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덮인 히말라야의 산자락
해발 3300m 지점에서 바라본 4000~5000급 봉우리들
산은 무엇일까요.
랑탕히말 국립공원에서 10일간 트래킹을 하면서
‘히말라야오지학교탐사대’는
해발 4650m 캉진 리 봉우리까지 올라갔습니다.
한라산조차 노루목 산장 부근에서 먼발치로
바라본 정도인 저로선 그 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에 해발 고도를 1000m 정도 올리는 일정도
산행 경험이 부족한 제게는 상당한 부담을 주었습니다.
카투만두로 돌아올 즈음 반가운 소식이 닿았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카투만두에서 대여해간 위성전화를 통해 조난당했던
‘박정헌-최강식’
등반조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일기가 나빠 21일 아침에야 헬기가 뜰 수 있었지만
히말라야의 눈 속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이 구조된다는 소식은
정말 기쁜 것이었습니다.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우리나라 산악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등반조의 대장이라 할
박정헌씨(34ㆍ노스페이스 클라이밍 팀)는
한국을 대표하는 히말라야 거벽등반가입니다.
‘거벽등반’은
일반에 알려진 등산과는 약간 다른 분야입니다.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 일반에 널리 알려진 산꾼들은
‘고산등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데 완만한 코스도 있지만
경사가 가파른 암벽 코스도 있습니다.
정상을 오르는 길은 여럿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봉우리를 두고 북서릉 코스로 올랐느냐,
남벽 코스로 올랐느냐를 얘기하게 됩니다.
계절적인 요인도 따져 겨울에 올랐느냐 여름에 올랐느냐가
기록의 대상이 됩니다.
거벽등반 분야는 여러 코스 중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암벽 코스를 거쳐 오르는 분야입니다.
박씨는, 아직 학생이지만
나이에 비해 고산 등반 경험이 풍부하고
거벽 등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최강식씨(26ㆍ경상대 산악부)와 함께
1월16일 촐라체(6440m) 북벽 신루트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촐라체는 에베레스트 남서쪽 쿰부히말 지역에 있습니다.
촐라체 봉우리의 북벽은
같은 능선 상의 타위체(6,501m) 북벽과
그 남쪽 캉테가(6,779m) 북벽과 더불어
쿰부히말을 대표하는 난벽입니다.
82년 영ㆍ미 합동대가 남서릉으로 초등했고,
84년 미국원정대가 북동스퍼를 통해 알파인스타일로
1주일 만에 정상에 올라선 후 북벽 등반에 성공한 팀은
95년 프랑스 팀뿐입니다.
이번 박-최 등반대의 북벽 신루트 동계 등정은
여러 면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길이가 1500m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을
자일과 하켄 등 기본 장비 몇 가지에 의지해
올라간다는 것은 말만 들어도 고개를 흔들게 되는
고난의 작업입니다.
두 사람의 등반 과정에 대한 설명을 위해
월간 산 한필석 기자의 기사를 인용합니다.
“두 사람이 베이스캠프를 출발,
등반에 나선 것은 (1월) 13일 새벽 3시,
촐라체 북벽에 새 루트를 낼 야심을 가진 두 사람은
경량속공등반으로
1박2일 안에 끝낼 계획으로 간단한 비상식에,
장비도 피켈과 5mm 캐블러 60m에 하켄 15개,
러프 4개가 전부였다.
예상보다 난이도가 높아 등반이 늦어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평균경사 85도가 넘에 계속 등반을 강행해야 했고,
등반 나흘째인
16일 저녁 결국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16일 저녁 남서릉으로 하산 도중 최 대원이
크레바스 속으로 추락하면서 고난은 시작됐다.
마침 박 대장이 제대로 낚아채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25m나 추락하면서 (최 대원은) 양쪽 정강이 골절상을 당했고,
박 대장은 최 대원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몇 차례나 설사면에 처박히며,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다.
