사무실이 점거되었습니다. 운송 일정표가 찢겼고, 철도 분기점에서는 배차가 늦어졌으며, 석탄 출하는 끊겼습니다. 당 기관지들은 마침내 독일 노동계급이 다시 일어섰다고 썼습니다. 레멜레와 중앙위원회는 잠시나마 자신들이 역사의 목덜미를 붙잡았다고 믿었습니다.
2일차, KPD는 SPD 의장 루돌프 브라이트샤이트(Rudolf Breitscheid)에게 동조파업 요구서를 보냈습니다. 문체는 동지적 제안이라기보다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건네는 요구서에 가까웠습니다. 레멜레와 당 지도부의 입장에서 SPD가 반대할 명분은 더 이상 없어 보였습니다. DNEP는 내각에 들어갔고, 노동권은 제한되었으며, 국가방위산업은 노동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선택해야 했습니다.
KPD는 자신들이 관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돌아온 탕아를 환대하는 아버지처럼 너른 마음으로, 잠시 사회파시즘이라는 못된 버릇을 들였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공동전선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SPD에게서 돌아온 답은 냉랭했습니다.
“우리 당은 독일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가 국가 정상화의 이름으로 희생되고 있는 현실을 규탄한다.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은 수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극좌적 경향에 경도된 모험주의에는 여전히 단호한 반대의 뜻을 표한다. 당은 공장 점거와 운송 마비에 동의하지 않는다.”
레멜레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SPD의 선택은 자연스러웠습니다. 혁명을 “죄악처럼 증오한다”는 에베르트의 말을 따르든, “SPD는 혁명정당이지만 혁명을 하는 정당은 아니”라는 카우츠키의 가르침을 따르든, 아무튼 KPD가 지금 시도 중인 국가전복사업에 동참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혈기왕성한 공산당원들은 우익적 국가동원체제에 맞서기 위해 혁명적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루덴도르프의 전시동원체제도, 그 이전 비스마르크의 보수적 사회국가 논리도 버텨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보수적 국가동원은 새롭고 낯선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위험한 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장점거와 운송마비로 맞서야 하는 적은 아니었습니다.
SVP와 기독교 노조의 반응은 더욱 직접적이었습니다.
“생산현장 일선에서의 불만은 지극히 당연하며,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극좌주의자들은 그러한 불만을 혁명전략의 연료로 소비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허울삼아 노동자의 생활과 공화국의 안전을 인질로 삼는 공산당의 저열한 반국가행위를 가장 엄중한 자세로 규탄하는 바이다.“
이 성명은 KPD에게 불쾌한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이번 싸움은 더 이상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가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의 이름을 쓰는 다른 조직들이 정부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본가를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았고, 노동자의 불만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래서 더 위험했습니다.
KPD의 강력한 한 방은 푀글러 내각이라는 권투 선수를 한 번 주저앉히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첫 충격이 지나가자 공무원들과 생산평의회의 중재관들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대체 운송경로가 작성되었고, 미점거 공장 네트워크가 구축되었으며, 파업 참가자와 비참가자들의 명부가 만들어졌습니다.
1930년의 국가는 거리에서 얻어맞았습니다. 1937년의 국가는 명부를 작성했습니다.
이제는 라이히의 내무장관이 된 SVP 위원장 구스타프 뵐러는 경찰병력과 군 차출병력, 무장질서단을 편성해 ‘적색 지대’에 대한 군사작전을 수립했습니다. 동시에 KPD 계열 신문에 대한 즉각적 정간 조치가 내려졌고, 주요 지도부는 지명수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막스 폰 프렌츨라우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이제 육군 중장이었고, 육군최고사령부 일반국장(OKH Chef des Allgemeinen Heeresamtes)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찰과 군 차출병력, 무장질서단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작전구역을 나누었습니다. 철도 분기점, 석탄 출하지, 항만, 통신시설, 주요 화학공장, 생산평의회 사무소가 동시에 목표로 지정되었습니다.
군은 전면에 나서는 것처럼 보이지 않되, 가장 중요한 곳에는 반드시 나타나야 했습니다. 경찰은 체포했고, 무장질서단은 출입문과 거리와 복귀 노동자의 동선을 장악했으며, 군 차출병력은 운송망과 국가방위산업의 핵심시설을 보호했습니다. 프렌츨라우는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주요 목표물은 거의 동시에 타격되었습니다.
국가방송협회(RRG) 회장이 된 도리나 리하르츠슐러도 자기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전국의 라디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곧 진압될 것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방송은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차분했습니다. 공포보다 질서를 말했고, 복수보다 정상화를 말했습니다. 청취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을 증오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내일 아침 공장이 다시 열릴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약 두 달 뒤인 1937년 6월 초, 결과는 분명해졌습니다.
KPD 의원 상당수에 대한 면책특권이 박탈되었고, 그들은 체포되었습니다. RGO와 안티파는 정말로 해산당했습니다. 공산계 신문들은 문을 닫았고, 공장세포들은 드러난 곳에서 하나씩 잘려나갔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산전선에 완전히 편입되거나 SPD 계열로 이탈했습니다. 급진파들은 아예 국경을 넘어 PCF에 가담하거나 모스크바의 망명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에 보란듯이 실패하고 도망친 이들의 발언권은 크지 않았습니다.
KPD 자체가 불법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정부는 그 정도의 선은 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불법화는 순교의 서사를 만들 수 있었고, 독일 제1당이었던 조직을 한순간에 지하로 몰아넣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대신 더 효과적인 방식이 선택되었습니다. 당은 남겨두되, 신경망을 끊었습니다. 의석은 남겨두되, 공장은 빼앗았습니다. 이름은 남겨두되, 대중정당으로서 권력을 노릴 수 있는 단계는 완전히 끝장냈습니다.
