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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89권
79. 선달품(善達品)을 풀이함
【經】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은 모든 법의 4모양[法相]을 잘 통달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변화한 사람[化人]이 음욕[婬]ㆍ성냄[怒]ㆍ어리석음[癡]을 행하지 않고,
물질 내지는 인식을 행하지 않으며,
안팎의 법을 행하지 않고 모든 번뇌와 결사(結使)를 행하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법ㆍ무루(無漏)의 법과 세간(世間)의 법ㆍ출세간(出世間)의 법과 유위(有爲)의 법ㆍ무위(無爲)의 법을 행하지 않고, 또한 성인의 과위도 없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런 일이 없으며,
또한 이런 법을 분별하지 않는 것을,
곧 모든 법의 모양을 잘 통달한다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변화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도를 닦는 일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변화한 사람이 닦는 도는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또한 5도(道)의 생사(生死)에 있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은 근본과 진실한 일이 있어서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사람은 근본과 진실한 일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일도 없으며 또한 5도의 생사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모양을 잘 통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온갖 물질은 마치 변화한 것[化]과 같으며, 모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마치 변화한 것과 같은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물질은 마치 변화한 것과 같으며 온갖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마치 변화한 것과 같으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물질이 마치 변화와 같고 온갖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마치 변화와 같으며 온갖 법도 마치 변화와 같다면,
변화한 사람은 물질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5도의 생사도 없고 또한 해탈하는 곳도 없거늘 보살에게는 어떠한 효용[功用]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마하살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혹 어떤 중생이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하늘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을 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중생이 삼계(三界)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보아 알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보아 안다면,
무슨 일 때문에 6바라밀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37조도법(助道法)을 행하며, 나아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행하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중생 스스로가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줄 알면, 보살마하살은 끝내 아승기겁 동안 중생들을 위하여 보살의 도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중생들은 스스로가 모든 법이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모르고 있나니,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하며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마치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 같으며,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다면,
중생들이 어느 곳에 머물러 있기에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면서 그들을 구출하는지요?”
“수보리야, 중생은 다만 이름[名]ㆍ모양[相]과 허망한 기억과 분별 가운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니,
이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름ㆍ모양과 허망한 가운데서 중생들을 구출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이름이며 어떤 것이 모양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이름은 억지로 만들어 붙인 것이니, 이른바
‘이것은 물질이다, 이것은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다’,
‘이것은 남자이다, 이것은 여자이다’,
‘이것은 큰 것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다’,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이것은 수다원의 과위이다, 사다함의 과위이다, 아나함의 과위이다, 아라한의 과위이다, 벽지불의 도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도이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화합하는 법은 모두가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이며 이름으로써 모든 법을 취하나니, 이 때문에 이름이라 하느니라.
온갖 유위의 법은 다만 이름과 모양이 있을 뿐이건만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그 가운데서 집착을 내고 있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 이름 가운데서 멀리 여의도록 교화하며 말하기를,
‘중생들이여, 이 이름은 다만 껍데기 이름만이 있을 뿐이요 허망한 기억과 분별 가운데서 생겼을 뿐이니, 그대들은 허망한 기억과 생각에 집착하지 마시오.
이것은 본래부터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공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집착하지 않는 바이오’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나니,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이름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라 하는가?
수보리야, 두 가지의 모양이 있어서 범부의 사람들이 집착하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빛깔 있는 모양[色相]이요,
둘째는 빛깔 없는 모양[無色相]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것을 빛깔 있는 모양이라 하는가?
모든 있는 바의 굵거나 가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하는 물질[色]이니, 모두 공하느니라.
이 공한 법 가운데서 생각하고 분별하며 마음에 집착하고 있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빛깔 있는 모양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빛깔 없는 모양이라 하는가?
모든 빛깔이 없는 법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에 집착하여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빛깔 없는 모양이라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이 모양과 집착을 멀리 여의게 하며,
모양이 없는 법 가운데서
‘이것은 모양이다, 이것은 모양이 없다’라는 두 가지의 법에 떨어지지 않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모양을 멀리 여의면서 모양이 없는 성품[無相性]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다만 이름과 모양만 있다면,
어떻게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이익을 얻게 하며,
어떻게 보살은 모든 지(地)를 두루 갖추어 한 지위로부터 다른 한 지위에 이르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3승을 얻게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모든 법의 근본이 반드시 있어서 다만 이름과 모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수도 없고 또한 남을 이롭게 할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모든 법에는 근본과 진실한 일이 없고 다만 이름과 모양만이 있을 뿐이니라.