설사면에서 비박한 두 사람은
이튿날 설사면을 따라 하산을 강행,
이번에는 급사면에서 확보를 보다 최 대원이 미끄러지면서
충격을 이기지 못한 피켈 두 자루가 몽땅 빠져버렸고,
그 피켈의 해머가 가슴과 이마를 쳐
박 대장은 늑골골절상과 타박상을 입었다.
박 대장은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입고 있는 옷과 꼭 필요한 자일과 피켈 외의 모든 장비뿐만 아니라
배낭과 카메라까지 버리기로 했다.
이틀째 비박 후
온몸이 엉망이 된 두 사람은 기다시피 하면서 내려오다
첫 번째 야크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또다시 기어서 내려서다 두 번째 야크 움막으로 들어섰다.
마침 땔감이 있어 몸을 녹일 수 있었다.
1주일 동안 물다운 물을 마셔보지 못하고
얼음으로 갈증을 달랬으니,
두 사람은 탈진 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마을서 올라온 한 노인을 만나 노인의 딸에게
상황을 적은 메시지를 베이스캠프에 전해주고,
이어 무전이 가능한 로부체로 넘어가
카투만두에 구조헬기를 요청할 수 있었다.
구조요청 이튿날인 헬기가 출동했으나,
날씨가 나빠 실제 구조는 다음날인 21일에서야
이루어졌다.”(월간산 2005년2월호)
카투만두의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두 사람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골절상과 타박상도 심했지만
보는 이를 무엇보다도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동상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두 발과 두 손에
심각한 동상에 걸린 상태였습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경과돼 동상 부위가 검게 변했고
건조가 진행됐습니다.
치료 과정을 보고 호텔로 돌아온
김영식씨(오지학교탐사대 대장ㆍ충주 칠금중학교 교사)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라고 했습니다.
김영식씨는 세계 제3위 고봉인 칸첸중가(8586mㆍ1990년) 등반,
칸첸중가 북벽등반(1999년),
중앙아시아 천산산맥 칸텡그리 원정대장(1996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 원정대장/등정(1998년),
에베레스트ㆍ로체 등반대장(2000년),
러시아 코카서스산맥 엘브르즈ㆍ촛찻ㆍ잔투칸ㆍ구마치 등정(2001년),
이란최고봉 다마반 등반(아시아산악연맹 합동등반 2001년),
천산산맥 마블월피크 등정(6400m 아시아산악연맹 합동등반) 등
고산 경험이 풍부한 산악인입니다.
대원을 잃기도 하고 몸을 던져 대원을 구하기도 하는 등
온갖 상황을 다 겪어본 그는
박-최 두 사람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마도 눈물이 솟았던 듯합니다.
두 사람의 치료가 급선무였기에
김 대장과 저는 일정을 중단하고
두 사람을 한국으로 이송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트래킹 일정이 끝난 뒤라 우리 두 사람이
탐사대에서 이탈해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22일 아침 우리는 카투만두 트루부번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타이항공 측은 그러나 환자 이송에 난색을 표명했습니다.
워낙 상태가 위중해 의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날 공항에는 카투만두 시내 산악인들의 요람인
빌라에베레스트 앙도르지 사장,
등산 장비점 덴디 사장 등
두 네팔인이 나와 진행을 도왔습니다.
말이 돕는 것이지
이 두 사람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한국산악인과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이들은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두 사람을 도왔습니다.
카투만두 시내로 나가 의사 소견서
(항공사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를 받아온 뒤에야
자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신 비즈니스 석은 곤란하고
일반석 뒤편에 자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앰뷸런스 편으로 항공기로 직접 환자를 이송,
힘 좋은 김영식 대장이 두 사람을 업고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만석 상태가 아니라서 뒤편 빈 좌석 4개에 1명씩 눕히고
링거는 테이프로 벽면에 단단히 고정했습니다.
