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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 이 책의 3장의 3절과 4절이 식민지 지배의 방식에 외디푸스가 개입해 있다고 저자들은 본다. 다음으로 식주의(食住衣)에서 식(食)에 연관으로 신체와 토지를 말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지만(non-dit), 유일신앙의 선별(선민의식)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이고, 이를 벗어나는 것은 차히를 선택하는 것이다(달리살기). 공간적으로 분류가(선별) 아니라, 시간적으로 생성과 과정이(선택) 있다. 식민지에서 자주와 자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 생산의 먹거리이고(식량자급자족), 둘째가 인민의 소통에서 남의 글을 빌리지 않는 입말의 정립이다(우리말로 철학하기). 이 다음으로 공동체에서 새로운 용출선과 창안으로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삶의 터전의 토대이다. 따라서 터전에서 셋을 만들자, 셋에 셋을 만들고... 저항의 시작이다. 셋에 가지치기가 아홉을 유기체적으로 만들자, 자주와 자치의 항거이다. 이들의 소통에서 자유가 생장한다. (57LMI)
** 니체를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니체, 도덕을 다루었지만 실재론 또는 경험론의 근거로서 토지를, 생명이 토지 위에서 발생이라는 점을 구석구석에서 말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인류사에서 토지와 더불어 부채에 관한 논의가 먼저이고, 분업에서 불평등과 축적과 교환에서 투쟁과 불협화의 생성이라는 이야기와는 다음 이야기로서 전혀 다른 문제제기일 것이다.
<<삶은 땅, 토지, 지구 위에서 삶이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사실이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새롭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의 원한, 죄의식의 전도된 사고를 깨부수는 과정 이전에 탐구의 바탕은 권능의 의지라기보다 토지가 아니었을까?
들뢰즈와 그의 부인 파니와 함께 쓴 「니체와 바울로, 로렌스와 파트모스의 요한(Nietzsche et Paulus, Lawrence et Jean de Patmos, 1978)」에서 “「묵시록」은 신의 선물(le don, 보시)이라기보다 무한한 부채(une dette infinie)인 셈이다. (50-51)”라고하고 또 “「묵시록」, 이것은 좀비들(les Zombis)의 책이다. (51)”라고 한다. 들뢰즈가 로렌스 덕분에, 결과 또는 목적을 앞에 두는, 미래 예측을 남발하는, 사고가 얼마나 좀비같은 또는 허수아비같은 사고를 하는지를 안다. 이 사고는 나중에 나올 3장8절의 ‘원국가’에서 말할 지배계급의 설정 또는 정립에서 갇혀서 길들여지는 어린애 같은 사고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건물을 허물고 다시 올리는 것과 같은 성장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서 토지와 더불어 살면서 사유를 달리하고, 달리 활동하고, 입말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57MKE)>>
외디푸스라는 참주(절대권자, 파라오든 야훼든)의 등장은 토지에서 삶이 빚을 지고있다는 가설에서 나올까? 인류가 오랜 선사시대의 과정에서 토지에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나로서는 산다는 것은 오랜 과정에서 무상으로 공시태의 상부상조하는 것이었는데, 그 상부상조를 통시태로 이어왔을 때, 아제(다음에)의 삶에 대한, 영혼의 잔존에 대한, 자기성찰이 아닐까? ‘농부는 굶어죽더라도 내년의 씨앗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성찰에 의하면 내일 죽으나 오늘 죽으나 마찬가지 이지만, 다음 해의 농사는 누군가(?) 또는 어느 생명체(들개든, 송골매든)가 살아갈 양식이다. 무상보시는 인간의 자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 좀더 라이프니츠 식으로 보면 모든 모나드들의 연관 속에서 각 모나드들이 알지 못하지만 모나드들 사이의 연관이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 각자에게 직접 관계가 없을 지라도 우연히(아자르, hasard) 일어나고 있는 연관은 확률성이 아니라 필연성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
