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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 출생
아호 안당
2013년 월간 「문학세계」 신인상 수상, (시) 등단
중랑문학대학 제5기 졸업
한국문인협회·소정문학동인·중랑작가협회 회원
동인지 「마라도에서」·소정문학「수요일엔 파란장미를」외 다수
노원문화원 「풍경이 있는 수필교실」 회원
<수상 소감>
이주숙
어린 시절 길 가다가도 왠지 모를 시구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바로 적지도 못하고 가다가 금세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문학에 대한 동경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움트고 있었나 봅니다.
스물셋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아이 낳고 살림하면서, 아이들이 크면 나도 아이들과 같이 더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시어머니 모시고 살며,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가 요양하면서 그 소망은 멀리 가버렸습니다.
어머님 25년 모신 뒤 요양원 보낸 후 그동안 미뤄왔던 문학의 꿈을 이루고 싶어 ‘시’ 공부를 하고 등단을 하였습니다.
나이 들어보니, 이제는 제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수필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노원문화원 ‘풍경이 있는 수필 교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벌써 이 소중한 공간에 몸담은 지 3~4년이 지났지만, 수필 세계는 갈수록 어렵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이름 석 자가 에세이스트사에 올려지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열정으로 지도해 주신 이미서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언제나 반가운 우리 수필 교실 문우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늘 곁에서 응원해 주는 남편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7월의 주말아침에~
<당선작> 어머니
이주숙
어머니 계절은 청명한 가을입니다. 집 앞 꽃가게에는 가을을 알리는 국화가 한가득입니다. 향기가 진하지는 않아도, 지나는 사람들 시선을 붙잡는 노란 국화 한 아름 사가지고 와 집안 곳곳에 두었습니다.
국화를 좋아하던 어머님께서 반백 년 해로했던 아버님을 먼저 보내셨지요. 그 후 어머님은 잠 못 들어하셨고, 저희 부부는 어머님을 모셨지요. 그 세월이 20년입니다. 모신 지 7년째 그날은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지요. 남동생 부부가 축하한다고 케이크를 준비해 와 식구들과 맛있게 저녁을 먹고 웃음꽃 피웠는데, 어머니는 평소 주무실 시간도 아닌 이른 시간에 눕겠다고 방으로 들어가셨지요. 자리를 피해주는 줄로만 알았는데 동생들이 간다고 인사드렸을 때 입이 약간 삐뚠 것 같고,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히죽’ 웃는 모습이 평소 어머니답지 않았죠. 왜 그러시냐고 여쭤봤지만 괜찮다고만 하셨지요. 어머니 주무실 때 몇 번씩 안방 문을 열어보았는데, 코까지 골면서 곤하게 주무셔서 ‘별일 없겠지’ 했습니다.
평소에는 애들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시는 분인데, 아침 7시가 되어도 일어나지를 않으시더군요. 남편 출근시키고 애들 학교 보내고 진지를 차려 가지고 들어갔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큰일이 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숟가락질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밥과 국을 입에 넣지 못하고 다 흘리셨기 때문이죠. 맨발로 뛰어나가 약국에서 우황청심원을 사다 드리고, 남편과 시누이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어머니 병명은 ‘중풍’이었습니다. 의사는 어머니의 왼쪽 뇌혈관이 막혔다고 했습니다. 두 달간 입원 후 지켜봐야 하는데 연세 때문에 회복은 장담 못한다는 말을 덧붙였죠. 아랫동서는 손님처럼 왔다 갈 뿐이었으니, 큰며느리인 제가 그날부터 병실 지킴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몸은 만신창이였는데, 어머니는 병원에서도 시위라도 하듯 또 얼마나 제 속을 태우셨습니까. 식사도 거부하고, 눈도 안 뜨고 돌아누워만 계셨죠. 그때만 해도 자존심에 그러시는 줄 알았는데 언어장애가 온 충격 때문에 그러셨던 거였지요. 의사는 가족들이 시중을 드는 것보다는 간병인을 쓰라고 권했습니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가장 경험 많은 간병인을 소개받았죠. 그런데 그 베테랑 간병인이 저더러 이런 분을 어떻게 모시고 살았냐고 거꾸로 어떻게 간호해야 하는지 비법을 물어보더군요. 그 당시 저의 삶도 어머니 못지않았습니다. 간병하랴, 살림하랴, 애들 보랴, 몸은 하나인데 너무나 많은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책임의 무게가 더 무거워져 하루하루 사는 게 힘겨웠습니다.