굳었던 두 사람의 표정은
비행기가 뜨고 한 차례 눈을 붙인 뒤에야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렌지 쥬스를 네 컵이나 연달아 마신 뒤에야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 사람의 생환 과정은 기적과 같습니다.
크레바스에 빠진 최 대원을
박 대장이 캐블러 5mm 자일에 의지해
25m나 끌어올린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던 일입니다.
전문 등반가인 김영식 대장은 후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 상황과 기술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장비 없이 단 5m도 끌어올리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 산악인들의 의견입니다.
박정헌이었기에,
후배를 살려야 한다는 의지기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등산 기술에 문외한인 제가 물어볼 일도 아니고,
또 대답해 준다한들
정확하게 기록을 남길 자신도 없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제가 본 산악영화 중에
‘K2’와 ‘버티컬리미트’가 있습니다.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절대 자연의 힘,
그에 도전하는 인간,
산꾼들의 우정과 사랑 등등을 영화적 기법으로 그려
많은 생각을 하면서 보았습니다.
그 외에 헤르만 불이라는 유럽의 산악인이 쓴
‘8000m 위와 아래’라는 등정기,
제목이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일본 작가가 쓴 소설
‘인간의 조건(새벽?)’ 등등이
제가 간접 경험한 산의 전부입니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학보사 선후배들과 함께 올라간
오대산 적멸보궁, 설악산 공룡능선의 기억,
일출을 바라봤던 울산바위 정도가
제 몸에 남아 있는 전부입니다.
그 작은 경험과 지식으로 두 사람이 이뤄낸 기적을
다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의지가 정상에 오를 만큼 강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싶습니다.
4500m의 야크 움막에서 노인을 만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계절적으로 1월은 야크 방목을 하지 않는 시기입니다.
야크 방목 때 임시로 거처하는 움막(커르커)은
겨우내 비어 있습니다.
겨울에 사람이 사는 마을은 해발 3300m 정도가 보통이고
4000m 지역에는 가끔 롯지가 있습니다.
노인이 그날 왜 4500m 지역까지 올라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히말라야의 신은 알고 있겠지요.
얼음을 깨물어 먹으며 기어 내려와 움막에서 불을 피워
몸을 데운 두 사람은 노인이 끓여준 찌
(네팔식 차.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은 것)를 먹었습니다.
촐라체 북벽에 올라갈 때 준비한 음식은
이틀 만에 다 떨어졌으니
5일 만에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깁스를 한 채 두 발과 두 손에 모두 붕대를 감은 두 사람은
방콕공항을 거쳐 23일 새벽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방콕공항은 통과 여객이 많은 공항인 탓인지
두 사람 같은 중환자가 쉴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퀴의 림을 분리시켜 항공기 좌석 사이 좁은 복도까지
들어올 수 있는 휠체어를 비행기 탑승구에 대기시켰다가
전문 요원들이 직접 환자를 이송했습니다.
우리에겐 짐이나 잘 챙겨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인천공항에도 전문 요원이 대기하고 있지만 비행기 안까지
휠체어가 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날 경희의료원에 입원했습니다.
경희의료원에는 동상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정덕환 박사가 있습니다.
박 대장은 이미 정 박사의 신세를 졌던 '전과자'입니다.
발가락을 잘라낸 적이 있는 박 대장은
두 손의 엄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여덟 손가락을 다 잘라야 합니다.
산소치료 등 정 박사가 미국에서 연수받은 새로운 기법을
총동원했지만 상태가 너무 심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박 대장은 이미 등반 과정에서 동상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암벽 등반의 특성상 세밀한 손동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얇은 장갑을 꼈고 예정보다 기간이 길어지면서
동상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부러지고(최강식 대원),
늑골골절상과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박정헌 대장)을
입은 상태에서
3일간 그들은 기어서 10km 정도를 내려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상은 더욱 심해져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된 것입니다.
며칠 전 최 대원은 진주로 병원을 옮겼습니다.