이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선(禪)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나니 모양[相]이 없기 때문이며, 비리야(毘梨耶)바라밀과 찬제(羼提)바라밀과 시라(尸羅)바라밀과 단(檀)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나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4선(禪)의 바라밀과 4무량심의 바라밀과 4무색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4념처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나아가
8성도분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내공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나아가
무법유법공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8배사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9차제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의 10력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나아가
18불공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이 착한 법을 두루 갖추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여 착한 법을 두루 갖추게 하나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모든 법의 모양이 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있다 한다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은 모양이 없고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거나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무루(無漏)의 법을 얻게 할 수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무루의 법은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무루의 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면, 어떻게
‘이것은 곧 성문의 법이다, 이것은 곧 벽지불의 법이다, 이것은 곧 보살의 법이다, 이것은 곧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등급을 매기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양이 없는 법은 성문의 법과 다른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양이 없는 법은 벽지불의 법과 보살의 법과 부처님의 법과 다른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양이 없는 법이 곧 수다원의 과위요 사다함의 과위이며, 아나함의 과위요 아라한의 과위이며, 벽지불의 법이요 보살의 법이며 부처님의 법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런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모양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 온갖 법의 모양이 없는 것을 배워서 착한 법을 더욱 늘리나니, 이른바 6바라밀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이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그 밖의 법의 긴요한 것으로는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3해탈문(解脫門)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착한 법은 모두가 3해탈문에 들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의 제 모양이 공한 것을 곧 공해탈문이라 하고,
온갖 법의 모양이 없는 것을 곧 무상해탈문이라 하며,
온갖 법의 조작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는 모양을 곧 무작해탈문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3해탈문을 배우면 이때에는 5음(陰)의 모양을 능히 배우고 12입(入)의 모양을 능히 배우며,
18계(界)의 모양을 능히 배우고 4성제(聖諦)와 12인연(因緣)의 법을 능히 배우며,
내공ㆍ외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능히 배우고 6바라밀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능히 배우며,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능히 배우게 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5음의 모양을 배울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色]의 모양[相]을 알고, 물질의 생멸(生滅)을 알며, 물질의 여(如)를 아느니라.
어떻게 물질의 모양을 아는가?
물질은 필경 공하여서 안의 부분[內分]이 달라지고 거짓이며 실체가 없어서 마치 물거품이 견고하지 않은 것과 같은 줄 아나니,
이것이 곧 물질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물질의 생멸을 아는가?
물질은 생길 때도 어디서 오는 데가 없고 떠날 때도 가서 이르는 곳이 없으니, 만일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곧 물질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물질의 여를 아는가?
이 물질의 여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물질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如)의 이름과 여의 실체는 거짓이 아니며, 여의 앞ㆍ뒤ㆍ중간도 또한 그러하여 언제나 달라지지 않나니,
이것이 곧 물질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느낌[受]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느낌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느낌의 여를 아는가?
보살은 모든 느낌의 모양은 마치 물속의 거품이 하나가 생기면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음을 아나니,
이것이 곧 느낌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느낌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이 느낌은 어디서 오는 곳도 없고 어디로 가서 이르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곧 느낌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느낌의 여를 안다는 것은, 이 여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느낌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생각[想]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생각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생각의 여를 아는 것인가?
생각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이 생각은 마치 아지랑이에서는 물을 얻을 수 없는데도 부질없이 물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곧 생각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생각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이 생각은 어디서 온 곳도 없고 가서 이르는 곳이 없나니,
이것이 곧 생각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생각의 여를 안다는 것은,
모든 생각의 여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실상(實相)에서 옮아가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생각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의욕[行]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의욕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의욕의 여를 아는 것인가?
의욕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의욕은 마치 파초가 한 잎 한 잎 떨어져 없어져 견고하거나 충실하지도 못한 것과 같나니,
이것이 곧 의욕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의욕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모든 의욕이 생긴다 해도 어디서 온 곳도 없고 가서 이르는 곳도 없나니, 이것이 곧 의욕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의욕의 여를 안다는 것은,
모든 의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의욕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인식[識]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인식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인식의 여를 아는 것인가?
인식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마치 환술사가 환술로 네 가지의 병사들을 만드는 것처럼 진실한 인식이 없는 것도 이와 같나니,
이것이 곧 인식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인식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이 인식이 생길 때에도 어디서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에도 가는 곳이 없나니,
이것이 곧 인식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인식의 여를 안다는 것은,
인식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인식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모든 입(入)을 아는가?