2개월 입원 예상 기간의 배인, 4개월 후 어머니는 퇴원을 하셨습니다. 호스로 공급받는 영양식, 그다음엔 죽, 그리고 밥을 드시면서부터 기운이 나셨던 거였어요. 어머니가 오시니 그때부터 저는 반대로 바깥 볼일은 못 보고 발이 묶였습니다. 갓난아기 돌보는 애 엄마처럼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누워계셔도 깐깐한 성품은 그대로였습니다. 몸이 맘대로 안 되니 시시때때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반찬 투정도 심하셨죠. 아범과 저는 결국 언성을 높였습니다.
아범은 어머니 모시는 게 그렇게 힘들고 하기 싫으면 보따리 싸가지고 친정집으로 가라더군요. 큰며느리로 온 이상 고생되더라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되고 그게 싫으면 나가라는 겁니다. 남편에게 섭섭한 마음에 저는 가출할 결심을 했습니다. 딸아이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내면서 말했습니다.
“엄마가 오늘 시골 외할머니 댁에 갈 테니 너는 동생 잘 챙기고 할머니 잘 모시고 있어라.”
가출을 결심하니 마음이 급했습니다. 아침 식사 드린 후 집을 치우고 있는데 예고 없이 시동생이 찾아왔지요. 하는 수 없이 점심을 차렸습니다. 시동생이 돌아간 후 또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데 이번엔 어머니 친구분이 오시지 않았겠어요? 다과를 챙겨드리고 나니 집 나설 새도 없이 시간이 훌쩍 지나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겁니다.
“엄마가 없을 줄 알았는 데 있어서 너무 좋아” 하고는 딸아이는 달려와 제 품에 안겨 활짝 웃었습니다. 도시락이 그대로 있길래 왜 안 먹었냐고 물으니 “엄마가 집 나간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되어 우느라고 밥을 못 먹었어요” 하는 거예요. 순간 집을 떠나려던 제 자신이 너무 부족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님도 그때 제 마음을 아셨나 봐요.
어머니!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으신다면, 어머님 목욕시켜 드리는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쪽 수족을 못 쓰시는 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목욕시켜 드렸잖아요. 반지하에 살 때, 화장실에 계단이 있어서 목욕을 하려면 어머니를 부축해서 올라가야 했었죠. 그때마다 허리가 너무나 아팠지만 ‘악’ 소리 한 번 안 내고 참았습니다. 원체 팔 힘이 약한 데다 허리 통증까지 심해져, 어느 날은 아범이 나섰지만 어머니께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바람에 13년간 제가 어머니 목욕을 도맡게 되었지요.
어머니 세신 후 쟁반에 반찬 몇 개랑 국 한 그릇 챙겨 현관 밖에 나와 앉아 아침식사를 하면서 그제서야 하늘 한번 올려다보았었지요. 어디선가 ‘야옹’ 하면서 나타난 고양이가 저를 빤히 올려다보면 밥을 좀 나누어 주었어요. 생선과 밥을 맛있게 받아먹고 고양이는 금세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개다리소반 위에 올린 국그릇 위로 눈물 몇 방울 떨어집니다. 저는 그때 그 고양이의 자유로움이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어머니!
그때 의지할 곳이라곤 두 분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저는 날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또한 친정 아버지에게도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큰며느리가 그게 무슨 소리냐, 너보다 더 고생한 사람도 있어!”