빚을 갚으려고 하는 것일까, 자연의 순환에 순응일까. 자연에서 역사와 산업사회의 역사는 다른 것 같다. 20세기의 인간은 돈(자본)을 가지고 죽더라도 함께 사는 상부상조는 아니라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자본이 세계와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고, 잔인한 사고이며, 예속과 굴종의 인간성이다. 가지고 있는 자도 예속이다. 자본은 눈이 없고, 유전과 상속이 없어서 소유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소유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법률과 제체이다. (57LMJ)
*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 이유가 점점 분명해진다. 하나의 방향(양식), 하나의 원리가 수학처럼 기호 또는 상징으로 있다고 믿는 유럽인들이 역사적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하나의 방향이 맞다고 하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피비린내였다. 근대 프랑스에서 성바르텔르미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1572년 8월-10월)에서 카톨릭과 캘빈파(위그노), 독일에서 30년전쟁(1618-1648)에서 카톨릭과 루터파(감리교) 싸움은 변증법의 투쟁이 아니라, (싯달다와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완성자(부다, 신)를 형상으로 세우면 안 된다’고 숙고하고 집중하고 하였는데) 참주의 지위를 서로 차지하려고, 또한 인민과 재산(부)을 차지하려는 간악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세 달이든 삼십년이든 중세의 마남(魔男)사냥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마남사냥(魔男)의 시발은 예수를 크리스토스(메시아)로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추방한 삼신교의 등장에서부터, 우상파괴, 동서로마 분리의 가짜문서, 십자군 전쟁의 반대파인 알비 도시의 대학살, 십자군 전쟁 마지막에 남은 성전 기사단의 화형 등에서 연속으로 있어왔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로마 교황청의 마남사냥으로 이어지는 브루노(유일한 순교자인)를 산채로 화형 시켰고, 갈릴레이를 재판했던 악마들의 야합(카르텔)이 있었고, - 아직도 교황청이 이런 잘못을 시인하기 않듯이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군사 쿠테타처럼 윤석열 대통령과 검찰집단의 검찰독재에서도 잘못들을 시인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현세에도 인민의 피골을 빨아먹는 드라큐라 같은 신앙자들이 존속하고 있다. 일제의 공비(共匪, 빨치산)에 대해, 해방 후 독립운동가에 대한 여러 테러사건들, 제주도 4.3, 남북전쟁전후에 보도연맹, 조봉암, 인혁당, 남민전, 전두환 쿠데타에 항거하다가 사라져간 의문사자들에 이르는 마남(魔男)사냥이 열거하기가 부끄럽고 참담하다. 누가 마녀(魔女)사냥이라고 번역 했던가? 마녀사냥이란 용어는 마남사냥을 감추기 위한 것이고, 빨갱이란 파랭이의 잘못을 감추려는 용어이다. 달리말하기, 빨강이는 선업을 쌓는 자들이고 파랭이는 야바위꾼 사기꾼으로 남을 현혹하여 사적이익을 챙겼던 저 악남사냥자들과 같으며, 지금도 악남사냥을 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고 신주처럼 모시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잔재이며 미제의 주구들이 마남사냥할 수 있는 도구이다. 이것으로부터는 자유도 평등도, 자주도 자치도 없고, 최종심급인 인민도 없다. 예속과 굴종이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이뭣고”가 무엇이냐고 묻는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이뭣꼬”가 무엇에 쓰였으며, 쓰이고 있고, 과정이 어떠한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물음을 평생 가지고 있었던 이는 고다마 싯달다와 소크라테스였다. 우리역사 속에서는 서산대사 이래로 화두(話頭)라는 용어로 남아있다.철학사는 이런 무엇, 왜, 과정을 묻는 방식으로 달리말하기, 달리 실천하기를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강조해왔던 이유가 있다. 이런 철학의 방식은 스토아에서, 플로티노스, 브루노, 루소, 벩송을 거쳐서 들뢰즈가 강조한 것이다. 독일철학에서 이런 과정에 절대자로 이르는 마남사냥에 의문을 품은 철학자로 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들 수 있다. 이들이 자연의 자발성에까지 이르지 못했기에 낌새를 알아챈 철학자들이라 부른다. 자연의 자발성에서는 신의 현존이란 없다. 자연의 현존이란 자연의 자기 생성의 다양한 발현이며, 더불어 인간의 창발이 있다. 크리스토스를 내세우는 것은 미래의 기표(기호, 상징, 관념)를 현실로 앞당기는 것으로 이는 벩송은 착각이라 하고, 맑스주의자들은 사기(기만, 허위의식)이라 하며, 정신분석을 하는 이들도 파라노이아 또는 망상이라 한다. 심하면 다미 선교회 휴거 소동처럼 착란을 일으킨다.