눈은 눈의 성품이 공하고 나아가 뜻은 뜻의 성품이 공하며, 빛깔은 빛깔의 성품이 공하고 나아가 법은 법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아는 것이니라.
경계[界]를 아는가?
눈은 눈의 경계[眼界]가 공하고 빛깔은 빛깔의 경계[色界]가 공하며, 안식은 안식의 경계[眼識界]가 공하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意識界]까지도 그와 같음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4성제(聖諦)를 아는가?
괴로움[苦]의 거룩한 진리를 안 때에 두 가지 법을 멀리 여의며,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둘이 아니고[不二] 구별도 없는[不別] 줄 아는 것이니, 이것을 곧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며, 쌓임[集]ㆍ사라짐[滅]ㆍ도(道)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어떻게 괴로움의 여(如)를 아는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곧 여요 여가 곧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인 것이니, 쌓임ㆍ사라짐ㆍ도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어떻게 12인연을 아는가?
12인연의 나지 않는 모양을 아는 것이니, 이것을 곧 12인연을 안다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저마다 분별하며 모든 법을 안다면, 물질의 성품으로 법성(法性)을 파괴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의 성품으로 법성을 파괴하는 일은 없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법성 외에 다시 법이 있다면 법성을 파괴한 것이 되겠지만, 법성 외의 법은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파괴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는
‘법성 외의 법은 얻을 수 없다’고 알기 때문이니,
법성 외에는 어떤 법도 있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마땅히 법성을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만일 법성을 배운다면 배우는 바가 없는 것[無所學]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법성을 배운다면 곧 온갖 법을 배우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이 곧 법성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이 곧 법성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모두가 모양이 없는 무위의 성품[無爲性] 속에 들어가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법성을 배우면 곧 온갖 법을 배우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곧 법성이라면, 보살마하살은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을 배우며,
보살마하살은 무엇 때문에 초선(初禪)과 제2선과 제3선과 제4선을 배우는지요?
보살마하살은 무엇 때문에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를 배우고,
무엇 때문에 무변허공처와 무변식처와 무소유처와 비유상비무상처를 배우며,
무엇 때문에 4념처와 4정근과 4여의족과 5근과 5력과 7각분과 8성도분을 배우는지요?
무엇 때문에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8배사와 9차제정과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배우며,
무엇 때문에 6신통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32상과 80수형호를 배우는지요?
무엇 때문에 배워서 찰리(刹利)의 큰 족성과 바라문(婆羅門)의 큰 족성과 거사(居士)의 큰 집안에 태어나며,
무엇 때문에 배워서 4천왕천(天王天)의 처소와 33천(天)과 야마천(夜摩天)과 도솔타천(兜率陀天)과 화락천(化樂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나는지요?
무엇 때문에 배워서 범천왕(梵天王)이 머무는 곳이나 광음천(光音天)과 변정천(遍淨天)과 광과천(廣果天)과 무상정(無想定)과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며,
무엇 때문에 배워서 무변허공처에 태어나고 무변식처에 태어나며 무소유처에 태어나고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지요?
무엇 때문에 최초로 뜻을 낸 지위[初發意地]에서 제2ㆍ제3ㆍ제4ㆍ제5ㆍ제6ㆍ제7ㆍ제8ㆍ제9ㆍ제10지(地)까지를 배우며,
무엇 때문에 성문의 지위와 벽지불의 지위와 보살의 지위를 배우는지요?
무엇 때문에 중생을 성취하는 일과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모든 다라니를 배우며, 무엇 때문에 요설의 법[樂說法]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배우며, 배운 뒤에는 일체종지를 얻고 온갖 법을 아는지요?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법성 가운데에는 이러한 분별이 없습니다. 세
존이시여, 장차 보살은 도가 아닌[非道] 가운데에 떨어지지는 않겠는지요?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법성 가운데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으며,
법성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없으며,
모든 법성도 또한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멀리 여의지 않아서,
물질이 곧 법성이요 법성이 곧 물질이며,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또한 이와 같고,
온갖 법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아서 물질이 곧 법성이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곧 법성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일 법성 외에 법이 있다고 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 되나니,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온갖 법성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줄 아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온갖 법이 곧 법성인 줄 알며,
그런 뒤에 이름과 모양[名相]이 없는 법으로써 이름과 모양을 말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물질이고, 이것이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며, 나아가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솜씨 좋은 환술사나 환술사의 제자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 서서,
갖가지 형색의 남자ㆍ여자ㆍ코끼리ㆍ말과 반듯하게 다듬어진 동산 숲, 그리고 모든 작은 집ㆍ큰 집ㆍ흐르는 샘물ㆍ목욕하는 연못ㆍ의복ㆍ침구ㆍ향화ㆍ영락ㆍ반찬과 음식 등을 환술로 만들고,
여러 가지 풍악을 울리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과 같으니라.