어떻게든 손가락을 살려야 한다는
부모님의 성화도 있었지만
다른 치료 방법에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이미 카투만두로 생환한 무렵 각오를 했던 것이지만
막상 일이 닥쳐 수술을 앞두고 두 사람은
심리적 갈등을 겪는 듯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했던 박 대장도 수술 일정을
2월18일로 한 차례 연기한 상태입니다.
박 대장은 제게 수술 전
손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심코 그러겠다고 승낙한 뒤
집에 돌아온 저는 괴로웠습니다.
도저히 그 손을 앵글에 담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옆에서 바라보는 제가 그러할진대
당사자와 가족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끝내 박 대장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나약한 저는 사진을 찍으며
울지 않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박 대장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보다
저는 외면하기로 한 것입니다.
스스로에게도 몇 번이나 물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산이 무엇이건대 저런 고통을 이겨가며
몸을 던지며 오르는 것일까.
아직 산을 잘 모르는 제가 풀어내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낸 두 산 사나이에게
경의를 표할 따름입니다.
>" 형 혼자 가, 난 틀렸어"~ " 안돼 함께 살아야해"
▲ 해발6440m 높이의 히말라야 산맥
촐라체(cholatse)봉
"죽음의 촐라체봉" 산사나이들의 생환기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남미 안데스산맥 시울라 그란데 서벽(西壁)에서
다리가 부러진 친구를 돌보다 끝내
자일을 자르는 내용의 이 실화소설은
세계 산악인들에게
‘고전(古典) 중의 고전’으로 통한다.
두 사람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최후의 선택’,
너무나 가슴아픈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살기 위해
후배 산악인과 연결된 자일을 끊지않고
사지(死地) 크레바스에서 구해낸
국내 내로라하는 거벽(巨壁) 등반가 박정헌(34)씨.
하지만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과의 사투(死鬪)는 이제부터였다.
지옥같은 크레바스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영하 15도를 넘는 살을 찢는 살인적인 추위에
1시간 동안 구조의 사투가 끝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한 발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천근 만근의 무게에 호흡조차 곤란한 상황이었다.
후배의 두 발목은 퉁퉁 부어 올랐고,
선배는 숨을 몰아쉴 때마다
왼쪽 가슴을 칼로 ??는 고통을 느꼈다.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5시간 거리의 베이스캠프를 앞두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등정했던 눈덮인 촐라체봉을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선배가 후배를 부축했다. 하지만
내 한몸 가두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금세 한계상황에 도달했다.
선배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배는
엉덩이로 기어갔다.
양 손으로 바위를 짚은 채
엉덩이를 옮겨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날 밤,
두 사람은 강추위 속에서
비박(텐트 없이 밤을 지새는 것)을 해야 했다.
“미안해, 혀~엉.”
후배 최씨는 선배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괘얀타, 그럴 수도 있다.
” 선배도 하늘만 바라봤다.
후배는 크레바스에 빠진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선배 또한 잠시나마 줄을 끊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든 자신이 괴로웠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과연 살아서 이 산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거벽(巨壁)등반가 박정헌(34 왼쪽)씨와
고향(경남 진주)후배 최강식(25 경상대 3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박정헌씨와 최강식씨의 모습은
디지털카메라의 자동타이머 가능을 이용해
스스로 찍은 사진이다.
1월17일 아침.
선배 박씨는 크레바스 사고 때
안경을 잃어버려 온통 시야가 흐렸다.
시력이 마이너스 0.3. 안경 없이는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던
중 70~80도의 급경사가 나타났다.
눈벽에 피켈(얼음 송곳)을 찍으며 내려왔다.
한발, 한발….
마지막 발을 내딛는 순간
얕게 박힌 피켈 하나가 튕겨져
박씨의 이마를 깊게 긁고 지나갔다.
터져나온 붉은 피가 흰 눈위에 잉크처럼 뿌려졌다.
5㎝ 길이의 상처였다.
