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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산으로 향했다. 길이 좋아 도착이 예정된 시각보다 이르다. 서로 맞닿을 듯 늘어선 산줄기 사이 좁은 적성면 설마리 계곡 '감악산출렁다리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저 도착한 부지런한 친구와 만났다.
주차장 가장자리에 능선 위의 출렁다리로 인도하는 나무계단이 놓여 있다. 밑도 끝도 없이 그 산행 들머리로 들어서서 능선마루까지 이어진 고층빌딩처럼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정자 하나가 자리해 있는 능선마루로 올라서자 설마천 계곡 건너편 감악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으로 놓인 출렁다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개에 묻혀 흐릿한 감악산 주봉 능선 뒤에서 비치는 햇빛이 김이 잔뜩 서린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듯하다. 비교적 이른 아침이라 산객 한 두 명만 눈에 뛸 뿐이다. 무채색 수묵화 같이 안개와 어우러진 산중 깊은 계곡 위에 가로질러 놓인 붉은색 난간의 출렁다리가 이색적이다.
한발 한발 다리 가운데로 발을 옮기자 천길 허공 위 출렁다리는 상하로 작게 출렁인다. 다리의 안전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터이고 양옆으로 가슴 높이 케이블 난간도 있지만, 가랑이 사이 허벅지와 아랫배에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듯 찌릿한 전율이 흐른다. 난간 밖 발아래 아찔하게 깊은 계곡을 애써 외면하고 앞만 보면서 잰걸음으로 서둘러 다리를 건넜다.
건너편 안내판은 이 출렁다리가 설마천 위를 가로지르는 길이 150미터 폭 1.5미터의 국내 최초 'Under curved suspension bridge'로 성인 900명의 무게를 견디도록 설계되었다는 설명이다. 6.25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3일 동안 저지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를 기려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로도 명명했단다.
여느 현수교(懸垂橋)와 달리 인장력을 감당하는 주 케이블을 도와 압축력으로 지지해주는 탑이나 교각이 없고 양쪽의 앵커리지가 다리의 하중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다.
범륜사(梵輪寺) 쪽을 하산 길에 들르기로 하고 우측 산허리를 도는 등산로를 택해 발을 옮긴다. 이정표가 계곡능선길이 2.1km 이어진다고 한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기슭 바위 틈새에 하늘로 쭉쭉 뻗은 참나무 나목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산허리를 휘돌며 놓인 나무데크 길을 잠시 오르내리며 지나고 너덜바위로 덮인 계곡 옆을 따라 오른다. 포근한 날씨에 낙엽 깔린 계곡은 계절을 잊게 한다.
계곡 옆으로 간간이 3미터여 지름으로 빙 둘러 돌을 쌓은 방공호처럼 생긴 숯가마 터가 남아 있어 눈길을 잡는다. 참나무가 많아 숯을 굽는 가마가 많았을 것이다.
계곡 길은 능선으로 올라선다. 지나온 계곡은 안개에 덮였고 앞쪽 봉우리는 머리를 쳐들어야 눈에 들어온다. 본격적으로 가파른 길로 접어들기 전 능선 우측의 완만한 사면에 보리암이 자리한다. 어린 나무 가지에 맺힌 물방울이 구슬처럼 영롱하고 앵두처럼 작고 귀엽다.
산봉우리 사면을 따라 삼각뿔 모양의 돌탑 군락이 자리한 보리암을 잠시 둘러봤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는 각기 손길이 분주하고 야트막한 막사 옆 나무에 매인 백구는 느긋하다. 아이 주먹 크기의 텃새 한 마리는 등산로 옆에 앉아 산객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리저리 깡충거리며 땅을 쫀다. 겨울 막바지 응달에는 잔설이 남아있어 발밑에서 자박자박 소리를 낸다.
가파른 능선을 한 번 올라서면 악귀봉, 장군봉, 임꺽정봉이 차례로 산객에게 각자 준비한 비경을 내놓는다. 소뿔처럼 하늘로 곧추 솟은 악귀봉에 올라서니 안개가 낀 절벽은 높이를 가늠할 수 없고, 뒤로 설마리 계곡 위에 놓인 371번국도 설마4교, 앞으로 장군봉과 감악산 주봉 등이 눈에 들어온다.