또 다시 사람들을 환술로 만들어서 보시도 하고 또는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게도 하며,
이 환술사는 또 찰리의 큰 족성과 바라문과 거사의 큰 집안과 4천왕천의 처소와 수미산과 33천ㆍ야마천ㆍ도솔타천ㆍ화락천 및 타화자재천 등을 환술로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라.
또 범중천(梵衆天)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천을 환술로 만들며, 또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보살마하살이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초지(初地) 내지는 10지(地)를 행하며,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신통에 유희하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며,
모든 선정ㆍ해탈ㆍ삼매에 유희하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과 대자대비를 행하며,
부처님 몸의 32상과 80수형호를 완전하게 갖추는 것 등을 환술로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라.
이런 가운데서 지혜 없는 사람은
‘전에 없던 일이로다. 이 사람은 재주가 많고 교묘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갖가지의 형색 내지는 32상과 80수형호로 부처님 몸을 장엄하는구나’라고 찬탄하느니라.
그러나 그 가운데서 지혜 있는 이[士]는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없던 일이로다. 이 가운데에는 진실한 일이란 없는데도 있는 바 없는 법[無所有法]으로서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 형상이 있게 하지만, 일마다 모양도 없고 있는 것마다 모양이 없구나’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법성을 여의고는 어떤 법도 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 비록 중생을 얻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보시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보시하게 하며, 보시하는 법을 찬탄하고 보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계율을 지니며 또한 남들에게도 계율을 지니게 하고,
스스로 인욕하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인욕하게 하며,
스스로 정진하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정진하게 하며,
스스로 선정을 행하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선정을 행하게 하며,
스스로 지혜를 닦으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지혜를 닦게 하고,
지혜를 닦는 법을 찬탄하며 지혜를 닦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10선(善)을 행하고 또한 다른 이를 교화하여 10선을 행하게 하며,
10선을 행하는 법을 찬탄하고 10선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5계(戒)를 받아 행하고 또한 다른 이를 교화하여 5계를 받아 행하게 하며,
5계의 법을 찬탄하고 5계를 받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8계재(戒齋)를 받고 또한 다른 이를 교화하여 8계제를 받게 하며,
8계제의 법을 찬탄하고 8계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초선을 행하고 나아가 스스로 제4선을 행하며, 스스로 자ㆍ비ㆍ희ㆍ사를 행하고, 스스로 무변허공처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를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행하게 하느니라.
스스로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행하고 스스로 3해탈문과 부처님의 10력을 행하며, 나아가 스스로 18불공법을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18불공법을 행하게 하며 18불공법을 찬탄하고 18불공법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칭찬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법성의 앞ㆍ뒤ㆍ중간에 차이가 있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방편의 힘으로써 법성을 보이거나 중생을 성취시킬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법성의 앞ㆍ뒤ㆍ중간은 차이가 없으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보살의 도를 행하는 것이니라.”
【論】
【문】 부처님은 품(品)마다 그 가운데서 모든 법의 모양을 통달하는 일을 말씀하셨거늘, 지금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다시 묻는가?
【답】 이 반야바라밀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으며 언설(言說)이 없기 때문이니, 비록 자주자주 듣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물은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송아지가 비록 크고 착한 어미의 맛있는 젖을 먹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크신 자비는 마치 이 착한 어미 소와 같고,
반야바라밀은 마치 맛있는 우유와 같으며,
수보리는 마치 송아지와 같아서,
비록 자주 모든 법의 모양을 듣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다.
또 오직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만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통달할 뿐이며,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비록 통달한다 하더라도 궁구하여 다할 수 없나니, 이 때문에
“그 밖의 보살은 아직 부처님이 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비유로 대답하시기를,
“마치 환술로 변화한 사람은 3독(毒) 등 모든 번뇌와 결사(結使)가 없고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도 없으며,
안팎의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법 가운데에도 포섭되지 않는 것이어서 범부의 법에도 떨어지지 않고, 또한 성인의 과위 안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수다원 등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도 또한 다른 이의 마음에 선과 악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변화의 일을 반드시 성취하게 하나니, 이 변화는 실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아서 6도(道)에 속하지 않느니라.