마음은 한없이 약해지면서도
‘포기하지 말자’ ‘포기하면 죽는다’
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두 사람은 배낭을 버렸다.
몸뚱아리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의식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입이 타올랐다.
사흘째 물을 마시지 못했다.
등정하기 전날부터
영하의 날씨로 물통이 꽝꽝 얼어버린 탓이었다.
박씨는 얼음을 피켈로 찍어서 마구 삼켰고
후배도 같이 얼음 빙수를 만들어 마셨다.
두 사람의 입안은
거친 얼음 조각에 다 헐어버렸다.
잇몸에서 피가 나왔다.
17일 밤.
두 사람은 밤새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박씨는
“비명을 들으며 서로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후배 최씨가 꼼짝하지 못했다.
발에 피가 공급되지 않아 물먹은 솜처럼 부풀어올랐다.
“형님! 먼저 가십시오. 저는 힘듭니다.”
가장 가까운 인가(人家)가 수백m 밖이었다.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망설이던 박씨는
“내가 마을 사람을 불러 곧 너를 데리러 오겠다”며
등을 돌렸다.
몇 발자국 못가 눈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박씨의 걸음이 빨라졌다.
3시간쯤 걸었을 때 오두막 두 채가 나타났다.
벌써 눈은 발목 깊이로 쌓여 있었다.
달려가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다.
호주머니 속 피켈 망치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마른 장작만 천장까지 쌓여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지금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이 지나면 후배, 강식이의 삶의 희망은 사라진다.
‘그 녀석 부모를 무슨 낯으로 보나.’
크레바스에서의 갈등이 다시 밀려왔다.
그러나 박씨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삐-그덕.’
문 열리는 소리에 박씨는 벌떡 일어났다.
시커먼 그림자가 성큼 들어왔다. 후배였다.
“강식아!”
후배 최씨가 눈 위에 찍힌 선배의 발자국을 따라
필사적으로 오두막까지 들어온 것이다.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선배가 “잘 왔다. 이 자식아. 진짜 잘왔다.
걱정돼서 죽을 뻔했다”고 소리쳤다.
후배는 “눈이 쏟아지는데,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아 따라왔다”며 웃어 보였다.
그뿐이었다.
이날 두사람은 4일 만에
오두막에 남아 있는 꿀과 말라 비틀어진 초콜릿 조각을
녹여 배를 채웠다.
쌓인 장작으로 불도 쬐었다.
2시간 간격으로 잠을 깨,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이들이 마을 사람을 만난 것은 19일 오전.
베이스캠프로 ‘헬기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틀 뒤(21일) 머리 위로 헬기가 날아왔다.
‘이제 살았구나!’
하지만 손과 발은
온통 동상(凍傷)에 걸려 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펌)
첫댓글 박정헌! 이 사람은 와룡산 산행에서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최광식 군은 진주고등학교 동문의 후원을 받은 걸로 봐서 진주고 출신인 것 같고.... 새로운 각도로 전개될 박정헌의 삶에 히말리아 신들의 가호가 가득하기를....
아~"저위에 그 산악인이 있다"라고 말씀하신이가 거벽 등반가 박정헌씨 인가 봅니다.호리병 같은 20m크레바스 아래에서 "형님 살려주이소~" "다리가 부러졌어요"라는 후배의 투박한 절규속에서 기적같은 구출을 하였으나 그 대가가......가슴이 너무 아파옵니다.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그들에겐 산이 삶의 전부이자 신앙이 아니었나 생각듭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일을 짜르고 살아남아 평생 괴로움에 몸부림 치는 산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탐험일정들을 생생하게 담아 그들의 산사랑과 우정을 기리고 후등자들에 산 교훈이 되었으면 하고 부디 용기를 잃지마시길 기원해봅니다.
정헌, 그리고 강식군에게 다시 산을 오를 수 있도록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데...... 강식군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죠. 정헌씨는 서울에서 수술을 했구요..... 강식군은 진주고 출신으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