하고 야단만 치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전화를 하셔서 대뜸 제 계좌번호를 물으셨어요. 아버지는 딸의 고충을 도울 것은 그 방법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덕분에 작은 빌라로 이사할 수 있었지요. 어머님 혼자 화장실을 출입하는 것만으로 저는 행복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님도 그러셨지요?
하나님께서 친정아버지를 통해 좋은 집을 주셨구나 생각하며, 어머니 목욕시켜 드릴 때마다 ‘이 몸이 예수님 몸이다.’ 하며 정성껏 씻겨 드렸어요. 또 하나님은 제 꿈에 나타나셔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시며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고지식한 아범은 처가에서 도움받은 것을 알고는 회사 대출로 아버지께 도로 보내드렸지요.
어머니, 제가 허리 수술로 이산가족처럼 흩어졌을 때 생각나세요? 어머니를 모시고 얻은 게 이 추간판탈출증(허리디스크)인가 싶어 서럽기만 했습니다. 동서는 처음부터 어머니 못 모신다고 딱 잘라 말했지요. 시고모님은 간병인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돌아다닌다고 나무라셨어요. 또 시누이들도 늘 참견하는 일에만 나섰지요.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어머니는 시누이 댁에, 아범은 직장이 있는 강릉에, 딸은 봉사로 인도에, 아들은 혼자 집에, 강아지 로리는 남의 집에 맡겼었지요. 이상한 것은 어머님과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 우리 집이 그리워지는 거였어요.
저는 그때 생긴 허리디스크로 지금 또다시 병상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당신 자신은 얼마나 답답하고 고생스러우실까 싶지만, 지금도 그동안 병구완 해왔던 저의 고충이 먼저 떠오르는 건 사실입니다. 어머님이 안 계신 지금 저는 어머님이 늘 채우던 국화로 집안을 가득 채워 봅니다. 그런데 뭔가 또 허전합니다.
< 심사평 > 이주숙의 어머니
조정은
이주숙의 이 글 끝에는 2006년 10월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게 글을 쓴 시기라면 거의 십 년 전 글이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음이 분명하다. 다른 응모작은 성숙한 시선으로 타자를 응시하는 데 반해 이 글은 자신의 아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심사위원들이 구태여 이 작품은 등단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마도 이 한 편의 글에 작가의 삶이 총체적으로 그려져 있고 성품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신인상 응모작에는 어머니를 소재로 하는 글이 대체로 한 편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수상작에 선정되는 작품도 어머니를 소재로 한 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만큼 어머니란 존재는 우리의 의식 무의식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남자들은 자기 어머니만 어머니라 부르고 그 어머니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경우는 있어도 장모를 어머니라 지칭하며 글을 쓴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여자들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친정어머니라 지칭하기 일쑤고 시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글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여자는 친정보다는 시댁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회적 규범 속에서 살아온 세대들이 수필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시집가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 제삿밥을 얻어먹어야 한다는 게 유교가 뿌리 깊게 뻗어있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정서다.
하지만 이주숙의 글처럼 큰며느리라는 굴레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당하며 시어머니 병수발을 든 이야기나 시집살이한 이야기는 십 년만 지나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 확실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모계사회로 회귀하는 중이다. 요즘 젊은 층들은 시댁보다 친정이 가깝고 친가보다 처가가 가깝다. 아이들은 친조부모보다 외조부모와 더 가깝다.