보살의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3독 등의 번뇌가 없고 이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모두 앞의 세상에서의 거짓되고 뒤바뀐 법이요, 인연으로 생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으며 능히 이와 같이 행하고 있나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의 모양을 잘 통달한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때에 수보리는 비록 공을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을 공경하고 귀중이 여기며,
또 부처님의 모든 법은 한량없기 때문에 부처님께 묻기를,
“세존이시여, 온갖 물질 등의 법이 모두 공한 것은 마치 변화한 것[化]과 같은 것인지요?”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온갖 물질 등의 법은 모두가 마치 변화한 것과 같다.”라고 하셨으니, 곧
‘그대는 부처님 법을 귀중히 여기기에 가히 공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일체지(一切智)이기에 모든 법은 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사자의 힘을 귀히 여기지만, 사자 자신은 그의 힘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때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이 필경 공하여서 모두가 마치 변화와 같다면,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갖가지로 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며 보살로 인하여 3악도(惡道)를 끊고 중생들을 구출하여 열반을 얻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반문(反問)하시기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반드시 중생이 5도(道) 가운데서 구출되는 일이 있다고 보느냐?”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하기를,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마음을 인가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을 때는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알고 보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다.
수보리는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보살은 무슨 일 때문에 6바라밀을 행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중생들 스스로가 모든 법은 공하여서 마치 환과 같음을 안다면, 보살은 곧 공들일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만일 모든 법이 반드시 공한 모양이라면 곧 보살은 공들일 것도 없으며, 모든 법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공한 것도 아니어서 모든 언어의 길을 초월하고 필경 공하여서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지만,
중생들은 이런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나[我]라는 마음을 내어 나쁜 죄업을 짓고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고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장자(長者)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가 소경이라 독을 마시려고 하자,
장자는 그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고 갖가지 방편을 써서 마시지 못하게 막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이 중생들을 보면 뒤바뀌어서 밝지 못하고 소경인지라 3독(毒)의 물을 마시고 있으므로 대비의 마음을 내어 한량없는 아승기 동안 6바라밀을 닦으면서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이런 말씀들을 듣고 다시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공한 것이어서 근본이 없고 마치 꿈과 같고 환 등과 같다면,
중생들은 어디에 머물러 있기에 보살은 그들을 구출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다.
수보리의 생각으로는 마치 사람이 깊은 진창에 빠져 있을 때에 구출해 주는 것과 같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중생은 다만 이름과 모양과 속임수와 그리고 기억과 분별하는 가운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다.
곧, 부처님의 뜻은
‘온갖 법 가운데는 결코 진실한 것이 없다.
다만 범부가 속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캄캄한 가운데서 사람과 비슷한 물건을 보고서 진짜 사람이라 여기면서 두려운 생각을 내는 것과 같다.
또 사나운 개가 우물가에 가서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서 그 물속에는 개도 없고 자기의 형상만이 있을 뿐인데도 격한 마음을 내며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것과 같다.
중생도 이와 같아서 4대(大)가 화합한 까닭에 몸이라 하고, 인연으로 생긴 의식[識]이 화합한 까닭에 동작도 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범부는 그러한 가운데서 사람이라는 모양을 일으키어 애욕을 내고 성을 내면서 죄업을 일으켜 3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갖가지 인연으로 교화하여 공한 법을 알게 하면서 그들을 구출하며,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 법은 모두 필경 공하여서 아무것도 없다.
중생은 뒤바뀜과 허망 때문에 마치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그것은 마치 변화한 것과 같고 환과 같으며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아서 진실한 일이란 없다.
오직 사람의 눈을 속이고 헷갈리게 할 뿐이다’고 한다.
또 온갖 법은 다만 이름이 화합함에 따라 다시 그 밖의 이름이 있을 뿐이다.