친일파 친미파라는 용어를 쓰는 이들이 마남사냥꾼에 비슷하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상대의 티끌을 과장하여 대들보로 만드는 자들도 윤석열과 한동훈의 검사집단이다. 이에 철(절후)모르는 태극기부대 등은 문재인조차 빨갱이라 떠드는 것도 마남사냥에서 배워 온 것이다 이 잘못된, 악마의 짓을 자행하면서 자유니 민주를 말하는 그들이나, 자기들의 잘못을 포장하는 일부 언론들도 마찬가지이다. 윤석열이 말하는 친일파란 우리 기준으로 보면 부일파 또는 숭미파이다. 또는 종일파와 모미파이다.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는 달리 실천하기의 이법(rasion)이며 자연(nature, 본성)이다. 혁명은 저항을 통하여 달리 말하기, 달리살기이다. 인민의 저항에 대해 상층의 저항도 거세다고 벩송은 말했다. 그럼에도 상층의 저항의 각질을 뚫고, 어느 시기에도 있었으며 어느 곳에서도 솟아나는, 인민이 분출하는 것을, 들뢰즈는 용출선이라 한다. 윤석열의 책임지지 않으려는 앞뒤 없는 용어들의 남발, 조국의 딸에 비해 한동훈의 딸, 양승태의 사법농단의 무죄 등등으로 계속되는 카르텔의 탐만치에서, 그 각질에 균열을 내고 용출선이 솟아나고 있다. 각질 위에서 평면으로 흐르는 시기는 긴 역사에서 그리 흔치 않았다. 이 시대 이 영토에서 솟아나고 흐르고 있는 순간이다. (57LMIJ)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59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162.
제3장 야생인들, 야만인들, 문명인들 Sauvages, barbares, civilsés 163-324.
01절 등기를 행하는 사회체 Socius inscripteur 163-170
02절 원시 토지기계La machine territoriale primitive 170-180
03절 외디푸스 문제 Problème d'Oedipe 181-195.