신세대라고 고부갈등이 없을 리 없고 시집살이 고되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며느리가 집에서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며 목욕시키고 밥을 떠먹이는 이런 일들은 곧 전설이 될 게 틀림없다. 요양보호사라는 간병인 자격증 시대가 도래했고 2022년 통계로 252만 명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자격증을 갖춘 이들의 93%가 50대 이상이어서 실제로 현장에 투입되는 인원은 겨우 20% 남짓하다. 장기요양을 필요로 하는 노인에 비해 요양보호사의 수급은 점차 부족해지고 있어 외국인 자격증 제도도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며느리 수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 고된 시집살이에 병든 시어른 수발을 들어온 며느리들이 벌써 고령이 되고 말았다. 이 세대가 가고 나면 다시는 이런 글을 만날 수 없을 건 당연하다. 평자는 이 기록 자체만으로 귀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때 우리는 이렇듯 자신의 존엄한 권리보다 사회적 규범이 요구하는 의무에 충실한 것을 인간으로서의 가장 높은 가치로 떠받들었다. 효자문도 세우고 열려문도 세우며 인간의 개인적 존엄을 축소시키던 그 시대는 갔다. 그리고 마지막 증언들이 간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그 시대가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깐깐한 시어머니가 반신불수가 되자 그 수발을 들며 자신의 몸도 망가지고 말았다. 남편과 다투기도 하고 가출을 결심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아마도 남편과 크게 다툰 다음날이었겠지) 등교하는 딸에게 도시락을 건네며 그는 말했다.
“엄마가 오늘 시골 외할머니 댁에 갈 테니 너는 동생 잘 챙기고 할머니 잘 모시고 있어라.”
가출을 결심하니 마음이 급했습니다.
아침 식사 드린 후 집을 치우고 있는데 예고 없이 시동생이 찾아왔지요. 하는 수 없이 점심을 차렸습니다. 시동생이 돌아간 후 또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데 이번엔 어머니 친구분이 오시지 않았겠어요? 다과를 챙겨드리고 나니 집 나설 새도 없이 시간이 훌쩍 지나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겁니다.
“엄마가 없을 줄 알았는 데 있어서 너무 좋아” 하고는 딸아이는 달려와 제 품에 안겨 활짝 웃었습니다. 도시락이 그대로 있길래 왜 안 먹었냐고 물으니 “엄마가 집 나간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되어 우느라고 밥을 못 먹었어요” 하는 거예요. 순간 집을 떠나려던 제 자신이 너무 부족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주 코믹하면서도 감동을 자아내는 절창이다. 그에겐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가정이었다. 지쳐 돌아오는 가족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가정. 그렇다. 주부, 엄마가 곧 가정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가족은 해체되어가고 이혼 비혼자들이 급격히 증가하며 어른은커녕 어린아이들마저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방임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다. 1인 가구가 30%에 육박하고 있다.
지금 나는 이주숙의 이 글이 그래도 인간다운 삶이 있었던 시대라는 생각이 들며 그리움으로 가슴이 더워진다.
이주숙은 시어머니의 수발에 지쳐 병든 몸으로 병원 침상에 누워서 아픈 시어머니가 있고 남편과 자식이 있는 집이 그리웠다고 술회한다. 그는 틀림없이 시누이댁에 잠깐 의탁하게 된 시어머니가 자기보다 더 걱정되었을 것이다. 목욕할 땐 아들도 마다하던 시어머니 아닌가. 자신의 아픔보다 시어머니의 불편함이 더 걱정되는 이 사랑은 어디서 온 것일까. 헌신적으로 돌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경지다. 초인이 별 건가. 바로 이런 경지가 초인이 아니던가. 자기 한계를 뛰어넘으면서까지 타인을 염려하고 돌보려는 마음, 인간으로서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을까. 지금 우리가 가장 빠르게 잃고 있는 것은 바로 저 헌신과 희생이라는 덕목임이 분명하다. 인간이라는 종이 서로 기대어 살도록 창조되었음에도 우리 사회는 그 기댈 언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주숙의 글을 읽으며 화들짝 나를 깨운다.
등단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길 기원한다.
―심사평 조정은 baramandgurm@hanmail.net
첫댓글 이주숙 선생님, 신인상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져며오지요. 건필하십시요.
이주숙 선생님, 등단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