마치 머리와 발과 배와 등이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같고,
또 머리칼ㆍ눈ㆍ귀ㆍ코ㆍ입ㆍ살갗 및 뼈가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며,
여러 개의 털이 화합한 까닭에 머리카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따로따로 갈라진 까닭에 털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여러 작은 티끌[微塵]이 화합한 까닭에 아주 작은 부분[毛分]이라 하고,
또한 모든 작은 부분들이 화합한 까닭에 작은 티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 작은 티끌[微塵]은 제일 미세한 것이므로 나누어진 것[分]이 될 수 없으며,
나누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화합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은 곧 정해진 법이다. 그 때문에
‘온갖 것은 공하여서 정해진 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답】 만일 작은 티끌이 곧 물질이라면 마땅히 나누어진 것이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온갖 물질은 모두가 허공 가운데에 있으며 모두 시방(十方)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작은 티끌이 곧 물질이라면 시방으로 나누어진 것이 있고, 만일 시방으로 나누어진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것이 극미(極微)이겠는가?
만일 그대의 말과 같아서 ‘작은 티끌은 나누어진 것이 없다’ 한다면 물질이 아니다. 왜냐 하면, 물질의 모양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또 물질은 5정(情)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만일 작은 티끌은 5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물질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은 티끌은 다만 헛된 이름만이 있을 뿐이니, 눈으로 보는 굵은 물질조차도 오히려 파괴하여 공하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볼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는 것이겠는가?
【문】 작은 티끌은 미세하기 때문에 5정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성인이 얻은 천안(天眼)으로는 볼 수 있다.
【답】 천안으로 보는 것이 비록 미세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의 모양이기 때문에 마땅히 나누어진 부분이 있어야 한다.
만일 나누어진 부분이 없다면 그것은 물질이 아니며, 물질이 아니라면 곧 천안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안도 거짓되고 허망하게 보는 눈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혜안(慧眼)으로써 세간을 관찰하여 도(道)를 얻는다.
작은 티끌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요 실체가 없다.
작은 티끌은 없는 것이므로 온갖 법은 이름이 화합한 까닭에 다시 임시로 붙인 이름은 있을 뿐이고 진실하거나 일정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부질없이 탐착을 내면서 탐냄과 성냄의 인연 때문에 나쁜 업을 일으켜 한량없는 아승기 동안 3악도에 있으면서 고통을 받는다.
만일 모든 법이 진실하고 일정하더라도 오히려 탐내고 성을 내는 죄의 인연을 짓지 않아야겠거늘, 하물며 거짓되고 진실이 없는 것이겠는가?
만일 이 거짓된 이름과 모양을 버리고서 공한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곧 열반의 상(常)ㆍ낙(樂)을 받으리라.
【문】 이름[名]과 모양[相]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이름은 바로 여러 가지 물건에 붙인 이름이라서 마치 뜨거운 물건의 이름을 불이라 한 것과 같다.
모양이란 마치 연기[烟]를 보고 불이라는 모양을 아는 것과 같나니, 뜨거운 것[熱]은 곧 불의 체성[火體]이다.
또 5중(衆)이 화합한 것 가운데서 남자ㆍ여자라 하는 것은 곧 이름이요, 그 몸의 모습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수 있나니, 그것을 모양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모양을 보기 때문에 이름을 붙여서 남자 또는 여자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름과 모양에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양을 보는 까닭에 이름을 얻고 이름을 아는 까닭에 모양을 얻기 때문이다.
【답】 그대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남자나 여인의 모습을 보고 그런 뒤에 남자 또는 여인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니, 모양은 근본[本]이 되고 이름은 말단[末]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눈으로 물질을 볼 적에 치우치게 좋아하는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만 그 밖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면, 그 물들고 집착하는 마음을 낼 수 있는 그것을 곧 모양[相]이라 하기도 한다.
또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이름과 모양을 분별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름이란 임시로 붙인 것이며, 이름으로써 모든 법을 취하게 된다.”라고 하셨으니,
경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이 다만 이름과 모양만이 있다면 보살은 어떻게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모든 법의 근본이 결정코 있다고 한다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만일 모든 법의 성품이 일정하고 실제로 있다면 곧 그것은 생하는 것이 없기[無生] 때문이다.
왜냐 하면, 성품은 전부터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니,
만일 이 법이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생긴다면 곧 그것은 일정한 성품이 없다.