04절 정신분석학과 인종학 Psychanalyse et ethnologie 195-217
05절 영토의 표상[재현] La représentation territorial 217-227
* [3장 §3과 §4.에서 외디푸스가 현존(존재)이 아니라 형상적 기호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도 그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왜? 인간은 제도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5까지는 자연생산 즉 야생의 사회체를 다루고, §6-§8은 전제군주제 즉 야만의 사회체를 다룰 것이며, §9 이후에는 자본주의에서 즉 문명화된 형성체를 다룰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5) 사회형성체의 다양함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맑스의 노동의 생산양식과 다른 개념으로 욕망의 생산양식을 구해내려 한다. 그러자면 몸의 노동(노동은 생존인데 비하여)이 아니라, 몸의 활동성(activité, 생산 분배 소비 전체) 자체를 분석해야 한다. (40UKC)]
3장 5절. 영토적[토지의] 표상[재현] La représentation territorial - (원 217-227)
3.5.1. 표면의 요소들 Ses éléments en surface -
표상[재현]이 언제나 욕망하는 생산의 억압-억제라 해도, 그것은 고찰된 사회 형성체에 따라서 아주 다른 갖가지 방식으로 있다. 표상의 체계는 그 심층에, 억제된 표상표현, 억제하는 표상작용, 옮겨진 표상내용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이것들을 현실화하는 심급들은 가변적이고 체계들 속에 이동들(migrations)이 있다. (217) [형성체: 야생, 야만, 문명..., ](20세기 후반에서는 규소의 시대로서 “문화”를 말하게 될 것이다)
사회기계들과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에서, 여러 경우들에 따라[네 가지 설명] 다소 간의 친화력[근친성]의 계수(係數)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모든[네 가지] 점에서 주요 인자(le facteur)는 사회 등기의 전형 또는 종류, 그 알파벳, 그 문자들이다. 사회체 위의 등기는 사실상 이차적인 “소위 말해서” 억제의 집행자이며, 이 집행자는 반드시 기관없는 신체의 욕망하는 등기와 또 기관없는 신체가 이미 욕망의 영역에서 행하고 있는 일차적 억제와 관련있다. (217-218)
따라서 각각의 경우에 억제장치의 자연과 욕망하는 생산에 대한 이 장치의 작용들을 평가하려면, 심층에서조직되는 재현(la représentation, 표상작용)의 요소들뿐만 아니라, 재현 자체가 표면에서, 즉 사회체의 등기의 표면에서, 조직화되는 방식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218)
3.5.2. 부채와 교환 Dette et échange -
사회체는 교환주의자가 아니며, 사회체는 등기자이다. 즉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재료로 하는 신체를 표시하는것이다. 신체는 땅에 속해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앞서 본바와 같이,부채의 체제(le regime de la dette)는 야생적 등기의 요청들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나온다. (218)
부채는 확대된 부자관계와 더불어 결연을 조성하고(composer), 밤의 강도들을 억제하고는 그 위에 외연을 지닌 체계(표상작용)를 형성하고 벼려서 만든다. 결연-부채는, 니체(Nietzsche, 1844-1900)가 인류의 역사이전시대의 노동으로써 묘사한 것에 응답한다. 즉 맨살에 새겨 넣은 가장 잔인한 기억술 사용하는 것은, 생명-우주적인 오랜 기억을 억제하고 그 위에다가 말투들의 기억을 강요하기 위하여 이다. (218)
모스(Mauss, 1872-1950)가 열어놓은 채 남긴 물음: ‘부채는 교환보다 근원적인가?’ 그렇지 않고 교환의 한 양식, 교환을 위한 수단인가?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이 물에 답하여 이 물음을 해결한 듯했다. 부채는 하나의 상부구조, 즉 교환의 무의식적인 사회적 현실이 돈으로 바뀌는 의식적 형태이다. (219)
도둑질(le vol)은 증여와 반-증여가 교환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 욕망은 교환을 모른다. 욕망은 도둑질(le vol)과 증여(le don)만을 안다. 가끔 이 양자는 원초적 동성애의 영향을 받아 서로 얽히기도 한다. 여기서 반교환주의적인 사랑의 기계가 출현하는데, 이것을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는 추방자들(Exiles, 1918)(희곡)에서,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는 로베르트(Roberte)에서 재발견할 것이다. “굴리만체바(les Gulimanceba)족의 이데올로기에서는 ... [예 에서]”욕망이 교환을 모르는 것은 교환이 욕망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219)
교환이 금지되고 추방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근원적 현실이라는 것의 증거가 전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본질적인 것은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등기하는 것, 표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220)
그러한 공허한 형식은 선[앞선]의식을 규정할 수는 있어도, 무의식을 규정할 수 없음은 확실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무의식이 재료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확실히 무의식이 공허한 형식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의식이 언제나 이미 작동하는 기계, 욕망하는 기계이기 때문이지, 식욕부진(anoréxique)이 구조인 때문이 아니다. (220)
3.5.3. 교환의 개념작업의 다섯 가지 전제[요청]
- Les cinq postulats de la conception échangiste -
기계와 구조 사이의 차이는, 사회체의 교환주의의 구조적 개념작업을 은연중에 부추기는 전제들(postulats, 요청들) 속에서, 구조가 기능하기에 알맞도록 도입하는 중화제들(les correctifs)과 더불어, 나타난다. (220)
첫째로, 친족구조들에 있어서, ... 사실은 횡적인 결연들과 부채 더미가 외연을 가진 체계에서 확대된 부자 연관들을 좌우하지, 이 연관이 거꾸로 되지는 않는다. (220) [결연과 부채가 부자관계를 좌우한다. 즉 외디푸스는 나중이다.]