KPD는 선거에서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리에서만 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공장에서 졌습니다.
프랑스에서 독일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던 자크 도리오와 PCF는 일단 KPD ‘동지’들을 짓밟은 독일 당국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연일 발표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과연 얼마나 KPD를 동지로 생각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이미 국민주의적 이단으로 자리매김한 PCF에게, 레멜레의 KPD는 불편한 친척에 가까웠습니다. 버릴 수는 없지만, 닮고 싶지는 않은 존재였습니다.
그보다 PCF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KPD처럼 코민테른 노선을 맹종하며 고립을 자처했다가는, 아무리 큰 세력을 구축했어도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다는 전훈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짧은 시간 안에 노동자들을 조직해 체제를 방어해내는 데 성공했던 독일 ‘생산전선’의 무서움이었습니다. 도리오는 독일을 혐오했습니다. 그러나 패배한 독일 공산당보다, 그것을 꺾은 독일의 생산국가를 더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교훈들은 후일 도리오의 PCF가 레멜레의 KPD와 확연히 다른 성과를 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모스크바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인정해야 했습니다. 독일 혁명은 최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독일 노동계급은 아군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모스크바가 기대한 방식의 아군은 아니었습니다. 재무장, 복지, 생산동원, 반공을 결합한 독일은 내부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방은 군사적으로 독일을 즉시 압도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전략이 바뀌었습니다. 독일을 내부에서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외부에서라도 봉쇄해야 했습니다.
1937년 가을,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프랑스와 소련 간의 접근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히틀러의 무절제한 재무장 움직임이 프랑스뿐 아니라 소련까지 일찍 자극시켰고, 이는 1935년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Franco-Soviet Treaty of Mutual Assistance)과 뒤이은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 간 조약의 체결로 이어졌습니다.
이 대체역사에서 소련은 조금 더 늦게까지 독일 혁명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조약은 2년 늦게 체결되었습니다. 다만 국제연맹 규약을 인용하며 가상적국의 무력공격 상황에서의 의무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한 우리 역사의 조약과 달리, 이 세계선의 불소조약은 선명하게 자동참전 조항을 삽입했습니다. 소련-체코슬로바키아 상호원조조약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와 소련은 당연히 서로를 믿지 않았습니다. 1936년 총선 이후 프랑스 내각을 구성한 것은 인민전선이 아니라 피에르에티엔 플랑댕(Pierre-Étienne Flandin)이 이끄는 급진당과 우익 정당들의 우파 연립정부였습니다. 소련의 외무인민위원 알렉세이 바레츠노프(Алексей Барецнов) 역시 프랑스의 반동 제국주의 정부를 결코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만들 세계를 혐오했습니다. 서로의 신문을 읽으면 대개 분노했고, 서로의 외교문서를 읽으면 대개 의심했습니다.
다만 둘 다 독일을 더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워했습니다.
카를 폰 뢰벤슈테른(Karl von Löwenstern), 자칭 ‘사회주의자’이자 국민공동생산전선의 창안자.
막시밀리안 폰 프렌츨라우(Maximilian von Prenzlau) 중장. 자유 독일에 충성 중.
구스타프 뵐러(Gustav Wöhler), 라이히 내무장관. 노동자들을 위해 자유 독일의 질서를 지킨다.
도리나 리하르츠슐러(Dorina Richartz-Schuller) 국가방송협회(Reichs-Rundfunk-Gesellschaft) 회장. 자유 독일은 안전합니다. ‘정상적인’ 국민 여러분께서는 생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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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역사보다 spd의 사회파시즘론을 강도높고 과격하게 밀어붙이다 업보빔을 쎄게 받아버린 kpd군요
진짜 사회파시즘도 불러내버렸죠(?)
@E.E.샤츠슈나이더 이렇게 보면 이 세계선만큼은 kpd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맛탱이를 보내버린 흑막이네요(?)
@dnjdss 결국 돌고돌아 박통 노선으로 오긴 했지만요(?)
이번화의 푀글러 내각에게서 어쩐지 대처 내각이 보이는데 기분탓인가요?
경제정책은 거의 정반대긴 한데, 노조 분쇄하는 건 비슷하네요(..)
@E.E.샤츠슈나이더 빌리 엘리어트에도 나오듯이 대처 총리님이 저 방식으로 탄광노조를 조졌습니다.
이야... 엔딩 못 본 연대기의 다른 엔딩을 볼 희망이 보이는군요 ㅋㅋ 잘 읽고 있습니다.
+ 하지만 주기를 보면 3일 휴일 후 2일 연재 다음 4일 휴일 후 2일 연재니까 다음화는 5일 후겠군요 ㅋㅋㅋ
주기를 따로 정해놓지는 않았고, 그때그때 되는대로 작성해뒀다가 얼추 모이면 글로 올리고 있습니다.
AI랑 공동집필이라서 그래도 좀 낫네요(…)
@E.E.샤츠슈나이더 ai가 이미지는 진짜 빨리 느는데 글은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하더라구요 ㅋㅋ 그래도 저보다는 나은디(...) 소설은 되는데 보고서는 그럴수가 없어서리 ㅋㅋ
근데 마지막에 나온 도리나 사진이 어째 바겐크네히트랑 닮은꼴로 나왔네요.
저 세계선의 독일은 노조를 두들겨 패는거 빼고는 이외로 자라-바겐크네히트 동맹과 비슷한 면이 있 읍읍....(?)
독일이 방어적 민주주의(아님)와 연성 파시즘(?)의 끔찍한 혼종이 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