통천문 바위 옆을 지나 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장군봉도 지나서 생긴 모양이 매와 비슷해서 매봉재로도 불린다는 해발 676미터 임꺽정봉에 올랐다. 산객 한 분은 바위 무덤 위에 배낭 스틱 자켓 등을 내려놓고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있다. 빛, 능선, 바람, 안개가 시시각각 빚어내는 풍경의 한 순간을 포착하려는 모습이 강가에 묵묵히 서서 물속을 주시하며 호시탐탐 물고기를 쪼려는 외가리와 흡사해 보인다.
봉우리 아래 의적 임꺽정이 관군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임꺽정 굴은 둘러볼 생각을 못하고 감악산 정상으로 발을 옮긴다. 산행 초입 뒤따르던 산객 한 분과 동행을 하게 되면서 말을 섞고 세상사 얘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이 흩어지고 머리가 어수선해졌다.
감악산은 비슷한 높이의 주봉들이 평탄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악산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고 산행 내내 몸이 편안하다. 널찍한 해발 675미터 감악산 정상엔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쬐고 있다.
성모 마리아상이 두 팔을 아래로 펼친 채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서있는 정상 북동쪽 건너편 작은 봉우리를 둘러보았다. 그 봉오리 아래 자리한 여느 봉우리 부근에 보이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의 방공호는 예로부터 성이 많은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적성(積城)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감악산 정상에 자연석을 쌓아 올린 키 높이 단 위의 3층식 돌 기단을 받침 삼아 서 있는 감악산비는 비신의 글자가 모두 닳아 없어졌다. 설인귀사적비, 빗돌대왕비, 광개토왕비, 백비(白碑)등 그 정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이유이다.
1666년 미수 허목은 “석단 위 비석의 글자가 마멸됐다”고 기록, 1982년 동국대 박물관조사단이 다섯 번째 진흥왕순수비라 추정, 2019년 서예전문가 손환일 박사가 비신에서 '光, 伐, 人' 세 글자를 찾고 진흥왕이나 진평왕 때 조성된 신라고비라고 주장, ...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비의 정체와 관련해서 언론 보도도 여럿 확인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듯 비문이 없는 비석의 진짜 이름도 알 길이 없어 현재로선 '몰자비(沒字碑)’인 셈이다. 어찌 되었건 1400여 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산객들에게 노출되어 손때을 타고 있는 것이 의아할 뿐이다. 북한산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가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과 극히 대조적이다.
갓을 쓴 정상석 바로 뒤편 가림 막 뒤로 족히 축구장 반 넓이의 땅을 깊숙히 파놓았다. 기존 통신탑을 대체하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시설물을 세우려는 공사인지 알 수가 없다. 조선 때 백악, 관악, 치악, 송악과 함께 사시사철 제사를 지내는 ‘오악(五嶽)’의 하나요, 지금도 경기오악의 하나로 꼽히는 감악산, 그 정상이 저리 파헤쳐지고 인공시설물들이 들어서고 있으니 산신들이 있었다손 어디론가 다 떠나버리지 않았을까.
공사장이 옆으로 내어준 좁은 잔교를 지나 까치봉 쪽 하산 길로 접어든다. 까치봉 너머로 낮은 구릉과 어우러진 적성면의 마을과 논밭, 안개에 묻혀 희미한 임진강 물줄기 등이 펼쳐져 있다.
까치봉을 지나고 완만한 능선를 따라 내려가다가 범륜사 쪽으로 산허리를 휘돌다 보면 감악산계곡 쪽으로 뻗다가 우뚝 멈춰선 곳에 운계전망대가 자리한다. 전망대에 서면 지나온 감악산 준봉들과 능선, 범륜사, 운계폭포, 출렁다리 등이 아래 위로 한눈에 들어온다. 범륜사 옆을 지나는 계곡에서 층층 연이어 물줄기를 떨구는 높고 낮은 폭포가 장관이다.
범륜사는 1970년 옛 운계사 터에 재건한 사찰이라 한다. 대웅전 극락전 범종각 등 전각과 함께 중국 하북성 아미산에서 나는 백옥으로 조성하여 1995년에 봉안했다는 높이 7미터 십일면관음상이 유려하다. 돌거북을 기단 삼아 서있는 범륜사사적비 옆에 나란히 서있는 자연석에 새긴 '世界平和' 네 글자를 몇 번 돌아보며 산사를 빠져 나왔다.