둘째로, 외연을 가진 체계를 있는 그대로, 즉 자연적[물리적] 체계(système physique)로 보지 않고, 논리적 조합 장치로 보기 쉽다. ... (220) [결연 확장 체계는 논리적 체계라기보다 강도성들이 분배되어 있는 자연적[물리적] 체계(강도)이다.]
셋째로, 교환주의의 구조적 개념작업은 그 원리들에 있어서 초기의 가격 균형, 등가, 동등을 요청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 [친족(부자)체계보다] 확장[외연]체계가 필연적으로 개방적 성격으로 나타난다. 이는 마치 잉여가치의 원시적 메카니즘이 코드의 잉여가치처럼 나타난다. (221)
레비스트로스와 리치의 논쟁: 카친(kachin)족의 결혼에 관하여, .. 레비스트로스가 믿는 것처럼, 불균형이 병리적이고 귀결에 속하는 것인지, 또는 리치가 생각한 것처럼, 불균형이 기능적이고 원리적인 것에 속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221)
넷째로, 교환주의[레비스트로스] 생각은 통계학적으로 닫힌 체계를 내세우고, 구조를 심리적 확신(원의 닫힘에 안도감[순환론])으로써 뒷받침하지 않을 수 없다. (221)
횡적인 결연들(les alliances)과 이어지는 세대들에 따라서 부채덩이의 본질적 개방뿐만이 아니라, 또한 통계학적 형성작업들과 이것들의 분자적(moléculaire) 요소들 사이의 연관은 구조적 모델에 부적합한 한에서 단순한 경험적 실재성에 귀착되는 것을 발견된다.
다섯째,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경제정치학을 주장한 데 못지않게 교환주의 인류학에 무거운 짐이 되는 하나의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 그 전제란, 사회적 재생산을 순환의 영역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22)
“결국 생산연관들[생산관계]의 관점에서, 여성들의 순환이 노동력의 재분배로 나타나지만, 사회가 그 경제적 기반에 관해서 갖는 이데올로기적 표상에 있어서는, 이 양상이 교환 연관 앞에서 지워진다[사라진다]. .. 인종학은 재생산의 과정에서 순환 과정을 고립시킴으로써, 이런 표상을 비준하고”, [인종학은] 이 표상의 식민지적 외연 전체를 부르주아 경제학에게 부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보기에, 본질적인 것은 등기의 요구들에 엄밀하게 종속하는 교환이나 순환이 아니라, 신체 속에 등기의 불줄기, 등기의 알파벳, 등기의 부채덩이를 지닌 등기자체이다. 등기들을 주제하는 단단한 기계적 요소가 없이는, 유연한 구조는 결코 기능하지 못하며, 순화하지도 않을 것이다. (222)
3.5.4. 목소리, 그리기, 눈: 잔혹극 Voix, graphisme et oeil: le théâtre de la cruauté -
[목소리(구강) - 손(기록) - 눈(고통? 즐거움이 아니라) (감각기관들의 작동인데) - 이런 생각을 한 들뢰즈의 사유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 여기서 눈은 기관으로보다 총괄적 각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고통과 즐거움은 감각에서 오지만 내재적 정서와 감화와 연관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40UKC)]
야생의 형성체들은 구두(orale, 구강)적이고, 음성적이지만, 문자의 체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땅위에서 춤, 칸막이에 그린 소묘, 신체 위에 표시[문신] 등은 하나의 문자 체계, 하나의 지리-문자 체계, 하나의 지리학(géographie)이다. (222)
르화-구랑(Leroi-Gourhan, 1911-1986)은 야생의 등기 또는 토지 표상의 이질적인 이 두 극, 즉 목소리-청취의 짝과 손-그리기의 짝을 훌륭하게 묘사했다.그런 기계가 어떻게 기능하는가? 왜냐하면 기계는 기능한다. (223) [이 짝은 대칭이 아니라 비대칭일 것이다.]