만일 성품이 일정하게 있다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할 필요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곧 생기는 것이 없다.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다.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죄를 버리고 복을 닦거니와 만일 항상 있다[常] 한다면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며 세간도 없고 열반 등도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법이 일정하게 존재하고 단지 이름과 모양뿐만이 아니라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선(禪)바라밀 등을 행하면서 자기도 이롭게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리니, 모양[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자신이 착한 법을 두루 갖추고 또한 착한 법으로써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이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모든 법이 털끝만큼이라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보살은 도량(道場)에 앉을 때에
‘온갖 법은 공하고 모양이 없으며 있지 않다’고 관찰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도 없을 것이요,
또한 이 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이 보살은 도량에 앉았을 때에 온갖 법의 으뜸가는 진실[第一眞實]을 관찰하되,
만일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지 못하고, 또한 중생들을 위하여 공하여 모양이 없는 법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이 만일 일정하게 존재한다면 부처님이 어찌하여 중생들을 속이면서,
“온갖 법은 누(漏)도 없고 모양[相]도 없으며 기억[憶念]도 없다.”라고 하셨겠는가?
【문】 4제(諦) 가운데 세 가지 진리는 모두가 모양이 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에는 곧 괴로움의 모양이 있고, 쌓임의 진리[集諦]에는 곧 쌓임의 모양이 있으며, 도의 진리[道諦]에는 도의 모양이 있다.
오직 멸의 진리만이 모양이 없다. 또한
‘이것은 모양이 없는 열반이다.’라고 기억하는 일이 있거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온갖 무루(無漏)의 법은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고 하는가?
【답】 마하연(摩訶衍)의 법은 성문의 법과 다르다.
마하연의 법 가운데서는
‘온갖 무루의 법은 모양도 없고ㆍ기억도 없다’고 한다.
또 모양이 있고 기억이 있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다.
만일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다면 곧 그것은 모든 번뇌의 누이거를 어떻게 그것이 무루이겠는가?
또 이 세 가지 진리는 모두가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따른다.
괴로움을 보면 곧 버리고 쌓임을 보면 곧 끊으므로 진실하거나 일정하다고 말하지 못하며, 도(道)를 보면 사라짐[滅]에 나아가기 위하여 또한 이 도에 머무르지 않고 이 머무르는 일을 없애고 다한다.
이렇게 없애고 다하는 법[滅盡法]은 모양도 없고 반연[緣]도 없거늘 어떻게 기억이 있겠는가?
기억한다는 것은 모두가 이 모양을 반여하면서 법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무루의 법은 모두가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무루의 법이 으뜸가는 진실한 것이어서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면,
온갖 법의 성품도 또한 모양이 없고 기억도 없어야 한다.
다만 범부는 뒤바뀜 때문에 모양이 있고 기억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이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면 어떻게
‘이것은 성문의 법이다, 이것은 벽지불의 법이다, 이것은 보살의 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등급을 두어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반문하시면서,
“3승(乘)의 법과 모양이 없는 법은 차이가 있느냐?”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모든 번뇌가 멸하는 것이 곧 끊어진 것이요, 끊어진 것이 곧 무위(無爲)의 법이며 또한 사라짐의 진리와 도의 진리가 곧 무루요 모양이 없는 줄 아나니, 이 때문에
‘3승은 모양이 없는 법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또 묻기를,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의 법은 곧 모양이 없는 법이더냐?”라고 하셨고,
대답하기를,
“그런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모양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하자,
“만일 모양이 없다면 너는 어찌하여 따지면서 ‘모든 도(道)가 있다’고 말하느냐?
정작 모양이 없기 때문에 3승의 모든 도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모양이 없는 법을 배우면 모든 착한 법, 즉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이 더욱 늘어나리라”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오직 3해탈문에만 머무르며 그 밖의 다른 법은 긴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그것은 왜냐하면, 3해탈문은 바로 진실한 법이기 때문이니, 그 밖의 4념처의 법도 비록 진실하지만 모두가 방편의 말씀이다.
3해탈문은 열반에 가깝고 또한 온갖 진실하고 착한 법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
보살은 마땅히 배워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문】 만일 보살이 이 3해탈문을 배우는 것이 곧 5중(衆)과 12입(入)과 18계(界) 등을 배우는 것이라면, 이 3해탈문은 모두가 공하고 모양이 없고 분별이 없으나, 이 5중의 법들은 모두가 모양도 있고 분별도 있는 법이거늘, 어떻게 3해탈문을 배우는 까닭에 그 밖의 다른 법도 배운다 하시는가?
【답】 보살은 이 3해탈문을 배우면 곧 삼계(三界)를 벗어나고 3루(漏)를 다하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서 진실한 지혜를 얻어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앞에서 말한 5중 안의 것은 모두가 허망하고 삿된 행이었지만 지금은 이 3해탈문을 얻었기 때문에 바르게 통달하게 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이 3해탈문의 모양이 없는 법을 행할 때에 물질이 나는[生] 이치와 없어지는[滅] 이치를 알며 물질의 여(如)를 아나니, 나아가 인식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러하느니라”라고 하셨다.