오후로 접어들며 출렁다리와 가까운 사찰 주변은 행락객들과 산객들이 제법 많이 늘어나 있다. 출렁다리를 건너와서 전망대에 올라서니 구름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감악산 봉우리 위로 뭉게구름 한줌이 꽃송이처럼 피어올랐다. 긴 계단을 내려서서 원점회귀 산행을 마무리한다.
에필로그...
감악산 산행을 마치고 지척에 있는 6.25 참전 영국군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임진강 중류 남쪽에 위치한 적성(積城)과 감악산 곳곳엔 전흔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삼국간 남과 북으로의 진격과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혈투의 장이었고, 나당전쟁 때는 '칠중성 전투'의 격전지였으며, 6.25 때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군과 중공군 사이 '설마리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감악산 서쪽에 자리하는 적성군 설마리(雪馬里) 영국군이 '캐슬고지'라 일컫던 칠중성은1951년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싸운 곳이다.
산기슭을 끼고 설마천이 흐르는 곳, 1957년 세운 전적비에 더하여 2014년에 조성된 '영국군 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는 평화의 문, 추모 조형물, 영국군 동상, 글로스터교, 칸 중령 십자가 등을 비롯해서 벤치와 숲이 자리하고 있다.
'실마리 전투 역사 안내판'의 임진강 격전 약도에는 영국군 진지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화살처럼 표시된 중공군 진공로가 인해전술로 몰려드는 중공군의 모습을 보는 듯 소름이 끼친다.
피아간 치열한 격전은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봄을 맞은 산천에 지천으로 핀 진달래와 총탄에 피흘리며 쓰러지는 젊은 병사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글로스터 부대는 대원 652명 중 전사 59명, 포로 526명, 탈출 67명 등 큰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
영국군이 3일간 중공군의 진격을 필사의 투지로 저지한 것이 아군이 서울 방어선을 구축하고 중공군을 패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참전을 위해 사우스햄튼 항에서 한국행 수송선에 오르는 영국군, 적의 공세에 대비해서 구축한 235고지 진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젊은 병사들, 쪼그려 앉아서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젊은 대원, 1953년 포로 송환으로 풀려나 아내 캐서린 4살 딸과 재회하여 포옹하는 소총수 로날드 그린, ... 기록사진 조형물 하나하나가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한다.
너른 잔디 위로 내리는 햇볕은 봄날처럼 따사롭고, 영국군 사진 조형물 뒤 공원 숲에 나들이 나온 젊은 부부와 어린 딸 가족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인다.
휴전 67년째, 종전과 진정한 평화를 위해 도처에 평화의 문을 세우고 끊임없이 대화의 문을 두드리지만 쌓이는가 싶던 신뢰는 번번이 허물어지고 소통의 문은 빼꼼이 열리다가 이내 더 굳게 닫혀버리는 현실이다.
'광막한 중원에 피빛 하늘 밑 / 원수와 싸우는 산마루에
흰 구름 서리 듯 사랑의 꽃 / 아카시아 꽃잎 피네...'
얼마 전 텔리비젼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젊은 여가수가 부른 노래 <아카시아 꽃잎 필 때>를 들으며 알 수 없는 깊은 전율(戰慄)을 느꼈었다.
'꾸냥(姑娘)의 애타는 호궁(胡弓) 소리'
'자유의 종소리 들리는 날 양자강 물결은 왜 우느냐' 등 노래 가사는 동족의 적을 애둘러 중공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적성의 감악산과 영국군 참전 추모공원에서 6.25가 동족상잔의 전쟁일 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지켜내려는 세계 16개국 UN군과 이를 무너뜨리려는 북중연합군 젊은이들이 피 흘리며 생명을 바쳐 싸운 비극이었음을 새삼 목도했다.
감악산 방공호, 백비, 칠중성, 실마리 전투, 영국군 참전 추모공원 등을 품은 적성의 산과 들엔 아직도 원혼들의 탄식 소리가 멈추지 않은 듯하다. 출렁다리가 놓이고 감악산이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듯, 적성은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성소(聖所)나 다름없어 보인다.
#산행 #감악산 #임꺽정 #장군봉 #설마리 #적성 #영국군 #범륜사 #경기오악
첫댓글 접경지 북쪽은 위성지도가 표시되지 않는다. 6.25 전쟁에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공, 터키, 태국,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16개국에서 연인원 194만여 명이 참전했는데 이 중 전사자 3만 5천 7백여 명, 전상자 11만 5천여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