“처녀의 변형과정이 충분히 효과적이기 위하여 ... [이렇게 시작하는 이 인용문은 르화 구랑의 설명을 보충한다.] ... 신체에 표시하는 등기는 여기서 메시지의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신체 자체에 작용하는 행동도구이다‥… 기호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명령하며, 기호를 만드는 장인[기술자]은 단순한 모방자이기는커녕, 신적인 일에 견줄만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 (223)
두 측면(목소리-청취, 손-그리기)에, 세 번째 측면, 즉 표시의 세 번째 요소를 첨가해야 하지 않을까? 즉 목소리-청취, 손-그리기 이외에 눈-고통을 첨가해야 하지 않을까?참는자는 고통[비탄]의 의례들에서 말하지 않고, 그 말투를 받아들인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리는 행동 하에서 수동적이고, 기호의 스탬프를 받아들인다. 그의 고통을 지켜보는 눈을 위하여, 즐거움이 아니라면 그의 고통은 무엇인가? 이 눈은 집단적 또는 신적인 눈인데, 이 눈은 복수할 생각으로 생기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에 새겨진 기호와 얼굴에서 나온 목소리사이의 – 표시와 가면 사이의 연관을 파악하는 데 익숙할 뿐이다. 코드의 두 요소 사이에서 고통은 눈이 끌어낸 마치 잉여가치와 같다. 그 눈은 신체를 향한 능동적 말투의 효과를 파악하며 또는 신체가 작용 받은 한에서 신체의 반작용도 파악한다. 바로 거기에서 부채 체계 또는 토지적 재현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223-224)
말하거나 낭독하는 목소리(voix), 맨살에 찍힌 표시(signe), 고통의 향유(jouissance)를 끌어내는 눈(oeil), 이것이 공명과 잔영의 토지를 형성하는 야생의 삼각형(triangle sauvage)의 세 측면이다. 이 토지가 잔혹극(théâtre de la cruauté)이며, 이것은 분절된 목소리, 그리는 손, 평가하는 눈의 삼중 독립을 의미한다. 따라서 눈-손-목소리, 마술적 삼각형이다. (224)
(클라스트르의 찬탄할만한 원문에서 말하기를) “그 돌은 예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너무 쉽사리 베는 대나무 조각같은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적당한 돌을 고르려면 판단이 빠른 눈(coup d’oeil)이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예식의 장치 전체는 결국 하나의 작은 돌에 환원된다‥… 노동했던 피부, 희생된 대지, 유일하고 동일한 표식(marque)이다.”
