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디미방" 은 경상북도 영양지방에 살았던 사대부가의 장계향 선생(1598~1680)이 후손들을 위1672년경 일흔이 넘어서 지은 조리서이며, 한글 최초의 음식 백과서,현존 최고의 한글 조리서로써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책은 앞뒤 표지 두 장을 포함해 총 30장의 필사본으로 되어 있으며, 1600년대 중엽과 말엽 경상도 양반가의 음식 조리법과 저장.발효식품, 식품보관법 등 146가지를 소개하고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또한 "음식디미방"은 영양군이 세계속의 명품음식을 꿈꾸며 개발한 우리 전통 반가음식 브랜드이기도 하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생의 생애와 사상(1590(선조1590(선조 23)∼1674(현종 15)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 영해(寧海) 출신. 현감 함(涵)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현일(玄逸)의 아버지이다.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였다.
학행으로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640년(인조 18)에는 영양의 석보(石保), 1653년(효종 4)에는 영양의 수비(首比), 1672년(현종 13)에는 안동 도솔원(兜率院)으로 옮겨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도 잘 썼으며, 특히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에게 이학(理學)을 전수받아 다시 아들 휘일(徽逸)ㆍ현일에게 전하여줌으로써 주리학(主理學)의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령(金坽)ㆍ조경(趙絅)과 교분이 깊었다. 저서로는『석계집』6권이 있다.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安東張氏)
정부인 장씨는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서 1598년(선조 3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내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이고, 어머니는 첨지 권사온(權士溫)의 딸이다. 19세에 출가하여 재령(載寧) 이씨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계실(繼室)이 되었다. 이시명은 전실 김씨로부터 일남(尙逸) 일녀를 얻었으며, 둘째 부인 장씨로부터 육남(徽逸, 玄逸, 嵩逸, 靖逸, 隆逸, 雲逸) 이녀를 두었다. 장씨 부인은 칠남 삼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친에게 글을 배웠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이 장씨가 적벽부를 쓴 것을 보고 “글씨가 호탕하고 굳센 것이 동인의 서법이 아니니 중국인의 수적(水蹟)이 아닌가”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15세가 되자 시를 짓고 글씨를 쓰는 것은 여자에게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하여 돌아보지 않아 지금 전하는 것은 많지 않으나 시 7편과 한문 편지 1편이 남아 있다.
시는 장씨의 고모부가 부역에 나가자 그 모친이 슬퍼하여 기절한 일을 듣고 지은 4언 고시 「학발삼장(鶴髮三章)」, 성인의 시대에 나지 않았어도 성인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성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성인음(聖人吟)」, 비오는 소리를 듣고 지은「소소음(蕭蕭吟)」, 자신의 몸을 조심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경신음(敬身吟)」 등 오언절구와 손자 신급(新及)과 성급(聖及)에게 주는 오언절구, 장수하는 것을 노래한 칠언절구 「희우시(稀又詩)」등이 전하며 아들이 병이 났다는 것을 듣고 쓴 한문 편지도 있으며 만년에 쓴 음식디미방이 전하고 있다.
장씨 부인의 행실과 덕이 이렇게 높고 83세에 이르기까지 자녀 훈도에 힘을 쏟으니 이로부터 재령 이씨 가문은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 있는 동량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부인은 1680년(숙종 6년)에 83세를 일기로 향년을 마치었다. 장씨 부인이 생애의 말년을 보냈던 집은 현재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의 '두들' 마을에 있고,) 부인의 묘소는 안동군 수동에 있다
석계고택(石溪古宅)
석계고택(石溪古宅)과 석계종택(石溪宗宅)은 두들마을의 중심부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로 더욱 유명한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 남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 세상을 떠난 뒤 이곳으로 돌아와 5년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난 석계고택이다.
오른쪽 건물은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의 불천위 사당이 있는 석계종택이다. 석계고택은 4칸 규모의 사랑채와 5칸 규모의 안채가 이(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석계종택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석계 이시명과 장계향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석계고택 주변에는 가파른 절벽이 마을을 감싸 안고, 아름드리 도토리나무가 울창하게 잎을 드리우고 있다. 이 나무는 장계향이 처음 두들마을에 정착했을 때 이 지역의 빈민을 구휼하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
유우당 (惟牛堂) 문화재자료 제285호
이 건물은 조선 순조 33년(1833)에 이상도(李相度,1773~1835) 선생이 건립한 살림집으로, 당호는 선생의장자인 기찬(箕燦)의 號를 따 유우당이라 하였다. 이 집은 원래 석보면 주남리에 있던 것을 선생의 후손인 이돈호(李暾浩,1869~1942)가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돈호는 3.1운동때 유림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여 민족독립운동에 이바지한바 있으며, 그의 조카인 병각(秉珏)은 조지훈, 오일도, 조세림등과 더불어 항일 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정열의 천재시인 이병각(李秉珏)
1910년 1월 5일 경북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에서 태어난 몽구 이병각 시인(1910~1941)은 1930년대 중반기에 우리 문단에 등장, 활약한 분으로,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손이다.
어릴때 향리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보통학교를 단기반으로 졸업하였고, 그 후 서울로 상경하여 중등 중학교를 다니게 된다.
식민지 모순을 극복하려는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퇴학당하고 도일한 그는 츄오대학(中央大學)을 중퇴하고, 1935년 1월 조선 중앙일보에 소설 `눈물의 열차'를 발표,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시 `오직 진군을 할 따름이다', '생쥐이야기', 비평 `농민문학의 본질과 농본주의의 폭로', `풍자와 우화시에 대하여' 등을 남겼으며, 31세로 요절하기까지 6년의 자품활동 기간중 시 22편, 소설3편, 수필 7편,평론 13편을 남겼다.
두들 책사랑 - 두들마을 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역사문화를 체험할수있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