경에서 자세하게 말씀한 것과 같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아서 보살은 물질 등의 모양을 알고 물질 등이 생기는 것을 알며, 물질 등의 없어지는 것을 알고 물질 등의 여를 압니다.
만일 이와 같이 분별한다면 물질의 성품이 법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법성을 벗어난다면 물질의 성품은 마땅히 법성을 파괴해야 한다.
온갖 법의 실상(實相)을 법성이라 하고,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법성 가운데에 들어가나니,
물질의 성품의 실상이 곧 법성이어서 동일한 성품이거늘 어떻게 물질의 성품이 법성을 파괴하겠느냐?”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또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법성을 벗어나 다시 어떤 법이 있다고도 보지 않으며, 얻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도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가장 믿을 만한 분들이니,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법성을 배워야 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일 보살이 법성을 배운다면 이것은 곧 배울 것이 없는 것[無所得]이 됩니다.”라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법성은 없는 성품[無性]이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법성이 없는 성품이라 함은 만일 보살이 법성을 배우면 온갖 법을 배운 것이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만일 법성에 따로 성품이 있거나 없는 성품 그것이 성품이라면, 다만 법성만을 배우고 온갖 법은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법성은 실로 따로 성품이 없고 또한 없는 성품도 없기 때문에 온갖 법을 두루 배워야 한다.
다만 모든 법의 실상은 이것이 곧 법성일 뿐이니, 이 때문에 실상을 얻으면 온갖 법을 바르고 두루하게 배우는 것이다.
그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곧 법성이라면 보살마하살은 어떤 것으로써 6바라밀 내지는 다라니문을 배우는지요?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실상이 곧 법성이기 때문이니, 만일 온갖 법이 곧 법성이라면 보살은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또 법성 가운데는 이 6바라밀 내지는 다라니에 대한 분별이 없거늘 이제 보살이 분별하여서 이런 법을 행한다 하면 뒤바뀐 가운데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인정하시면서 대답하시기를,
“만일 보살이 법성에서 벗어난 어떤 법이 있다고 본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법성을 벗어나 어떤 법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있다[常]고 하는 뒤바뀜이 되니,
무명(無明)은 굴려서 진실하게 만들 수 없거늘 어떻게 온갖 법 가운데서 무명을 끊고서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보살은 온갖 법이 곧 필경 공이요 항상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어서 희론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인 줄 알면서도,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어 방편의 힘으로 일부러 이름과 모양을 붙여서
‘이것은 물질이다, 이것은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말하느니라”라고 하셨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신 환(幻)에 대한 비유와 같다.
곧, 환술사는 곧 보살을 말하고 환술의 법은 곧 6바라밀 등의 모든 법을 말하는데, 비록 이 모든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마치 환술사가 비록 환술로 갖가지 물건들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없음을 알면서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智者]’란 곧 부처님과 큰 보살이다.
‘지혜가 없는 이[無智者]’란 곧 범부와 새로 뜻을 낸 이를 말하니, 그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는 것이다.
보살은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비록 법성을 벗어나서 다시는 어떤 법이 있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어느 일정한 중생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의 몸과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나니,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살은 스스로 보시 등을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며, 보시하는 법을 찬탄하고 보시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나니, 이에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다.
“만일 법성이 먼저는 없다가 나중에 있다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고, 또한 방편의 힘으로써 설할 수도 없으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법성이 먼저는 없다가 나중에 있어서 인연으로부터 생긴다면 곧 범부와 공통하는 법이라 차이가 없을 것이요,
만일 법성이 먼저는 있다가 나중에 없다면 중생과 모든 법은 아주 없다[斷滅]는 데로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성은 먼저도 공하고 중간과 나중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지혜의 힘으로써 공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중생과 모든 법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을 때에야 비로소 공해지는 것도 아니니,
본래부터 언제나 공한 것이니라.
보살은 중생을 가르치길,
‘어찌하여 그 진실한 성품을 관찰하지 않고, 뒤바뀜에 집착하느냐?
만일 모든 법이 필경 공한 성품인 줄 관찰하게 되면, 본래부터 언제나 공이어서 지금에야 잃은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이면 중생을 도와주고 이롭게 할 수 있느니라.”