3.5.5. 니체 - Nietzsche 224 -
현대 인종학의 위대한 저서는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의 증여론(Essai sur le don)(1925)이기보다, 오히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도덕의 계보(Généalogie de la morale)(1887)이다. 왜냐하면 도덕의 계보의 둘째 논문은“영국식으로” 교환 또는 이익을 고찰하는 일로 온통 집어치우고 원시 경제를 부채의 항목들로, 채권자-채무자의 연관에서 해석할 것을 시도하여 비길 데 없이 성공한 책이기 때문이다. (224)
교환과 이익을 심리학에서 제거하는 것은 이것들을 구조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가 아니다. 니체는 옛 게르만 법률과 약간의 힌두 법률 같은 빈약한 자료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모스처럼 교환과 부채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망설이지 않는다. (바타이유도 니체의 영향을 받고 니체를 따라 이 선택에 있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니체 이외] 사람들은 등기, 코드, 표시라고 하는 원시사회의 근본문제를 그토록 날카롭로운 방식으로 제기하지 못했다. (224-225)
이러한 기억[개체 생명의 기억이 아니라 사회 집합적 새로운 기억]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부채를 통해서이다. 열려있는 가동적인 그리고 유한한 부채 덩어리를 통해서 이다. 다시 말하면 말하는 음성, 표시된 신체, 향유하는 눈. 이 세 가지 것의 예외적인 복합체(cet extraordinaire composé)를 통해서이다. (225)
부채는 등기에서 곧바로 흘러나온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사람들은 복수도 원한도 불러내지 못한다(복수와 원한은 이 토지위에서 솟아나지 않으며, 외디푸스도 솟아니지 않는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순지무구한 자들이] 그의 몸체 표시의 각인을 받는다는 것은, 그러한 것은 음성과 글체가 각각 자율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쾌락을 맛보는 눈(l’oeil)이 있다는데서 온다. (225)
니체는 말하지 않았지만, 중요한가?[대수 롭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그는 부채의 무서운 방정식, 즉 ‘생기게 했던 손해 = 감당해야할 고통’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묻기를, 범죄자의 고통이 그가 생기게 했던 손해에 “동등가”로 쓰일 수 있다고 어떻게 설명하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고통으로 지불할 수 있는가? 여기서는 [범죄자의] 고통에서 즐거움을 끌어내는 눈을 간청해야(invoquer)한다(이것은 복수와 아무 연관 없다). 이 눈은 니체가 평가하는 눈이라 부른 것이요, 잔인한 광경을 즐기는 신들의 눈이다. “벌이 크면 그 만큼 축제 기분은 고조된다!”(225-226)
간단히 눈은 자기가 바라보는 고통으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끌어내며, 이 잉여가치는 죄인이 어긴 결연의 음성과 그의 몸에 충분히 침투되지 못했던 표시사이에서 단절된 연관을 보상한다. 죄란 소리-문자(phono-graphie)의 연결을 파괴하는 것이며, 벌을 구경함으로써 회복한다. 이것이 원시적 정의(justice primitive)인데, 영토적 표상은 이 모든 것을 예견했다. (226)
3.5.6. 영토 체계의 죽음 La mort du système territorial -
영토적 표상은 고통과 죽음을 코드화하면서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 다만 자기 자신의 죽음이 밖으로부터 자기에 오는 방식을 제외하고서. (226)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그들은(Ils) 숙명처럼 원인 없이, 까닭 없이, 눈치 없이, 핑계 없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번개처럼 빨리 거기와 있다. 너무 무섭고,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자신만만하고, 너무 달라서(autres)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작품은 형식들을 본능적으로 창조하고, 자국들을 새기는데 있다. 그들은 예술가들 중에 가장 기계적이고 가장 무의식적인 예술가들이다. ... 조직자로서 태어난 그들은 잘못, 책임, 공손을 알지 못한다. ... 양심의 가책이 싹튼 것은 결코 그들에게서가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잘 알려진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이 없었더라면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망치의 타격아래, 그들의 예술가적 참주제의 충격아래, 경이적인 양의 자유가 세계에서 또는 적어도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사라져 잠재적 상태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없었더라면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는 이 무서운 식물은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다.” (226-227)
여기서 니체는 절단, 파괴, 비약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숙명마냥 들이닥친 그들은 누구인가? .. 그것은 국가의 창설자들이다. 니체는 다른 절단들도 밝힐 것이다. 즉 그리스 도시국가의, 크리스트교의, 민주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인간주의의, 산업사회의, 자본주의의, 사회주의의 절단들을 밝힐 것이다. (227)
성령의 국가건 세속의 국가건, 참주국가건 민주국가건, 자본주의 국가건 사회주의 국가건 유일한 국가만이 있었다. 즉 “연기를 뿜으며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국가-개(le chien- Etat)가 있었다. 그리고 니체는 어떻게 새로운 사회체가 진행되는지를 암시한다.
“이때부터 해방의 전망은 단번에(une fois pour toutes 결정적으로) 비관적 안개 속에 사라지고, 절망의 시선은 철의 불가능성 앞에서 낙심한다.‥…” 땅[토지]은 소외된 자들의 요양원이 된다. (227) (40UKC) (3:26, 57LMH) (9:28, 57MKF) (10:03, 57M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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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5. 영토의 표상[재현] La représentation territorial 217-227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독일의 철학자.
1872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 프랑스 사회학자. “프랑스 인류학의 아버지” 증여론(Essai sur le don, 1925), Sociologie et anthropologie, 1950(서문 레비스트로스)
1882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 아일랜드 소설가, 문학비평가. 추방자들(Exiles, 1918)(희곡), Ulysses, 1922,
1897 바따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 프랑스 작가, 철학자, 소설가, 시인, 수필가, 사서. La Part maudite[1949], précédé de La notion de dépense (1933), avec une introduction de Jean Piel, Paris, Éditions de Minuit, coll. « L'Usage des richesses », 1949 ; réédition Paris, Le Seuil, coll. « Points », 1967
1905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Nietzsche et le cercle vicieux, Mercure de France, 1969.
1906 포티스(Meyer Fortes 1906-1983)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서아프리카 사회에 대한 연구. Meyer Fortes, in Recherches voltaïques, 1967, 135-137.
1908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1908-2009), 프랑스 철학자. 구조주의자. L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 (1949) Sociologie et anthropologie, 1950. Anthropologie structurale (1958), Le Totémisme aujourd'hui (1962) 야생적 사유(La Pensée sauvage (1962), 신화학(Mythologiques (tétralogie ; 1964-1971).
1910 리치(Edmund Ronald Leach, 1910-1989), 영국 인류학자. 그는 말리노프스키(Malinowski, 1884-1942)의 강의를 들었다. 1차대전 중에 버마 여행.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1965), Rethinking Anthropology, 1961)(fr. Critique de l’anthropologie, 1968).
1911 르화 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 프랑스 인종학자, 고고학자, 역사가. 선사시대전공. Le Geste et la parole, technique et language, Alvin-Michel, 1964, pp. 270 sq., et 290 sq. (AO 223)
1931 까르트리(Michel Cartry, 1931-2008) 프랑스 인류학자, 아프리카 연구자. 종교 인류학 전문가.
1934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 프랑스 인종학자, 인류학자. 남아메리카 탐구자. "L'Arc et le panier", L'Homme, avril 1966.
1935 떼레 (Emmanuel Terray, 1935-) 프랑스 인류학자. 정치 운동가. Le Marxisme devant les sociétés primitivies, Maspero, 1969, p. 164.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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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리만체마(Le "Gulimancema", ou (en français)"gourmantchéma")는 나이제리아-콩고 계열 (nigéro-congolaises) 입말의 한 가지인 오티-볼타(oti-volta) 입말이다. 버키나파소, 토고, 베냉, 나이제리아에서 주로 굴리만체바(les Gulimanceba)족들에 의해 사용된다.
카친족(The Kachin peoples, lit. '"red soil"'), 보다 정확하게 카친 웅퐁족(the Kachin Wunpong이며 카친족 연합이라 불린다. 참조: 리치(Edmund Ronald Leach, 1910-1989)의 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1965).
과야키족(Les Guayaki), 파라과이 동부의 열대 숲에서 20세기까지 몇몇 가족을 이루며 노마드 무리로 살며 사냥과 수집을 하는 원주민. Clastres, P., Ethnologie des indiens Guayaki. La vie sociale de la tribu, L’Homme, vol. 7, n°4, 1967, 5-24
(11:01, 57MKF) (11:07, 57M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